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 죽절산
함선에 돌아온 난 폰을 꺼내 들고 한참을 고민했다. 지금 상황에 대해 상담할 만한 인물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가장 깔끔하게 대화할만한 사람은 현재 통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시후 녀석은 한창 필드를 떠돌고 있겠지.”
헌터 와치면 모를까 저런 식으로 필드에 들어갈 때 휴대폰을 들고 가는 미친놈은 없다.
애초에 가지고 들어가더라도 일정 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전화기가 켜져 있을 리 만무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한국의 후원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것이다.
내가 그간 쌓아왔던 인맥들, 가깝게는 바로 근처에 있는 블랙부터 관리국장, 서이수와 중국 쪽에 꽤 인맥이 있는 듯한 북진의 정상철 길드장까지.
이번 일에 대해 조언을 구할만한 곳은 충분히 있었다.
이쪽은 제대로 된 조언을 받자면 어느 정도 내 사정을 풀어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 숨길 부분과 꺼낼 부분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둘째는 회귀자 그룹 중 연락처를 알고 있는 이들이다.
다만, 이건 선택지가 갈렸다.
일전에 한국에서 만났을 때, 엔도 츠바사와 리 메이링. 두 사람의 연락처를 모두 받아 가지고 있는데 각자의 장단점이 다르다.
‘츠바사 쪽은 시후의 보장도 있지만, 내 심정적으로도 상대적으로 안전해 보이긴 해. 다만···.’
제갈민처럼 자신을 주시하는 인물이 있다면, 엔도 츠바사나 회귀자 조직에 부담이 갈 수 있는 일이다.
기껏 숨어서 만난 의미가 퇴색되는 것이다.
‘이미 한 명이 알아챘다곤 하지만, 우연이 겹쳤을 가능성은 충분해.’
누구나 제갈가의 가주처럼 눈치챈다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반면, 명교 교주인 리 메이링은 아예 나와의 관계를 숨기려는 생각 자체가 없어 보였다.
한국에서 약속 장소로 정했던 장소도 평범한 카페 하나를 통째로 빌렸을 뿐, 번화가에서 대놓고 만났다.
대리인을 시켜서 예약하고 슬쩍 들어오는 정도의 준비성은 있긴 했는데, 그뿐이었다.
그걸 확인한 시후가 인상을 처음부터 구기긴 했었는데, 별말은 없었던 걸 보니 그 녀석도 어차피 이번 중국행에서 들킬 거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마지막은 기억이다.
나 자신에게 묻는 방법이 있었다.
‘그래. 필요한 점수가 꽤 많이 줄었지.’
처음 등장했던 당시 1억이었던 요구 점수는 어느새 7,300만까지 줄어들어 있었다.
그걸로 기억에 요구되는 점수 역시 정보의 가치가 떨어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동적으로 바뀐다는 걸 알았다.
솔직히 아직도 좀 부담이 가는 수치임엔 분명했다.
그리고 내심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다.
결국, 한참의 고민 끝에 나는 절충안을 택하기로 했다.
자세한 속사정은 숨기고 블랙과 서이수, 그리고 정상철 길드장에게 연달아 연락을 돌렸고 그들의 대답은 각각 다음과 같았다.
[제갈민? 그 인간은 갑자기 또 왜? 방금 연회장에서 만났냐?]
[아, 따로 만났던 적? 산동에서 빌런 잡는 작전 하면서 두어 번 정도 만난 적은 있지.]
[한 성을 잡은 길드장 답게 꽤 합리적인 지휘를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리고 블랙은 개인적인 친분은 전혀 없다며 더 정보를 바라는 내게 선을 그었다.
[제갈세가? 그쪽 가주랑은 따로 만난 적 없어. 거기 김수철은 몇 번 만나봤을 텐데?]
[아, 이미 대화했어? 내가 아는 거라···,]
[중국은 외국에 유화적인 쪽과 강경하게 나오는 쪽으로 파벌이 갈려있어. 그 지역은 명백히 호의적이지. 주변국과 활발하게 무역하는 편이거든.]
[사실, 너도 알다시피 하면 좋긴 한데, 굳이 중국은 무역을 할 필요가 없잖아? 그런데 그 가문은 표국이라는 이름의 용병단까지 따로 운용하면서 적극적이야.]
[그래. 네 말대로 우리 금성처럼 세계적으로 놀려는 길드라고 봐야지.]
서이수와의 대화에서는 약간 도움이 될 법도 한 아리송한 정보를 얻었다.
[제갈민? 그 친구는 왜? 아냐고? 아주 잘 알지! 12년 전인가, 그때부터 3년 정도 북쪽 해골바가지가 내려올 때 함께 싸웠던 적 있다.]
[아주 야심가였어. 오만할 정도로 자신감 넘치던 인간으로 기억하는데, 과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군.]
[나름 사람 보는 눈은 괜찮은지 당시 알려지지 않은 놈 중에 괜찮은 애들 여럿 영입해 갔었다.]
[떠날 때, 북진의 분파를 중국에 내는 게 어떠냐고 하더군. 그건 뭔가 이용당하는 느낌이라 거절했었지.]
북진의 정상철 길드장과의 대화에선 과거 어떤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힌트 약간을 얻었다.
이후, 상담할 회귀자 두 사람 중에 내가 선택한 건 메이링 교주 쪽이었다.
[뭐, 그야 당연히 내가 떠나면 그럴 거라 예상했어요.]
“알면서 그리하셨다면, 분명 이유가 있었겠죠.”
[그럼요. 열에 일곱은 동료가 되고 셋은 중립을 지키는 인물인데. 당연히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해서 대화 나누라고 한 건데. 시후 녀석, 정보를 안 줘도 너무 안 줬는데?]
“···설마 그도 동료였던 겁니까?”
[그렇죠? 그런데 도선 할배도 그렇고 그 아재도 그렇고 난 별로 안 좋아해서. 그래도 차라리 그쪽이 말이 통하는 편이었는데, 아쉽게 됐죠. 그보다 만나봤으면 이젠 알겠네.]
“뭘 말입니까?”
[유성씨. 중국 통합계획이라는 일견 무모해 보이는 발상, 과연 누굴 중심으로 시도했었을 것 같아요?]
“아!”
다들 생각은 있었겠지만, 일전에 시도한 적이 있다면 말이 통하는 누군가와 함께 시도했을 것이다.
그저 막연히 곤륜 도선이 아니었을까 했는데, 반대편 세력인 명교와 저리 심하게 대립하는 상태라면 그쪽보다는 중재할만한 위치에서 시도했었을 것이다.
중국 북부와 정파의 한 축인 세가 연합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제갈가의 실질적 가주, 세계적으로 명망이 높은 길드인데다 무역으로 쌓은 막대한 부까지. 충분히 그럴만한 위치다.
[나랑은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싫어했죠. 주거민, 그 사람이 사람됨은 좋긴 한데, 덕분에 시도조차 못 해보게 된 내 입장에선 짜증이 나니까.]
“그러면 그는 결국 실패하고 그만둔 겁니까?”
[뭐, 그 후에도 책임감은 있는지 무리할 정도로 계속 따라오긴 했는데. 그 뭐라고 해야 하지? 이 일이라는 게 사실 한계가 있어요. 그만둔 사람을 가까운 시일 내 다시 끌어들이는 건 가능한 꺼리는 편이고.]
내가 침묵하자 폰 화면 너머에서 재밌다는 듯 생글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궁금증은 좀 풀렸어요? 분명 선택지가 꽤 있었을 텐데. 그 중에 굳이 내게 연락해왔다는 건, 이쪽에 호의가 있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절충안이었고 모두 시도하면서 다음 방법을 더 쓸지 고민하는 중이었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쓸데없이 그걸 밝힐 필요는 없을 터다.
“···조언을 좀 구하려고 합니다. 이 기억이라는 게 그만큼이나 중요한 겁니까? 솔직히 다른 이들이 당신을 이렇게까지 경계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이 두 번째 기억을 열어보는 순간, 날 계속 의심하게 되겠죠. 못해도 서너 개 이상을 더 열어보지 않는 한, 날 신뢰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을 거라는 건 나도 잘 알거든요!]
그 말에서 나도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메이링, 당신은 우리의 ‘적’이었군요.”
[후후, 정답이랍니다. 네. 매번 그랬겠죠. 이 시점에서 당신이 내게 선입견을 품지 않은 채 만나는 건, 오랜만이라 기쁘네요. 이번은 아주 시작이 좋아요.]
“솔직하게 말하죠. 난 이 기억을 열어보는 게 사실 조금 겁납니다.”
[어째서요? 남들이 모르는 미래의 정보를 안다는 건 재밌지 않나요?]
난 처음 첫 번째 기억을 받았을 때, 겪었던 충격과 한동안 겪었던 인격적인 혼란에 관해 이야기했다.
기억의 재촉과 아포칼립스의 위협에 입 꾹 다물고 겉으로는 웃으며, 가능한 냉철하게 활동을 했지만, 그런 심정적인 혼란이 아예 없던 것이 아니었다.
[아, 그래서 기억을 열어보지 않고 있는 건가요? 음, 이런 걸 듣는 건 처음인데. 하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을 거에요. 설령 아니라고 할지라도 당신은 결국 열어보게 될 겁니다.]
“나도 내가 이걸 끝까지 열어보지 않을 거라는 건 아닙니다.”
[시작의 당신과 이후의 당신은 많이 달라요. 그러니 자신의 인격이 변한 것처럼 느껴졌겠죠. 하지만 이미 적응했잖아요?]
인생의 굴곡이 지나치게 달랐기 때문에 충격적으로 느껴졌을 거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건 일리가 있었다.
지금의 내가 비슷한 기억을 다시 받는다고 해서 지난번처럼 정체성의 혼란을 겪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난 결심을 굳히기 위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건 기억이 확실합니까? 그 당시의 내가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단언컨대, 우리와 달리 유성씨는 회귀가 아니에요. 그리고 그렇기에 당신의 인생은 당신의 것이고 그 기억은 그저 참고자료일 뿐이죠. 두려워할 것이 아니랍니다.]
난 교주의 그 단호함에서 비로소 이 기억을 열어볼 각오가 되었다.
결심이 선 순간에 주저하지 않기 위해 띄워놓은 창에서 해당 기억의 구매를 선택했다.
곧이어 필름이 끊기는 것 같은 충격과 함께 쓰러진 내가 다시 깨어난 것은 시간상으로 날짜가 지나간 뒤였다.
그리고 깨어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심이었다.
“그 교주가 동료가 된다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이게 말이 된다고? 그 ‘거짓 예언자’가?”
기억에서 본 대로라면, 리 메이링 그 여자는 절대 아군이 될 수 없는 인물이다.
아니, 그건 아예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가장 거대한 열세 명의 거짓 예언자 중 하나이자, 동시에 마스터 테리온의 기수 후보자 중 하나.”
도저히 믿기지 않았기에 내 입에선 지금으로선 예언에 가까운 내용이 흘러나왔다.
말을 내뱉고 나서 뒤늦게 돌아오는 반동에 한 움큼의 핏물을 뱉어낸 나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몸 속의 내장이 진탕이 된 것 같다. 의자에 주저앉아 비상용 힐링팩으로 몸을 치유하며 앞으론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제약이라는 걸 나도 겪어보게 되는군. 즉, 그런 근거를 찾아낸 것도 아닌데 함부로 말로 내뱉으면 안 된다는 거겠지.’
그나마 주변에 사람이 없었기에 이만했던 것이리라.
마스터 테리온, 묵시록의 붉은 용을 타고 나타나는 모독자 릴리스. 그리고 우리가 릴리스의 유충들이라 부르던 여성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저 교주였다.
그리고 드물게 두 가지 역할을 전부 맡았던 만큼, 대개는 몹시 높은 확률로 리 메이링이 그 릴리스가 됐었다.
‘하지만 아직 모든 걸 알게 된 건 아니다.’
그저 몇몇 사건을 통해 몇 가지 사건이 확실해졌을 뿐, 아직 그 전체를 아는 게 아니다. 예언은 반드시 찾아야만 했다.
‘다음 기억은 역시 아직 없나?’
아직 개방될 시간이 되지 않은 것인지 두 번째를 열었음에도 세 번째 기억은 상점에 올라오지 않았다.
이번 기억으로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어째서 내 회귀가 기억으로 바뀌었는지, 그 이유의 한 단면이었다. 그리고 메이링의 말처럼 처음과 달리 정체성의 혼란은 전혀 없었다.
애초에 내 두 번째 자체가 그렇게 구성되어 있었다. 그 기억은 스스로 회귀를 포기한 17회차의 내 이야기였다.
더불어 회상으로 알 수 있던 몇몇 다른 회차의 그 수많은 장면이나 이야기 중에서도 가장 냉정했고 가장 이타적이었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이기적이었던, 그런 남자의 이야기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 깨어났나 보네. 기억을 본 소감은 어땠나요?]
바닥에 떨어져 있던 전화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쓰러져있던 몇 시간 동안이나 전화를 끊지 않았는지 통화 시간은 여섯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내가 피를 뿜은 건, 혼자 말해서가 아니라 이 통화가 끊어지지 않아서였나보다. 그리고 그 말은 상대가 내가 내뱉은 그 의심을 모두 들었을 거란 뜻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메이링은 마치 자신은 전혀 못 들었다는 듯, 그렇게 물어왔다.
“메이링, 넌 대체 왜···.”
[안타깝게도 저란 여자, 고작 한 번 가지고는 만족을 못 하는 여자랍니다.]
“교주. 그건 ‘지금의’ 내가 아니야.”
[난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요? 하긴, 그 두 번째 기억 가지곤 내가 어떤 여자인지 당신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죠.]
“넌 정말···!”
그 의심스러운 기억 속 악연 탓에 속에서 들끓는 감정에다 저 아무렇지도 않아하는 발언에 그때의 날 사랑하기는 했느냐고 고함을 치려다가 애써 삼키면서 입을 다물었다.
이 두 번째 기억에도 화면 너머의 메이링과의 인연을 짐작할 수 있을법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회귀를 그만두기까지의 나와 이 여자는 끊임없이 싸우기만 했다.
그리고 그렇다면 내겐 어떤 기억과 어떤 추억이 있는지 모를 이 여자를 다그치거나 판단할만한 그 어떠한 자격도 없었다.
[당신은 한결같은 그 객관적인 점이 좋다니까. 여기로 빨리 오시기나 하세요. 지금의 당신이라면, 이 파티에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눈덩이가 얼마나 커질진 잘 알겠죠?]
“그게 우리 사이에서 당신이 맡은 역할인 건가?”
[그래요. 당신과 당신의 동료가 날 매번 의심하면서도 매번 데려가며, 또 건들지 못하고 놔두는 이유기도 하죠. 이런 초기에 당신의 특성과 능력을 가장 증폭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나만 한 위치가 없으니까.]
“···넌 내가 하려고 했을 말, 아마 눈치챘겠지.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약간 딱딱해진 목소리와 이름이 아닌 ‘당신’이라는 호칭으로 나를 지칭하는 말까지.
조금 전 내가 감정적으로 외치려다 간신히 입 안에 머금은 말에 교주의 기분이 안 좋아진 건 분명했다.
‘믿을 수 없는 여자야. 역시 의심이 가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번째 기억을 열기 직전까지의 대화와 교류 탓인지 조금은 믿고 싶어졌다.
[기분이 나빠요? 아뇨. 난 기분이 좋은데요! 이 시점이면 무시로 일관하는 게 보통인데, 이 정도면 시작이 아주 좋아요. 유성씨에게 이렇게 사과를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고? 앞으로가 기대가 되네요.]
메이링과의 통화를 끊은 뒤, 나는 눈을 감고 과거의 장면 속으로 침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