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 죽절산
비행선들은 새벽녘에 공항에 내려앉았다. 미리 탑승 인원의 입국 수속은 전부 다 해놨지만, 공항에서 나가려면 그 외에도 여러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래서 고작 하루 머무는 여기선 굳이 귀찮은 절차를 거치며 관광하느니, 함 내에서 쉬면서 아예 내리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이들도 많았다.
“파트너요?”
“예. 은비씨.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그게. 저도 도와드리고 싶긴 한데, 죄송하게도···.”
난 아까 생각했던 대로 황은비에게 로텍의 기함에서 벌어질 연회에 파트너로 참가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중이다.
하지만 예상외로 그녀는 난감해 했고 그런 거절의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야, 유성아. 같이 부탁하면 선배인 내 쪽이 우선인 건 당연하잖냐. 너도 알다시피 양보도 못 해줘. 박사 녀석도 지금 파트너 구하느라 바쁘니까. 양보해도 그쪽이 우선이지.”
“아···.”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청수호에 함께 탑승한 히어로 중에선 황은비가 유일한 홍일점이다. 히어로들도 여기서 초청을 받았고 용무가 있다면 황은비에게 충분히 사전에 부탁했을만했다.
“영웅 협회 쪽도 여기 용무가 있나 보군요.”
“그래. 중국 영웅 협회에서 가는 길에 우리에게 맡길 게 있는지 참가해달라 초청이 왔더라. 물건만 따로 전달받아도 되지만, 여긴 남의 집이잖나. 중국 애들, 대개는 대인배처럼 구는데 체면 같은 걸로 바람 맞히면 은근히 쪼잔해서 뒷맛이 안 좋아.”
“여기 정세를 들을 필요는 있으니까.”
이번 여정에 관리국 쪽 대표 겸해서 따라온 히어로, 박사가 지나가다가 대화 중간에 끼어들었다.
“너는 그래서. 파트너는 구했냐?”
“선배, 지금 저희 히어로들 중에 딱 하나 있는 홍일점 차지해놓고 그러시면 약 올리는 거로 밖에 안 들립니다. 대체 왜인지 모르겠는데, 관리국 애들이 죄다 저를 퇴짜를 놔서···.”
그 말에 블랙이 박사를 몹시 미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딱 봐도 한심하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그건 가볍게 한숨을 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곤 흠칫하는 황은비도 마찬가지였다.
난 두 히어로 남녀의 그 표정들에서 비상한 눈치로 진짜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넌 관리국에도 적이 있잖냐. 그냥 직급으로 찍어눌러. 그러면 누가 거절하겠어?”
“아니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요. 큰일이 날 소리 하십니다. 부탁하는 거야 충분히 할 수 있다지만, 억지로 데려가는 건 무리죠. 히어로가 그러면 구설수 돌기 딱 좋아요.”
“거···, 그래. 그러냐? 참 불쌍하기도 하지.”
“하, 그렇게 불쌍하면 좀 도와주시죠? 선배 인맥이야 얇긴 하지만, 엄청 넓지 않습니까?”
“기분이 나빠서 싫다! 이 자식아!”
말은 그리하면서도 헌터와치를 꺼내 이번 여정에 포함된 인원들의 비상 연락망을 띄운 뒤, 명단 내의 여성 연락처 중 아는 인물을 뒤적거리는 김수철이다.
“찾는 김에 너도 좀 연결해주랴?”
“괜찮습니다. 구하다가 정 안 되면 영하 형에게 부탁하면 될 테니까요.”
“영하? 그게 누구더라···아, 로텍 둘째? 어디서 불렀나 했더니 넌 그쪽 통해서였구만.”
진짜 이유까지 말해줄 필욘 없었기에 난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멀어졌다.
내가 돌아서자 두 히어로들은 연락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박사에게 누가 어울릴지에 대한 토의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대체 누구를 데려가야 하는지 한참을 고민하게 된, 내 근심거리는 예상외의 인물들이 방문하면서 끝났다.
“김유성. 너, 이번에 시간 좀 남냐?”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그게, 우리가 이번에 좀 귀찮은 일을 하게 돼서 말이지. 사람이 한 명 필요하거든?”
직감적으로 난 이게 무슨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금성에서도 초청받았나 보군요.”
내 답에 최서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성에서도···? 아니, 넌 왜? 휘성아, 이거 우리 길드 정도 되니까 초청받는 거라 하지 않았어?”
“그거 뭔가 좀 자존심 상하는 느낌인데요.”
내 작은 항의는 들은 척도 안 하는 최서린의 마이페이스에 그대로 씹혔다.
“뭐, 그렇긴 한데, 유성 형님이야 여기저기 기이한 인맥이 많으니 몇 다리 건너 초청받았을지도 모르죠.”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채 반쯤 졸고 있는 강소연을 거의 부축하다시피 하며 지탱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강휘성이 그리 답했다.
“음···. 하긴, 이 녀석 이상하게 인맥 넓어. 아! 그러면 설마 너도 이미 파트너 구했어? 그럼 곤란한데!”
“이쪽도 영하 형에게 연락받은 지는 얼마 안 됐습니다.”
“아하? 정영하씨가 이런 자리에 데려가 소개할만한 멀쩡한 인맥이 좀 필요했나 보네요. 아무래도 정신을 차린 지는 얼마 안 됐다는 평이니, 제대로 된 외부 인맥이 많지는 않을 테죠.”
강휘성이 상황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까 대화 내용을 생각하면 그런 강요까지는 아니었지만, 정영하도 그런 의도가 아예 없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그러면 아직 없다는 거잖아. 그치? 다른 잡다한 설명이 뭐가 필요해? 그게 중요한 거지.”
“···뭐, 그렇죠. 그러면 두 분 중에 어느 쪽입니까?”
“당연히 소연이잖아. 당연한 건 왜 물어봐? 저 둘이 남매로 가면 밖에 인간들이 보기엔 더럽게 없어 보이지 않겠어? 그리고 휘성이는 누가 봐도 만만한데, 거기에 남매라고 해봐라. 귀찮은 파리가 꼬일 게 뻔하지.”
평소 같은 최서린의 강소연에 대한 과보호인데, 그건 나로서도 다행이다. 그녀의 높은 페이스나 주목받기 좋아하는 성격이 나와 안 맞다 보니 같이 있으면 은근히 피곤한 편이었다.
가끔 냉소적인 모습을 보여주긴 해도 대개는 얌전하고 조용한 편인 강소연 쪽이 파트너로선 나았다.
“그럼 형님, 내일 연회장에서 저희 누나 잘 좀 부탁합니다.”
“그런데 이거 본인이 듣고 있는 건 맞지?”
“이래 보여도 다 듣고 머릿속에 입력하고는 있을 걸요? 거기에 어차피 저도 서린 누나한테 끌려가니까. 정 의심이 가시면 제가 잘 챙겨서 보낼게요.”
파트너 문제는 그렇게 해결됐는데, 다음날이 되어 헌터 예복을 입고 강소연과 연회장에 들어가려는데 그 입구에서 좀 꺼림칙한 얼굴을 다시 만나게 됐다.
“야호, 유성씨! 중국에 온 걸 환영해요?”
“명교 교주님, 한참 전에 떠나신 분이 대체 왜 여기 계십니까?”
“어···? 이쪽은 ‘이번’ 애인?”
최서린과는 다른 의미에서 마이페이스인 메이링은 싱글거리는 얼굴로 화제를 돌리는 것으로 자기 페이스로 끌고 가려고 든다.
슬쩍 곁눈질하니 강소연이 게슴츠레한 눈을 한 채 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보였다. 평판이 걱정된 나는 교주에게 가벼운 경고의 말을 건넸다.
“오해살만한 말이나 행동은 좀 자제해주시죠.”
누가 들으면 내가 바람둥이인 줄 알겠다. 회귀 전의 나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난 여자 한 번 사귀어본 적 없는 모태 솔로로서 몹시 억울한 소리다.
그것 뿐만이 아니라, 입장하려다가 입구에서 지체되면서 몰리는 시선이 점점 부담스러워지는 중이었다.
상대가 보통 사람이면 시선이 금방 다시 흩어졌겠지만, 앞에 인물의 신분이 신분이다 보니 시선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쌓이기만 한다.
여기저기서 내 정체를 묻는 말이 오가는 것이 들렸다.
“후후, 확실히 신선하긴 하네. 대개 이 시기쯤에 여기 와서 날 봤으면 그냥 무시하면서 밀고 들어갔을 텐데.”
“지금이라도 당연히 그럴 수 있습니다만···.”
“아이 참, 그렇게 위협하는 게 아니라 말도 안 받아주고 그냥 밀고 들어갔을 거라니까요? 저기 놀란 늙다리들이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 같은데, 본 교주는 이만 빠지도록 할게요. 그럼 본단이 있는 충칭에서 다시 봐요?”
그렇게 교주가 떠나고 난 뒤, 난 이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도움이었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처음 보는군. 나는 무림맹에서 파견을 나온 리 하오란이라 하네. 도선께선 전달을 받았을 거라 하셨는데. 아무래도 우리도 사진으로만 본지라. 조금 전 일도 그렇고 확신은 하고 있네만, 확인이 좀 필요해서 말이야.”
“예. 곤륜산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그렇네.”
“이야기는 전해 들었습니다.”
나를 만나기 위해 다가온 두 사람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도사와 그 제자쯤으로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말은 리 하오란이라 자신을 소개한 중년인 쪽에서 건네는 중이었다.
“그런데 방금 그 망할 요녀는···.”
“특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한국에서 이번에 발생한 사태로 잠깐 마주쳤던 적이 있어 가벼운 환담을 했을 뿐입니다. 그리 반가운 얼굴은 아니었죠.”
“하긴, 멀리서 보기에도 그리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진 않았네만. 가까이해서 좋을 게 없는 여자일세.”
먼저 이 두 명의 도인들 쪽에서 먼저 다가오게 한 것 자체가 몹시 큰 도움이었다.
‘나이 많은 쪽이 전진파의 호법, 적은 쪽도 무당의 각주라고 하니···.’
중국 전체로 두더라도 그리 낮은 신분들이 아니다.
모든게 인맥으로 이뤄진다는 중국 사회에서 이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 자체로 이 안에서 얕보인다거나 귀찮은 일을 당할 가능성은 순식간에 사라진 셈이다.
거기에 내부에 자리한 주요 인물들의 시선을 한 번씩 받아둔 것 자체가 사람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다가오게 만든 것이 가벼운 인맥을 다지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시후 녀석 말대로 교주가 내게 우호적일 거라는 말 만큼은 부정하기가 어렵겠는데.’
마지막으로 교주가 다가온 이유에 대해 변명하는 과정에서 내가 뭐 하는 사람인지 자연스럽게 소개할 수 있다는 것도 유용했다.
이번 동해안 사태 관련한 활약상이나 내가 참가한 전투 등에 대해 말해주면 가볍게 감탄사를 터뜨리거나 했다.
아무래도 주로 중국 북부에서 이번 한국에서 벌어지는 동해안 정벌에 많이 파견했고 여기 산동은 얼마 전에 많은 전력을 보낸 참이다.
그와 관련된 이전 전쟁 때의 작전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연회장의 이벤트가 진행되고 함선 여기저기로 사람들이 흩어지거나, 아예 퇴장하는 사람도 생기는 등 그런 가벼운 대화도 대부분 끝나간다.
그 와중에 내게 붙어있던 강소연도 금성의 일행들에 휩쓸려 어디론가 멀어졌다.
그렇게 내게서 관심이 어느 정도 떨어지자 두 도인은 구석으로 이동해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이 지긋한 도인 쪽도 가벼운 인사말 외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있겠으나, 우리는 그대가 중국에 있는 동안 경호를 맡기 위해 파견된 인물들일세. 도선께선 이유는 말씀해주지 않으셨네만, 아마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예. 어르신. 다른 걸 떠나서 저 요녀가 달라붙는 것만 봐도 이자가 귀인인 건 확실합니다.”
“다른 이들 앞이라 뭐라 하진 않았으나, 그 여자 역시 한 성을 이끄는 자이니만큼 존중해야 해. 자네 의기는 알겠으나, 언행에는 조심하게.”
“오신 분은 두 분이 전부입니까?”
“어르신과 나, 둘이면 충분하고도 남아.”
“무력대는 각 문파의 비행선을 타고 충징으로 직행할 걸세. 그전까지는 우리 둘이 혹시 모를 사태에서 자네를 보호하게 되겠지. 가는 동안에는 신세를 좀 지겠네.”
어차피 선실에는 충분한 여유가 있으니, 저들이 부하를 끌고 온 게 아니라면 함께 가는 건 어려울 것은 없었다.
“두 분, 맹의 장로분들께선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정영하가 누군가를 달고선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이쪽에서는 전혀 소개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정영하를 통해서 접근해오는 것 같다.
“주거 민, 가주 대리. 우린 세가 연합과는 딱히 할 말이 없네만···.”
주거 민, 우리말로 하면 제갈민이다. 뒤에 붙은 칭호로 보아 제갈가의 후계자인 것 같다.
“그래도 동맹이 아닙니까? 껴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무슨 일인지는 좀 알려주시죠?”
“대륙에서 벌어지는 일을 자네가 모른다 말하는 건 좀 웃긴 일인데. 그 하오문이 자네들 휘하 조직이 아닌가?”
“저희가 아무리 발이 넓어도 주변 국가까지 손을 뻗치진 못합니다. 지금이 1차 격변 시기도 아니고 조각난 저희 대륙의 위상도 예전 같진 않지요. 나름의 국제관계라는 걸 고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라 한들 나에 대한 건 당연히 모르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하지만 서늘한 눈동자로 나를 한 차례 훑고 가는 이 중년인의 시선에서 그가 나에 대해 전혀 모르진 않다는 걸 느꼈다.
결국, 그가 지금 다가와서 캐내고자 하는 건 새로 수집된 정보. 명교 교주가 관심을 보이는 이유와 갑자기 자기 영역권도 아닌 산동에 무림맹 장로들이 허겁지겁 날아온 이유일 것이다.
두 장로가 입을 꾹 다물자 고개를 갸웃한 제갈민이 대화를 이어가려는지 민감한 화제를 꺼내 들었다.
“맹에서는 지금 남부에서 터진 사태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려 합니까?”
“그거야 도선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하시겠지. 거보게. 자네, 다 알면서 아닌 척한 거였잖나?”
“아하?”
그가 내뱉은 감탄사에 두 도인의 얼굴이 굳었다.
“지금 이들의 이동 경로에 충징이 포함된 건 확실하군요.”
“이들의 경로를 우리가 알 리가 있나. 자네는 무슨 근거로 확신하나?”
절대 확신을 주지 않겠다는 듯, 하오란이 그리 즉답했다.
“먼저, 두 분 직속 부대가 전부 이동 중이라는 걸 들고 싶군요. 뭐, 맹에서 굳이 여기까지 오신 것 자체도 단순히 의심이 갑니다.”
거기까지는 누구나 의심해볼 수 있는 내용이고 찔러볼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건, 저처럼 따로 정보조직을 운영하시는 것도 아닌 두 분이 곤륜 도선께 하필 그런 내용을 전달받으시고도 여기에 계시다는 것 그 자체죠.”
“···으음.”
“두 분이 충징에 가시는 것도 아닌데, 그런 불필요한 정보를 도선께서 주셨을 리가 있습니까? 따라서 두 분도 충징으로 가셔야 한다. 그런데 따로 돌아가는 항공편을 예약하셨다는 정보는 들어오지 않았군요.”
그러면서 그 외에도 자기 휘하 병력 지휘권을 누군가에게 뺏긴 것치곤 표정이 지나치게 밝다는 등 몇 가지 심정적 단서 몇 가지를 제갈민은 덧붙였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다면 중요하고 아니라면 아니겠지요. 그러나 이번 일의 중심에 이자가 있다며, 감이 외치고 있어서 말입니다. 그러니 이 산동의 주인으로서, 제가 이 청년을 정식으로 소개를 좀 받고 싶은데요. 이제 대화에 껴도 되겠습니까?”
거절하면 중국에 있는 동안 몹시 귀찮게 해주겠다는 무언의 압박을 내뿜으면서 산동의 주인이 그렇게 합석을 요구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