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8 예상하지 못했던 손님 (1)
원래 아무도 없어야 할 게이트 앞에 누군가 있었다.
보기만 해도 더워 보이는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구겼다.
“네놈은 누구길래 그 불법 게이트에서 나오는 거지?”
나도 똑같이 묻고 싶은 말인데. 당신은 누구길래 이 앞에 있었냐고 말이다. 혹시 설록진의 부하? 그렇게 생각하며 얼마 남지 않은 마나를 끌어 올리려고 할 때였다.
남자의 뒤에서 다른 이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게이트를 지키고 있던 남자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남자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본 순간 나는 경악했다.
“이신이?”
정호산, 네가 거기에서 왜 나와? 나는 당황해서 입을 벌렸다.
하지만 정호산보다 내 눈알을 더욱 튀어나오게 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미친 여기 붉은개가 왜 있어!’
<붉은개> 길드의 화견(火犬), 김명철이 바로 정호산의 옆에 서 있었다.
도대체 두 사람이 여기에 올 이유가 뭐란 말인가. 눈앞의 남자도 <붉은개> 길드에서 나온 거라면, 무려 <붉은개> 길드의 멤버 셋이 이 불법 게이트의 앞을 지키고 있었다는 뜻이다.
A급 육체 강화계 능력자 5성급 헌터 정호산.
A급 화염술사 7성급 헌터 김명철.
눈앞의 남자도 최소 4~5성급은 돼 보이니, 나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젠장.
나는 눈을 굴렸다.
불법 게이트에서 나오던 걸 들켜 버리다니, 최악이었다.
“저 사람이 네 친구니?”
혼란스러운 나와는 달리 눈앞에 있는 김명철은 여유가 넘쳐 보였다. 나에게로 손가락질을 하며 그렇게 묻는 김명철의 말에 정호산은 넋이 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 비서, 일단 그 녀석 좀 잡아 두지.”
그 말에 황 비서라는 남자가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렸다. 파랗게 물드는 동공을 보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에서 이 황 비서라는 이 남자를 떨치고 나갈 수 있나.
“형님.”
정호산의 말에 김명철이 옆을 바라보며 찔끔한 얼굴로 말을 바꿨다.
“그러니까 우리 호산이 친구분이시니까 잘 모셔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듣자고. 저 불법 게이트에 억지로, 어, 잡혀 있었다가 탈출한 참일 수도 있고.”
그때 게이트 바깥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김명철과 정호산이 먼저 반응했다.
“저 사람들은 누구지?”
황 비서 또한 갑작스러운 사람들의 등장에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하긴, 당황할 법도 했다. 헐벗은 데다가 마르고 먼지투성이인 남자들이 하나도 아니고 열다섯이나 튀어나왔으니 말이다.
사람들에게로 시선이 쏠렸을 때, 나는 허리에 매고 있던 포션 띠를 만지작거렸다. 연막 포션이 하나쯤 남긴 했는데.
이 황 비서라는 남자 하나뿐이었다면 연막 포션을 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김명철. 화염을 다루는 저 인간이 있는 한 연막 포션 따위는 통하지 않을 거다. 순식간에 불길로 연기를 태워 버릴 테니까.
나는 허리춤에 가져다 댔던 손을 내려놓았다.
“저들은 누굽니까?”
황 비서의 질문에 나는 입을 닫았다. 내 침묵에 긴장감은 더욱 고조됐다. 황 비서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그의 손가락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반지들이 녹아내리며 건틀릿으로 변했다.
젠장, 마법 도구였군. 어쩐지 쓸데없이 반지를 많이 꼈다 싶었지. 나 또한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어이, 황 비서. 새로운 친구들도 여기로 모시지 그래? 다 같이 모여 앉아서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으면 될 거 아닌가?”
김명철의 명령에 황 비서는 짧은 한숨을 내뱉곤 나에게 눈짓했다. 저기로 가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붉은개 김명철의 시야에 닿는 게 이 남자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두려웠기 때문이다.
“마스터께서 대화를 원하십니다. 저쪽으로 가시죠.”
하지만 그 말에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계속해서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고 황 비서가 말했다.
“자꾸 이러시면 억지로 모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사이에 오가는 신경전을 본 한조희가 무어라 말하려고 하는 게 보였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한조희가 내 변호를 하면 모든 게 말짱 꽝이 된다. 물론 내가 저 게이트에서 나쁜 짓만 한 건 아니지.
뭐, 사람을 좀 죽이긴 했지만, 이곳에서 착취당하고 있던 사람들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면 이 사람들도 날 이해해 줄 거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왜?
‘설록진이 나에 대해 알게 될 테니까요.’
━넌 그놈을 참으로 두려워하는군.
‘그거 말고도 안 좋은 점이 잔뜩이니까 웬만해서는 들키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설록진에 대한 걸 떠올리고 싶지 않다. 특히 이곳에서는 더더욱. 내가 말을 돌리자 레이도 침묵했다.
━여기서 저놈들한테 잡힐 수는 없다, 이거군.
‘그렇죠.’
그러니 황 비서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저 앞으로 나갈 수가 있나.
그렇게 서로 가시를 세우고 있는 우리 둘을 본 김명철은 골치가 아프단 얼굴로 소리쳤다.
“다 아는 사이끼리 왜 이러는지 몰라. 호산아, 네가 저 친구 데리고 올래?”
김명철의 말에 황 비서의 얼굴이 구겨졌다. 김명철이 저렇게 말하니, 자존심이 잔뜩 상한 모양이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아니야, 황 비서는 그 시간에 게이트 안쪽도 좀 살펴보라고. 아직 붕괴되기엔 시간이 좀 있는 거 같으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나 김명철이야.”
그 말 하나면 충분했다. 7성급의 화염술사. 7성급이라고는 하지만 워낙 사기적인 재능인 화염을 타고난지라 사실상 8성 초입으로 쳐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을 듣는 김명철이라면 여기에 있는 모두를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었으니까.
김명철의 말에 황 비서는 어쩔 수 없단 얼굴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내 앞을 가로막던 황 비서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도망갈 각은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김명철과 나 사이를 가리던 황 비서가 사라지니 더 겁이 났다.
김명철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 친구는 내가 데리고 오지 뭐.”
이젠 죽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정호산이 말했다.
“잠깐, 제가 먼저 저 녀석이랑 얘기 좀 해 봐도 될까요?”
“네가?”
“네.”
정호산의 말에 김명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정호산을 어떻게 할 거라는 걱정은 보이지 않았다.
“뭐, 그럼 나는 저 불쌍한 피해자분들이랑 얘기를 좀 나눠 볼까. 거기 친구들 이쪽으로 넘어와 볼래요? 나 붉은개의 김명철인데, 그쪽들 해치지 않을 테니 걱정은 말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김명철은 내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그렇게 자기소개를 굳이 하지 않아도, 여기에 김명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도.
사람들은 내 눈치를 보며 김명철에게로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나는 한조희에게 눈짓을 보냈다. 무슨 말을 하든 상관없지만 제발 내게 폐가 되지 않는 말이면 좋겠다.
젠장.
그리고 그사이, 정호산이 내 앞에 도착했다.
무시무시하네. 옅은 갈색을 띠는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강이신, 너 맞냐?”
“이야, 호산아. 오랜만이다. 여기에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나는 가볍게 말을 던졌다. 서로 이렇게 간단히 안부를 묻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이렇게 만날 줄은 정말 몰랐지.”
정호산의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실종된 네 흔적을 찾다가 불법 게이트 채굴 일을 소개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난 네 걱정뿐이었어.”
그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이놈의 연락을 피한 게 이 모든 일의 스노우볼이 됐단 말인가? 억울했다.
“그런데 이젠 모르겠다. 대체 저 안에서 무슨 짓을 하고 온 거냐. 그 피는 다 뭐고?”
그렇게 말한 정호산이 내 손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내 피는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 더 큰일 나는 거 아니냐?
그러게. 정호산의 사나워지는 눈빛을 보며 나는 잘못된 버튼을 눌렀다는 걸 깨달았다.
“강이신, 너 진짜…….”
나에게 말을 쏟아 내려던 정호산이 말을 끊었다. 눈을 커다랗게 뜬 것이 뭔가 이상한 거라도 발견한 것 같았다.
“너 목에 인식표 어디 갔어?”
아차차. 나는 휑한 목을 더듬으며 멋쩍게 웃었다.
“떼 버렸어, 불편해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김명철과의 거리를 인식한 듯, 정호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당장 내 멱살이라도 잡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인식표를 떼는 건 엄청난 중죄였으니까. 살인보다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살인까지 했으니 완전히 가중처벌감이다 이거다.
혹시라도 김명철이 이 말을 듣고 날 잡으러 오는 건 아니겠지?
━걱정하지 마라, 저 녀석. 마나를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정호산을 배려하기 위해선가. 김명철은 이곳의 대화를 엿듣지 않았다.
그럼, 기회다.
“정호산, 하나만 부탁하자.”
침을 꿀꺽 삼킨 나는 정호산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도망치게 해 주라.”
“뭐?”
제발. 나 한 번만 살려 다오.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너 아니면 진짜 엿 되게 생겼걸랑?
내 눈빛을 읽었는지 정호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잡혀가면 엿 될 만한 짓?”
“너.”
정호산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나는 정호산의 팔을 붙잡은 채 애원했다.
“호산아, 나 감옥 가기 싫다. 각성자 전용 감옥이 얼마나 끔찍한지 너도 들어서 잘 알잖아.”
나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진심이 담긴 말이기도 했다. 각성자 전용 감옥은, 정말이지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일단 들어가자마자 능력을 봉인하는 족쇄를 차야 하는 건 물론이고 24시간 감시되는 공간 안에 갇혀야 했으니까.
게다가 수감 기간은 평생이지.
━너 지금 친구에게 한 번만 봐 달라고 애원하는 중인 거냐? 그런 말로 여기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야?
레이는 내 말이 어이가 없다는 말투로 말했다.
그래, 다른 놈이라면 얼토당토않은 말이겠지.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지금 이 상황에서 탈출을 도울 사람이 어디에 있겠나.
게다가 정호산은 엄청나게 정의로운 놈이었다. 불의를 참아 넘길 성격이 아니라는 거지.
하지만 정호산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쳤을 정도로 나를 아끼고 있는 놈이었다. 정호산에게 나는 하나뿐인 가족이니까.
그러니까 ‘한 번’은, 딱 한 번은 봐줄 거다.
━아무리 친구여도 자세한 사정도 들어 보지 않고 너를 놔줄 그런 멍청한 놈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냐.
내 간절한 눈빛에 눈을 질끈 감았다 뜬 정호산이 말했다.
“시간, 오래는 못 끌어.”
됐다.
━여기에 있네, 그런 멍청한 놈이.
나는 정호산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뒤로하고 달렸다.
그제야 이상을 깨달은 김명철이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렸다.
“죄송합니다, 형님.”
김명철은 자신을 가로막는 정호산을 보며 숨을 내뱉었다.
“호산아, 정말 이렇게 나올 거냐?”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놈을 넘어서 저 수상쩍은 친구 놈을 붙잡아 자초지종을 묻고 싶은데 하필이면 자신의 재능이 화염이다.
김명철은 자신이 아끼는 정호산의 몸에 화상을 입히기 싫었다. 맨몸? 맨몸으로는 이 녀석을 도저히 이길 수 없고.
결국 도망치는 놈을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자신의 얼굴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놈을 보니, 화를 낼 기운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