제23화
#9 얽히는 관계 (3)
강남 한복판이 전부 내려다보이는 고층 건물, 성공의 상징인 그곳에 조각 같은 미남이 앉아 있었다.
웃는 것처럼 부드럽게 휘어 있는 눈동자는 선한 인상을 만들어 냈다.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만큼 유명한, 그러면서도 전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남자.
평상시에는 그 미소가 걸려 있던 그 얼굴에는 지금 미소 한 조각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 그렇게 된 겁니다.”
자신이 몇 달간 공을 들였던 불법 게이트가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는 이야기에는 아무래도 미소가 나오지 않았으니까.
설록진은 툭툭 책상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언젠가 한번 이런 일이 터질 거라는 생각은 했었죠. 거길 지키는 인원이 영 질이 떨어지긴 했으니까. 누가 그러던데, 그 인원만으로도 그곳을 지키는 데에는 충분하다고.”
설록진의 말에 청 과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야, 그렇게 말을 던진 게 바로 그였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설마하니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라서…….”
“하긴 나도 꼭꼭 숨겨 놓은 내 뒷주머니를 누가 털어 갈 줄은 예상 못 하긴 했죠. 나도 모르던 걸 과장님이라고 해서 알 수는 없었겠죠.”
그 말에 청 과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저 말은 나를 용서해 준다는 건가? 아니, 설록진은 용서라는 걸 모르는 인간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말을 돌려대는 건지.
“얘기를 들어 보니 그리 뛰어난 각성자도 아닌 것 같은데요.”
설록진의 말에 청 과장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B급이라지만 재능이 기껏해야 거짓말을 좀 잘하게 되는 수준이라고 합니다. 바벨 아카데미를 나왔다지만, 영 전투력이 약해서 별을 얻는 데도 실패했답니다. 당연히 헌터가 되지도 못했고요.”
“그런 놈에게도 털린 거죠, 안 그래요?”
신이 나서 떠들어 대던 청 과장은 아차 한 얼굴로 다시 입을 닫았다. 뒷창고를 턴 놈이 허접하다고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설록진이 물었다.
“아직도 알아낸 게 없습니까?”
“예, 정보가 어디에서 샜는지 전, 전혀.”
“그 소개꾼 친구는요?”
“경찰에 넘어가기 전에 잠깐 말은 나눠 봤는데, 뭘 알고 있는 게 없습니다. 그 강이신이라는 놈이 먼저 다가와서 일자리를 달라고 했다더라고요.”
“그래서 소개해 줬고요?”
“네.”
청 과장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눈앞에 적을 두고도 모른 그 바보 같은 놈 때문에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걸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정보가 새지 않게 관리는 잘했습니까?”
“네, 저에 대한 건 물론이고 아무것도 모르게 처리는 했습니다. 그도 불편하시면 사람을 보낼까요?”
“이미 경찰에 넘어간 증인에게 히트맨을 보내는 건 위험부담이 따르지 않을까요?”
설록진의 말에 청 과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저건 질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해내라는 명령이었다.
“자신 있습니다. 이런 일에 쓰기 좋은 칼이 있어서요.”
“믿어 보죠.”
그렇게 임현수라는 놈의 운명이 결정됐다. 조금만 입을 닫고 있으면 곧 자신에게 탈출행 티켓이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그 녀석에게 보낼 것은 저승행 티켓뿐이었다.
“그럼 그렇게 우리 측에서 흘린 흔적은 지운다고 치고요. 내가 이 일로 얻은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말이에요.”
설록진의 말에 청 과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개소리. 물론 설록진이 자신의 자금책을 잃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 기회를 그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해 이미지 메이킹을 하는 데 사용하지 않았나.
9시 뉴스며, 각종 시사 토론 프로그램이며. 요즘 그 누구보다 바쁜 시간을 보내며 국민들에게 눈도장을 또 한 번 찍은 설록진이었다. 돈 몇 푼 잃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얻고 있으면서 저런 말이라니.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냈다간 그대로 죽은 목숨이 될 터. 청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 그렇죠.”
“게이트야, 하나 더 찾으면 그만이고. 돈이야 다른 데에서 당겨 오면 그만이죠. 그런데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으면 아주 기분이 나쁠 것 같아서요.”
“이런 일! 다시는 없게 하겠습니다.”
청 과장은 칼같이 답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두 번 이런 일을 겪었다는 그의 연약한 심장이 터져 버리고 말 테니까.
“그래요, 이번 일로 청 과장님도 많이 배우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모든 게 다 끝이 났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그런데 말이에요. 난 대가 없는 교훈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란 말이죠.”
그 말에 심장이 툭 하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청 과장님한테 뭘 빼앗아 드려야 이번 일에 대한 교훈이 될까요?”
설록진의 말에 청 과장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설록진은 천천히 청 과장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도 바깥일 하시는 양반이 어디 흠이 있기는 좀 그렇잖아요. 나를 대신해서 돌아다니셔야 할 분이 손가락이나, 귀 한 짝이 없으면. 음, 아무래도 가오라는 게 상하려나.”
청 과장은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끄윽, 죄소, 죄송합니다.”
머리를 바닥에 처박고 시선을 내렸다. 차라리 윽박이라도 지르면 마음이 편할 텐데. 설록진의 얼굴과 말투는 여전히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죄송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편하잖아요. 청 과장님이나, 나나. 나도 청 과장님한테 뭐 뺏기 좀 그렇다고요.”
턱을 괸 설록진이 자신의 발밑을 기고 있는 청 과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청 과장님이 실수한 건 지금이 처음이었던가?”
청 과장의 어깨가 떨렸다. 그의 앞 사람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그는 가까이에서 지켜봤었다. 실수 한 번에 사람이 어떻게 망가지는지,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네, 처음, 처음입니다.”
“관대한 상사로서 부하의 첫 허물 정도는 감싸 줄 줄도 알아야겠죠.”
꿀꺽, 청 과장은 침을 삼켰다. 정말 이대로 용서받을 수 있는 걸까.
“그래도 그냥 용서해 드리는 건 그렇고. 그 친구를 좀 직접 보고 싶은데요.”
“그 친구라면…….”
“내 게이트를 턴 놈하고 아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 말에 청 과장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저, 정호산이요? 붉은개 길드를 건드리기엔 조금.”
“그 친구 말고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다른 친구요.”
“하, 한…….”
청 과장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놈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설록진이 그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대신 말을 이어 주었다.
“한조희.”
“아, 맞다! 그 녀석이요.”
“우리 게이트를 턴 사람하고 얼마나 잘 알고 지내는 사이인지 궁금해서 말이지요.”
가장 좋은 건 이 일의 범인을 잡아 오는 거지만, 범인은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놈을 전에 알고 있던 사람이라면 뭐든 알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놈에게도 무언가를 빼앗긴 해야 할 거 아닌가.
“영종도 일 전까지는 그 친구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싱긋, 설록진은 청 과장을 향해 상쾌한 미소를 내보였다.
* * *
‘그러고 보니 백도산 일은 어떻게 됐으려나.’
이제 조금 있으면 영종도 사건이 터질 거다. 백도산이 설록진에게 넘어가 버리면 아주 골치가 아파진다. 웬만하면 내 충고를 받아들여서 영종도를 포기하거나 거래 날짜를 옮겼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설록진의 게이트를 털었지만 그 일로 내가 설록진에게 준 타격은 아주 미미할 거다. 설록진이 백도산을 차지하면 모두 없던 일로 될 정도란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한번 체크 정도는 해 볼까.
여관에서 나온 나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너, 너는!”
저번에 내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던 가드가 나를 보며 손가락질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능청스럽게 인사를 해 봤지만, 가드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금 박사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들어가라.”
영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길을 터 주는 걸 보니 다행히 금 박사가 나를 블랙리스트로 지정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나는 그전에 봤던 복도를 따라 금 박사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금 박사가 퉁명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여기에는 무슨 일이냐? 다시는 안 올 것처럼 가 놓고서는.”
이것도 인사로 쳐도 되는 거겠지.
어깨를 으쓱거린 내가 금 박사에게 물었다.
“근처를 지나가다 보니 제가 저번에 드린 충고가 쓸모가 있었는지 궁금해져서요.”
내 말에 금 박사는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표정을 보아하니 잘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네 말은 전했는데 말이다. 백도산 그 친구가 생각보다 고집이 세서 말이야.”
“그래서 그 거래를 진행할 생각이라고요?”
“그래.”
금 박사는 내가 그 거래에 대해 알고 있는 티를 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긴 미래 예지자니까 아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애초에 예지 같은 걸 어떻게 믿냐던데. 나 같은 바보나 믿는 거라고 딱 잘라 말하는데 정말이지, 내가 조금만 힘이 셌으면 그놈의 머리통을 아주 반으로 쪼개 놨을 거다.”
금 박사의 성질을 제대로 돋워 놓은 건지, 금 박사는 내 앞에서 백도산의 욕을 하며 이를 박박 갈아 댔다.
확실히 백도산은 형체가 없는 걸 잘 믿지 않는 성격이었다. 두 주먹으로 자수성가한 타입이라 그런가.
“뭐, 그럼 어쩔 수 없네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자리를 뜨는 척했다.
“잠, 잠깐만! 이대로 갈 생각이냐?”
“예.”
금 박사는 당황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레이 또한 난리가 났다.
━그 백도산이라는 놈을 구하기 위해 여기에 온 거 아니냐?
“내 친구가 그, 그 설 의원한테 넘어가면 큰일이 난다며.”
“예, 대한민국이 좀 큰일 나는 편이죠.”
“그런데 그냥 가?”
“제가 막으려 한다고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서요. 뭐, 그쪽 협조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백도산은 암흑계의 거물이었다. 지금 내가 그를 돕는다고 찾아가 봤자 나를 묻겠다고 작정하면 그대로 나를 묻어 버릴 수 있다는 거다.
━하긴 누굴 돕겠다는 것도 내가 안전해야 할 수 있는 생각이지.
‘적어도 지금 이 상태로는 안 되죠. 게다가 저쪽 입장도 생각해 봐야 돼요. 갑자기 나타난 내가 대뜸 댁이 위험해지겠다고 한 상황이잖아요. 내가 적극적으로 나설수록 의심스럽다고요.’
그러니 쳐 보는 블러핑이다. 정말 저쪽이 간절해지게 하기 위해서.
금 박사는 내가 던진 미끼를 물었다.
“협조가 필요하다고?”
“그쪽이 도와 달라고 하면 모르겠는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제가 미래에서 보고 왔는데 그쪽이 좀 위험해진답니다, 라고 하면 백도산이 제 머리를 날리지 않겠습니까? 전 그런 건 별로라서.”
내 말에 금 박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럼 네가 이대로 가면…….”
나는 태연하게 말을 던졌다.
“그러니 박사님도 튀는 게 어때요? 설록진이 그 사람을 세뇌하고 나면 친구고 뭐고 못 알아볼 텐데.”
“그래도 도와주겠다고 말해야지!”
“제가 왜요. 아는 사람도 아닌데.”
“난리가 난다며! 대한민국이 엿 된다며!”
“뭐, 그야 그렇지만 저는 어떻게든 할 자신이 있어서.”
“난 없어, 그런 자신!”
금 박사가 말했다.
“그 협조라는 거 어떻게든 내가 해 줄 테니까 제발 같이 가 주면 안 되겠냐?”
그 말에 나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며 말했다.
“아, 진짜. 뭐 해 줄 건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