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 죽절산
아직 요새가 다 지어지려면 멀었다. 예전 게이트 내에서 짓던 진지 혹은 대전쟁 때 방어선에 지어졌던 군진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굳이 따진다면 제대로 각 잡고 ‘길드’의 거점을 만드는 것에 가깝다.
각 지역에 자리 잡는 중소형 길드 요새의 열화판을 짓겠다는 것이고 일전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던 명교의 본단에서 봤듯 절대 단기간에 끝날 작업이 아니다.
이건 말 그대로 성을 축조하는 거다. 짐꾼들의 장비로 일시적으로 축조한 뒤, 다시 해체할 것이 아니기에 끊임없이 자재 보급을 받으면서 건설해 나가야 했다.
다만, 그렇게 건설에 시간이 걸리고 까다로운 만큼 그 요새의 형태가 잡히기 시작하면 여길 공격하려는 이들은 어쨌거나 막대한 희생을 강요받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붉은달의 이번 습격이 슬슬 개시된 것이 전혀 이상한 건 아니다.
“이야기 듣고 왔습니다. 피해는 어떻게 됩니까?”
“첫 습격이라 대응이 잘 안 됐다. 짐꾼이 일곱 죽었어. 뭐, 여기 온 인간들도 다 설명은 듣고 온 거니 당장은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역시 아래쪽부터 노리는군요.”
“이유야 너도 잘 알 거 아니냐.”
빌런을 짐꾼들 사이에 섞어 들여보내 정확히 짐꾼들만 치고 빠졌다.
습격한 놈을 잡았다면 모를까. 짐꾼 파티 하나를 전멸시키고 산 속으로 사라져서 잡을 틈도 없었다.
물론, 중국 영웅 협회의 도움을 받는 중이기에 당장 큰 문제가 되진 않을 거다. 히어로의 힘이 거의 없다시피한 일본과 다르게 중국 영웅 협회의 영향력은 막대하다.
‘물론, 사상누각이긴 하지. 하지만 덩치만큼은 무시 못한다.’
이 중국 전체의 히어로들이 한데 뭉쳐있는 형태다.
중국의 재계나 정부, 관리국, 헌터 협회나 길드들이 ‘성’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면, 중국 영웅 협회는 유일하게 그 제약에서 벗어나 있다.
유일하게 이 대륙을 지배하는 거대 국가의 역량을 그대로 써먹을 수 있는 집단이라는 거다.
중국 영웅 협회 내부에도 이 나라가 가지는 전체적인 문제가 똑같이 내재해 있긴 했다.
여러 성의 이해관계에 히어로들이 더럽게 많이 얽혀있고 견제가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좀 부패해 있기도 했다.
다만, 그런 만큼 영웅들의 이익이나 체면이 걸리면 그만큼 무서울 수 없는 집단이었다.
이 중국에서 중국 영웅 협회에 찍히면 제대로 살아가기가 힘들고 블랙을 통해 인원 일부를 통제를 위해 받은 만큼, 고작 이런 위협에 짐꾼들이 반발하거나 혹 태업을 할 가능성은 없다.
그런데도 붉은달이 이런 수작을 부리는 건 물리적으로 짐꾼의 수를 줄이며, 지도부를 불신하거나 불만이 나오게 하고 사리도록 하기 위해서다.
말단 조직에 혼란이 와야 침투해오는 놈들에게 운신의 자유가 더 생길 테니까. 내부 건설의 진척도라거나 순찰조의 습관이나 틈 같은 사소한 정보까지.
그런 걸 수집하려면 우리 지휘부의 시간을 더 뺏을 필요가 있다.
“위축시키고 틈을 만들려는 거겠죠. 작업 속도를 늦추려는 이유도 있을 겁니다.”
“뭐, 그 말도 맞지만, 그건 그저 기본적인 거지. 가장 중요한 건···.”
“공포죠.”
“잘아네. 너무 잘 알아서 해줄 말이 없구만.”
에이스 넷보다 트롤 하나가 무서운 법이다. 그리고 멀쩡한 인간도 그런 폐급으로 만드는 공포라는 것에는 전염성까지 있었다.
그리고 코브라가 좋아하는 게 바로 그 공포다. 그러니 일전의 빌드에는 악영향이 갈 수 있는 그런 독물 폭탄 따위를 익혀서 습격을 해오는 거다.
“습격으로 말단에 공포가 머리를 들 때쯤, 아마 외부 괴물의 몰이를 시작할 거다. 내가 이미 몇 번이나 상대해봐서 그놈의 수법은 잘 알아.”
밑에 사기를 통제해야 하는 중간 관리자들에게 추가로 외부 방어라는 과부하를 얹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이란 건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없다.
“이걸 확실하게 막아내려면···.”
“그래. 지휘부가 뒤에 숨지 말고 솔선수범해서 나서야지. 그런 수작을 일격에 쓸어버려서 사기를 올려야 하는 거다. 우리가 군대가 몰이하기 어려운 이곳으로 온 것도 사실 그런 걸 고려해서니까.”
전쟁을 생각해야 할 정도의 규모로 괴물이 몰려오면 지휘부의 특급 각성자들이 아무리 날고 긴다고 해도 제대로 활약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도 위험하겠죠.”
“놈들도 당연히 그럴 경우도 상정해서 습격을 준비했겠지. 요새는 쓸모가 없어. 우리 실력으로 그걸 막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이번 일은 성패가 갈릴 거다.”
그리 말하는 김수철의 입꼬리는 기대로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내 실력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 도착해있는 도선이 돕는다면 그 승리는 확실하겠지만, 당장은 도선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럴 목적으로 온 사람이 아니니까.
도선이 데려온 특급 각성자 둘, 그리고 나하고 김수철까지 특급 각성자 다섯이면 아자젤 본인이 직접 온다 해도 위협을 느낄만한 전력이다.
'거기에 그 휘하를 보낸다면 당연히 더 꺼릴 테지.'
아자젤의 권능은 반드시 주변에 게이트나 희생양으로 쓸 괴물들이 있어야 하는 종류라, 특급이 다섯 쯤 되고 권능을 쓸 여지가 없으면 충분히 잡는다.
그러니 본인이 유리하지 않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도 있다.
“놈들이 기존의 정보로 오판하고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겁니다.”
“그래. 놈들의 계산과 다르게 2대 2일 테니까. 그리고 상성을 생각한다면 코브라는 내가, 바이퍼는 네가 상대해야 할 거다.”
붉은달은 반드시 2인 1조로 움직인다. 다른 성을 맡은 간부급 조직원까지 지원 요청한 게 아니라면, 코브라가 직접 습격해올 그 공세 때에 우리가 상대해야 할 특급 각성자는 단둘이다.
그리고 아마 지원이라면 빌런을 격동시킨 그 조력이 끝이었을 거다.
‘놈들에게도 계파라는 게 있으니까.’
같은 파벌은 인접 지역에 붙여두지 않으려고 할뿐더러, 이렇게 중국 영웅 협회라는 벌집을 코브라가 들쑤셔 놓은 이상, 여기까지 지원을 오려면 그들도 과정에서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다.
‘저놈들도 그렇게까진 안 하지.’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그래서 다른 일들이 너무 급한 것만 아니었다면, 난 붉은달도 대전쟁 전에 끝내 놓으려 했을 것이다.
대전쟁 시기 이후에는 붉은달도 모든 전력을 한군데 모아 세력화해서 몰려다녔기 때문에 공멸을 각오하지 않으면 처리하기 어려워졌다.
지금처럼 저놈들이 전 세계에 퍼져 있을 때 처리해야 편한데, 그럴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필수적인 일을 하면서 가능한 거쳐 가는 곳에 끌어들여서 수를 줄여놓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따진다면 이번 회차에 바이올렛을 통해 붉은달에 도발을 해둔 게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여유 있을 때 바이퍼가 쓰는 술법에 대해서 좀 말해주시죠.”
코브라의 경우, 이름과 같은 뱀과 융합하는 변신 계열 특급 각성자다. 따로 독 계열을 타서 쓰는 게 아니라 쓰는 독의 종류는 그 뱀독 하나뿐이다.
그걸 가지고 독 폭탄을 만들기도 하긴 하는데, 변신 계열 트리의 기술일 뿐이다. 파트너인 바이퍼는 똑같이 독을 사용하지만, 그 계통은 술사 계열이다.
그로 인해 기술의 바리에이션이 넓은 편이고 똑같이 소환수를 활용한 바리에이션을 통해 상성 전투를 하는 블랙과 붙으면 몇 날 며칠을 붙어도 제대로 승부가 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근거리, 원거리, 전위형이 모두 가능한 만능형이지.’
나는 근접전에 약한 바이퍼의 허를 찌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바이퍼를 맡으면서 우리 의도대로 코브라와 블랙이 붙으면 놈은 단기 승부를 걸거나 도망가는 수밖에 없다.
근접해서 체술 승부를 걸고 보유한 독도 소모품인 바이퍼에게 비행 계열에 전방에 많은 희생양을 끊임없이 세울 수 있는 블랙은 상성이 전혀 맞지 않는다.
주변 헌터나 민간인을 인질로 삼으려 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 싸움에 억지로 응할 블랙이 아니니까.
‘괜히 코드명이 블랙이 아니지.’
영웅으로서 블랙이 내세우는 정의는 ‘대의’와 ‘징벌’이다.
금강산 길드에서 보여줬듯 자기희생도 마다치 않고 히어로의 의무를 다하는 성격이지만, 적어도 빌런을 상대하는 상황에 있어선 가차 없다.
이후,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수색을 강화했음에도 집요하게 짐꾼만 노리는 테러에 사람이 끊임없이 죽어나가면서 그 희생이 슬슬 세자릿수가 넘어가자 작업을 온 중국 짐꾼들이 몸을 사리는 게 느껴진다.
워낙 페이가 센 데다가 중국 영웅 협회가 각 물류 길드에 압박을 넣기도 했기 때문에, 인원은 끊임없이 충원되고는 있었다.
다만, 언제든지 도망가기 위해 주변 경계를 하느라 일에 집중을 못 하는 건 여기 온 짐꾼 대부분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제일 정도다.
거기에 각성자들이 순찰을 하는 곳에서만 일하려 하거나 저들끼리 패를 이뤄서 저등급 헌터에게 위험한 일을 몰아버리는 등 벌써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면 말은 안 하지만, 은근슬쩍 내통하면서 자기 목숨을 챙기는 이들도 나오겠군요.”
“그러면 저희가 위험한 것 아닌가요? 거기에 암살 시도라도 있으면···.”
김민지 본부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왜 손 놓고 있느냐며 따져왔지만, 블랙은 고개만 저었다.
“괜찮아. 그 정도면 상정한 수준 내야. 놈들도 영웅 협회가 뒤에 있는 걸 아니까 수상한 행동이나 무리한 요구를 하진 않아. 거기에 그런 뻔한 건 그래서 우리 두 어린 지휘관 핑계를 대고 일부로 생활구역 나눠놨잖아.”
“사람이 워낙 많고 외지인데다 행정이 과부하 된 충징에서 걸러낼 수가 없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해결할 방법이 없으니 감수할 수밖에요.”
“그나마 다행인 건 중국 영웅 협회가 이게 빌런 조직과의 자존심 싸움이라 생각하고 계속 말없이 우직하게 밀어붙여 주는 거겠지.”
“하지만 이러다간 결국 불만이 터지지 않을까요?”
“거 아가씨 참 걱정 많네. 댁네 이수 녀석은 안 그렇다고. 그럴 리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니까?”
“블랙 히어로, 전 이 원정을 이끄는 대장으로서 모두의 안전을 챙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설명하다 혼자만 자꾸 못 알아먹는 게 귀찮았는지 김수철이 김민지의 신경을 긁었다. 내가 그 사이를 중재할 겸 방금 질문한 내용에 대해 설명했다.
“중국은 우리랑 다릅니다. 적어도 신분이 있는 국민에게는 최소한의 복지가 제공되는 우리와 다르게 이곳은 그럴 여유가 없어요.”
명교 같은 교단이 한 성을 장악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게 그런 이유도 있다.
“그래. 먼저, 이번에 영웅 협회에서 내건 보수면 여기 온 인간들이 족히 몇 년은 일 안 하고 놀 수 있을법한 큰 건이야.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 인간들은 우리가 요새 완공을 미룰 거라는 사실을 몰라.”
“네. 그게 저들에게 주어진 희망이죠.”
희망. 그게 결정적이다. 어차피 이 요새가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한다면 이런 습격도 어려울 거라는 믿음이다. 우리 둘이 주고받는 내용에 그제야 김민지 본부장도 깨달음이 스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놈들이 이간질해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차피 내성과 외성 구조로 나눌 거니까. 내성 완성하고 전부 내부에 밀어 넣은 다음에 작업 속도를 늦추고 조를 돌려가면서 호위대를 붙여 작업하게 되면 그런 불만은 통제할 수 있어.”
“그리고 어차피 그 전에 우리도 놈들도 승부를 볼 겁니다. 수철 형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건 그래서죠.”
그리고 그때, 임시 지휘소 건물의 문이 벌컥 열리며 이민호가 뛰어들어왔다.
“옵니다!”
“그래. 드디어 왔군.”
밖으로 곧장 뛰쳐나온 우리는 지휘소 바로 옆에 세워둔 철골 구조물을 타고 올라갔다.
“제법 많이도 끌어모았는데. 수는 대충 1만은 넘지 않는 것 같고.”
“많네요. 이 정도 몰이를 포위 안 당하고 조직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게, 범죄 조직도 세계급 규모가 되면 장난 아니군요. 그리고 숫자는 8천에 자투리는 2백은 넘고 4백은 안 넘어요.”
“오, 정확해?”
“저희 길마님이랑 함께 싸워보셨다면 아실 텐데요?”
“뭐, 이수 눈 정확한 거야 알지.”
대개 후방 지휘를 자주 맡는 만큼 저것도 좋은 서포터의 조건 중 하나다.
“그럼 고위 전력 숫자도 알아볼 수 있겠어? 알지? 이수라면···.”
“A급 괴수가 일곱, B급으로 보이는 건 서른을 좀 넘어가고 주력은 D급이네요. 숫자 계산까지 해드려요?”
“아니. 그걸 못 알아먹으면 치매 온 거니까 히어로 때려치워야지.”
주력 D급 8천 중에 대략 10 ~ 20마리당 C급이 하나 존재할 테니 평균 15로 치면 C급은 대략 500마리 정도 있다는 뜻이다.
요새 구조물도 적당히 건설되어 있는 상태고 여기 전력 가지고 못 막을 건 아니었다.
“퍼포먼스는 나랑 저기 히어로들이 최우선으로. 김유성 너는···알지? 그리고 그쪽 아가씨는 전체 지휘를 맡아.”
“잘 알고 있네요.”
“걱정 마시죠.”
“명심해. 중요한 건 괴물이 아니야. 놈들이 습격하지 않으면 몬스터만 정리해버리면서 사기 끌어올리면 끝이지만, 습격이 시작되면 절대 요새로 가는 거 막는다거나 하며 무리하지 마. 그냥 흘려버려.”
김수철은 그리 당부하곤 상징인 삼족오를 소환해서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막대한 마력이 몰려드는 요란한 소환에 성 내의 시선이 갑작스러운 그 힘자랑에 집중됐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암살자 계열 은신 기술을 펼쳐 어둠 속으로 조용히 녹아들었다.
그런 한편에서는 김민지 본부장이 금성의 정예를 전부 소집하곤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금성 정예도 곧 적을 요격하러 나갈 것이다.
앙상한 철골 형태만 갖춘 성벽에 척후의 비상신호를 보고 사태를 파악한 짐꾼들이 서둘러 제 장비를 설치하며 임시 보강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직 짐꾼들이 달라붙지 않은 한쪽 성벽의 골조 사이로 빠져나와 히어로들을 태워 하늘을 날고 있는 블랙의 뒤를 조심스럽게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