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헌터의 성좌투자법-125화 (111/128)

11장 - 죽절산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인 게 금방 드러났다.

거리를 좁혀오는 녹색 이무기는 일견 살아있는 생명체 같지만, 저게 소환수도 아니고 그럴 리는 없다.

그저 독액으로 이뤄진 골렘일 뿐.

‘그저 혼합 빌드를 탄 정도라고 판단한 건가?’

어떻게든 상식적으로 판단하려고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노력이 가상하다. 높은 잠재력을 가지고 다중 빌드를 탄 정신 나간 놈 정도로 생각하는 게 보인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주문 계열은 오직 바람 하나라 보고 액화를 택했다면, 그 판단의 근거는 훌륭했다.

독무는 바람을 통제해 날려버릴 수 있지만, 액체형 골렘을 일으키면 풍계 주문은 상성 상 대응하기 힘드니까.

하지만 터무니없는 착각이다.

기억 속에서 모든 주문계 빌드를 탔던 경험이 전해진 건 아니었지만 사용했던, 그래서 쓸 수 있는 주문의 종류는 많았다.

“빙뢰식 - 천공의 추.”

극초반 회차를 제외하곤 회귀 기간의 대부분을 동료로 함께했던 최서린의 주력기다.

워낙 깔끔하게 검증된 빌드였던 만큼 최서린이 회귀를 포기한 뒤로 직접 빌드를 타서 익혔었는지 사용법이나 마력 운용법 따위가 전부 머릿속에 있었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수정 십수개가 푸른 서릿빛 꼬리를 그리며 전방 하늘로 날아오르고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자 싸늘한 냉기가 내려앉으며 공기를 얼리기 시작한다.

천공의 추로 자신 전방에 필드를 만들고 강화된 냉기 주문을 초고속으로 퍼붓는 게 최서린이 최종적으로 정립하게 되는 전투방식이다.

이 정도 빌드를 별다른 이론적 지식조차 없이 직접 만들어낸 걸 보면 최서린도 센스 하나는 천부적이다.

허공에 수백의 얼음화살이 형성되어 날아가고 지면을 타고 두더지처럼 얼음 길이 형성되다가 일순간 적에게 금접하는 순간 뚫고 올라간다.

접근하는 속도가 확연하게 줄어든 것이 느껴진다. 지그재그로 움직여가며 공격을 피하고 독 폭탄을 날려 허공에서 어떻게든 격추하려는 노력이 눈물겹다.

보통의 속성 공격 같으면 자체 기술의 위력이나 자신의 보강 능력을 믿고 달려들었겠지만, 수계 기술로 냉기 기술을 맞받아치는 건 아무리 격이 높은 기술이라 해도 기술의 통제력이 약해지는 걸 피할 수 없다.

‘자, 그걸 쓰기엔 늦을 텐데? 어떻게 대응할 거냐?’

내가 바이퍼가 달려들 때 걱정했던 건 하나다.

저 여자의 상징과도 같은 기술이 하나 있다.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고 사용하는 독 계열 최종기 중 최고 위험도를 자랑하는 기술, 독인을 쓰고 덤벼들었다면 나도 죽을 각오를 해야 했을 거다.

하지만 파트너라고 해도 코브라를 위해 목숨을 걸어줄 정도는 아니었는지, 바이퍼는 할 수 있는 최고가 아닌 현 상황에서 판단하기에 ‘최선’을 선택해 달려들었고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을 것이다.

바이퍼는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빙계 주문을 한 차례 강력하게 마력을 격발해 뿜어내며 막아내더니, 잠깐 번 여유시간을 활용해 독 골렘에 술식을 추가했다.

‘저건···.’

그 주문에 따라 붉게 달아오른 이무기가 본격적으로 자신에게 날아드는 빙탄들을 피하지 않고 맞받아치기 시작했다. 그에 내 표정에는 약간 의문이 떠올랐다.

‘왜 달려들지 않지?’

저 술식은 독에 양기를 더해 발산하는 자괴에 가까운 보조 주문이다.

저런 짓을 해서 냉기를 쳐내면 움직임이 느려지거나 하진 않겠지만, 냉기에 대항할 만큼 열기를 뿜어내는 터라 독액이 계속 증발한다.

바이퍼는 착잡한 표정으로 코브라 방향을 한 차례 보더니 이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내게 대화를 걸어왔다.

“넌 뭐지? 너 같은 놈은 들어본 적도 없어. 지금 확인한 빌드만 다섯.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건가?”

“내가 네게 그걸 알려줘야 할 이유가 있나?”

“뭐, 그렇겠지. 뭔지 짐작이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리 답한 바이퍼는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더니 손휘슬을 불었다.

그 신호에 몇몇이 코브라 방향을 바라보며 잠깐 주저하는 듯도 했으나 이내 강한 기술을 펼쳐 상대하던 각성자를 밀어내더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또 보자.”

“동료를 버리고 가는 건가?”

“동료? 우리에게 그런 게 있다고 생각해?”

“···도망칠 수 있을 거로 생각하나?”

깔끔하게 포기하고 빠져나가려는 기색에 가능하면 여기서 둘 다 잡고 싶던 난 도발을 걸었다.

“하? 네 실력으로?”

“그런 녀석에게 밀리고선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정말 내가 밀린 것인진 너 자신에게 물어보지그래?”

조금 전의 격돌을 마지막으로 다 파악이 끝났다는 듯, 침착한 표정으로 받아친 바이퍼는 그대로 독 이무기의 기수를 돌리더니 부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전장을 빠져나갔다.

사실 그 말대로다. 내가 잠시 우위를 잡았다고 하지만 도망치는 걸 붙잡을 정도는 아니다. 승리를 장담했던 것도 은신 기술의 의외성을 생각했던 것.

‘다 받아칠 순 있지만, 이길 순 없나.’

작정하고 달아나게 되면 은신 능력은 쓸 데가 없다.

블랙이 멀쩡했다면 추격이라도 해보겠지만, 블랙도 저 상태로는 먼저 달아난 저걸 추격할 수 있을 정도의 속도를 가진 소환수를 뽑을 수 있을 리 없겠지.

난 주먹은 가볍게 쥐었다 폈다. 그랬다.

아무리 경험이 쌓여도 이런 한계가 있었다.

기본 재능이 B+에 불과했던 나는 기술 습득에 들어가는 모든 재능 점수를 빌드에 돌리고 특화 빌드를 짜더라도 특급 초중반이 한계였다.

그래도 이번 전투로 기억과 실전감각의 괴리는 어느 정도 좁힌 것 같다.

붉은달의 빌런들이 전장에서 모두 빠져나갈 때쯤, 저쪽도 결말이 난 것 같다. 거대한 크레이터 한가운데엔 코브라가 박살이 난 비늘과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몸이 땅에 비스듬하게 박혀 있었다.

변신형 수인 특유의 강건함으로도 버티기 힘든 압력이었는지 비늘이 다 떨어져 나가는데 그치지 않고 온몸이 가뭄이라도 온 것처럼 이리저리 갈라졌다.

내장이 전부 터졌는지 죽은 피가 흘러나오는 입속에선 내장 조각이 섞여 보이는 게 제대로 된 치료가 없다면 반드시 죽을 거다.

크레이터 아래로 천천히 걸어 내려간 블랙은 그런 코브라에게 다가가 뭐라 말을 건넸고 빌런은 피식 웃더니 푹 고개를 떨궜다.

“그쪽은?”

“아쉽게도 도망쳤습니다.”

“뭐, 그래. 그 정도는 예상 범위지. 그래도 한 놈 잡았으니 괜찮아. 나이스 어시스트였어.”

김수철도 속이 답답한지 심호흡을 하는 걸 보니 조금 전 기술로 마력 탈진이 왔다. 거기에 언뜻 보기엔 완벽하게 상대한 것 같더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귀는 어디로 갔는지 뜯겨서 한 짝이 사라져 있었고 같은 방향 팔은 어깨부터 손바닥까지 내부가 싹 터져나가서 그 원래 색이 검은 팔인 줄 알 지경이다.

“내 상태가 말이 아니라 추격은 무리일 것 같다.”

“이거 아까 공중에서···.”

“그래. 뱀 대가리 놈 감이 어찌나 좋은지 보지도 않고 후려치는데 귀랑 팔 하나씩 내줬지. 팔에 감각이 아예 안 느껴지는 걸 보니까 치료받아도 몇 주는 요양해야겠다.”

귀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테니 재생을 하려면 한참 걸릴 거다. 주변 전장은 빌런들이 빠지면서 순식간에 정리되어가는 중이다.

중간에 빌런 상대한다고 뒤로 흘리면서 요새 일부가 요괴에게 점거되는 사태가 벌어지긴 했지만, 피해가 크진 않았다. 그리고 저건 중국 군부에 보고할 때 자료로 쓰이겠지.

나머지 잔챙이 정리는 부하들에게 맡겨놨는지 김민지 본부장이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아니, 이 상태로 치료부터 안 받고 지금 뭐 해요!”

“그러네. 이수 녀석은 치료는 젬병이라 외부 지원을 부를 생각이나 하고 있었네. 깜빡했다. 그쪽 치유 계열이었지?”

그렇게 블랙이 김민지 본부장을 따라 치료소로 따라가자마자 누군가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내게 달려오는 게 느껴졌다.

“너! 너, 너너! 야! 대체 뭐야!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쓰는데!”

“아. 그러네. 그러고 보니, 최서린씨. 생각난 김에 이야기 좀 하죠.”

“어? 어! 어어, 응. 뭔데?”

최서린의 빌드 역시 회귀자가 아니라면 약간 고쳐야 할 부분이 있을 시점이다. 전투를 벌인 직후라 좀 피곤하긴 했지만, 생각난 김에 고쳐줘야겠다.

그리고 요새로 돌아가 정리해뒀던 자료를 가져다 최종 버전의 빙뢰식 빌드를 설명한 뒤, 그 자료를 넘겨주고 방에서 쫓아냈다.

자료를 꼭 품에 안고 떠밀리듯 방을 나서는 최서린의 표정이 뭔가 멍하고 묘해 보이긴 했는데, 그런 건 별로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생각할 게 많다.

‘교주가 뭔가를 알렸다면 그건 바로 지금이라 생각했는데.’

교주가 보내온 두 A급 각성자들은 금성 쪽 파티에 포함되어 김민지 본부장의 지시에 따라 착실하게 적들을 상대했다.

사실 바이퍼를 따로 무리해서 쫓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가 약간은 있었다.

아예 요새의 붕괴를 각오하고 나머지 괴물 부대를 버려둔 채 김민지 본부장과 함께 뒤를 쫓았다면 바이퍼 본인은 몰라도 빌런들은 대부분 처리할 수 있었을 거다.

이러면 뭘 노리는지 예상하기가 너무 어려워졌다.

‘도선이 근처에 대기 중이니 딱히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쯤, 머리와 팔에 붕대를 칭칭 감은 김수철이 내 방에 노크했다.

“무슨 일입니까?”

그리고 그는 바로 본론부터 말했다.

“이수 부하 아가씨 더럽게 깐깐해서 시간 없어. 우리 둘이 지난번 의논했던 혈교 본단, 혈수산 말이야.”

“지금 그 상태면 취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이대로 미루기에는 뭔가 감이 안 좋단 말이지?”

김수철의 감이라, 악운에 몹시 강한 타입인지 상황이 안 좋을 때 보면 꽤 자주 들어맞는 편이라 나로서도 그냥 경시하기는 어려웠다.

그리고 저런 감이라는 게 대개 배후 성좌가 슬쩍 밀어 넣는 경우도 많다는 걸 생각하면 그저 배제할 순 없다.

“아까 보니 마력 탈진이 온 것 같던데, 고작 하루 만에 되겠습니까?”

“삼족오 뽑아서 그냥 날아가는 정도라면야.”

“그럼 내일 갑니까?”

“그래.”

여파 수습한다고 하루 쉬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블랙 본인이 강행하고 싶은 수준이다.

“···수철 형. 지금 그 판단, 정상 아닌 것 알고 있습니까?”

“알아. 나도 머리로는 아는데, 아무래도 내 성좌가 이걸 밀어 넣는 것 같다.”

“배후성좌가 누굽니까?”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그걸 아는 게 당연하진 않았기에 질문했다. 그리고 한반도로 따지면 최고위 신좌라 할만한 존재의 이름이 언급됐다.

“해모수. 내가 그리 좋은 계약을 한 편은 아니지만, 신뢰도 하나만큼은 확실하지.”

“그 정도면 믿지 않기도 어렵겠군요.”

신좌의 움직임을 마냥 고깝게 볼 필요는 없다. 더욱이 동양 신화에 속하는 해모수라면, 지금 이 개입이 태백 금성과 연관이 있을 확률을 배제할 수가 없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삼족오 그거 최대 몇 명까지 태울 수 있습니까?”

* * *

삑삑대는 알람이 울렸다.

“아, 슬슬 때가 됐나?”

귀주성 동부 전선의 작전을 지휘하던 메이링은, 헌터 와치에 적힌 날짜와 시간을 보곤 피식 웃었다.

“남이 모르는 걸 안다는 건 이렇게 재밌는데 말이지. 유성 씨는 대체 왜 재미를 못 느끼는지 몰라?”

분명 지금 혈수산의 전황을 유성이 확인한다면, 가진 모든 전력을 데리고 몰아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거기서 직접 관전하지 못하는 게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녀의 기억이 며칠 전으로 돌아갔다.

그건 메이링으로서도 꽤 뜻밖의 방문이었다. 죽음의 기시감이나 예지 따위는 하나도 없었는데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 인간인 듯, 인간 아닌 형상을 한 신비로움을 지닌 존재.

그러나 그 탓에 대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속에 묘한 반발심을 자연스레 가지게 한다. 그게 바로 신화 속에서 등장하는 천사의 후예, 네팔렘이다.

“열세 번째 예언자. 네가 이곳에 있는 걸 안다.”

“네네. 우리 첫 번째 기수의 종자께선 이런 곳까지 무슨 일일까나?”

“그분께선 네가 여태 모은 정보를 바라신다.”

짧은 순간에 팽팽 돌아간 머리는 그녀로 하여금 꽤 재밌는 그림이 만들어질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리고 하필 그 순간에 메이링의 눈이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하필 이 상황에 예지라, 뭘 봤지?”

“그걸 말할 의무가 있던가요? 난 조력자지 부하는 아니랍니다. 같은 편이지만, 경쟁자라는 걸 잊지 마세요.”

“···그래. 그렇다면 받아야 할 정보에 조언까지 요구하지.”

그리고 그때, 그녀가 정보를 넘기면서 조언이라며 가리킨 곳은 유성이 있는 그 요새가 아닌, 아직도 끈질기게 저항 중인 혈교의 본단, 혈수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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