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7화 (17/352)

제17화

#7 불법 게이트 (3)

털썩, 놈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역시 사람을 기절시키는 데에는 전기 속성이 최고라니까. 낑낑거리며 놈의 무거운 몸을 게이트 안쪽으로 밀어 넣는데, 레이가 툭 말을 던졌다.

━네놈의 말을 이렇게나 쉽게 믿을 줄이야.

“그만큼 이놈의 정신력이 형편없었던 거죠. 실제로 여기에서 마나석을 빼돌리는 놈들이 있기도 했고요.”

감히 설록진의 것을 건드리다니. 아직은 설록진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모르니 이런 실수를 하지.

“찔리는 구석이 있을 때는 생각이 짧아지기 마련이거든요.”

거짓말에도 기술이 필요했다. 약점을 잡고 뒤흔드니 나를 의심할 여유가 있을 리가.

게이트 안으로 놈의 몸을 끌어당긴 나는, 나는 내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평범한 채굴꾼이라면 이곳에서 곡괭이 같은 걸 꺼내겠지만, 내가 꺼낸 건 다른 거였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 다 죽일 생각이냐?

“제가 아니었더라도 원래 다 죽었을 놈들입니다.”

횡령을 알게 된 설록진은 여기에 있던 모두에게 목숨으로 책임을 물었으니까.

허리춤에 포션을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가방을 멘 나는 침착하게 포션을 채워 넣었다. 내 두 번째 목숨이 될 수 있으니 잘 챙겨 줘야지. 그리고 손에 든 건 내 손 한 뼘쯤 되는 날카로운 단도였다.

이래 보여도 몬스터의 뼈를 가공해서 만든 거라 웬만한 충격에는 금도 가지 않는 놈이다. 이거 하나에 3천만 원이나 줬지.

그 3천만 원짜리 단검의 첫 임무는, 바로 눈앞에 있는 놈의 목을 찌르는 거였다.

푸욱, 살갗을 뚫고 날카로운 단검이 놈의 경동맥을 끊어 놓았다. 푸슉, 피가 얼굴에 튀었다. 나는 손등으로 피를 문질러 닦았다.

뜨겁네.

이번 생으로 돌아오고 나서의 첫 살인이다.

아무렇지도 않네.

음, 그렇고말고.

━네 손.

레이의 말을 듣고 보니 내 손이 덜덜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하.”

몇 번이나 해 본 일인데, 새삼.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단검이 살갗을 뚫고 지나갔을 때의 기분 나쁜 촉감이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이 감각만큼은 영 익숙해지지 않는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내 손을 더럽힌 것도 오랜만이지.

떨림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영혼은 닳고 닳았으니까 당연하려나. 나는 놈의 피를 쓱쓱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지금부터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앞으로 만날 놈들은 이놈처럼 쉽게 처리할 수 없을 테니까.

이곳 게이트는 돌산 지형이었다. 전에 일했던 게이트처럼 땀범벅이 될 일은 없어서 좋았지만, 대신 내 몸을 가릴 지형지물이 마땅치 않았다.

나무나, 풀 따위가 자라지 않는 돌산에서는 내 위치를 훤히 볼 수 있겠지.

적들은 최소 C급의 헌터다. 눈앞에서 다가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나는 배낭에서 미리 준비해 왔던 망토를 윗옷 위에 꺼내 걸쳤다. 내가 망토를 몸에 걸치자마자 망토는 주변의 색과 동화되기 시작했다.

━오, 이건.

“변신 도마뱀의 가죽으로 만든 겁니다.”

중하급 몬스터인 변신 도마뱀 가죽으로는 이렇게 위장 로브를 만들 수 있었다. 몸을 숨길 곳이 없다면, 나 자체를 위장하면 그만이다. 가까이에서 보면 티가 날 수밖에 없지만, 배경까지 열심히 보는 놈은 없지.

사실상 내가 가진 돈 대부분을 이 망토를 사는 데에 썼다. 이것도 3회 정도밖에 못 써먹을 물건이지만, 그래도 적들이 바글거리는 이곳에 맨몸으로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얼굴을 가릴 가면도 하나 뒤집어썼다.

흰색 가면에 웃는 얼굴이 그려진 놈은 문방구에서 그냥 대충 집어 온 것이다. 그냥 동네 문방구에서 구한 만큼 내구도는 별로겠지만, 애초에 방어구 용도로 쓰는 게 아니니까 괜찮겠지 뭐.

━그건 또 뭐냐?

“여기에 있는 사람을 죄다 죽일 순 없잖습니까.”

━아까는 다 죽일 생각이라며.

“그거야, 여기서 일하는 나쁜 놈들 말한 거죠. 억지로 여기에 끌려온 사람들까지 죽일 생각은 없습니다.”

멍청하게 속아서 여기까지 온 것도 죄라면 죄지만, 이런 곳에서 죽을 만한 죄는 아니었다.

꼼꼼하게 온몸을 가린 나는 바닥에 난 흔적을 따라 걸었다.

걸음을 옮길수록 기억이 선명해졌다. 이미 오래전 지워 버렸던, 아니, 지워 버리고 싶었던 기억들이.

전생의 나는 더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말만 듣고 이곳에 왔다. 입구에 서 있던 놈이 게이트로 들어가는 나를 보며 기분 나쁜 미소를 짓는 게 신경 쓰였지만, 그때는 그저 설레는 마음뿐이었지.

아무리 불법 게이트라고 해도 ‘나라면’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얼마나 순진하고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얼마 걷지 않아 문제의 채굴 장소가 나타났다. 깡, 깡, 곡괭이로 돌을 깨는 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언덕 위에 납작 엎드렸다. 나는 망원경을 눈에 댔다.

━이런, 지옥이 따로 없군.

부드러운 땅속에 마나석이 묻혀 있는 환경이 있다면, 이렇게 돌 속에 마나석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순도야 이쪽이 낫다지만, 채굴 환경은 훨씬 나쁘지.

헐벗은 남자들이 저 아래에서 감시자들의 눈총을 받으며 돌을 깨는 장면은 레이의 말마따나 지옥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노예들도 저렇게 다루진 않을 텐데.

“노예보다 더하죠. 적어도 노예들을 일회용으로 쓰진 않잖습니까. 여기 일꾼들은 일회용이거든요. 저렇게 막 굴리다가 죽으면 그대로 끝이죠.”

━일회용이라니.

“밖에 나가서 여기에서 있었던 일을 불어 버리면 안 되니까요.”

애초에 살려 보낼 생각이 없는 거다.

그래서 마나 중독 현상을 풀어 줄 생각도 없이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굴리는 거고.

‘일단은 감시자부터 처리한다.’

버튼을 누르면 소리가 나는 함정을 언덕 뒤에 설치한 나는 조심스럽게 비탈길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근처 바위에 몸을 숨긴 나는 버튼을 눌렀다. 내가 설치한 함정에서 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 살려 주세요!]

이곳에서는 들릴 리 없는 여자아이의 목소리.

“이게 무슨 소리야?”

감시자는 바로 반응했다. 성인도 아니고 어린애의 목소리다. 아까도 한 말이지만, 허를 찌르는 상황이 생기면 생각이 짧아지기 마련이다.

감시자는 무전기를 통해 동료를 부르는 대신, 곧바로 언덕 뒤로 뛰어 올라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감시자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야, X발.”

이 모든 게 조잡한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깨달은 감시자가 얼굴을 구겼다. 그것도 잠시, 이 모든 게 자신을 꼬여내기 위한 함정임을 깨달은 감시자가 막 입을 벌리려 할 때.

이미 나는 지척에 도착해 그놈의 목에 단검을 꽂아 넣은 다음이었다.

“큭.”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놈은 자신의 목을 움켜잡았다.

하지만 아무리 목을 세게 움켜잡아도 그곳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멈추게 할 순 없었다. 단번에 경동맥과 성대를 끊어 놨으니, 놈은 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옆으로 쓰러졌다.

아무리 대단한 헌터라고 할지라도, 이런 기습에 반응하기란 쉽지 않다.

6성급 이상의 초인이라면 몰라도, 4성급 정도면 간단하지.

이렇게 또 한 놈. 나는 놈의 시체를 질질 끌고 갔다. 구석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 시체를 숨겨 놓은 나는 숨을 훅 내뱉었다.

━이제 두 놈이로군.

이곳의 채굴 현장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자연히 그곳을 감시하는 감시자들끼리는 꽤 거리가 떨어진 편이라 이놈 시체만 제대로 감춰 두면 나머지도 이런 식으로 처리할 수 있을 거다.

그래야 했다.

“야, 확인했어?”

언덕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곧바로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일인데?

다행히 남자는 바위 뒤에 숨은 나를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바닥에 퍼진 핏자국을 발견하고 말았다.

“이, 이게 무슨!”

남자는 곧바로 허리에 매고 있던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막 놈이 입을 열기 직전, 내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타다닥, 최대한 빠르게 땅을 박찬다고 박찼지만, 놈에게 닿기까지 시간이 소요되었고, 놈은 내 기습에 곧바로 반응했다.

“큭!”

내가 날렸던 단검은 놈의 팔뚝에 박혔다. 제법 타격은 줬다만, 일격에 놈을 해치우지 못했다는 게 문제다.

팔뚝에 박힌 단검을 바닥에 집어 던진 남자는 몸에 있던 마력을 끌어올렸다.

놈의 동공이 파랗게 빛나는 걸 본 나는 이를 악물었다.

푸른색 동공 중 대부분은 육체 강화계니까. 아니나 다를까 놈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게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젠장 잘못 건드렸다.’

제법 단련해 둔다고 해 둔 몸이지만, 아카데미를 쉬는 동안 말랑해진 데다가 육체적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내 몸은 놈의 힘을 버텨 내지 못했다.

순식간에 놈에게 업어치기를 당한 나는 바닥에 널브러졌다. 크윽, 돌바닥에 등이 그대로 메쳐지니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고통이 몰려들었다.

그사이에 놈의 손에서 무전기를 빼낸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멀리 무전기를 집어 던졌다.

좋아, 이걸로 다른 놈이 끼어드는 건 막았다.

“넌 누구냐? 누가 보내서 여기에 온 거야?”

“퉤.”

나는 피가 섞인 침을 내뱉으며 말했다.

“물어보면 내가 순순히 대답해 줄 것 같아?”

━지금 그렇게 입을 놀릴 처지가 아닐 텐데.

레이의 말대로 난 놈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레이를 얻고 마나의 속성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나지만, 신체적인 스펙은 놈에 비해 많이 딸릴 테니까.

하지만 그거야 멍청하게 놈의 방식대로 달려들었을 때의 말이지.

나는 허리춤에서 포션을 하나 뽑았다.

“육체 강화계들은 말이야, 자기 몸이 단단한 것만 믿는단 말이지.”

내 소꿉친구 정호산은 무려 잠재력 A급의 육체 강화 재능을 가진 놈이었다. 내가 실력을 늘리기 위해 그놈이랑 몇 번을 맞붙어 봤을 거라고 생각해?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육체 강화계에도 빈틈은 있었다.

특히 눈앞의 놈처럼 겨우 하급밖에 안 되는 놈에게는 더더욱.

나는 포션을 바닥에 던져 깼다. 순식간에 자욱한 연기가 사방을 감쌌다. 육체 ‘강화’라는 말처럼 놈은 곧바로 이 상황에서도 내 기척을 읽고 따라붙었다.

하지만 이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바.

나는 곧바로 놈에게 포션을 던졌다.

이번에는 산성 포션.

“아아악!”

염산보다 독한 붉은 뱀의 독을 뒤집어쓴 놈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때, 놈의 빈틈을 찾은 나는 곧바로 놈의 눈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으윽, 눈알이 터지는 촉감이 최악이었다.

“아무리 육체 강화계라고 해도 이런 약점까지 강화할 수는 없지.”

“끄아아악!”

놈은 비명을 지르며 내 몸을 붙잡고 내동댕이쳤다. 엄청난 힘에 내 몸은 버티지 못하고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이번에는 날아가다 바위에 몸을 부딪쳤다.

“X, X발.”

갈비뼈에 금이 간 게 엊그제인데. 레이의 도움으로 겨우 붙으려던 갈비뼈가 동강 부러져 버렸다. 끄윽. 나는 옆구리를 붙잡고 신음했다.

“내 눈! 내, 내 눈, 이, X, X발 새끼가.”

두 눈을 잃은 놈은 바닥을 기어 다니며 비명을 질러 댔다.

젠장, 이래서야 무전기가 아니라도 온 동네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떠들어 대는 셈이잖아.

고통으로 울부짖는 놈에게 전기탄을 먹여 줬다. 놈의 몸이 쓰러지고 나서야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절뚝이며 일어난 나는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들어 놈의 목에 쑤셔 넣었다.

“헉, 허억.”

━잔인하군.

“대신 확실하잖습니까.”

아카데미에 있을 때도 나는 지나치게 손을 잔인하게 쓴다는 말을 들었다. 손속의 여유를 두는 것도 힘이 있는 놈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 놈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이런 방법밖에 없다고.

결국 살아남은 건 나다.

놈에게 두들겨 맞은 온몸이 쑤셨다.

“으으.”

아무리 각성자의 몸이 회복이 빠르다고 쳐도. 이렇게 매일 굴러 대다간 몸이 버텨 내질 못할 거다.

딱 여기만, 여기만 해결하고. 당분간은 쉰다.

“젠장.”

놈의 주먹에 깨져 버린 가면을 주워 들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분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데.

그때 위에서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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