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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14화 (14/352)

제14화

#6 건방진 아티팩트 (4)

원래대로라면 이런 열악한 환경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지만, 나는 미로에 자리를 잡고 며칠을 보내기로 했다.

함정이 모두 해제된 이 미로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실력을 갈고닦을 완벽한 훈련장이었다.

새로 얻은 능력을 시험해 보기에 딱이라는 뜻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앞으로 팔을 쭉 뻗었다. 마치 마X의 아이X맨처럼 손바닥으로 마력을 방출해 봤다.

하지만 내 손바닥에서 나간 건 아이X맨은 고사하고 저녁 예능에도 나오지 못할 형편없는 연기뿐이었다.

━내가 이끌어 주는 경로를 기억하라니까.

이럴 때에는 늘 함께하는 레이의 잔소리가 따라붙었다. 하여간, 끼어들지 않으면 입이 간지러워서 못 참겠지.

“기억하려고 하는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라니까요.”

머리로는 알아도 몸으로는 영 감이 오지 않는달까. 평생을 두 다리로 걸었는데 갑자기 제3의 다리가 돋아나 1인 3각을 해 보자고 덤비는 꼴이라니까.

레이의 보조가 없으면 내 몸에서는 아직도 마나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의 보조에만 의지하면 내 실력은 조금도 늘지 않을 터. 레이가 내 마나를 이끈 다음에는 레이의 도움 없이 몇 번이고 나 혼자서 마나를 움직여 보았다.

마치 나침반 하나 없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기분이랄까.

수없이 깔린 마나 회로가 오히려 내게 혼선을 줬다.

하지만 몇 번이나 반복하고 또 반복하자, 이제는 제법 옳은 길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벽을 부수느라 한차례 힘을 빼서인지 손바닥으로 나온 마나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느껴졌다.

뭐가?

냉기가.

━하나에만 집중하라니까.

“언제 어떤 속성이 필요할지 모르니까 최대한 여러 가지 준비를 해 놔야죠.”

이왕 온몸에 무한대에 가까운 회로가 깔렸는데 그 마나 회로를 놀리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나는 레이가 이끌어 준 마나 회로 중에 다섯 가지를 기억했다.

제법 괜찮다 싶었던 화 속성과 냉 속성, 그리고 뇌 속성.

영 아니다 싶었던 건 땅 속성과 나무 속성이었다.

하긴 이건 내 머릿속에서도 영 어떤 이미지인지 그리기가 어려웠으니 당연한 거려나.

마력이 바닥을 기고 있다는 걸 감안해도 내 몸의 출력은 그리 좋지 않았다.

어쩐지 온몸의 힘을 다 끌어내도 돌벽을 부수는 게 고작이더라니.

“음, 이걸로 몬스터 사냥은 무리겠는데.”

━네놈 몸속에 있는 마나의 힘, 그러니까 마력은 형편없는 수준이다.

잔뜩 열이 받았는지, 레이의 말투는 주인을 향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만방자했다.

“뭐, 그래도 사람을 상대로는 충분히 효과가 있을 겁니다.”

내 말에 레이가 외쳤다.

━그게 무슨 소리지? 사람을 상대로 한다니?

“당분간 저는 게이트가 아니라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더 많을 거라는 뜻이지요.”

그 말에 레이가 마나 회로에 흐르던 내 마나를 모두 차단했다. 허, 순식간에 온몸의 힘이 빠졌다. 세상에, 이런 짓도 가능하다고?

━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힘을 쓰겠다고 하지 않았나?

“잠, 잠깐만 내 말 좀 들어 보시죠.”

━들을 필요도 없다! 애초에 거짓말쟁이인 네놈을 믿는 게 아니었거늘! 벌써부터 사람을 해칠 생각이나 하다니!

“거, 진짜 듣는 거짓말쟁이 서운하게 하네.”

나는 바닥에 침을 딱 뱉었다. 내 험악한 반응에 레이는 그제야 입을 닫았다.

“내가 며칠 전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이 나라를 좀먹는 개자식들을 치울 생각이라고.”

이러나저러나 일단 한국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건 바로 그놈들이다.

목표가 조금 더 거대해지긴 했지만, 이 세상을 그 침략자들에게서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값진 각성자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리는 게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쁜 놈들을 족쳐야 하고.

━나라를 좀먹는 개자식들이라.

“그런 경우 많잖습니까.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서 방해가 될 것 같은 다른 놈을 처리하는 거요. 그 나쁜 놈들은 앞으로 이 세상을 구할 영웅들을 자신에게 방해가 된다는 이유만으로 치워 버릴 거란 말입니다.”

레이의 말을 들었지만, 이 세상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아직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래도 한 가지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그 사람들을 구하지 못한다면, 이 세계가 망해 버린다는 거다.

과거의 멸망이 딱 그런 식으로 왔었지.

“나 혼자서는 세상을 못 구해요. 내가 못나서가 아닙니다. 원래 세상은 혼자서 구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고요.”

━그 말에는 일리가 있군.

레이의 말에 나는 거보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네놈은 지나치게 세 치 혀를 잘 굴리는 경향이 있어.

“하하, 전생에 하던 짓이 그런 거라.”

어쨌거나 레이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내가 강해진다면 이 세상의 멸망에 훨씬 더 잘 대처할 수 있겠지.

“이거 몬스터를 상대할 정도로는 강해질 수 없는 겁니까?”

━네놈이 지금 사용하는 마나 회로는 1획짜리다.

“1획이요?”

━그래, 마나 회로에도 격이 있거든. 초보적인 것부터, 웬만한 경지를 쌓지 않으면 건드릴 수도 없는 것까지. 네 몸에 깔린 마나 회로 중에 네놈이 이용할 수 있는 건 아주 일부뿐이야.

1획짜리가 있다면 2획, 3획짜리도 있다는 뜻.

━당장 네 능력으로 사용 가능한 건 2획짜리가 끝이다.

“그 위로 올라가려면?”

━글쎄, 특별한 수련법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는군.

나는 혀를 찼다. 뭐, 사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쉽게 풀리면 내 인생이 아니지.

그래도 당장은 이보다 더 강한 기술을 쓸 수는 있다니 다행이었다. 2획이 어느 정도 강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의 도움으로 그래도 다섯 가지 속성의 1획 정도는 간단히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이쯤이면 게이트를 공략하진 못해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그곳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하다.

금이 간 갈비뼈도, 멍투성이던 몸도 이제는 괜찮아진 상태였다. 레이가 회복력을 올려 준 것도 도움이 됐다(레이는 내가 잠든 사이 1획짜리 회복 효과를 계속 돌렸다고 말해 주었다).

━어딜 갈 참이냐?

“이제 부상도 제법 괜찮아졌으니, 슬슬 나가 보려고요. 대충 능력을 쓰는 방법도 알 것 같고.”

이 세계를 멸망으로 이끌 첫 단추가 되는, 아주아주 못돼 먹은 나쁜 놈들이 있는 곳으로 말이다.

━겨우 그 정도 실력으로?

“이 정도라도 충분하다니까요.”

거기에 있는 놈들의 실력은 그야말로 형편없으니까. 나는 레이의 걱정을 뒤로하고 지긋지긋했던 동굴을 탈출했다.

* * *

“공략에서 끝내 주는 성과도 올린 놈이 표정이 왜 그래?”

<붉은개> 길드의 길드 마스터, 김명철은 정호산의 등짝을 팍 쳤다. 손이 찌릿찌릿했다. 두들겨 맞은 쪽은 정호산이지만, 아픈 건 김명철의 손이었다.

“아, 아주 근육이 단단하네, 단단해.”

김명철은 그렇게 말하며 낄낄 웃었다. 정호산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덜미를 긁적거렸다.

“죄송합니다.”

“아이고, 죄송할 게 뭐가 있냐! 내가 친걸.”

보기만 해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A급 헌터인 정호산을 그가 이 길드로 데리고 온 지도 삼 개월.

불과 삼 개월 만에 5성급 헌터로 올라선 정호산은 <붉은개>의 기대주라고 불리기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직 5성인 것도 실적이 부족해서니, 곧 6성에 이를 수 있겠지.

실력이면 실력, 인성이면 인성. 거기에 머슬맨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탄탄한 근육질의 몸까지. 얼굴도 저 정도면 잘생겼지, 암. 딸이 있다면 당장 사위 삼고 싶은 놈이었다.

이번 게이트 공략에서도 초보자답지 않은 결단력으로 마지막 보스 몬스터에게 일격을 날리는 데 커다란 공을 세우지 않았던가.

이번 보스 몬스터를 해체하고 나온 가죽으로 아머를 하나 만들어 준다고 공언까지 한 상태건만, 정호산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뭐 문제라도 있는 거야?”

“친구가 연락이 안 돼서요.”

“연락이 안 돼?”

그 말에 김명철의 얼굴 또한 가라앉았다. 게이트가 등장하기 전이라면 모르되, 게이트라는 놈이 생긴 순간부터 사람들은 ‘실종’이라는 단어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하니 그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마지막으로 연락을 한 게 언제냐.”

“벌써 열흘도 더 된 것 같아요. 게이트 공략이 끝난 다음에 곧바로 연락했으니까. 근데 아직도 답장이 없네요.”

“허어.”

한숨을 토해 낸 김명철이 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집은?”

“찾아갔는데 비어 있어요.”

“그럼 따로 연락할 만한 사람은?”

“없어요. 걔가 사람들하고 낯을 좀 가려서.”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것 같은데. 김명철이 눈을 굴리며 말했다.

“최근 게이트 관련으로 뭐, 사건은 따로 없었는데.”

김명철의 하루 일과는 게이트 관련 사건·사고 뉴스를 확인하는 걸로 시작했다. 이 대한민국에서 뛰어난 재능으로 각성한 이상 게이트를 공략하고 시민을 지키는 게 그의 임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정호산의 친구의 실종은 게이트와 무관한 다른 일과 얽힌 것 같다고.

“네가 말하는 친구가 혹시 그 녀석이냐? 그, 그, 그…….”

김명철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녀석의 이름을 말하려 노력했지만 이름 대신 그의 뇌리에 스치는 건 바벨의 수치니, 반푼이니 하는 식의 멸칭뿐이었다.

그런 김명철에게 정호산이 말했다.

“강이신이요. 저번에 몇 번 보셨잖아요.”

“그, 그래. 강이신이.”

정호산과는 달리 비리비리하고 눈이 쫙 찢어진 게 누가 봐도 믿음이 쉬이 가지 않는 얼굴이었지. 당당히 제 능력으로 이 길드에 들어온 정호산과는 달리 어느 길드에서도 받아 주지 않을 만큼 형편없는 재능을 가지고 있기도 했고.

‘원하면 우리 길드 말단에라도 넣어 주겠다고 했는데, 주제에 자존심만 높아서 그 제안도 받아들이질 않았지.’

여러모로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었지만, 고아인 정호산에게는 단 하나뿐인 가족이라고 들었다.

그런 녀석이 실종되었으니 이렇게 축 처져 있을 만도 하지. 쯧, 김명철은 혀를 찼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기가 막힌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몇 번이나 손발을 맞추고, 관심이란 관심을 다 내보였음에도 여전히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는 정호산을 한 번에 확 감아챌 방법.

바로 그 소중한 친구 놈을 찾아 주는 거다. 자신의 일만 묵묵하게 하는 이런 놈이야말로 그런 은원에 껌뻑 죽는 법.

몸이 단 김명철이 정호산에게 물었다.

“그놈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그랬지?”

“게이트 채굴 일을 한다고 했어요.”

“흐음.”

그 말에 김명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채굴꾼 일을 하는 각성자 중에서는 유혹에 못 이겨 나쁜 일에 손을 대는 경우도 많다 들었는데, 혹시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가 한번 알아보마.”

“정말요?”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한 정호산의 얼굴에 김명철은 가슴을 툭툭 두들겼다.

“호산아, 내가 그러지 않았냐. 이 형님은 너를 진짜로다가 아낀다고. 네 일인데 내가 알아봐 주는 것도 당연하지.”

“하지만 마스터께서는…….”

“어허! 형님이라고 부르라니까.”

그렇게 말한 김명철이 정호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상심 말고 기다려라. 이 형님이 그래도 제법 발이 넓은 사람이잖냐. 곧 찾을 수 있을 거다.”

“감사합니다!”

정호산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참 얘도 난 애는 난 애라니까.’

엄청난 계약금이나, 오피스텔 같은 걸 제의했을 때도 시큰둥하던 놈이 자기 친구를 찾아 준다는 말에 진심으로 감복해서는 그 비싼 고개를 숙이다니 말이다.

‘호산이를 진정한 내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강이신, 그놈을 찾아내야 한다.’

그렇게 일은 강이신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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