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9 얽히는 관계 (2)
“망했네요, 망했어.”
웬만하면 좋게 생각하고 싶지만, 망해도 너무 망해 버렸다. 원래 내 계획대로 됐다면 나는 그 누구의 주목도 받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일이 꼬여도 한참이나 꼬였고 정호산에게까지 내가 한 짓을 들켜 버렸다. 인터넷을 뒤져 본 나는 사건의 전말을 확인하고 이마를 칠 수밖에 없었다.
내 실종을 조사하다가 이렇게 됐다니.
참 나, 이럴 줄 알았으면 연락이라도 꼬박꼬박 해 줄 걸 그랬다.
━이제 어쩔 셈이냐? 이 모든 게 네가 한 짓임을 알게 됐는데.
레이의 말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한 가지는 확실하죠. 언제까지고 이렇게 누워 있을 수만은 없다는 거.”
━지난 사흘간 누워 있기만 한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조용히 있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잖아요.”
━그래도 뉴스에는 네 이름이 나오지 않았잖냐. 이렇게 몸을 사릴 필요가 있는 게냐?
처음에는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더니, 그동안 내 옆에서 정보를 주워듣더니 꽤나 아는 게 많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반푼이다.
“대놓고 수배하지 않더라도 붉은개 길드가 끼어든 이상 다를 바가 없어요.”
뉴스에서는 내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지만 뻔하지. 붉은개 길드의 김명철이라는 인간은 범죄와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기로 유명했다.
정호산을 봐서 대대적으로 내 이름을 알리진 않았더라도 각범 팀에는 내 이름을 넘겼겠지.
각범 팀, 그러니까 각성자 범죄 전담 팀에 찍힌 순간 나는 내 얼굴을 들고 돌아다닐 수 없는 상태가 돼 버리고 말았다.
특히 도채희, 그 미친 말티즈한테 내 이름이 넘어갔다면……. 으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
━언제까지 이 여관에 처박혀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저 웃기지도 않은 가면을 뒤집어쓴다고 해도 말이다.
레이의 말에 나는 탁자 위에 올려 둔 가면으로 시선을 던졌다. 웃는 얼굴이 새겨진 가면은 이 암시장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구매한 것이었다. 안면 인식 장애 기능이 달린 아티팩트로, 앞으로 나와 함께할 놈이었다.
━그놈의 웃는 마크는 왜 새겨 달라고 한 거냐?
“웃으면 복이 온다잖아요.”
━복이 오기는 개뿔.
“뭐, 진짜 이유는 어그로 때문이죠.”
━어그로?
“네, 한번 보면 잊히지 않을 만큼 강렬한 이미지가 필요했거든요. 제 이미지를 마스코트화시키는 거랄까.”
━뭐 하러?
“어차피 제 존재는 들켰으니 작전을 바꿔야죠.”
원래는 존재감이 없는 흑막 정도의 위치에 있고 싶었지만, 그건 이미 글러먹었다. 강이신은 이미 노출된 신분이다. 나라는 존재는 이미 내가 가장 들키고 싶지 않았던 이들에게 각인되었다. 설록진이든, 붉은개든, 각범 팀이든. 추적을 완전히 끊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 어째야 하나.
내가 절대 강이신이라는 걸 들키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 뭔가 대단한 빌런이 이 세상에 나타난 것처럼.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예, 전 앞으로 거대한 사기를 칠 생각이거든요.”
내 능력은 모두 알고 있겠지만, 내가 아티팩트를 얻고 새로운 재능을 개화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없다.
“저는 이론상 모든 속성의 마력을 쓸 수 있잖아요.”
━그렇지, 네놈의 몸에 모든 마나 회로가 깔렸으니.
“이걸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어떨까요.”
━엄청나 보이겠지.
그 마력의 출력이 턱없이 낮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그 단점을 들키지만 않는다면 나는 이 세상에 단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는 사기적인 재능의 소유자로 보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기적인 놈의 상징이 저 웃는 가면이 되는 거죠.”
━허허.
설록진의 밑에 있으면서 어느 정도 ‘있어 보이는’ 방법을 깨달은 나였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댔지. 이 나라를 완전히 말아먹은 악당의 옆에서 십 년 동안 버틴 나는 어떻겠나.
“바벨 아카데미의 수치, 강이신을 두려워할 사람은 아무도 없죠. 하지만 저 웃는 가면은 달라요. 저 가면을 뒤집어쓰고 할 짓은 다를 테니까.”
━지난 사흘간 누워서 생각한 게 그런 거냐.
“예.”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내가 팔아 치운 마나석과 아티팩트는 총 8억 원어치. 이 정도 돈이라면 당분간 할 수 있는 건 다 할 수 있다.
이 돈으로 나는 내 힘을 만들 생각이었다.
━본인의 힘이 부족하다는 걸 알면 수련을 해야지!
“수련한다고 괜찮아질 상태가 아니잖습니까. 애초에 마나량이 턱없이 적어요. 속성탄 몇 번을 쓰면 지쳐 버리는 지금 수련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바벨 아카데미에서 그건 뼈저리게 깨달았다. 타고 태어난 재능을 이길 수 있는 건 없다고.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 말할 필요가 있나?
“다 해 보고 안 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저번에 상대한 놈들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등급이 낮고 약해 빠져서 가능했던 거다.
“이 정도 힘으로는 설록진은커녕 그 밑에 있는 잔챙이를 치우는 것도 무립니다.”
하지만 돈만 있으면 이 세상에 하지 못할 건 없다. 내가 제일 처음 설록진의 게이트를 털 생각을 한 것도 다 자금 마련을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이제 토대는 다져 놓은 셈이다. 이 토대 위에 올릴 주춧돌을 고르면 된다.
━그나저나 전생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네놈이 그렇게 그 인간에게 이를 가는 거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인제 와서 갑자기 저에 관한 관심이라도 생긴 겁니까?”
━네가 한 말대로 싫으나 좋으나 우리는 한배를 탄 사이니까.
“뭐, 그야 그렇지만.”
조금 나에게 정이라도 붙은 걸까.
━네가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묻지는 않았지만 계속 궁금해서 말이다.
아티팩트치고는 너무 사람 같은 반응 아닌가. 하긴, 이 정도로 사고가 가능하니 사람과 다를 바가 없나. 뭐, 앞으로 내 계획을 함께할 동료라고 생각하면 못 해 줄 말도 아니긴 했다.
“짐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또한 그 불법 게이트에 채굴꾼으로 일하러 갔던 적이 있습니다. 임현수 그 개자식한테 홀딱 속아서요.”
━돈을 벌려고?
“네. 그것도 있고. 당시에는 이래저래 불만이 많았거든요. 나름 B급 각성자인데 채굴꾼 일 해서 버는 돈은 쥐꼬리만 하니까요. 어쨌거나 그래서 조금 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대뜸 지원한 거죠. 위험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나라면’, 그래, 나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단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일단 불법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 험악한 분위기에 엿 됐다는 걸 깨달았거든.
“봤으니 알겠지만 거긴 지옥입니다, 지옥. 남의 인생을 땅바닥에 처박은 인면수심의 쓰레기들이 감시자라고 있는 곳이에요. 잠자는 시간도, 밥을 먹는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았죠. 아, 일단은 게이트에서 나가질 못하니 마나 중독 현상으로 사람들이 픽픽 쓰러져 댔죠. 남들은 길어 봐야 일주일이나 열흘을 버텼지만, 제 경우는 조금 재수가 없었습니다.”
이래 보여도 나는 B급 각성자였다. 마나 중독 정도에 쓰러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얼마나 버텼냐?
“한 달.”
그 한 달은 정말 끔찍한 시간이었다.
옆에서 같이 말을 나누던 사람이 말라 죽어 가는 걸 지켜보며 나는 그야말로 미치기 직전까지 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사람들이 죽어 가는 걸 지켜보던 나는 참다못해 감시자라는 놈들에게 덤벼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힘이 전부 빠져 버린 뒤라 상대도 되지 못했다.
“차라리 그때 죽었다면 좋았을 텐데.”
━거기에서 어떻게 나왔지?
“풀어 줬습니다, 그놈들이요.”
그 안에서 죽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는데, 놈들은 나를 바깥에 풀어놓았다. 이때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이성이 마비된 나는 이상함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을 지배한 건 어떻게든 내가 겪은 지옥을 이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밖으로 나온 저는 곧바로 가장 믿음직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경찰도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차라리 그때 경찰에 신고했다면 나았을 거다.
━그 믿음직한 사람이 누구, 설마…….
정호산. 내가 그때 전화를 건 사람은 내 하나뿐인 친구 정호산이었다.
“나를 놔준 건 나를 설록진 앞에 데리고 가기 위해서였죠. 잠시 시간을 준 건 그놈들의 유희였습니다. 어차피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처리할 자신이 있었을 테니까. 내 주변으로 감시자가 쫙 깔려 있더라고요.”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컨트롤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나를 놔주지 않았을 거다.
설록진에게는 악취미가 있었다. 어차피 세뇌로 다른 사람을 멋대로 주무를 수 있는 주제에 진심 어린 절망을 보고 싶다나. 어쨌거나 나를 놔준 건 다 그 때문이었다.
그리고 놈의 계획대로 나는 절망했다.
내 앞에 끌려온 정호산을 본 순간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를 처절하게 깨달았으니까.
“정신을 반쯤 놔 버린 내게 설록진이 계획을 늘어놓더군요.”
설록진의 목표는 나를 세뇌해 테러를 저지르는 거였다. 죄도 없는 민간인들과 함께 폭사하는 게 내 역할이었다.
━왜 그런 짓을 하지?
“그래야 사람들이 각성자를 미워할 테니까요. 사람들이 각성자를 미워할수록 반각성자 루트를 탄 설록진의 인기가 올라갈 테고 말이죠.”
오로지 그 이유로 설록진은 출퇴근 시간 버스 안에서 일어날 테러를 기획했다. 정말로 개X끼가 아닐 수 없다.
나를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바벨 아카데미를 졸업한 B급 재능을 지닌 각성자라니. 타이틀이 너무 좋잖습니까. 하지만 설록진이 생각하지 못한 걸림돌이 하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놈의 세뇌가 통하지 않았거든요.”
정신계 쪽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일까. 나에게는 S급 정신계 패시브 스킬이 하나 있었다.
불굴의 신념(S)이라는 스킬. 그 전까지 나는 이 스킬의 효용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게이트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각성자인 내가 ‘정신계 스킬’에 당할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덕분에 나는 설록진의 세뇌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현장에는 나 말고도 고등급의 각성자가 한 명 더 있었다.
“평범한 상황이었다면, 정호산은 설록진의 세뇌를 튕겨 냈을 겁니다. 하지만 설록진이 나를 인질로 삼자 그 바보 같은 놈이 그냥 당하더란 말입니다.”
━네 친구는…….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낸 테러범으로 기록되었죠.”
내 친구의 이름은 죽어서까지 모욕당했다. 정호산의 인생은 그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헌터가 됐던, 그래서 붉은개 길드에 들어가 제2의 인생을 살아 보려고 했던 정호산의 인생은 그야말로 똥통에 처박혀 버렸다.
“그러니 그놈을 위해서는 내가 못된 범죄자가 되는 편이 훨씬 낫죠. 나를 미워하고 의심할수록 날 위해서 죽는 일은 없을 거 아닙니까.”
내 말에 레이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한참의 침묵 끝에 레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인간, 네가 모시던 보스라고 하지 않았냐? 넌, 너는 네 친구를 그렇게 만든 놈의 부하가 된 거냐?
“예.”
레이의 말에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전생에서 나는 쓰레기라는 말도 아까울 폐기물이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