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 죽절산
집중이 깨진 건 아쉽지만, 어차피 17회차가 가지고 있던 경험을 정리하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손님을 받기로 해놓고 실상 공공장소나 다름없는 관제실에서 검무를 췄으니 방해를 받아도 할 말이 없다.
“궁사라고 들었는데, 잡다한 걸 고도로 익힌 걸 보니 삼촌의 판단력이 조금 의심이 가는데.”
만나자마자 각을 세워오는 듯한 내용에 내 고개가 그리로 돌아갔다. 조카 쪽이다.
새로 얻은 기억 속에서는 그리 낯선 이들은 아니었다.
의심하는 것 같은 내용이지만, 목소리에 조롱하는 기색은 없다. 그것에서 딱히 적대감이 담겨있지는 않다는 걸 잡아챌 수 있었다.
눈을 바라보니 이쪽의 반응을 유심히 살피는 것 같은 기색이 보였다.
그리고 곧 그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사촌 동생인 제갈란이 내 집중을 깬 상황에 일단은 내 인물됨을 스스로의 눈으로 확인하려는 거다.
내 인물됨에 따라 불쾌감을 드러낼 수도 있긴 했지만, 객관적으로 제갈란만의 실수라 보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에 더불어 혹여 적대감이 있다면 상대할 자신이 있는 자신에게 향하도록 일부로 약간 날을 세운 것이다.
‘아마 내 관심을 돌리고 호의를 사거나 사태를 무마할 자신이 있는 거겠지.’
그게 어떤 자신인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그쪽이 제갈운인가 보군요.”
중국어 발음으로는 주거윈이 되는데, 아무래도 중국식 이름은 기억하기가 어렵다.
어차피 통일언어로 전환해주는 장비를 쓰고 있는 상태다. 굳이 그런 부분에 신경 쓰지 않아도 자신을 지칭한다는 걸 알아들을 테니 편하게 우리식으로 하기로 했다.
제갈운은 내가 앞선 말이나 상황에 발끈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자, 끌어올렸던 긴장을 푸는 모습이다.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이쪽도 호위로 충분한 전력을 데리고 온 만큼, 그쪽 일정에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폐라, 지금처럼 말입니까?”
“하하, 물론 내 사촌 동생이 약간 실례한 것은 맞지만, 우리 쪽 책임만 있다고 하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그것도 그렇군요. 앞으로는 조심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어차피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 넘어가죠.”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제갈운과 제갈란을 보낸 이유는 짐작이 간다.
그는 제갈가의 빌드전문가다. 전투력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지만, 직책은 제갈가 연구소의 팀장인데다 국제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이름값이 있었다.
추가로 지금 제갈가문에서 각성을 한 인물 중 아직 빌드를 익히지 않았을 건 제갈란이 유일했다.
‘그러니 사제지간 인연을 빌미로 나와 끈을 이어놓고 싶다는 말이군.’
일전의 펠릭스에 대한 빌드 지도까지 이미 다 파악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내 능력이 상대적으로 빌드 전문가에 더 치우쳐있다고 보고 흥미를 느낄만한 상대를 보낸 것이다.
“그쪽이 이른 아침부터 여기 찾아온 건, 제갈가 선발대의 선실 배정을 논의하기 위해서입니까?”
“그것도 있지만, 따로 전달해야 할 것도 있어서죠. 선실 배정이야 실무자끼리 이야기해도 되는 사항이니 진짜는 이쪽이라 해야겠습니다.”
제갈운이 내미는 봉투를 받자 친서 한 장과 어음증서가 나왔다.
친서는 맡기는 이들을 잘 부탁한다는 의례적인 인사에 예상대로 제갈란의 빌드를 내게 맡기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어음은 한화로 100억에 가까운 금액이 들어있었는데, 약소하다고 하는 걸 보면 확실히 통이 크다.
‘이 정도 금액이면 호위나 빌드 컨설팅을 해주는 걸 고려하더라도 큰데. 이쪽에 호의를 보이는 건 확실하군 뭐, 제갈란의 잠재력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지만···.’
소녀의 추정 잠재력은 잘 쳐줘도 B급 정도. 큰 활약을 하는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기억 속에서 이미 빌드 관리를 해줬던 적이 있고 비슷한 경우인 지혜도 특정 상황에서의 스페셜리스트로 만들었던 만큼, 쓸만하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후발대는 부대 재편이 끝나고 출발할 겁니다. 저희 가문도 지금 여유가 많은 편은 아니라서.”
선발대 인물들은 유럽까지 따라올 이들이고 후발대는 충징에 파견 보내주겠다는 전력이었다.
한국에서 유럽으로 가던 이들은 날 돕겠다는 명목으로 합류해선 충징에서 헤어지는 게 의아해하겠지만, 내가 거대 조직의 대리인 혹은 수장으로 아는 제갈민과 내 사이에선 도움이다.
“전해주실 소식이 한 가지 더 있을 텐데요.”
“아, 그 약속이라면 여러분이 출발하실 때 삼촌도 움직이실 겁니다. 개입하려면 그 지역 세가를 통해 우회해서 들어가야 할 거라, 협의할 사항이 많으니까요.”
아직 기억을 열기 전이긴 했지만, 지원을 얻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세가 연합도 회의를 열어 남부에 벌어지는 사태에 관해 이야기해달라는 언급을 해뒀다.
이 정도면 제갈가와 관련된 건 다 마무리 지은 것 같다.
함장과 논의해 탑승 인원의 선실 배정을 마무리 짓고 복귀하는 인원을 점검한 뒤, 함대는 다시 날아올랐다.
확실하게 지원해주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는지 산둥의 경계를 떠나갈 때까지 제갈민은 함선들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우리 함대를 호위하듯이 붙였다.
민간, 전투용 함선을 합쳐 족히 1천 척은 되어 보이는 대함대가 움직이는 장관은 중국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것이었는지, 그걸 찍은 사진이 SNS를 통해 돌아다녔고 제갈가의 일원이 저 함선에 타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금성에 산동의 제갈가까지 합쳐지면, 어지간한 작은 국가급 길드다. 그래서 그 소문 자체가 어중간한 해적들에겐 꺼려지는 만큼, 상당한 도움이 맞았다.
그렇게 우린 난징과 상양을 거쳐 충징으로 들어갔다.
난징까지 하루가 걸렸고 그곳에서 이틀을 휴식, 상양까지 다시 하루를 가고 이틀을 쉰 후, 거의 꼬박 하루를 다시 날아 충징에 도착했을 땐, 산동을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거 함대 경로를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던데. 여기 충징에서 귀주 통해 미얀마로 가려다간, 음···. 크게 돌아가야 할 것 같던데.”
함선에서 내리기 직전, 김수철이 말을 걸어왔다.
“항저우에서 히어로들 모인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 보군요.”
“그렇지. 물건 전달해달라는 것도 그쪽 히어로들에게 유물을 전달해달라는 의뢰였고. 요 일주일간 지켜보니까 너도 뭔가 아는 것으로 보여서 말이야. 중국 녀석들하고도 인맥 있어 보이고?”
“따로 자세한 이야기는 안 나온 겁니까?”
“내가 들은 건 우리 동해안 사태급 폭탄이 터진 것 같다는 정도. 그런데 그쪽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진 않았어.”
아무래도 진원지에서 먼 산동이니만큼, 당사자인 명교나 무림맹, 해당 지역 히어로들처럼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진 못했겠지.
“이번 필드. 최소 동해안 사태의 다섯 배입니다.”
동해안 사태 다섯 배면 산술적으로만 따져도 거의 필드 면적이 대한민국 전 국토에 해당한다.
“이 미친···.”
“그리고 아마 슬슬 금성이나 로텍에도 협조 요청 들어올 겁니다.”
그런 요청이 들어갈 거라는 건 교주에게 이미 언질을 받았다.
“아, 중국 각지에서 전력이 모일 때까지 시간 벌어달라는 건가?”
“예. 중국에서도 따로 일이 있는 타국 함대를 오래 붙잡지는 못하겠지만, 지금 한국에서 펼치는 중인 작전에 방해가 안 가려면 저희도 도의적으로 방어전이나 길을 뚫는 일 정도는 돕고 가야겠죠.
”이거 진짜 귀찮은 일에 휘말리겠는데.”
“아마도 저희 여유 시간은 여기서 모두 쓰고 가야 할 공산이 큽니다.”
충징은 명교 본단이 있고 그 세력권이지만, 또 반면에 중립지에 가깝기도 했다.
그 북쪽을 감싸고 있는 사천, 청해, 감숙, 섬서 전부가 무림맹의 세력권이었고 충징시 자체와 호남으로 가는 길만 아슬아슬하게 명교가 통제하고 있을 뿐, 나머지 지역은 여기저기서 나눠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죽절산이 열린 귀주는 혈교와 아미파가 다투는 성이었는데, 혈교 영역으로 밀고 들어가던 아미파는 사천의 일부 지역 문파로 쪼그라들 확률이 높았고 혈교는 말 그대로 기반이 쓸려나가고 있을 거다.
“다들 좀 모여주셔야겠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금성에서 각 함대를 이끄는 이들을 전부 불러모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상황은 블랙과 대화에서 했던 예상대로였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저희도 저희 일정이 있는데요!”
“저쪽에서도 맨입으로 도와달라는 건 아닙니다. 중국도 국가 비상사태씩이나 선포하는 건이라, 도의적으로 돕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확실히 여기서 함부로 거부하기엔 저희 본진에 문제가 되긴 할 텐데. 그래도 어떻게···.”
분위기가 안 좋게 흘러서 내가 슬쩍 끼어들어서 정보를 풀었다.
“그리고 듣기로 지금 중국 쪽에서도 심각하게 생각하는지 인도와 이야기가 오간다고 건너 들었습니다.”
“음, 인도 쪽에서 정말 온다면야 해볼 만은 하겠는데?”
“빨리 온다면 말이겠죠. 다들 알다시피 우리 동해안 사태가 드물게 잘 해결된 편입니다. 대개는 필드화되고 이후 열리는 게이트도 해당 필드의 전력화하니까.”
“인도 쪽에서 온다는 게 확실하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뭔지도 대충 감은 잡히는군요.”
그 북쪽인 옛 티베트 자치구는 몬스터 천국이다.
청해를 통해 빙글 돌아서 가는 길이 있긴 한데, 반쯤 무법 지대라 몹시 위험하다.
인도에서 병력이 온다면 길은 하나뿐이다.
미얀마를 거쳐 운남성을 통해 와야 하는데, 호남성에서 명교가 동쪽은 막고 있으니 죽절산의 확산은 별다른 조치가 없다면 자연스럽게 서쪽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인도도 청해 쪽 길이 워낙 위험한 걸 알고 육로가 끊기는 게 부담스러우니 도우러 오는 거다.
“예. 지금 우리가 가야 할 길, 운남 방면의 길을 지켜내야 할 겁니다. 이건 우리 복귀로와도 연관이 있으니 마냥 남일 보듯이 할 순 없어요. 미국 통해 돌아오는 길도 만만치 않게 위험하니까요.”
그래서 중국의 계획이라는 게 미얀마 쪽에서 오는 인도와 북쪽에서 누르는 무림맹, 동쪽의 명교가 힘을 합쳐 거의 인도차이나 반도 동쪽, 옛 베트남으로 밀어 넣는 것이다.
‘자기들은 망한 태국이랑 라오스로 밀어 넣었다고 말하려는 거겠지.’
태국은 이미 망한 지 오래고 베트남 방면 인구라는 게 사실상 캄보디아 남쪽과 베트남 남부만 거의 반쯤 무정부 상태로 근근이 버티는 수준으로 살아있으니 개미가 무는 수준의 외교적 항의는 씹겠다는 생각인 거다.
“어쨌건, 협상단은 꾸려야겠습니다.”
그리고 따라간 협상장에서 나는 또 다른 회귀자, 곤륜 도선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나를 회의장 옥상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좋은 표정이로군. 두 번째 기억을 열었나? 내 아직이라고 들었는데.”
“도선,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겁니까?”
“교주는 아닐세. 그 요녀가 일부러 혈교를 끌어들이진 않았으니까. 교주에게 말은 안 했지만, 아미는 내 협조 요청을 받고 부추겨서 들어간 거야.”
“그럼 태백금성입니까?”
내 질문에 도선은 새하얀 자신의 수염을 쓸며 고개를 갸웃했다.
“태백금성? 그럴 수도 있겠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큰 그림에서 본다면 어쩌면···. 그래. 자네 쪽에서 의심하는 것도 이해가 가. 금성이 뭔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난 당장은 사황교를 생각중이네.”
사황이라면 인도 방면의 거짓 예언자다.
“당장 중국이 부담스러우니 단절시키고 움직이겠다는 의도로 보시는 거군요.”
“그렇지. 사황이 교주를 의심하기 시작했다면 충분히 그리 움직일 수 있어. 좀 이른 타이밍이지만, 가능성이 없진 않잖나.”
“그러면 저희 움직임이 드러난다는 거고 몹시 위험한 것 아닙니까?”
“자네도 알다시피 그놈들이 보게 되는 장면을 우리가 예상할 수는 없어. 그게 매번 가장 골치 아픈 변수잖는가.”
그리고 그때 옥상 문을 열면서 교주가 들어왔다.
“유성씨가 어디로 갔나 했더니. 그래서 그쪽은 사황을 의심하는 중이에요?”
“교주, 또 귀찮아질 일을 하는군. 만만한 이들은 아니었을 텐데 숫자로 밀고 들어온 건가? 인명을 경시하는 악랄함은 여전하군.”
입구에서 대치 중인 이들과 흩뿌려진 피를 본 도선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긴 내 땅인데, 참나. 내가 못 올 곳에 왔나? 그리고 아무도 안 죽었으니까. 도발하지 마시죠.”
“우선은 저들부터 물러나게 하게.”
“그러죠, 뭐. 들어왔으니까.”
두 조직의 장이 서로의 수하를 물리고 다시 이야기가 재개되었다.
“일단, 나도 사황 의심스러운 건 인정. 하지만 그냥 사고였거나 단순히 특정 성좌의 개입일 가능성은?”
“자네도 태백금성을 말하려는 건가?”
“태백금성? 아니 난 제육천마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흠···.”
제육천마왕 마라 파피야스, 불교 석가모니의 열반을 방해하려 했다는 신좌다.
“혈교주의 천살성 특성 조건을 완성하려는 심산, 그 자체로 보자는 거군. 하지만 가능성은 낮아 보이는데.”
“어쨌거나 성좌 입장에선 인간 상대로 그 살업을 쌓게 할 수는 없잖아요. 인간이 아니고서 조건에 맞추려면 같은 세계관의 존재여야 하는데, 죽절산 규모 정도라면 혈교야 망하더라도 무리시키지 않으면서 가능할 테죠.”
“그것도 우리에겐 그리 좋진 않겠군.”
마라 파피야스 자체가 문제는 아닌데, 천살성 특성을 활성화한 혈교주면 세계 최강자 반열이다. 열에 셋은 대전쟁 시기에 빌런이 되는 인물이라 협조 대상에선 제외였다.
그리고 혈교가 그리 커버리면 명교를 가만둘 리 없다.
“원래는···.”
“저랑 공멸을 유도했었죠. 마라 파피야스 정도 되는 신좌면 모두를 아는 건 아니지만, 사황과 저에 대해선 매번 알고 있어요. 그래서 뭔가 하기 전에 없애려고 유도하는 거죠. 그래서 의심하는 거고요.”
“어차피 열셋은 반드시 채우지 않···. 아니군.”
너무 당연한 사실에 난 말을 흐렸다.
뒤늦게 각성하는 이후의 후보자는 그만큼 준비 시간이 줄어드니 마라 파피야스의 그런 인간을 위한 노력은 절대 헛된 것이 아니다.
악신이 인간을 위한다는 게 뭔가 웃기긴 한데, 인간이 악신이라 부르는 신좌들도 그들 나름으론 인간을 위한다고 생각을 하며 움직인다.
그 수단과 방법, 과정 따위가 인간의 기준에 악해 보일 뿐이다.
“공멸 작전은 이제 불가능하니 가능성은 그 정도로 둔다 치고 대책을 세워보지.”
“이거 길어지지 않겠어요? 일단 유성씨부터 본단으로 데려가야겠는데.”
“교주는 또 나와 기 싸움을 하자는 건가? 시간은 충분하네. 여기 회의장에서 결론을 지은 뒤, 데려가게나.”
그리 대치가 벌어지자마자 두 사람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모습에 쓴웃음이 나왔다. 잘도 이런 서로 안 맞는 인물들을 데리고 세계 멸망을 막으려 든다 싶다.
난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도선을 바라봤다.
“도선. 지금 이곳 충징에서 명교 본단만큼 안전한 곳이 있겠습니까? 제가 바이올렛을 저리 건드려놓은 이상, 붉은달도 생각해야 합니다.”
우선 점수 덩어리들이 잔뜩 몰려 있는 명교로 먼저 가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