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6화 (16/352)

제16화

#7 불법 게이트 (2)

군자의 복수는 십 년이 걸려도 늦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나야, 군자는커녕 평생을 간신배로 산 인간이지만 그래도 십 년 만에 내 원수를 갚을 수 있게 됐다.

━회귀자였냐, 너?

적당히 둘러댈까도 생각했지만, 어차피 레이와 나는 한배를 탄 사이. 게다가 레이의 사정을 모두 들어 놓고 내 사정을 숨긴다는 것도 이상하지.

“아니라면 아무런 능력도 없는 제가 어떻게 당신을 찾았겠습니까.”

━전생에서 나를 얻은 놈을 알았다는 거군. 어쩐지. 너 같은 무지렁이가 어떻게 나와 연이 닿았나 했더니.

“듣는 무지렁이 마음도 생각해 주시겠어요?”

듣는 사람을 앞에 두고 별말을 다 한다. 나에게 조금 마음을 열었나 싶었지만, 여전히 악감정이 남아 있는 건가.

쳇, 속으로 혀를 찬 나는 말을 이었다.

“전생에 당신을 차지한 놈은 세상을 구하는 데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당신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만 써먹었죠.”

내가 본 박세운은 구원자하고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자신의 운을 남들과 나눌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놈이었지. 애초에 설록진과 친하게 지낸 것만 봐도 각이 딱 나오지 않는가.

나한테는 이렇게 잔소리를 쏟아 내면서 그놈은 S급 각성자라고 오냐오냐한 건 아니야? 억울한데.

“그냥 등급만 높다고 다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내 불편한 심기를 느낀 건지 레이가 더듬더듬 말했다.

━아니, 뭐 전생의 내 생각을 내가 알 수는 없지만 나름 생각이 있지 않았겠냐?

“참 나, 생각은 무슨. 그놈이 어떻게 하고 다니는지 사흘만 봐도 견적이 딱 나온단 말입니다.”

박세운은 애초에 세상의 구원자가 될 깜냥이 안 되는 놈이었다. 그런 놈을 선택해 놓고 참 혀도 길다.

━그러는 네놈의 견적은 어떻고?

나도 내 능력을 안다. 이 세상의 구원자라고 스스로를 일컫기엔 많이 부족하다는 것도.

하지만 나쁜 놈들을 상대하는 법은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심연을 너무 들여다봐서 심연 그 자체가 돼 본 사람이 바로 나니까.

그래도 나는 어떻게든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저야, 미래에 빵 하고 터질 주식이죠.”

━주식이 뭔데.

됐다, 이 타 차원 노땅이랑 무슨 말을 한다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데 레이의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어차피 네놈이 말했던 대로 내 주인은 너다. 싫으나 좋으나 앞으로는 너와 함께 가야 한다는 거지.

“그래요, 그 생각 앞으로도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놈을 떼어 놓을 수 없는 이상 우리는 같은 배, 아니, 같은 몸을 탄 상태 아니던가. 서로 좋게 좋게 가는 편이 좋았다.

━그나저나 전생에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그렇게 치를 떠는 거냐.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사실 내 속을 읽고 있는 레이는 알았을 거다.

내가 임현수의 앞에서 몇 번이나 살기를 억눌렀는지.

“설명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일이라고만 해 두죠.”

━흐음.

그 말을 끝으로 레이는 침묵을 지켰다. 정말로 과거를 말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레이의 그 침묵이 고맙기만 했다.

잠시 감정을 다스린 나는 임현수에게서 받은 정보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부평역, 오늘 오후 3시라.

“나쁜 놈들을 조질 때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압니까?”

━내가 네 속을 언제든지 읽을 수 있다는 건 알고 내게 묻는 거지?

“그래도 좀 대화하는 재미가 있으면 좋잖아요?”

━에휴, 그래. 가장 중요한 게 뭐냐?

영 말을 주고받는 재미가 없었지만, 이거라도 어딘가. 나는 씩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

한쪽을 건드리는 순간 모든 곳을 접고 튈 준비가 돼 있는 놈들이다.

그러니 이번 한 방에 제대로 털어야 했다. 정보든, 돈이든, 뭐든.

━하여간 볼 사람도 없는데 멋있는 척은.

머릿속을 울리는 레이의 얄미운 말은 애써 무시했다.

* * *

나는 부평역으로 왔다. 오기 전에 암시장에서 구매한 물건을 체크하고 노점상에서 어묵을 하나 사 먹으니 시간이 딱 맞았다.

내 앞에 선 건 나온 지 십 년은 돼 보이는 구형 소나타였다. 얼굴이 까맣게 탄 남자가 운전석 쪽에서 고개를 뺀 채로 내게 물었다.

“그쪽 이름이?”

“강이신입니다.”

“타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소나타에 올라탄 나는 인상을 구겼다. 담배 찌든 내와 함께 이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의 체취에 코가 마비될 정도였다.

━이 무슨 끔찍한 냄새냐!

레이가 그렇게 소리칠 정도였다.

며칠간 비위가 다시 약해진 나도 죽을 지경이었다. 내 구겨지는 표정을 봤는지 운전석에 앉은 남자가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요, 방금 현장 뛰는 애들을 태워다 주고 왔더니. 알잖아요. 냄새를 빼고 또 빼도 지독해지는 거. 게다가 말이야, 거기가 좀 멀어?”

확실히 칠성군 게이트는 외진 곳에 있긴 했다. 그러니 불법 채굴이 가능한 거겠지만. 그래서 그 먼 거리를 냄새나는 인간들과 오가니 냄새가 배지 않을 수 없었다고 떠들어 대는 남자에게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닫았다.

쓸데없이 입을 놀려 에너지를 뺄 생각은 없었다. 몇 번 백미러로 나를 힐끗 쳐다보던 남자는 내가 피곤한 듯 입을 닫자 운전에 집중했다.

남자는 나를 내려 주고 곧바로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이렇게 목격자를 남겨 둬도 되는 거냐? 여기에서 사람을 잔뜩 죽일 생각이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그 불법 게이트에서 저지를 일을 알고 있는 레이는 내게 불안한 듯 그렇게 물었다.

“저 사람이 목격자인 게 중요한 겁니다. 강이신이라는 신분은 오늘 버릴 생각이거든요.”

금 박사가 내 인식표의 신호를 속일 수 있는 건 최장 보름. 그러니 강이신은 어떻게든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했다.

“게이트만큼 사람이 실종되어도 자연스러운 곳이 없죠.”

나는 오늘 이 자리에 금 박사가 내게 준 GPS를 가지고 왔다. 이 GPS를 게이트 안에 던져 놓을 생각이었다.

━게이트는 어떻게 닫고? 네놈은 공략을 할 수 없을 텐데?

“애초에 채굴꾼이 가는 게이트는 모두 공략이 끝난 것들뿐이에요. 그걸 게이트 유지 장치로 닫히지 않게 유지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런 게 있다고?

“예. 그러니 내가 할 건 일을 치르고 그 유지 장치를 뽑아 버리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게이트는 닫히고, 증거는 모두 이 세상에서 사라질 테니까요.”

━아하, 그런 계획이군.

“그래, 그러니 얼굴을 제대로 보여 줘야죠.”

그 바벨의 수치 강이신이 이곳에 왔노라, 그리고 이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증명해 줘야 할 테니까.

그럼 이제 일을 하러 가 볼까. 나는 산중턱 한가운데에서 빛나고 있는 녹색 게이트를 보며 걸음을 옮겼다.

* * *

“또 왔군.”

바보 같은 놈들. 현장을 맡은 김 씨는 땅바닥에 침을 뱉었다. 마침 일손이 너무 줄어서 곤란하던 차였다.

오늘 오는 놈은 제법 오래 버텼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김 씨는 그런 기대를 담고 시선을 위로 올렸다.

남루한 차림새에 영 비실거리는 걸 보니 오래 버티기는 무슨, 당장 내일 송장을 치러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지만 말이다.

‘툭 치면 죽게 생겼는데?’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놈들의 사정이야 뻔하지만, 그래도 저런 놈을 보내다니. 김 씨는 속으로 임현수를 욕했다. 그래도 기력 보충이라도 조금 하고 보내지. 저게 뭐란 말인가. 기껏해야 사흘은 버티려나. 아니면 이틀? 가뜩이나 위에서 할당량을 쪼는 중인데 이러면 곤란했다.

그래도 일단 일손은 일손. 어쩔 수 없지.

김 씨는 놈에게 다가갔다.

“일하러 왔지?”

보통 김 씨가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 마련이었다. 온몸이 도화지인 양 문신을 그린 데다가 체구가 2m에 가까운 거한인 김 씨를 두고 긴장하지 않을 사람은 없었으니.

하지만 눈앞의 놈은 달랐다.

김 씨의 말이 제게 닿자마자 놈의 자세가 바뀌었다. 어깨와 허리를 편 것뿐인데도, 찌질한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다. 놈이 고개를 올려 자신의 눈을 바라보았을 때, 김 씨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 건가.

“그래, 여기에 일하러 왔지.”

순간 김 씨는 놈이 제게 반말을 내뱉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평범한 놈들과는 다르다. 놈에게서는 높은 분들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뭐지? 조금 전까지는 당장 쓰러질 것처럼 위태해 보였던 놈의 마른 몸이 마치 태산처럼 느껴졌다.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는 김 씨의 앞에서 남자가 여유로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윗분들께서 여기가 잘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보라고 해서 말이야.”

“그, 그게 무슨.”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단어에 김 씨는 몸을 굳혔다. 윗분들이라니. 그 말이 나온 순간 김 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까짓 게 그분들을 알고 있을 리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놈의 눈을 마주친 순간 그 말이 쏙 들어갔다.

겉으로 보면 부랑자가 따로 없는 놈인데, 왠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젠장, 정말 윗분들이 보낸 건가?’

하지만 아직도 김 씨의 마음에는 의심이 남아 있었다. 가끔 위쪽에서 사람이 나오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형편없는 녀석이 온 적은 없었다.

의심을 가득 담고 김 씨는 남자에게 물었다.

“검사 날도 아닌데 말입니까?”

“그래, 너희 중에 몰래 할당량을 빼돌리는 놈이 있다고 들었거든. 그러니 몰래 살펴봐야지.”

그 말에 김 씨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굴렸다. 이제야 눈앞의 남자가 이 꼴인 게 이해가 갔다.

‘그놈들이! 적당히 빼돌리라니까!’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그동안 조심한다고 조심했지만, 결국은 들킨 모양이었다. 젠장,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혹시 자네도 뭔가 알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입꼬리를 올리고 김 씨를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는 살기가 번뜩였다. 꿀꺽, 김 씨는 침을 삼켰다.

“아뇨, 저는 그냥 밖에서 이렇게 오가는 사람들이나 들이는 역할이라서요. 안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하나도 알지 못하죠.”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본 남자가 말했다.

“좋아, 일단은 믿지.”

후, 김 씨는 남자의 말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남자에게 찍혔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게이트부터 열어.”

“드, 들어가시게요?”

“그래, 윗분들께서는 내가 아주 확실하게 안을 살피는 걸 원하시거든. 며칠 있으면서 상황을 볼 거야.”

정말 이번에 싹을 뽑으려나. 어떻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혹시, 자신이 이 남자를 먼저 손본다면?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김 씨는 이내 속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허접해도 그분들이 보낸 남자라면 자신과는 비교도 안 될 실력자일 게 분명했다.

그런 실력자와 맞붙어 이길 자신은 없었다.

김 씨는 순순히 게이트를 열었다. 비굴한 얼굴로 김 씨가 뒤를 돌아보며 남자를 부르려 할 때였다.

“안내 고마워.”

이윽고 엄청난 고통과 함께 앞이 깜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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