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헌터의 성좌투자법-127화 (113/128)

11장 - 죽절산

혈교주 리 셴, 17회차를 거친 두 번째 기억을 얻었음에도 이리 직접 대면하게 된 적은 없었다.

“용건이 있다면 빨리 말해라. 반 각 후에는 다시 튀어 나가야 하니까.”

저 상태로 반각만에 다시 튀어나간다는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을 삼켜야 했다.

“여기서 버티고 있는 건 천살성 때문입니까?”

“호오? 네가 그놈인가? 이리 비리비리하게 생긴 놈이 중요 인물이라니 의외인데.”

일반적으로 알 수 없는 사실을 말했음에도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예상대로 뭔가 있다.

“배후성이 뭔가 언질을 줬습니까?”

“난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랑은 대화하지 않아. 넌 첫인상부터 불합격인데, 내 시험을 받아볼 테냐?”

다짜고짜 기세를 흘리는데 순간 미친놈인가 했다. 한 집단을 이끄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파격적인 행보다.

“···지금 상황에서?”

내 반문에 혈교주는 떫은 표정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취소다. 넌 자격이 없으니 그냥 전언만 듣고 가라.”

“미ㅊ···.”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려던 ‘미친놈인가?’라는 말은 내뱉어지기도 전에 막혔다.

조금 전 온종일 날뛴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무지막지한 살기와 마력의 압박이 뿜어지며 나를 압박한다.

건물이 유형화된 마력에 흔들리며 진동할 지경, 직감적으로 여기서 입을 잘못 날리면 죽으리란 걸 깨달았다.

“나는 재는 놈하곤 논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나와 대화하고 싶다면 나를 꺾던지, 내가 인정할만한 업적을 증명해야 할 거다.”

“······.”

내가 침묵하자 그제야 표정을 푼 리 셴이 아마도 마라 파피야스일, 배후성의 전언을 내게 전했다.

“우리 천마왕 누님께서 말씀하시길, 이쪽은 준비되었다. 멍청한 놈! 이건 겁쟁이처럼 순리를 걷고자 하면 절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셨다.”

“전언은 그게 전부입니까?”

“그래. 이제 내 성에서 꺼져라.”

논의하거나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였지만, 뭔가를 더 말하는 순간 저 기이한 검이 내 목을 향할 것이 분명해 보였기에 난 가볍게 묵례를 해 보이곤 그 방을 떠났다.

* * *

[오딘 / 태백금성]

이쪽은 때아닌 묘한 기싸움이 한창이었다.

죽림 속, 바둑판 앞에 앉은 오딘은 제 옆에 놓인 흑돌을 힐끔 본 뒤, 족히 한 시간을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눈만 감고 있었다.

태백금성은 쓴웃음을 짓곤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초대한 것은 자신이니만큼, 이쪽에서 먼저 분위기를 풀어야 할 것 같아서다.

“생각이 많으시구려. 이 바둑은 그냥 분위기를 풀고자 제안한 것이니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태백금성의 그 말이 끝나기 직전, 오딘은 바둑돌을 하나 잡더니 강렬한 기세로 착점했다.

“흐음···.”

“너희 동방 신들의 페이스에 놀아날 생각은 없다. 조언과 조율을 논하기에 오긴 했다만, 우리 신화는 독자적으로 움직일 것이다. 그리고 이게 네 초대에 대한 내 답이다.”

“그래. 천원이구려. 혹시나 해서 묻소만, 그 의미는 알고 두신 게요?”

바둑에서 천원을 둔다는 건 파격이다. 또한, 바둑적인 수의 관점에서 본다면 혼란과 난전을 꾀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네놈들은 대체 날 뭐로 보는 거냐? 천 년을 내리 쉰 셈이다. 저 인세의 놀이 중 안 해본 게 있을 것 같나?”

“그렇구려. 그렇다면 말씀하고 오셨겠군.”

태백금성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후, 돌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떼어 자세를 정갈하게 고쳐잡았다.

“그래. 그대는 어디까지 보셨소?”

“실패하는 7천 927만 6251의 미래. 성공하는 137만 1028의 미래.”

“과연 한 신화의 최고신이라 할 만한 시야임이 틀림없소. 내가 본 것과는 약간 차이가 있소만, 대동소이하군.”

“허나···.”

““순리를 걷고자 하면 전부 실패할 것이다.””

그들이 동시에 내뱉은 것은 직전 마라 파피야스가 유성에게 전한 것과 같았다.

“그 하계의 마지막 영웅은 결정적인 것을 착각하고 있다.”

“그렇지요. 무작정 유산을 남겨가며 재시행을 돌린다고 능사는 아니니까.”

“결과를 정해두고 시뮬레이팅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시행 조건을 그리 잡고 시험을 돌리는데 어찌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겠나? 신념이라는 것이 더 악질적이다.”

“허허, 그 점에 있어선 의견이 일치하니 다행이구려.”

태백금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에 놓인 바둑판의 표면이 깎이며 지구 전도의 형태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위로 인간을 깎은 몹시 정교한 형상의 나무 조각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선다. 그 조각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 참 많이도 모았군.”

나무 인형은 전부, 유성과 그 회귀 집단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시행 횟수도 이제 백만 단위를 넘어가는데, 그간 그 많은 것들 중 찢고 찢어 선별하고 다듬은 기억들로 이 정도는 해내야지요.”

“반대로 말하면, 이만큼 모이고서야 비로소 확실한 성공을 논해볼 만한 때가 됐다는 말이기도 하지.”

태백금성도 점을 치며 세계의 흐름에 난 균열을 쫓다가 그것을 처음 깨달았을 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괴이가 다중차원에 참으로 재밌는 씨앗을 뿌렸소이다.”

“혼자서 이 별의 신앙을 그만큼 처먹었으면서 그 정도조차 하지 않고 내뺐다면 다 같이 반발이라도 해야해.”

“되겠소이까? 나머지가 다 합쳐도 못 이길게요.”

“끙···.”

말은 호기롭게 했으나 오딘 역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 사이 네 개의 적색 나무 인형이 각지에 흩어져 섰고 커다란 나무 조각상 하나가 귀주와 인도 지역 사이에 자리 잡았다.

“첫 번째 기수는 높은 확률로 이 언저리에 있을 것이오. 그리 판을 짜놨소이다. 우리 측 제육천마왕은 매번 같은 준비를 해뒀으니, 유도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지.”

“넷이라, 그쪽도 꽤 파악한 모양이군.”

오딘이 손가락을 가리키자 북미와 북유럽에 각각 하나의 붉은말이 더 생겼다. 뿌려진 그 작은 말들은 전부 거짓 예언자를 의미했다.

“그는 동료를 장기 말로 여길 필요가 있소이다.”

“그렇다. 희생 없는 승리를 논하는 것 자체가 우습지. 가능성이 상당하다고 해도 실패에 비해선 현저히 낮다. 흐름에 올라타고 조금씩 뒤트는 것으로 모두를 끝까지 데리고 가려 해? 광대놀음이 따로 없도다.”

백만 단위를 넘어가는 시행, 그러나 그 모든 유성은 항상 자신과 함께하는 동료 전부를 끝까지 함께 끌고 가는 길을 택하려고 했다.

“그걸 보던 중동의 옛 신이 도중에 재밌는 짓을 했던 걸로 보입니다.”

“적성 예언자 하나를 그놈에게 붙인 것 말인가? 변수를 만들기에는 그만한 게 없긴 했지.”

“그걸 모를 수가 없지요. 그 주변에 아직도 흔적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그 대상 여신이 이슈타르였나? 거짓 예언자를 옛 신화 여신의 화신으로서 취급하도록 수를 쓴 것으로 보인다.”

“그랬지요. 그 신화의 마스터 테리온의 기수라는 것이, 실상 대적자였던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그 신좌에 가깝다는 건 당연하니···.”

“성좌의 화신이 그런 장기말로서 각성할 수는 없지. 따라서 자신이 새겨뒀던 혼에 새긴 그 징표를 그대로 가져간다면 이번에도 엔키는 신물을 내줄 것이다.”

이들이 언급한 대로 메이링을 유성에게 붙인 건 엔키의 솜씨였다. 태백금성은 중국 쪽 커다란 조각 하나를 가리킨 뒤, 몇몇 작은 조각들을 가리켰다.

그 조각들은 전부 아자젤로 추정되는 첫 기수를 포위하듯 둘러싼 뒤, 그것을 끌고 함께 퇴장했다.

“이게 내가 그리는 그림이오. 이는 끝에서부터 뒤집어야 하지. 과도한 뒤틀림이 아니라면, 기수는 움직이지 않을 터. 그래선 늦지.”

“나 역시 이견은 없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적 지휘관을 빠르게 치우는 것이 우선이다.”

수많은 회귀 속, 유성 일행이 첫 번째 기수를 대전쟁 전에 치운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대개는 때가 되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을 포착해 그간 모아온 힘을 퍼부어 섬멸한 수준이었을 뿐, 이쪽에서 초기에 함정을 파고 잡아낸 적은 없다.

즉, 그저 여러 경우를 참작해 이런 곳에 나타났으니 그 모든 곳에 집중적으로 시야를 두고 있으면 얻어걸리겠지. 그런 식으로 운에 따랐다는 뜻이다.

기존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으론 적 지휘관은 움직이지 않는다. 유성이 흐름을 따라 안전하게 가고자 하는 것처럼 그건 아자젤도 마찬가지다.

아자젤이 가장 두려워할 만한 사안은 하나다.

‘유성, 그건 예정된 일정보다 압도적으로 빠른 해결뿐이오.’

아자젤에게 있어서 시간을 버틴 후, 사타니엘과의 합류는 가장 확실한 승리의 길이다.

그러나 사타니엘이 나오는 순간에 그 주변에 어떤 전쟁도 없을 정도로 혼란을 일으킬 여지가 전부 사라진다면?

그래선 아자젤이 합류해봐야 둘이 같이 죽는다는 결말뿐이다.

‘그것이 적 지휘관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지. 그러나 그때의 그대는 내 제안을 끝까지 거부했겠지.’

그렇다면 이쪽도 자기 생각과 신념에 따라 강제로 유도하여, 할 일을 할 뿐이다.

‘돕기로 했으나, 어떻게 돕는지는 내 자유이니.’

이번에 아자젤을 잡지 못해도 상관없다.

이제 유성이 가는 곳을 따라 태백금성은 바로 열 수 있는 댐을 전부 터뜨릴 것이다.

당장 인프라가 박살이 나거나 혼란에 빠지고 예언자들도 이때다 싶어 날뛰기 시작하겠지만, 아자젤만 끌어내 일찍 잡을 수 있다면 인간 측도 성좌들이 준비한 성장을 위한 시련을 안정적으로 치를 수 있다.

“여태 그가 모아온 동료, 그건 시간의 격차를 메우기 위한 도구로 써야 하지요.”

“이 싸움은 열쇠가 되는 성좌들을 설득해 적극적 개입을 유도하지 않는다면 승리할 수 없다. 그런데 자원을 계약조차 않는 그런 놈들을 중심으로 투자? 정신 나간 인간 애호가 놈들이 아니고서야 대체 누가 돕겠느냔 말이다.”

그 말대로다. 이 싸움은 그 근본이 성좌와 신화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과 계약조차 하지 않았거나, 했더라도 그들을 위해 싸우지 않는 회귀자라는 것들이 준비된 것을 차지하곤 중심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걸 성좌 중에 그 누가 반기겠는가?

저 회귀자들 중 유성만이 진짜 회귀자가 아니라는 건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회귀자들의 적절한 쓰임이란, 필시 때가 왔을 때 희생으로 운명을 뒤트는 것. 그들은 그리 생각했다.

그것이 개입할 의지를 갖춘 이 두 명의 최고위 신좌가 그 흐름을 읽어내자마자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게 공통의 의견으로 대화의 물꼬가 터지고 두 신좌는 정보를 교환하며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그럼 구라파를 부탁하겠소이다.”

“그 나머지 전부를? 자네 혼자서 되겠나?”

“반대로 묻지요. 그대의 역량이 미리견까지 닿겠소이까? 맘 같아서는 맡기고 싶으나 그냥 버려두자고 할 생각이었소이다. 본도의 격이 그대에 비해선 밀리나, 집단의 힘은 더 크니 구대륙 대부분은 감당할 수 있소.”

“흠···. 나도 자신은 없네만, 제대로 하기로 했으니 어떻게든 해봐야겠지.”

“알겠소이다. 그러면 그쪽도 맡기지요.”

태백금성과의 꽤 유익했던 만남을 파하고 제 영역으로 돌아가던 오딘은 뭔가를 떠올리며 인상을 살짝 구겼다.

“동방 신화의 책사여. 연이 없는 그대는 그 미래를 볼 수 없었겠지만, 이번 회차에 그놈이 전부는 아니어도 원하는 것에 가까운 결말을 보는 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사실 그 이후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그편이 승산이 더 높긴 했다.

그러나 오딘 자신이 그렇게 둘 생각이 없었다. 그 어떤 가문의 가장이 제 피를 이은 혈육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반기겠는가?

그날, 그 둘 앞에서 내뱉은 건 그걸 의식한 경고이자 그리 가지 않기 위해 살짝 뒤틀어 놓은 예언이었다.

* * *

“우리는 한 시간 뒤, 복귀합니다.”

혈교주와 헤어진 난 곧장 함게 온 이들을 호출해 불러모았다. 다들 혈교에서 내준 방에서 슬슬 쉬려다가 불려나온지라 표정이 좋지 않다.

“곧 해가 지는데?”

“우리라고 시야가 줄어들지 않는 건 아닌데요. 위험하지 않겠어요?”

“정확히 한 시간 뒤, 혈교주가 다시 날뛸 겁니다.”

“···그건 또 자살지망자인가?”

“놀랍게도 고립된 뒤로 쭉 여태 쉬지도 않고 저러고 있다는 것 같더군요.”

그 말에 모두가 기가 질린 표정을 했다.

“명준이 놈도 그 정돈 아니었을 건데.”

“여기 대총관을 따라다니며 닦달해서 들어보니까 고위 괴수를 피해 가며 잡괴수만 갈아버리고 있는 것 같더군요. 킬 카운트 따위로 기력을 회복하는 특성을 갖췄거나 빌드를 탔다면 아예 불가능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전 돌아가면 바로 끌어올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이끌고 여기로 돌아올 생각입니다.”

“김유성, 그거 왠지 네가 아까 말했던 그 구출작전이 아닌 것 같은데?”

“조금 전, 혈교주와 대화를 나눠보고 확신한 게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침묵하자 이번엔 블랙마저 미간을 구겼다.

“그 내용은 또 말할 수 없고?”

내가 짧게 고개만 끄덕이자 주변 반응이 별로 좋진 않다. 아마도 이들의 도움은 거의 받을 수 없겠지.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마라 파피야스가 전하라 했던 ’이쪽 준비는 다 끝났다‘는 말은 그 신좌가 모든 걸 알고 있으며, 시간 내로 혈교주가 천살성 조건을 만족할 거란 뜻이다.

’뭔가 이 끈을 놓치면 후회할 거란 예감이 든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누군가 거대한 큰 톱니바퀴를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나는 그게 내게 아주 유리한 것이라는 걸 직감뿐 아니라, 여태까지의 흐름을 통해서도 느끼고 있었다.

분명, 운과 감에 맡기는 무리한 행동이다. 이건 단순하게 표현하면 회귀 패밀리의 역량을 올인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난 알 수 있어. 분명히 이게 정답이다.’

내겐 배후 성좌조차 없는데 이 감이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몰랐으나, 나는 아주 천천히 그것을 깨달아갔다.

그래. 이 예감은 지금의 내가 알아챈 것이 아니다.

열일곱 번을 싸운 끝에 끝내 절망하고 쓰러져있던 기억 속의 내가 어느새 꼿꼿하게 일어선 채, 저 앞쪽에서 환영처럼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