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 비상
그리고 이어지는 설명은 나로서도 정신이 아득해지게 만드는 대사건이었다.
“그러니까. 죽절산을 열어버렸다고?”
황당해하는 강시후의 물음에 메이링은 질질 짜다 말고 해맑게 웃었다.
“응!”
순간순간의 감정 변화가 너무 빠른데, 그게 너무 자연스럽다보니 뭐가 진심인지 모르겠다.
그 흔히 볼 수 없는 능력에서 벌써 뭔가 비범함이 느껴진다.
“이 아줌마가! 뭘 잘했다고 이렇게 해맑아? 그걸 왜 지금 열어!”
“잠깐만. 죽절산이 내가 알고 있는 그거 맞아?”
“넵. 유성 오빠. 맞아효오오오!”
“···교주님. 저보다 나이 많지 않습니까?”
“멋있으면 다 오빠니까?”
상상을 초월하는 사고에 시후는 메이링의 멱살을 잡는 중이었고 잘못한 게 있어서인지, 얌전히 잡혀 흔들려주던 메이링은 헤실헤실 웃다가도 이내 급정색했다.
“이제 그만해. 어지러워. 시후. 더 갈구면 선 넘는 거 알지?”
역시 순식간에 수습되는 감정과 분위기 변화가 소름이 돋는다. 그녀가 정색하는 순간, 이 공간의 분위기가 또 확 바뀌었다.
“하-, 아줌마. 자세히 설명해줘 봐.”
“그러니까···.”
요컨대 명교에서 죽절산이 열리는 타이밍을 뒤로 조절하려고 작전을 펼쳐 해당 지역 장악에 들어갔는데, 냄새를 맡은 혈교와 아미파가 끼어든 탓에 일이 틀어져서 예정보다 배는 일찍 열린 상황이다.
“너무 빠른데. 그래도 원래대로 신대륙 타이밍이랑 겹치지 않은 건 다행이긴 한데···.”
“시후, 이거 지금 열리면 중국 남부는 초토화 아닌가?”
내가 기억하는 대로라면 죽절산이 열리는 여파는 이번에 우리나라에서 터진 ‘동해안 사태 x5’라고 하면 설명이 간단하다.
하지만 내 질문에 강시후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원래는 거기랑 같이 열려서 꼬인 거라서.”
“그러면 피해는 어떻게 되는 거지?”
“최악이라도 동남아랑 인도 쪽 육로가 끊기는 선에서 막을 수는 있어. 뭐, 같이 나오느니 매도 먼저 맞는 게 차라리 낫긴 할 건데. 음···.”
강시후가 고민에 빠지자 교주 쪽에서 슬며시 끼어들어 왔다.
“마침 한국 쪽은 잘 되어가는 것 같아서. 지금쯤이면 유성 씨도 두 번째 정돈 열었을 거니까. 변수 어떻게 대응할지 의논하려고 내팽개치고 일단 왔어.”
“의논은 그렇다고 치고 뭔가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그러면 수습은?”
“어···. 일단 혈교 미친놈이랑 아미파 쌍년한테 던져두고 왔는데?”
“아니. 내가 아줌마 그때그때 땜질하면서 대책 없이 사는 건 알았지만···. 참···.”
“응응. 초기 대응은 잘한 것 같지?”
“그건 그러네. 그대로 내버려 두면 아줌마네 성장에 방해물인 혈교랑 아미파는 깔끔하게 망하겠는데. 어차피 원래는 그쪽 영역이니 떠넘기는 명분도 확실하니까.”
“아닌 것 같아도 다 생각 있었다. 이 말씀이야.”
“그런 것치곤 거기 둘 끝장나면 아줌마네 차례잖아. 생각이 있으면 여기 달려오는 게 아니라, 일단 알리고 외교적인 대응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내가 그런 능력이 어딨어? 알잖아. 다른 데는 우리 엄청나게 싫어하는 거.”
순식간에 가련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자세로 처음처럼 우는 표정을 짓는데, 누가 봐도 진심으로 우는 모습이다.
이상하게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 감정이 마치 그녀에게 동화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변화하는 그 감정의 여파를 따라가기가 힘들 지경이다.
“지금 대장 상태로는 적응하기 힘드니까. 장난질은 그만둬.”
“···혹시나 했는데, 설마 아직도 두 번째를 못 연 거야? 그럼 솔직히 큰 도움 안 되지 않나. 예상외인데?”
메이링은 그리 말하더니 묘한 기색으로 내 쪽으로 슬며시 달라붙는다. 하지만 강시후가 그 사이로 단검을 집어 던지면서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하? 이건 선전포고라고 봐도 되니? 방금 살기 뭐야?”
“이쪽에 간섭할 생각하지 마. 각자 영역을 지켜, 메이링.”
갑자기 터진, 여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소름이 끼치는 살기, 나를 향하는 게 아닌데도 몸이 굳어버릴 지경이었다.
강시후는 여태 본 적 없던 지독한 냉기가 흐르는 무표정으로 메이링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메이링은 부채를 꺼내 입을 가린 채 요염한 소리를 내며 웃을 뿐이다.
“그래. 이 지역은 너희 집이라 이거지? 그런데 어쩌지. 지금의 시후 넌, 별로 안 무서운데.”
“네 실력으로 꿈길 타기 전에 날 일격에 죽일 자신은 있고? 지금 여기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츠바사 형이 있다는 걸 잊지 마시지. 그쪽은 좀 무섭나?”
“쯧, 그 검귀는 좀 그러네.”
아무래도 엔도 츠바사의 위치는 회귀 패밀리 중에서도 꽤 높은 편인 것 같다. 메이링 쪽에선 그 이름을 듣자 확 물러나는 기색을 보였다.
“초반이라고 하지만, 항상 여기만 유성을 독점하는 건 좀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 쪽에서 훨씬 더 잘 돌보고 키워줄 수 있는데. 유성씨도 큰물에서 놀아야지.”
“아줌마의 뭘 믿고? 예전에 했던 짓을 모두가 똑똑히 기억하는데. 다시 강조하지만, 더는 선 넘지 마. 곤륜산 도선 아저씨한테 연락하는 수가 있어.”
“칫···.”
곤륜산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메이링 쪽에서 두 손을 들어 올린다.
강시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아줌마. 난 아줌마가 참 싫어. 매번 만날 때마다 진이 빠진다고.”
“나도 넌 싫어. 코 풀게 옷 좀 다시 빌려줄래?”
“···꺼져.”
농담같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은 뒤에야 은은하게 유지되던 살벌하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강시후는 두통이 인다는 듯 이마를 꾹꾹 누르더니 본격적으로 문제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 사태, 생각하고 있는 건?”
“이렇게 된 거, 장로들이랑 내 의견은 국가 비상사태 걸고 한국이랑 일본에 공조 걸어서 아예 베트남 쪽으로 밀어 넣을까 생각 중인데. 여기 나가만 빨리 치우고 이쪽 전력이 도우러 오면 시기 상 피해 제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어?”
“베트남이야 망하기 직전이니 거기 밀어 넣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치자. 하지만 지금 시점에 한국, 일본 쪽 전력을 소모할 순 없어. 무조건 리치 제거가 최우선이야. 놈은···.”
“그거 말이지. 조금 다른 방법을 취할 때도 됐잖아?”
“다른 방법? 아아, 우리 친애하는 교주님께서 항상 말씀하시는 그 계획? 그 짧은 시간 내에 중국 통일해서 통제할 자신은 있고? 대체 폐기된 지 오래된 계획을 언제까지 혼자만 붙들 거야!”
“해봐야 아는 거지! 그건 나를 중심으로 했던 게 아니잖아!”
내가 모르는 내용으로 두 사람 사이에 말싸움이 벌어지는데,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보니 난 준비된 차와 다과만 마셨다. 두 사람의 말다툼이 좀 잦아들 기색이 보이고 나서야 내가 물었다.
“시후, 중국 통일은 왜 불가한 거냐?”
“여러 시도로 이미 무력 통일 말고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인데, 시간이 없어. 과정에서 소모되는 전력도 장난이 아니겠지. 그러느니 차라리 대전쟁 초기부터 미국과 유럽 중심으로 뭉치는 계획 쪽이 차라리 현실적이야.”
“중간마다 발생하는 모든 사건에 대응하면서 중국 통일을 하기엔 시간이 모자란 거군.”
“중국 무림만 해도 다섯으로 갈라져 있는데, 성마다 군벌에 문파가 갈려있어. 무엇보다 우리 다른 동료인 곤륜산 쪽에서도 이 아줌마 중심으로 통일하는 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거고.”
“그거야 유성씨가 잘 조율해주면 되는 문제야. 정 안 되면 곤륜 도선하고 반씩 나눠서 남북을 먹고 통제하면서 서로 협력하면 되는 일이잖아?”
“잘도 협력하겠다. 그리고 안 되는 걸 알잖아. 도선 아저씨네가 수습 안 되게 무너지는 건, 이미 몇 번 소모해서 결론이 난 이야기였어.”
강시후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그 타임라인, 다 기획해서 치밀하게 짜놓은 거 있어? 그 망할 대륙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몇인지는 알긴 해? 아직도 전부 다 파악이 안 됐어. 그 수많은 변수를 다 파악할 방법도! 조율할 수도 없지!”
메이링은 침묵했다.
나도 어렴풋이 문제가 뭔지는 알겠다.
중국은 워낙 큰 나라고 주변에 연결된 것이 너무 많은데다 인간 숫자도 어마어마한 탓에 큰 줄기 외에는 변수 통제가 어렵다는 말이겠지.
“결국 그쪽의 그 잘난 감과 임기응변을 믿고 가겠다는 거잖아. ‘한 번’을 그렇게 소비할 순 없어. 우리와 달리 대장은···!”
“됐어! 그만. 뭐, 버텨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내 뜻대로 가는 날도 오긴 할 테니까. 이건 일단 넘기자.”
“···그래.”
의도적으로 대화를 끊은 느낌이다.
“알다시피 이번에 대장이 그쪽 세력권으로 갈 거야. 물론, 곤륜쪽에도 당연히 연락은 보냈어. 이건 명단이고.”
“그래? 어디 보자, 인원이···. 헤-? 이 정도 명단이면 이번은 꽤 흐름이 괜찮네?”
“적당히 써먹는 건 말 안 하겠지만, 큰 사고 안 나게 잘 지켜. 이쪽은 멀쩡하게 토스했어.”
메이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리고 밀어 넣는 건 인도쪽하고 연락해. 어차피 대장도 인도 통해서 갈 거고. 아줌마, 그쪽하고는 사이 나쁘지 않잖아.”
“뭐, 위에 곤륜쪽에서만 진심으로 도와줘도 단순히 나라 밖으로 쳐내는 데는 큰 문제 없어. 온갖 생색내려 할 게 뻔한데 먼저 숙이고 들어가기가 싫어서 그렇지. 대국의 힘을 얕보지 말라고.”
“그놈의 대국 부심은···. 그러면 그렇게 하든가.”
“그래도 그 인간들 싫은 건 싫은 거니까. 연락해줘.”
강시후와 몇 가지 더 논의한 뒤, 메이링은 그렇게 떠났다.
“뭔가 위험한 여자 같은데. 중국에서는 조심해야 하려나.”
“대장한텐 전혀 안 위험할 거야. 연인이었던 적도 있으니까. 굳이 위험한 쪽을 따지자면 워낙 여장부 스타일이라 제멋대로 계획을 뒤틀려 드는 쪽이 위험하겠지. 그러니 어떤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가.”
강시후는 메이링이 날 중국에 눌러 앉게 하려 하거나 이상한 사건에 연루시킬지 모르니 조심하라고 강조했다.
“가장 좋은 건, 지금 두 번째를 여는 거겠지만. 대장도 대장 나름대로 계획이 있겠지. 어차피 통과해가는 동안에는 곤륜 쪽에서도 사람을 보낼 거니까. 그쪽에서 잘 대응해 줄 거야.”
“그러면 넌···.”
“난 대장이 나가 있는 타이밍에는 항상 저쪽에 들어갔었어.”
강시후가 가리킨 쪽은 북쪽이었다. 리치의 영역권을 말하는 거다. 말은 안 하지만 아무래도 그간 내 뒤를 봐주느라 본격적인 레벨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대장 말대로 나도 지금 수준으로는 곤란하니까. 저기 오가면서 번 돈이나 점수로 레벨, 특성, 장비 따위. 전부 다 맞춰야겠지.”
“강시후, 궁금한 게 좀 있는데.”
“뭔데?”
난 녀석과 헤어지기 전, 정말 물어보고 싶었던 걸 질문했다.
“왜 내가 대장인 거냐.”
“무슨 뜻이야? 대장이니까 대장이지.”
“나 같은 녀석보다 더 나은 녀석도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모든 일엔 이유가 있어. 대충 느꼈겠지만, 난 대장과 그리 친한 편은 아니야. 그런데도 내가 선택된 건, 아마 츠바사 형하고 곤륜 도선 아저씨랑 친밀해서 일본과 중국측을 조율할 사람으로 적합했기 때문이겠지.”
확실히, 엔도 츠바사 쪽이 처음 만나는 것인데도 확 가까운 느낌이었다면, 강시후와는 만난 이래로 쭉 조금 거리감이 느껴지긴 했다.
“내 말은 그러니까 꼭 어떤 자격이 있어야 지도자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거야. 리더는 단순하게 사람이 모이는 중심부에, 인연의 공통점이 가장 많다는 그런 사소한 이유만으로도 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이런 시대의 리더라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끝까지 살아남아서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강한 사람이어야 할 텐데.”
그 말에 강시후는 웃기는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끝까지 살아남을 만한? 하, 난 그 말에 대장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마 그것 만큼은 모두가 동의할걸? 그렇게 생각한다면 확실히 그게 자격일지도 모르겠네. 의외로 핵심을 잘 찌르잖아?”
“···뭔가, 그리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은데?”
“아니. 말 그대로의 의미야. 중요한 자질이니까. 적어도 당신은 절대 ‘포기’할 사람은 아니지. 그리고 그것 말고도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어. 그걸 지금 말해줄 순 없지만.”
“그러냐. 그러면 그건 몇 번을 가야 들을 수 있겠어?”
“글쎄. 지금 속도라면 아마도 세 번? 아니면 네 번 정도? 이제 더 궁금한 건 없지?”
내가 침묵하자 강시후는 고개를 끄덕이곤 돌아섰다.
“그래. 이제 헤어질 시간이야.”
그가 떠나가고 나 역시, 엔도 츠바사를 만난 뒤, 결심했던 대로 더 지체하지 않고 김진수를 만나서 부딪쳐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