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포터와 불의 잔> 끝
제5권에서 계속됩니다.
옮긴이의 말
현대의 성배
최인자(문학평론가)
불의 잔! 마침내 불의 잔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불의 잔을 가만히 응시한다. 불의 잔은 새로운 신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나는 신화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드디어 마법의 세계가 막을 올리는 것이다. 조앤 롤링은 '불의 잔'을 통해 온갖 모험을 즐길 수 있는 신비와 감동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은 그야말로 '현대의 성배'라고 할 수 있다. 그 속에는 빛과 어둠이 골고루 스며들어 있다. 가뭄이 심할수록 한 모금의 물이 더욱 소중한 것처럼, 해리 포터는 복잡하게 얽힌 운명의 미로를 헤쳐 나가면서 용기와 지혜의 물줄기로 애타는 듯한 갈증을 시원하게 적신다.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풀 한 포기, 벌레 한 마리조차도 무심코 지나갈 수 없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후반부로 갈 수록 그 의미가 증폭되면서 거미줄처럼 촘촘한 의미망을 형성한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이른바 '동화'라는 장르의 특성으로 인해 문학성에 대한 시비 또한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과연 해리 포터를 진정한 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는가?
조앤 롤링은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다. 조앤 롤링은 영국에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출판문학상 중에 하나인 위트브레드 상을 놓고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셔머스 히니와 경합을 벌인 끝에 안타깝게도 간발의 차로 수상을 놓쳤지만, 아마도 제 4권이 미리 출간되었다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이것은 해리 포터 시리즈가 <톰 소여의 모험>이나 <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영원한 명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분명한 반증이다.
조앤 롤링은 마크 트웨인이나 키플링처럼 전형의 창조와 묘사, 치밀하고 황홀한 구성을 바탕으로 작품의 환상적인 구조를 지탱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조앤 롤링의 손끝에서 현대 문학사가 다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해리 포터는 그야말로 현대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다.
해리 포터 시리즈 중에서 가장 뛰어난 문학성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은 마치 시계의 초침처럼 정확하고 완벽한 작품이다. 지금까지 출간되었던 작품들이 스토리 중심의 얼개를 가지고 있었다면, 제 4권은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성격을 불어넣으면서 그 형식과 내용을 더욱 확장시킨다.
"전편들에 비해 분량이 거의 두 배나 되고 가장 쓰기 힘들었던 작품"이라는 조앤 롤링의 고백대로, 이 책은 '깊이'와 '넓이'를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고민한 저자의 흔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만만찮은 분량으로 인해 모두 네 권으로 출간된 <해리포터와 불의 잔>은 (처음에 우리는 이 책을 집어 드는 순간, 일반 소설을 압도하는 그 엄청난 분량으로 인해 질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기는 동안 독자들은 순식간에 호그와트의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두 가지 상반된 갈등으로 인해 몹시 고민하게 될 것이다. 먼저 이 책이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싶어서 빨리 속독을 하고 싶은 욕망과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늦추기 위해 천천히 정독하고 싶은 욕망이 서로 엇갈릴 것이다. 이보다 더 행복한 고민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런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다. 조앤 롤링은 이미 절묘하게 완급을 조절할 수 있도록 사건들을 적절히 안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해리 포터 제 5권은 도대체 언제 나올 것인가?) 처음에는 다소 지루하게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외적인 흥미에 치중하던 조앤 롤링의 작품 세계가 내적인 흐름으로 이어지면서 등장인물의 성격이 너무나 섬세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해리 포터 매니아라면 해리와 론, 헤르미온느의 개성과 거미줄처럼 깔린 복선을 느긋한 마음으로 음미하면서 그 재미와 깊이에 더욱 몰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얽힌 실타래가 한꺼번에 풀려 나가는 가슴 떨리는 재미와 감동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모두 7권으로 예정되어 있다. 이 시리즈의 반환점을 이루고 있는 '불의 잔'은 전체 작품의 방향과 형태를 잡아 주는 매우 중요한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불의 잔'은 빛과 어둠의 세계를 동시에 담아 내고 있다. 확고한 규범과 질서를 가지고 있는 '밝은' 호그와트와, 위험과 무질서가 지배하는 '어두운' 리들 하우스가 한꺼번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해리 포터는 빛과 어둠의 세계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해리 포터를 읽으면서 빛과 어둠의 양면성을 동시에 체험할 수 있다.
개학이 되어서 다시 호그와트로 돌아간 해리는 덤블도어로부터 올해에는 퀴디치 게임이 열리지 않는 대신에 트리위저드 시합을 개최하게 되었다는 뜻밖의 소식을 듣는다. 세 차례에 걸쳐서 진행되는 트리위저드 시합은 챔피언들의 용기와 미덕 그리고 지혜를 시험하는 무대이다. 해리는 헝가리의 혼테일과 싸우면서 용기를 익히고 인어들에게 사로잡힌 인질을 구출하면서 미덕을 쌓는다. 마지막으로 우승컵을 지키는 스핑크스와 지혜의 대결을 벌인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해리 포터와 불의 잔>은 마지막 4권으로 오면서, 마치 양파의 껍질을 벗기듯이 모든 비밀들을 하나씩 풀어 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역자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좀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책읽기를 당부하고 싶다. 이 소설의 전반부가 늘어진다거나 전편에 비해 흥미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것은 흙 속에 파묻힌 보석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내버리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출간 즉시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고 가장 유명한 인물로 떠오를 수 있었던 해리 포터의 원동력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해리 포터가 우리의 내면 속에 깃들어 있는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작품을 쓰면서 소설 속의 주인공을 위대한 영웅으로 포장한다. 그것은 소설 속의 주인공과 작가 자신을 동일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천박한 영웅들(혹은 작가자신)은 모든 난관을 혼자의 힘으로 헤쳐 나가면서 정상에 다다른다. 결국 그런 영웅들은 우리가 도저히 접근하거나 공감할 수 없는 초월적인 존재가 된다. 그러나 해리 포터의 경우에는 전혀 다르다. 해리 포터는 위대한 마법사의 재능을 타고 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해리 포터는 친구들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온갖 역경을 헤쳐 나간다. 결국 그 '불완전함'이 해리 포터를 더욱 '완전'하게 만들면서 우리의 사랑을 듬뿍 받도록 하는 것이다. 해리 포터는 동양의 고유한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지, 덕, 체를 한몸에 아우르는 진정한 우리 시대의 영웅이다. 하지만 그 영웅은 결코 자만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해리 포터라는 한 소년의 이야기가 가질 수 있는 서사적 가치는 이러한 경로를 거치면서 초개인적이고 초시간적인 타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해리 포터는 신의 신탁을 받아서 최정상에 우뚝 선 '강요된' 영웅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공감하면서 '자연스럽게' 영웅의 길로 접어든다. 물론 그 길에는 가슴 벅찬 감동과 용기, 그리고 희망이 깔려 있다.
해리 포터의 책장을 여는 순간, 우리는 전혀 새로운 마법을 경험하게 된다. 어느 사이에 우리 모두는 또 다른 해리 포터가 되어 있는 것이다. 현대 문명을 지배하는 디지털이나 영상 매체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문자의 힘으로 우리의 마음을 빼앗아 버린 것 자체가 놀라운 마법의 힘이 아닐까!
자, 우리 모두 위태로운 갈림길에 서 있는 해리 포터의 새로운 출발을 지켜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