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 죽절산
혈교주가 다시 날뛰어주면서 어렵사리 피해 없이 혈수산을 빠져나와 요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난 돌아오자마자 도선과 독대했다.
“가서 뭔가를 본 모양이로군.”
정찰을 나갔다가 돌아오자마자 자신을 호출한 모습에서 도선 역시 뭔가를 느낀 것 같다.
“태사(太師).”
입술을 뗀 내 입에선 극존칭이 나왔다. 17회의 기억. 그 기억 속, 한때는 도선을 큰 사부라 부르며 아버지처럼 여기면서 크게 의지하던 시절도 존재했다.
도선이 인격적으로 단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한 지역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다.
다만, 지금의 도선과도 그런 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게 나로선 그에게 보낼 수 있는 최대의 예의였다.
“그 호칭으로 나를 부르는 걸 보니, 어려운 부탁을 하려는군.”
“예. 우리 예상이 맞았습니다. 아자젤이, 혹은 아자젤의 수하가 여기 와 있습니다.”
“그 말인즉, 그 요녀가 정말로 그쪽에 붙었다?”
난 고개를 짧게 저었다.
“그건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그래서 자네는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길 원하나?”
“리더로서 제가 아자젤을 잡기 위해 이 집단의 역량을 총동원할 방법이 있습니까?”
이 집단이라는 게 회귀자 집단을 의미하는 걸 모를 리 없는 도선은 침묵했다. 한참을 날 조용히 바라보던 그의 입에선 느릿하게 의문이 튀어나왔다.
“자네답지 않군. 왜 그리 급한가?”
“모릅니다.”
몰아치는 즉답에 도선은 이번에는 어울려주지 않았다.
“내가 그런 감만으로 움직여주는 것은 한 번뿐일세.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이번 사건에서 흔적을 알아내고 천천히 추격해가도 늦지 않아.”
“태사,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내게 모든 기억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 죽절산이 열렸던 적은 없으리란 걸 압니다.”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저 이것 역시 ‘단 하나의 올바른 길’을 위한 경험일 뿐이야. 우리는···.”
그래. 잘 알고 있다. 저게 몇 번일지 모를 그 수많은 회귀 속, 가장 중요시되는 대전제라는 것쯤, 아주 잘 알고 있다.
“압니다. 천천히 기억의 조각을 모아서 ‘완벽한 그림’을 만들자는 것. 그게 두 번째 기억의 그자가 정하고 끊임없이 우리가 이어온 의지겠죠. 그 과정에서 지도자인 우리는 항상 흔들리지 말아야 했었죠.”
도선은 보수적인 사람이다. 누구보다 그 대원칙에 공감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내가 그의 말을 끊고 속사포처럼 내뱉자 도선의 입은 굳게 다물렸다.
“도선, 당신이 움직여주시지 않는다면, 전 의심이 가는 교주를 통해서라도 시도할 겁니다.”
“자네는···.”
기묘한 것을 본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을 흐리는 도선을 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특이점이로군. 대략 십수 번에 한 번쯤은 ‘그런’ 묘한 자네가 나오곤 하지.”
“다른 내가 어땠는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게 그런 권한이 있는가 없는가죠.”
“물론, 대부분의 집단이 그렇듯 지도자에게 그런 권한은 있네. 전시태세와 총동원령이 있지.”
“그 권한과 제한을 설명해주십시오.”
“총동원령은 오직 한 번만 내릴 수 있어. 그 명령이 내려지는 순간, 전 세계에 퍼진 우리 전원이 현재 자네가 있는 장소로 모일 걸세.”
무슨 명령인지 알겠다. 이건 회귀 집단의 모습을 드러내고 대전쟁 이후 체제로 넘어가겠다는 선언이다.
“하고 있는 건 전부 버리든 합치든 하는 거겠군요.”
애초에 다 한가락 하는 이들이 모인 것이 이 회귀자 집단이다.
내 특이점에 의해 회귀하니만큼 나를 어느 정도 존중하고 내게 권한을 주는 건 인정하지만, 그 연결이 느슨할 건 예상했던 일이다.
“그러네. 하나의 집단으로서 모습을 드러낸 이상,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국가나 세계 기구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초거대집단이 전 세계에 관측되는 셈이다. 당연히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그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가 없다.
“결정은 자네 몫이네만, 자네 두 번째 기억상 한때 스승이었던 자로서 조언 차 묻고 싶군. 지금의 자네는 집단을 이끌 준비가 되었는가?”
“그럴 리 없겠죠. 그렇다면 다른 하나를 확인해봐야겠군요. 전시태세 명령은 뭡니까?”
“지역 소집령이네.”
뉘앙스만으로도 총동원보다는 급이 낮아 보이긴 했다.
“각 지역에는 최소 두 명의 회귀자가 자리 잡고 있지. 한국과 일본은 규모에 비해선 좀 특이점이 있어 극동으로 지정해서 셋. 인도에도 셋이 있고 중국은 다섯이 할당이었네만, 지금은 겨우 셋 뿐이긴 하군.”
“동아시아에도 접근해온 시후나 엔도. 그리고 당신을 제외하고도 제가 모르는 숨겨진 인원이 더 있군요.”
“뭐, 그렇네. 여하튼···, 그런 중요도에 따라 인원을 분배해두지. 다만, 총동원령이 내려지기 전까진 자네도 그들이 누군지 알 권리는 없네. 그쯤까지 도달하지 않는 한, 자네도 아직 모두를 이끌 만큼 완전하진 않으니까.”
“그런데 그렇다면 이리 접촉을 해온 것은···.”
“스스로 접촉하는 건 자유야. 뭐, 총동원은 애초에 할 수도 없네만. 그건 자네가 최소 다섯 번째를 열어야 내릴 수 있는 권한이니까.”
다섯 번째라고 콕 찝어 말한 걸 보면, 총동원령을 내리려면 뭔가 기억 속에 알아야 하는 내용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자네에겐 그간 두 번째를 여는 게 몹시 중요하다고 앞서 동료들이 말해왔을 텐데···.”
그 말에서 두 번째를 여는 게 지역 소집령의 최소 조건이라는 것도 알겠다. 나는 이 두 번째를 연다는 게 왜 그리 중요한지 알았다.
‘아, 그래선가. 두 번째를 열더라도 내 전투력은 아슬아슬하게 특급 한 명에 불과한 수준이야. 그런데도 다들 왜 두 번째를 그리 강조해왔는지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이 권한이 열리는 것 때문이다. 즉, 메이링이 처음 만나서 말한 두 번째조차 열지 않았다면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던 이유 역시도 지금 대화에서 나온 셈이다.
다들 한 지역의 거대 집단의 수장이고 다들 특급 한 명 정도는 좀만 신경을 써도 움직일 수 있다. 혹은, 아예 그에 비견하는 힘을 가지거나 가질 이들이었다.
그런 수준인 동료에게 내가 큰 도움이 되려면 유사시에 주변 지역에 내가 그곳에 있을 때, 자기 쪽 일을 강제로 도와주게 할 정도의 권한이 있어야 했던 거다.
“물론, 누가 있는지 궁금합니다만 그게 당장 중요한 건 아닙니다. 여기서 제가 명령을 내리면 주변 지역에서 인원을 차출하는 겁니까?”
“현재 자네가 위치한 곳과 그 직접 인접한 지역에 해당해 각 지역장이 선택해서 즉각 한 명을 보내지. 또한, 전달받은 소집 사유의 경중에 따라 휘하 형성해둔 전력을 보내는 것 또한 각 지역장의 판단에 따르네.”
“잠깐, 그렇다면 중국 지역장은···.”
“나지. 항상 나였다네. 자네의 그 명령 역시 난 지금 시점에선 거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그 말대로다. 이미 도선 본인이 나를 따라와 있었다. 그가 자신이 온 것을 끝으로 전력을 차출 해주지 않겠다고 한다면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제가 도선 당신과 지금 끌고 갈 수 있는 전력만 데리고 특공을 펼친다 해도?”
“정말 그럴 생각인가? 물론, 그 경우 내겐 거부할 권한은 없네만···.”
난 눈앞 노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담담하게 내뱉었다.
“합니다.”
“······.”
“이건 최악의 경우겠지만, 설령 당신을 희생하는 한이 있어도 나는 저 길을 뚫고 제육천마왕이 준비한 안배라는 것이 뭔지 봐야겠습니다.”
마라 파피야스를 부르는 별칭, 제육천마왕의 이름이 나오자 도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혹, 설마 그 사악한 신좌가 자네를 꾀던가?”
그 말에 나는 기억 속 도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마라 파피야스 같은 악신과 도선이 안 맞는 건 당연하다.
“나는 불확실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이 내게 해줬던 말이죠. 그런데 이번의 저는 그런 불확실한 것에 걸어보는 타입인 것 같군요.”
“솔직하게 말하지. 난 지금의 자네가 너무 낯설어. 쉰 번이 넘는 여정에서조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성향이야. 그 두 번째를 여는 약간의 시차가 이렇게 큰 것이던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난 두 번째를 빨리 열었다면 동해안 사태에 그리 깊숙하게 개입하지 않았을 것임을 알았다. 설악산에 오른 건 되짚어보면 만용이었다.
‘그랬다면 트라바슈르를 만나는 일도 없었을 거다. 그래. 그게 결정적이었겠어.’
그런 식으로 설악산과 동해안을 넘기고 한국에서 여유를 가지고선 계획을 세워갔다면, 아마 내 가치관도 달랐을 확률이 높다.
“숨길 일도 아니니 말하죠. 마라 파피야스는 그 어떤 유혹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준비는 이것으로 비로소 처음 완성되었으며, 선택은 멍청한 내 몫이라 했죠.”
“······.”
“도선, 어쩌면 우리가 여태 쭉 잘못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회차가 특이점이라면 그것 때문이겠죠. 한반도의 동해에서 나가의 왕이 내게 말했습니다.”
트라바슈르와 이 시기에 만난 것은 분명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나가의 왕? 환상향의 트라바슈르를 말하는 것인가?”
나는 그 반응에서 우리가 환상향에서 어떤 계기로 어린 트라바슈르를 만났음을 알았고 동시에 성장한 트라바슈르와는 단 한 번도 만났던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가, 이번 자네 개입 때문에 그자가 살아난 게로군. 그가 뭐라던가?”
“신들에겐 자신만의 의도가 있으며, 신의 의지를 인간에게 맞추게 하는 것이 인간의 몫이라고 했죠. 물론, 그는 나가를 통해 표현했지만, 그게 제게 건네는 조언이었다는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도선이라면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거로 생각한다.
“즉, 그건 신들이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예.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걸 했습니다. 신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배척하고 우리만의 길을 만들어간 것. 그 자체가 우리의 오만이며, 또한 오판이었던 것이죠.”
도선은 내 말이 뜻하는 바를 알곤 약간 충격을 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번 회차가 진정 특이점이라 느껴질 정도로 크게 틀어졌다면. 그렇다면 그건 처음으로 우리의 행보가 저 하늘에 빛나는 별들의 의지와 일치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그렇기에 몇 번인지 모를 그 수많은 내가 실패한 길을 그대로 따라가서 실패하는 건, 이번 회차의 내가 내리고 싶은 결론이 아닙니다. 도선, 츠바사는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나’는 항상 마지막이었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도선을 향해 내가 담담하게 결론을 내뱉었다.
“그래서 나는 해봐야겠습니다.”
“자네가 가는 그 한 번이 수많은 실패를 타산지석으로 삼은 우리의 길보다 우월하다 자신하나?”
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건 해보기 전까진 모르는 것이다.
“도선, 이 도전이 두렵다면 그저 물러나시면 됩니다. 당신도 나도 신념에 이 한 인생을 바친 외골수 아닙니까. 그저 당신은 메이링을 지정해 빠지고 다음번의 ‘나’와 함께하면 됩니다.”
“자네가 죽어버리면 어차피 이번 회차가 마지막이야. 그게 무슨 소용인가?”
“태사. 내가 그렇게 쉽게 죽을 것 같습니까?”
나는 그저 웃었다. 엔도 츠바사가 일흔 번을 넘게 살아남았다면, 나 역시 그를 그만큼 회귀시킬 동안은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소리다.
그런 내가 하는 말이니 도선 역시 차마 쉽사리 부정하진 못하리라.
“설령 가서 아자젤에게 전부 던져주고 오더라도 이 질긴 목숨 하나만큼은 반드시 건져 나오겠다고 약속하죠. 당신이 더 할 의지가 있다면, 내가 반드시 당신을 다음 회차로 보내겠습니다.”
“못 당하겠어. 그래. 자네는 항상 그랬지. 이번 설득은 평소의 자네 같지는 않았네만, 두 번이나 마음이 따르는 걸 보니 운명이 우리에게 뭔가를 보여주려는 것인지 나도 좀 궁금해지려 하네.”
“그 말씀은···.”
“무림맹에는 총동원령을 내리겠네. 장악력이 온전치 않긴 하네만, 자리를 건다면 한 번쯤은 가능하겠지. 다만, 천축과 호주 그리고 극동에서 지원이 날아오려면 못해도 사흘 정도는 시간이 필요할 게야.”
작전 시행은 사흘 뒤. 우선, 충징에 집결 뒤에 우리가 지어둔 요새를 경유해서 혈수산으로 진격한다.
아자젤을 최우선으로 처리하되 일이 잘 풀리면 죽절산까지 그대로 밀어버리는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