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7 불법 게이트 (4)
겨우 바지만 입고 있는 채로 헐벗은 꼴을 보아하니 여기에서 일하고 있는 채굴꾼 같았다. 먼지를 잔뜩 뒤집어써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걸 보니 제대로 굴려진 모양이다.
나는 몸에 긴장을 풀었다. 채굴꾼이면 적어도 내 편이긴 하니까. 내 얼굴을 본 건 좋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뭐, 적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지. 어쩌면 잘 구슬려서 내 정체를 감춰 달라고 하고…….
“너, 너 강, 강이신?”
내 생각은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끊겼다.
“한조희?”
놀랍게도 저 부랑자가 내가 아는 사람이었던 거다.
“네가, 네가 여기는 어떻게.”
한조희의 꼴은 정말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이 안 좋아 보였다.
젠장, 내가 임현수를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해 두었는데 결국 여기까지 오다니. 하긴, 한조희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 그만큼 돈이 궁한 사정이 있었겠지.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여기에서 아는 사람을 만난 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한조희는 나와 시체를 곁눈질하며 입을 닫았다. 파랗게 질린 낯이 단순히 마나 중독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피에 젖은 손과 시체를 힐끗 쳐다보며 허허, 웃었다.
“오해입니다.”
안심하라고 웃어 준 건데 한조희의 얼굴은 어째 더 창백해지기만 했다.
왜지?
━지금 네 꼴을 보면, 아휴, 됐다.
저기요, 아저씨. 왜 말하다 포기하시는 건데요. 레이의 말투에 순간 열이 뻗쳤지만, 지금 중요한 건 한조희를 안심시키는 거였다.
“음, 난 일단 여기 끌려온 사람들 편이에요. 여기 이 나쁜 놈들이 내 적이라는 거죠.”
그렇게 말한 나는 단검에 묻은 피를 쓱쓱 닦아 냈다. 부실한 설명이지만, 내 계획을 모두 다 말해 줄 수는 없다. 한조희는 영 불안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가 적이 아니라는 건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어요?”
“일주일.”
그 말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용케 지금까지 살아 있었군.
레이의 말대로 한조희는 이미 한계였다. 여기서 꺼내 줘도, 여기에서 스며든 마나로 인해서 온몸의 장기가 기능을 멈추고 곧 죽겠지.
이미 한조희는 시한부 상태였다.
내 시선에 한조희는 가만히 시선을 떨구었다.
“하하, 네 말을 들을 걸 그랬어.”
저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까. 내가 뭐라고 말한들 한조희를 위로할 순 없을 거다.
내 침묵에 쓰게 웃은 한조희가 내게 물었다.
“넌 여기에 왜 들어온 거야?”
“나쁜 놈들을 잡는 데에 이유가 있나요.”
나는 그렇게 말을 둘러댔다. 아무리 아는 사람이라지만, 괜히 내 정보를 줄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얼굴까지 들켰으니, 더더욱.
나는 시체를 바위틈으로 끌어당기며 한조희에게 물었다.
“혹시 여기에 마지막으로 사람이 들어온 게 언젠지 알아요?”
한조희는 조금 더 창백해진 얼굴로 내게 답했다.
“오 일은 됐어.”
이런. 죄다 상태가 안 좋겠군. 여기서 나가도 길어 봐야 일주일이나 버틸까.
“감시자가 몇 명인지는 알아요?”
“네 명이었어.”
“그럼 이제 둘 남았네요.”
내가 들어오며 처리한 놈은 바깥을 지키는 놈이니 제외하고, 둘을 해치웠으니 이제 둘 남았다.
무전기로 연락하는 걸 막았으니 내가 여기에 들어온 건 모르겠지. 하지만 문제는 한조희처럼 이 소란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거였다. 언덕 너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고 가면을 챙겨 온 건데, 어이없게 부서져 버렸으니.
그렇게 고민하는 내게 한조희가 말했다.
“정체를 숨길 생각이었던 거야?”
“뭐, 그렇죠. 들켜 봐야 좋을 게 없는 일이잖아요.”
나는 바위 뒤에 숨겨 놓은 시체를 눈짓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여기에 있어. 내가 대신 말해 둘 테니까.”
“그래 줄 수 있어요?”
“도움이 될 수 있다면야.”
언덕을 넘어온 채굴꾼들에게 한조희가 먼저 다가갔다. 나는 망토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혹시나 생각을 바꿔 나를 공격하지는 않을까 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한조희의 말에 채굴꾼들은 모두 안심한 듯 어깨를 늘어트렸고, 몇몇은 손에 들고 있던 곡괭이를 집어 던져 버렸다. 한조희는 나를 보며 눈짓했다. 마치 이곳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이런 도움을 예상한 건 아닌데. 어쨌거나 잘 풀렸다.
이제 몸에 남은 마나는 50% 정도.
앞으로 속성탄은 두세 번밖에 쓸 수가 없었다.
남은 감시자는 둘.
해낼 수 있을까.
나는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허리춤에 놨던 포션을 꺼내 들이켰다.
순식간에 상처가 아무는 최상급 포션과는 달리 아직도 온몸이 삐거덕거리는 기분이지만, 없는 것보다는 낫다.
━겨우 갈비뼈가 부러진 거 가지고 엄살은. 나 때는 그런 거 다 기합으로 이겨 냈어.
“허, 기억이 없다면서요.”
레이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말은 이렇게 해도 슬쩍 내 몸의 마나를 움직여 회복력을 올리는 걸 보니 내가 걱정되긴 하는 모양이었다.
━남은 놈은 별거 아닐 거다.
그러길 바라야지.
* * *
다행히 레이의 말대로 나머지 남은 두 놈들은 별거 아니었다.
한 놈은 아예 대놓고 졸고 있었고, 마지막 한 놈은 자신의 능력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당황한 사이에 숨통을 끊어 놓았다.
이런 놈들도 헌터라고.
재능을 타고나면 뭐 해. 갈고닦을 생각을 하질 않는데.
나는 퉤 땅에 침을 내뱉었다. 제대로 된 헌터로서 게이트를 공략하는 걸 포기하고 약자를 핍박하는 방법만 익힌 놈들이니 약해 빠진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기분이 영 나빴다.
이런 놈들에게도 있는 재능이 없어서 개고생했던 전생이 떠올라서였을까.
“하아.”
상처를 붕대로 동여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내 몫을 챙길 차례다.
마나석을 바깥에 내놓기 전이었던지, 여기저기 마나석이 잔뜩 쌓여 있었다. 나는 압축 가방을 꺼내 눈에 보이는 대로 마나석을 집어넣었다. 내가 챙긴 것만 해도 몇억 원어치는 되지 않을까.
주머니를 모두 채우고도 마나석은 많이 남았다. 이건 그 사람들에게 나눠 줘야겠다. 시한부가 된 대가로는 뭐든 부족하겠지만, 무어라도 챙겨 가야지. 한조희 같은 경우에는 동생도 있었고.
놈들의 시체와 숙소를 뒤져 아티팩트도 챙겼다. 대부분 하급이었지만, 그래도 쓸 만한 게 하나 있었다.
━주제에 이런 것도 갖고 있었구나.
“공동으로 쓰던 거겠죠.”
다른 지역과 완전히 분리되는 안전지대를 세울 수 있는, 이른바 쉘터. 공간을 다루는 아티팩트는 천문학적으로 비쌌다.
게이트 공략에서는 필수적인 아티팩트였지만, 이걸 들고 가는 팀은 그리 많지 않을 정도로.
비상용으로 둔 것 같은데, 덕분에 횡재했다. 이건 암시장 가서 팔아야지.
“이제 게이트 유지 장치를 제거해야겠습니다.”
━그 게이트를 유지한다는 거 말이냐?
“네. 고등급 게이트에서는 통하지 않지만 이런 저등급 게이트에서는 충분히 먹혀서요. 덕분에 이 차원의 자원을 싹싹 긁어 올 수 있게 됐죠.”
━차원 문은 쓸모를 다하면 붕괴하게 돼 있는 것. 그 붕괴를 멈췄다니. 이 세계의 인간들도 대단한 부분이 있구나.
게이트 유지 장치를 제거하자마자 게이트 내 마력의 흐름이 달라진 게 느껴졌다.
한두 시간 후면 이곳이 붕괴할 거다.
그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나는 한조희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사람들을 모아 달라고 부탁하긴 했는데, 잘 모아 뒀을지는 모르겠다.
걸음을 얼마 걷지 않아 한조희와 사람들의 무리가 보였다.
나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한조희에게 다가갔다.
한조희의 뒤로 열다섯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까 내가 만든 소란에 이곳까지 도망쳐 온 사람들도 보였다.
“다 모았어요?”
“그래.”
한조희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수는 총 열다섯. 분명 이곳에 들어온 사람이 열다섯은 아닐 거다. 살아 있긴 하지만 모두가 상태가 좋지 않았다.
마나 중독 필터도 없이 이런 곳에서 일했을 사람들의 상태야 뻔했다. 여기서 나간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정상적으로 활동하긴 어려울 거다.
“일단 저쪽에 있는 마나석부터 챙기라고 말해 주세요.”
나는 미리 포장해 두었던 마나석 뭉치를 사람들에게 건넸다.
‘이것 또한 저들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지만.’
마나석을 들고 나간대도 당장 제대로 된 판매처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독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이 개고생을 했는데 여기에서 맨몸으로 나갈 순 없지.
복잡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 한조희가 말했다.
“고마워, 네 사정은 묻지 않을게. 그냥 나를 이 지옥에서 꺼내 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나는 한조희의 손에 마나석 주머니를 건넸다.
“이건…….”
“형이랑 저 사람들이 캔 거예요. 형 몫은 챙겨야죠.”
“난 곧 죽을 텐데.”
그 말에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실제로 한조희는 곧 죽을 거다.
물론 마나 중독을 치료하는 방법이 아주 없진 않지만, 그 방법은 억 소리가 날 만큼 비싼 데다가 효과가 미미했다. 기껏해야 지금의 증세를 멈추는 정도지, 완치는 꿈도 꿀 수 없겠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여기까지 온 한조희가 쓸 수 없을 방법이라는 거다.
그래도 마나석은 챙겨야지.
“동생 때문에 여기에 온 거잖아요.”
정호산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여기까지 굴러들어 오게 된 나와는 달리, 한조희는 동생을 위해 이곳에 왔다. 가족을 위한 희생이라는 거다. 그 결과가 이렇게 됐어도 나는 그 사실마저 무시하고 싶진 않았다.
가족을 이렇게 아끼는 사람도 흔치 않으니까.
사람들이 마나석을 챙긴 걸 확인한 나는 말했다.
“다들 나가죠.”
“고맙다, 너한테는 진짜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겠어.”
“고마우면, 제가 여기에서 죽었다고 말해 주세요. 여기에 있었는데, 미처 나가지 못했다고.”
내 말에 한조희는 눈을 깜빡였다.
“죽었다고 말해 달라고?”
“이곳을 운영하던 사람하고는 이제 원수를 져 버렸으니까요.”
“아.”
“저분들에게도 그렇게 말해 주면 고맙겠네요. 정체를 들키면 안 되는 사정이 있어서요.”
“……마나석도 나눠 주고, 목숨까지 살려 준 대가로 원하는 게 겨우 그거야? 그거라면 더 확실한 방법이 있을 텐데.”
한조희도 알고 있었다.
━정말 정체를 숨기고 싶다면 저 녀석들을 모두 죽여서 입을 막는 게 확실하잖냐.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서라면 자신들을 굳이 이렇게 살려 둘 필요가 없단 것을. 죽여서 입을 막는 쪽이 훨씬 안전하다는 것을.
그야, 그렇지만. 그래서야 정말 나쁜 놈들이랑 다를 바가 없게 되잖아?
‘나는 설록진, 그 인간처럼 되진 않을 겁니다.’
악당 노릇을 하던 건 전생으로 족하다. 효율이니, 뭐니 하는 변명을 대면서 인간성마저 버린 그 괴물들처럼 되고 싶진 않았다.
뒤로 돌아간 한조희는 내 부탁대로 사람들에게 말을 전했다.
“정말 그거면 됩니까?”
사람들은 내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분들은 그냥 자력으로 이곳에서 탈출했다고 해 주세요.”
“그 말을 누가 믿을까요?”
“알 게 뭡니까. 어차피 이 게이트는 곧 닫힐 텐데.”
게이트가 닫히고 나면 이 공간은 완전히 사라진다. 모든 증거가 증발한다는 뜻이다.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정말로 저 안에서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사람들의 감사 인사에 나는 괜히 딴청을 부렸다.
원망은 익숙하지만 이런 감사 인사는 정말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완전히 구한 것도 아닌데. 어차피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이번 달도 넘기지 못하고 죽을 테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 무거운 감사 인사를 두고 걸음을 옮겼다.
게이트 입구 근처에 있는 시체를 보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란이 있었지만, 뭐. 저건 나쁜 놈이니까 괜찮지 않나?
자, 이제 게이트를 열고 나가면 자유다.
나는 문을 열고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맞닥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