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이지만 세계 평화가 소원입니다-9화 (9/352)

제9화

#5 암시장 (3)

인식표를 떼는 시술은 금세 끝났다.

별것도 아니네!

나는 이마에 가득 맺힌 식은땀을 닦으며 애써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가벼워진 목덜미가 어색했다. 내 인식표를 손에 든 금 박사는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뭐 어쩌라는 거지.

내 덤덤한 얼굴에 실망한 듯 금 박사가 투덜거렸다.

“목줄을 떼고 나면 다들 신이 나서 소리를 지르던데. 고맙다고 머리가 바닥에 닿을 정도로 감사 인사를 전하고 말이야.”

“리액션이 부족해서 죄송하게 됐네요.”

“됐다, 됐어.”

됐다는 거치고는 되게 서운한 얼굴인데. 하여튼 이상한 양반이었다.

“도산이 보냈다며, 어디 소속이야?”

그건 어디서 들었지? 신호 재밍기가 설치되어 휴대폰은 먹통이 됐을 텐데?

내 의문에 대한 답을 주듯 금 박사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닮은 기계를 꺼냈다.

“그래도 내가 이런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인데 그런 신호 재밍에 당할 것 같았냐?”

그러니까 내가 한 거짓말을 이미 모두 들었다는 거다. 그런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시술까지 해 주다니. 허를 찔렀다는 내 표정에 금 박사가 말을 이었다.

“그 녀석 이름을 어디에서 듣고 왔는지 말해. 그러지 않으면 인식표를 작동시킬 테니까. 나야 어떻게든 도망치면 되겠지만, 정부의 수배자가 된다면 네놈은 꽤나 곤란해지겠지.”

금 박사의 말에 나는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인식표를 제거해 준 것도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겠지. 여기에서 어떻게든 도망친다고 해 봤자 금 박사가 인식표를 다시 작동시키면 정부에 쫓기는 몸이 될 테니까.

그것도 아무런 신분도 없이 말이다.

“내 능력이 뭔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저를 협박해도 되는 겁니까?”

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말을 던졌다. 금 박사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능력이 정말 위험한 거였다면, 이런 인식표를 매는 대신 길드의 헌터로 활동했겠지.”

젠장. 그것도 맞는 말이다.

실제로 내 능력은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으니.

그래도 눈앞의 비실거리는 박사 하나쯤은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아예 논 건 아니니까.

하지만 눈앞의 박사를 무력으로 제압해 봤자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금 박사와 백도산을 적으로 둬서 얻을 손해가 더 크다.

어쩔 수 없네.

「거짓말」이라도 하는 수밖에.

정신계 능력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벗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니 하려면 확실하게 해야 했다.

자신의 능력을 언제나 연마할 수 있는 다른 각성자들과 달리 정신계 각성자들은 자신의 능력을 언제나 감추고 숨겨야만 했다.

자연히 재능을 다루는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설록진의 밑에서 개같이 구른 뒤의 나는 다르다.

나는 몸 안의 감각을 끌어 올렸다.

눈앞에 나에게만 보이는 반투명한 자물쇠 하나가 나타났다.

자신의 능력을 시각화하는 건 정신계 각성자에게는 필수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이 필수적인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능력을 사용하면 직관적으로 바로 알 수 있는 다른 재능과 달리, 정신계의 재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나 또한 내 능력의 이미지를 찾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시스템이 내게 제공하는 상태 창과 달리 이 반투명한 창은 오로지 나에게서 기인한 것. 내 감각을 눈으로 볼 수 있게 시각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만큼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했잖은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쳤다고.

내 눈앞에 떠오른 자물쇠는 아주 평범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저 안에 있는 실린더 개수가 몇 개나 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양만 봐서는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찰칵, 첫 번째 실린더.

내 말이 열쇠가 되어 자물쇠에 닿았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내뱉었다.

“제 능력으로 봤거든요, 백도산이라는 사람을.”

내 말에 금 박사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봤다니?”

그 질문에 나는 숨을 골랐다.

거짓말이라는 능력은 애매하기 짝이 없다.

설록진의 능력인 ‘세뇌’와는 다르다. 내 재능의 가장 큰 단점은 상대방이 확실하게 내 거짓말에 납득해야 한다는 거다. 설록진은 아무에게나 ‘죽으라’고 명령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이미 반쯤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이라면 ‘저쪽에 더 좋은 세계가 있다’는 거짓말로 그를 살짝 밀어주면 된다.

상대방이 믿을 법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그래서 믿고자 하는 이야기를 속삭여 주면 거짓말은 세뇌보다도 더 잘 작용할 수 있었다.

금 박사는 지루한 걸 싫어하는 사람이다. 자신에게 찾아올 특별한 이벤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먹힐지도.

아니, 먹힐 거야.

“제 재능이요, 예지거든요. 미래를 보는 거죠.”

“예지?”

내 말에 금 박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여태까지 밝혀진 예지 재능을 가진 각성자는 딱 한 명뿐이었다.

지금은 세상을 뜬 게릭 도스만. 그는 그 어떤 게이트도 공략하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능력으로 9성급으로 취급받았지.

예지란 그만큼 대단한 능력이었다.

“네놈 말이 진짜라면, 정부가 널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텐데.”

“정부에서는 제 능력을 예측이라고 알고 있어서요. 고작 2초짜리 예측이요.”

“본인의 능력을 숨겼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에는 ‘발현하지 않았었다’가 맞는 소리겠네요.”

시간 차를 두고 재능이 개화하는 경우는 제법 흔했다. 그러니 믿어라, 내 거짓말을.

찰칵. 실린더가 맞물려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금 박사의 첫 번째 담이 허물어지는 소리였다.

“미래에서 본 거냐, 지금 이 상황을?”

“그렇게 친절한 능력은 아니고요. 그냥 봤어요. 미래의 백도산이라는 사람이랑, 금 박사님을요.”

거짓말은 아니다. 정말 나는 내 ‘미래’에 그와 금 박사를 만났으니까. 원치 않게 설록진의 밑에 들어간 나처럼, 설록진에게 미래를 저당 잡힌 사람은 많았다. 백도산은 그중 하나였다.

정신계 면역 패시브를 지녀 설록진의 세뇌를 튕겨 낸 나와 달리 백도산은 꼼짝없이 그의 세뇌에 당해 설록진이 시키면 무엇이든지 하는 개가 되어 버렸지.

그런 백도산을 보며 금 박사는 몇 번이나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너 지금 이상하다니까. 네가 아닌 것 같다고!’

하지만 그 눈물겨운 호소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백도산은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인 금 박사를 무시했고 홀대했다.

금 박사는 어느 순간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설록진이 죽였는지, 아니면 그 상황에 질려 스스로 떠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더는 이곳 암시장에서 금 박사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미래’가 오지 않는 거였다.

나는 금 박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 분이 친구라는 것도 알아요. 지금 이대로 미래가 흘러간다면, 금 박사님이 곧 그 친구를 잃게 될 거라는 것도요.”

내 말에 금 박사는 숨을 흡 들이켰다. 진지한 모습 하나 없이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금 박사에게 백도산은 나름대로 소중한 친구였다.

그러니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백도산의 멱살을 잡고 충고했겠지.

“대체 뭘 본 거냐.”

장난기 하나 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금 박사가 내게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설록진 의원과 백실장이 얽힐 일이 생길 거예요.”

내 말에 금 박사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反)각성자의 대표로 여겨지는 설록진 의원과 암흑가에서 활약하는 백도산의 접점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니까.

“……영종도 통해서 물건을 들일 때 조심하라고 해요.”

그 말에 두 번째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영종도. 이것 또한 중요한 키워드였다.

“네가 본 미래라는 게, 그러니까…….”

“그 사람은 거기에서 설록진의 개가 될 겁니다.”

흥분한 금 박사가 내 멱살을 잡아챘다.

“개라니!”

“주인이 시키는 대로 뭐든 다 하는 게 개가 아니면 뭡니까? 죽으라면 죽고 발바닥을 핥으라면 핥을 겁니다, 그 사람. 그 꼴이 될 거라고요.”

내 얼굴 또한 딱딱하게 굳은 건 마찬가지였다. 원래는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이 없었지만, 이왕 털어놓는 거 미래를 조금 더 알려 줘도 되겠지.

“백도산이라는 사람, 설록진이 시키는 대로 뭐든 할 거예요. 자신이 평생 일궈 왔던 걸 다 갖다 바치는 건 물론 신념에 어긋나는 짓도 몇 번이나 하게 될 겁니다.”

“예를 들면?”

“인신매매나 신체 개조, 말을 안 듣는 사람들은 민간인이든 뭐든 처리하는 건 기본에…….”

“정말 그 녀석이 거기까지 떨어진다고?”

나는 어깨만 으쓱거렸다. 믿기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미래의 백도산은 실제로 그런 일까지 했다.

“이 정보를 어떻게 사용하시든지 그건 박사님의 결정이지만, 그래도 전 제가 할 수 있는 말을 다 해 드린 것 같은데.”

여전히 정신을 딴 데 빼놓은 것처럼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금 박사에게 내가 말했다.

“날 신고할 겁니까?”

금 박사는 내 목에서 떼어 낸 인식표를 들었다 놨다 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겠냐.”

“그럼 계산이나 하죠. 이거 다 해서 얼마죠?”

내 말에 금 박사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계산? 하, 잘도 내빼려고 하는군.”

“계산도 안 하고 내빼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요?”

“젠장할, 돈은 됐어. 네 말이 진짜라면…… 그걸 들은 대가로 값을 대신하지, 뭐.”

“그래도 되겠어요? 내가 거짓말을 한 거면 어쩌려고.”

실제로 내가 한 건 전부 다 거짓말이었다. 아직 금 박사의 자물쇠는 완전히 열리지 않았다. 실제로 내 말에 대한 의심이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 솔직히 말도 안 되지.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예지 능력자라고? 설록진 의원이니, 뭐니. 차라리 백도산 그 자식이 나한테 장난을 치려고 널 보냈다고 믿는 게 낫겠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금 박사는 내 엉덩이를 걷어차는 대신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걸 선택했다.

“그런데 말이지. 이상하게 네놈 말은 믿음이 간단 말이야, 정말로 이상하게도.”

찰칵. 마지막 실린더가 제자리에 맞물렸다.

모든 게 풀렸다.

금 박사는 나를 믿었다. 내 말을, 전부.

좋아, 이제 금 박사의 생각이 바뀌기 전 재빨리 빠져나가야겠다.

“그럼 전 이만 가 봐도 될까요?”

“가기 전에 이거 들고 가.”

금 박사가 내게 던진 것은 신분증이었다.

일주일밖에 먹히지 않을 임시 신분증밖에 없다더니. 내게 건네준 신분증은 무려 정부 인증까지 받아 놓은 각성자 신분증이었다.

23살. 이승준.

신분증에 적힌 이름을 보며 나는 눈을 깜빡였다.

“불법으로 게이트를 공략하다 죽은 놈이라 찾을 가족도, 지인도 없지.”

“아까는 임시 신분증밖에 없다면서요?”

“그거야, 거짓말이지. 누가 봐도 수상쩍은 놈에게 진짜 신분증을 줄 리가 없잖아. 날 만나서 운이 좋은 줄 알아.”

정부 인증을 확실하게 받은 신분증은 흔치 않았다. 참고로 내 본래 신분인 강이신도 정부 인증을 받지 못했다. 저 인증을 받으려면 게이트 공략은 물론이고 파괴 지역에서 봉사 활동도 꽤 해야 하거든.

그런 이력을 가진 남자의 신분증이 어쩌다 이 암시장에까지 굴러들어 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횡재나 다름없다.

생각지도 못한 소득에 내가 히히덕거리고 있을 무렵, 금 박사가 내게 또 다른 물건을 건넸다. 그건 내 인식표 안에 들어가 있던 GPS였다.

“당분간은 신호 재밍으로 버틸 거지만,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끝’이 필요하게 될 거다. 그걸 바다나 강에 던져둬. 비관 자살처럼 보이게. 웬만하면 시체를 뒤지지 않을 곳이면 더 좋을 거다.”

아아, 확실히. 강이신의 끝이 필요하긴 하겠지. 고마운 배려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GPS를 챙겼다.

금 박사가 내게 물었다.

“하나만 묻자.”

“뭔데요?”

“넌 그 좋은 능력으로 뭘 할 생각이냐?”

미래를 안다는 좋은 능력. 그 능력으로 내가 하려는 건.

“글쎄요, 이 세상이라도 한번 구해 볼까 봐요.”

내 말을 들은 금 박사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하하 웃으며 내 등을 두들겼다.

“하, 농담은! 됐다, 더는 묻지 않을 테니까 가라, 가.”

농담 아닌데.

왠지 억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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