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헌터의 성좌투자법-113화 (99/128)

11장 - 죽절산

* * *

[과거 머나먼 시점 / 17회차 / 김유성]

회귀라는 것도 열일곱 번이면 충분히 많이 했다. 그리고 또 실패했지.

나는 지쳤다. 어딘가 정신이 망가져 있는 게 아닌 이상, 보통의 사람은 이런 끔찍한 환경에서 그런 십수 차례의 회귀를 견딜 수가 없는 게 정상이다.

그리고 난 그저 이를 악물었을 뿐인 보통의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모든 걸 내려놓고 쉬고 싶다.

그러나 그때했던 그 맹세를 내 쪽에서 어길 순 없었다.

물론, 위대하신 그쪽에선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지. 나란 것은 이 수많은 다중차원의 시간선 속에서 그저 하찮은 먼지에 불과할 미물일 테니까.

그러나 분명히 이 마음속 남아있는 책임감이, 과거 부렸던 자존심이, 그리고 어깨 위에 얹어진 이 무거운 짐이 설령 내가 망가지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움직이게끔 하는 동력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내가 포기하면 이 모든 차원의 미래, 그 가능성 속에서 전 인류가 사라진다.

그래. 완전히 멸종한다는 말이다.

고작 한 사람의 감정과 몰락으로 택하기엔, 그 죄과가 너무 무겁지 않은가?

하필 그게 나라서. 내가 선택받았기 때문이라면, 이런 이유로 포기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겪어보지 않은 그 누구도 이 붉은 버튼을 누른다는 것의 무거움에 대해 내게 함부로 말할 수는 없다.

‘그리고 결국 난 어떤 오래된 소설 속에서 봤던 것처럼 그런 미친놈이 되겠지.’

사람을 숫자와 효율로 보게 될 것이고 감정을 죽일 것이며, 악마보다 더한 악마가 될 것이다.

오직, 끝을 보기 위해 달리는 망가진 기계.

그리고 난 절대 그렇게 되고 싶진 않았다.

그렇기에 포기하기 위해선 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확실한 핑계가 필요했다.

‘사람으로 남을 거다. 그래. 끝을 보는 날, 나는 반드시 사람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인간성이 남아있을 때, 마음이 죽지 않았을 때, 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망가진 자가 내리는 결론은 반드시 망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남자는 결국, 자신의 마음이 무너지기 전에 그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그래. 방법은 기억의 유산이다.”

* * *

그리고 알게 된 회귀의 비밀이라는 건, 생각보다 끔찍한 것이었다.

‘회귀라는 기능은 과거에 흐른 세계선으로 갈아타서 그 멀티버스의 자신을 잡아먹는 거다.’

이건 도플갱어와의 만남이라는 게 실제로 벌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지금 돌아온 모든 이들은 전부 적게든 많게든 몇 번이고 그 과정을 거친 이들이라는 거다.

‘그래. 이런 것,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

단순히 회귀하는 것도 반복하면 미쳐가기 마련인데, 이건 심지어 멀쩡히 살아가야 했을 그 세계선의 자신의 영혼을 죽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짓인 거다.

어지간한 독심이나 어떻게든 인류를 구하겠다는 숭고한 의지가 아니라면, 여러 번 하기가 어려운 선택이다.

‘나란 건, 참으로 이기적인 놈이다. 동료에겐 그런 선택지를 제시한 주제에···.’

그렇기에 17회차의 나는 지독하게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그 다른 차원의 자신조차 나라고 본다면···.’

동시에 참으로 이타적이면서 숭고했다. 그것이 자기 자신임에도, 삼천세계의 모든 다중차원에 존재하는 자신들에게 이 짐과 죄책감을 떠맡게 한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내가 회귀가 아닌 기억 전송을 택하게 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회귀라는 건 언제든지 내가 도중에 죽어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다.’

아무리 회귀 경험 덕분에 쌓인 것으로 수많은 기술을 구사하며, 올 마스터에 가까운 놀라운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초기에는 능력치의 문제로 무조건 약하다.

즉, 언제든지 인류가 종말을 맞이할 위험이 초반의 내 머리가 날아가느냐 마느냐에 달린 거다.

17회차의 기억 속에서 회차가 진행되면서 점점 안정 지향적인 움직임만 취해가는 모습이 내게도 보였다.

능력을 보유한 내가 절대 급사하면 안 되기 때문일 것이다. 역할도 지원가와 전략가 따위로 제한이 되었다.

당연히 그래선 안 된다. 나 자신도 하나의 자원인 만큼 과감할 때는 과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번 회차 초기에 내가 혼자서 설악산을 해결한 것처럼,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또한, 지금의 메이링 같은 인물이 속을 숨기다가 배신한다거나 멀쩡했다가도 회차를 거듭하다 보니 심경이 변해 갑자기 변절하거나 미쳐버린 동료의 폭주도 문제가 있다.

모두 이번 기억 속에서 겪어본 것이다.

인위적인 회귀는 그런 것에서 절대 자유로워질 수가 없다.

‘물론, 지금도 동료를 회귀시키지 못하고 내가 죽어버리면 처음부터 혼자 다시 시작해야 하긴 하겠지.’

그 다음 문제는 가격이었다.

‘선별된 기억 일부만을 보내기 때문에 기억을 등록하는 쪽이 압도적으로 값이 싸다.’

별의 투자자 최종 특성은 ‘상품 등록’이었다.

별 것 아닌 이상한 기능 같지만, 회귀라는 이름의 과거 시점의 멀티버스에 자신을 전송하는 것도, 지금의 기억 전송까지 모두 이 기능을 가지고 한 것이다.

‘다만, 문제는 자신의 기억을 타인은 받을 수가 없다는 것.’

기억이라는 건, 개인의 고유한 것인지 오직 ‘자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져야만 열어볼 수가 있었다.

다른 동료도 별의 투자자를 택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었겠으나, 이유를 모르겠지만 이건 오직 나만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이다.

‘아마도 그건 최초. 처음 받은 1회차의 뒤편 끊어진 부분에 답이 있겠지.’

내가 어떻게 이런 능력을 얻게 되었는지는 기억 속에 없다.

아직 알아서는 안 될 기억이라는 거겠지.

그리고 회귀에는 문제가 많았다. 많이 버티면 버틸수록 내가 벌 수 있는 점수도 올라갔지만, 회귀에 들어가는 비용도 회귀를 거듭해감에 따라 조금씩 더 늘어났다.

이는 계속 회귀함으로써 모든 것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는 내가 가지게 되는 정보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다간 언젠가 파국이 올 거라는 건 누가 보더라도 뻔한 일이다.

‘그래. 그렇겠지. 그리고 첫 번째 이유와 상통하다. 이런 제약 속에선 여러 시도를 해볼 수가 없어.’

더불어 나 하나가 회귀를 포기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점수라면, 회귀가 처음인 동료를 족히 서른 명은 과거로 돌려보낼 수가 있었다.

그렇게 극 후반에 쓰고 남은 점수 혹은 더 희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부터 버티면서 모아온 점수로 기억을 등록한다.

다음 회차도 포기하게 되는 순간에는 다음 차원에, 그다음 차원에, 수십, 수백 개의 차원에 엄선된 기억 상품들을 등록하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 회차는 더욱 많은 정보를, 그리고 거리가 먼 곳에는 그저 내가 겪은 첫 번째, 그 최소한의 기억만을 보낸다. 그렇게 기억이 점점 계단처럼 쌓여가는 거다.

지겹도록 오랜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 시작이 언제인지, 그리고 몇 번째인지 모를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세계선들에, 그 지겨운 작업을 계속해온 것이다.

앞쪽의 ‘나’라는 인간들은 말이다. 오직 ‘알 수 없는 그 어디선가’에서 만큼은 인류의 구원을 해내겠다는 그 생각 하나로 이 미친 짓을 해온 거다.

‘이게 몇 번째지? 아니. 그런 생각조차 의미가 있나?’

아직은 몇 번째인지는 알 도리가 없다.

하나의 회차에 속한 ‘나’는 내 뒤쪽 세계선에 상품이 등록되어있는 걸 본다면 이번 회차에 그저 온 힘을 다하면 될 뿐이다.

‘지독한 이야기다. 함정이고 또 희망 고문이야. 그래. 분명 어딘가에선 정말로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 생각하는 놈도 다 지워버리고 싶다는 녀석도 나오겠지. 하지만 그건 일부일 뿐이다.’

17회차가 포기하는 핑계로 충분하길 바라며 생각했던 끔찍한 구상. 바톤을 이어가며 무한한 길을 달리는 영겁의 마라톤.

곁에서 같이 따라오는 이 동료의 존재가,

나를 바라보며 믿음을 보내는 그 시선이,

그리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멸망이.

매 회차에 내게 달리도록 강요를 한다.

분명히 나는 앞선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이런 책임에서 등을 돌릴 수 있을 만한 인물은 못 되었다.

어찌 되었건 삶은 한 번이며, 이곳은 나의 세계라는 것만큼은 분명했으니까.

지금 내가 떠맡게 된 유산은 언젠가의 자신이 선택했던 죄악의 대가였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회귀자들의 대장이라는 짐을 지게 된 연유였다.

“참, 숨이 막히는 기분이다.”

난 창 밖의 공항 너머, 항저우의 번화한 도심을 바라보았다.

‘시후가 했던 말처럼, 그리 대단한 자격이 필요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답답한 가슴과는 별개로 그들이 왜 두 번째 기억을 열어야 이야기가 된다고 말했는지는 잘 알겠다.

앞으로 일어날 주요 사건들에 대해 그 여파와 비밀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죽절산도 그 중 하나였다.

‘지금 시점에 죽절산이 열려버린 건 몹시 커.’

우리가 겪은 동해안 사태라는 건, 막아둔 둑이 터지기 시작하는 거다.

그리고 늦게 열릴수록 그 여파가 크다.

우리가 겪은 어류족들의 게이트를 예로 든다면, 터지는 걸 억지로 막고 막다 보면 지금처럼 트라바슈르의 나가 왕국 하나만 넘어오는 게 아니다.

그 방주 세계 속 주변에서 경쟁하던 다른 왕국 또한 한 번에 넘어오게 된다.

또한, 기본적으로 일정 기간에 열리는 게이트의 양은 정해져 있다.

따라서 죽절산이 열림으로 인해 이 지역의 게이트가 폭주하기 시작하면 다른 지역의 게이트는 큰 폭으로 줄어들 것이다.

한국은 강국 중 하나지만, 상대적으로 변방이었고 대개 이런 변방에서 먼저 둑이 터지며, 그걸 해결하다 보면 최종적으로 미주, 유럽, 중동, 인도, 중국 순으로 둑이 터진다.

‘그게 성좌들이 우릴 성장시키기 위한 계획이지.’

하지만 태평양에 신대륙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포르세티가 기대 중인 환상향 게이트, 죽절산까지.

첫 회차에서는 그 세 가지가 동시에 터지면서 인류는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나 회귀를 몇 차례나 한 기억이 있는 지금은 그 타이밍을 차례로 어긋나게 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메이링 정도 되는 여자가 그런 실수를 할 리는 없다.’

그 악독함이나 적으로 만났을 때의 껄끄러움과는 별개로 메이링의 능력은 인정하는 바다.

그렇다면 분명 연유가 있다.

이 사건에는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시점에서 가진 단서로 의심 가는 인물은 둘이다.

‘태백금성, 그리고 메이링 본인. 둘 중 하나가 의도적으로 죽절산을 건드린 게 분명하다. 이유가 뭐지? 모두의 말처럼 막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이건 명백히 중국 역량의 턱 끝까지 몰아붙이는 일격이야.’

메이링이 기억을 회복한 내게 빨리 오라는 것 역시 그것을 의논하고 싶은 거겠지. 변명을 위해서건, 그녀 본인이 한 것이 아니건, 그편이 자연스러울 테니까.

‘그래도 좋다. 꿀꿀한 것과는 별개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기억으로 인한 찝찝함과는 별개로 격한 깨달음들이 머릿속을 몰아치고 있다.

그 흥을 이기지 못하고 소매에서 단검을 뽑아낸다.

허공에서 춤을 추는 단검이 창 밖의 별빛을 받으며 현란하게 움직인다. 지금 상태라면 강화를 쓰지 않더라도 특급 각성자와 싸워서 버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든다.

정상철 길드장 같은 규격 외는 제외해야겠지만, B+쯤 능력치를 가지고 특급을 상대하는 거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임은 틀림없다.

또한, 전위에서 지원가에 이르기까지. 중심이 되는 기본 직군들에 대한 이해도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뭐가 됐든 직접 해보는 것만 못한 법이다.

“와···.”

회귀 기억 속에서 기술들을 점검하고 있었는데, 누군가의 감탄사에 몰입에서 빠져나왔다.

관제실 문 앞에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머리를 긁적이는 함장과 미간을 찌푸린 청년, 그리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만두 머리의 어린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제갈가에서 온 겁니까?”

제갈민이 보내겠다고 했던 제갈가의 조카와 막내딸이 이 둘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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