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 질곡의 시간
은신처에 도착했지만, 다들 자리에 앉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채다.
난 중앙 땅을 파내고 그곳에 커다란 둥근 구슬 하나를 집어 던진 뒤, 한쪽에 쌓아둔 짐 덩이를 뒤져 돌돌 말린 침낭을 모두에게 하나씩 던져주었다.
혹시 몰라 게이트 침투조 인원 절반만큼은 챙겨뒀기에 침낭 숫자는 여유로웠다.
구슬에서 열기와 함께 은은한 빛이 나와서 컴컴한 시야를 어느 정도 회복시켜주었다.
각성자의 눈이 어둠을 꿰뚫어 본다고 해도 빛이 있는 것과 없는 건 눈의 피로도가 다르다.
“요 며칠은 서로 강행군이었을 텐데, 경계는 제가 가장 먼저 설 테니 다들 좀 쉬시죠.”
내가 그렇게 분위기를 환기할 겸 먼저 경계를 자처하니 그제야 우리 히어로 측에서 먼저 구슬 주변에 침낭을 깔고 앉았다.
“그럼 난 잠시 실례! 여기 들어와서 일주일 동안 이틀밖에 못 잤어. 하필 좀 자려는데 신호가 올라와서···.”
말이 좀 길지만, 요약하자면 조성훈에게 자는 동안 혹시 모르니 자길 지켜달라는 거다.
“그래. 먼저 한숨 붙여라.”
그 정도로 무방비한 모습을 보여준데다 나 역시 그대로 입구에 만들어둔 엉성한 의자에 앉고 나서야 이젠 전직 금화 길드원이 된 두 사람도 침낭을 깔고는 그 위에 앉았다.
그렇게 두 시간쯤 경계를 서고 있자 조성훈이 교대해주러 왔고 나도 별말 없이 그 교대를 받아 침낭 위에 앉았다. 화염 구슬을 계속 밖에 둬서인지 내부는 적당히 따뜻해진 것 같다.
내가 구슬을 회수하자 장하린이 대화를 걸어왔다.
“아깐 가면을 쓰고 있어서 누군가 했는데, 당신이 소문의 그 궁사군요?”
“저에 대해 무슨 소문이라도 돕니까?”
“그 금성의 서이수가 싸고도는 유망주가 있다는 걸로 아마 가장 많이 알고 있을걸요? 히어로 쪽에선 말은 안 하지만 블랙이 몇 마디 해서 알려졌고요.”
“그렇군요.”
“이번 사건에서 유지혜라는 그쪽 길드장 임팩트가 워낙 큰 탓인지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있지만, 알게 모르게 실력 있는 궁사라고 상위 랭커 사이에 소문이 도는 중이에요. 소문의 주인공을 만나게 됐네요.”
“이목이 가려지는 건 잘된 일이죠. 작은 길드에 있으면서 괜히 이름값만 높아지면 귀찮아지는 법이니까.”
그 말에 장하린은 제 검지를 살짝 깨물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도 그렇네요. 적당히 얕보지 못하게···.”
“하지만 정확한 판단은 하기 힘들 정도로.”
장하린이 내뱉은 그 뒷말은 그녀와 내가 동시에 내뱉었다. 이 헌터계에 정보부라는 체계를 잡았던 초기 유명 각성자 데이비드가 남겼던 격언이다.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은 겉으로 눈에 띄는 건 꺼리죠. 보는 눈이 많아지는 건 자신의 정보가 샐 염려가 커진다는 거니까. 당신도 그쪽 사람인가 보죠?”
“이제 어쩌실 겁니까?”
“글쎄요. 아무래도 이번 건에 대해선 어딘가의 비호를 받아야 확실하게 빠질 수 있겠는데 그게 쉬울진 잘 모르겠네요.”
장하린, 원래라면 미국으로 넘어갈 각성자다. 거미와의 싸움으로 반쯤 무너진 금화는 여기저기서 공격을 받았고 석대성은 그때도 길드 자산을 정리해 망명 수순을 밟았다.
범죄에 연루되어 도망치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안정적으로 빠져나갔던 관계로 장하린은 배신하지 않고 그대로 석대성을 따라갔다.
그리고 계약 기간이 종료되자 반쯤 빌런 조직화 되어가던 금화에 남지 않고 미국에 눌러 앉았다.
재밌는 건, 한국에서는 별다른 활약이 없었던 장하린이 그쪽에선 꽤 뚜렷한 발자취를 남기게 되는 각성자라는 거다.
그 이전에는 그냥 금화의 일원으로 적당한 명성이 있었다면, 망명 이후로 미국 쪽에서 이리저리 활약하며 유명해진다.
그리고 30대 후반이 되었을 때, 최전성기의 특급 서포터로서 대전쟁 시기 미주 연합군의 지원가 부대의 최고 지휘관으로 미주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가 된다.
‘인생이 꼬이다가 이상한 곳에서 재능을 꽃피운 경우지. 아니, 이 경우는 작정하고 재능을 뒷받침해 키워준 경우인가···.’
대전쟁에 대응하는 방법은 세계의 국가별로 다양했다. 그중에서 미주는 모든 자원을 선별된 영웅들에게 쏟아붓는 형태였다.
미주 연합군 총지휘부, 그들을 칭하는 집단 명칭은 ‘히어로즈’다.
그 명칭에 걸맞게 각 파트의 장들은 각자가 몰아준 제약 없는 백여 개에 달하는 유물로 무장한, 특급 중에서도 최상위권의 각성자였다.
실제로 그들은 미주의 모든 전력을 이끌고 ■■ ■■ 중 미주에 나타난 둘을 정리하면서 그 위력을 증명했다.
‘이것도 또 제한된 정보였나. 두통이···.’
어쨌거나 눈앞의 여자는 그런 자원 투자를 받긴 했지만, 세계 최강의 서포터에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긴 하다.
물론, 그런 유물 템빨로 최강이라 불린 자들을 쉘터 시대의 각성자들은 절대 최고라 인정해주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해낸 업적만큼은 최고라 불렸던 각성자들 이상이니만큼, 회귀 전 내 수준에서 함부로 폄하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어찌 되었건 고작 여기서 죽어선 안 될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석대성의 그 싸늘했던 눈빛은 어떻게 생각해봐도 좋은 상황이 아님이 분명하다. 유성이 여기로 모두를 안내한 것은 석대성의 눈빛에 대한 꺼림칙함 때문이었다.
‘이 은신처는 안전한 편이다. 이 안에 숨어든 이상, 암살자 같은 것에 당할 가능성은 낮아. 다만, 그럼에도 위험할 수 있다면 그건 브레이크의 순간이다.’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브레이크의 순간에 이 주변 어디로 튕겨 나갈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보통은 브레이크가 끝나기 전에 빠져나가려 하겠지만, 지금 밖에는 독이 바짝 올랐을 타란툴라도 있고 보스나 혹시 모를 암살자도 있다.
히어로나 장하린을 비롯한 금화의 두 사람이 별말 없이 내 은신처로 따라온 것도 그걸 모두 고려한 것이다. 밖으로 빠져나가려는 게 더 위험하다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게이트 내부에서 브레이크까지의 이틀이 지나갔다.
* * *
작금의 대한민국은 이보다 시끄러울 수가 없다. 그리고 어수선했다. 금화와 삼정에 대해 가장 적대적인 세 길드의 포화에 이어 중립을 지키던 명성에 미적대던 청해도 결국 그들을 치는데 한몫 보태는 중이다.
국민, 국회야 당연히 드러나는 수많은 비리와 국가 이익에 반하는 증거들에 비난의 여론을 보태는 중이었고 계획은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서이수는 잔뜩 신경질이 난 상태였다.
그녀는 의자에서 머리카락을 꼬며 불편한 심정을 표하는 중이다.
“하여간 맘처럼은 안 풀리네. 가장 중요한 걸 놓쳤어.”
며칠 전, 정말 간발의 차이로 그들은 석대성을 잡지 못했다. 정확히 대한의 전력이 도착하기 17분 전, 석대성과 금화 공략조 전원은 가로막는 이들을 뚫어내며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물론, 그 대놓고 도망치는 행동 자체가 여론을 폭발시키는 데는 기름을 붓는 행위가 됐지만, 굳이 그게 아니라도 높은 확률로 승리가 예상됐던 만큼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그래서 그 녀석, 지금 어디로 가고 있어?”
“체포 영장이 떨어지기 전, 비행선을 타고 북쪽을 향해 날아간 것까지 확인됐습니다. 아무래도 미국으로 망명하려는 것 같습니다.”
“탈출로는 역시 일본 영해를 통해서인가? 아직 영역을 다 빠져나가지 못했을 텐데, 외교적으로 일본에 이권 좀 쥐여주면서 압박하면 어떻지?”
하지만 회의를 주관 중인 김한성 금성 공략본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정 길마님. 일본 영해를 통한 게 아니라 그대로 설악산을 넘어 동해안을 타고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 말에 북진의 정상철 길드장은 혀를 찼다.
“석대성놈, 거 답지 않게 대담하게 빠져나갔군.”
섬 지역을 많이 잃었다고 해도 내륙지방에 미국과 연계하기 위한 전초기지는 아직 운용하고 있는 일본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면 몬스터 천국인 시베리아를 그대로 통과해가겠다는 의미다.
충분한 전력이 상시 탈출 계획을 연습해왔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보급 같은 것이 전부 준비되어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말은 언제든지 우리나라를 버릴 준비를 해뒀다는 거네. 살 길 여기저기 파놓는 게 참 너구리 같은 놈이야. 아마 길드 자산도 이미 여기저기 빼돌려놨겠지.”
“예. 놓친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빠르고 부드럽게 빠져나갔습니다. 잡으려면 게이트에서 잡았어야 했습니다. 저희 반응이 늦었습니다.”
“난 나름대로 빠르게 결단내렸다고 생각했는데. 하···.”
그 찰나의 고민 시간조차 없이 바로 작전을 시행했어야 했나 보다.
“작전에 참가한 이들은 어떻게 됐어?”
“다행히 전원 무사합니다. 그리고 금화에서 사법 거래를 요청해온 전향자가 한 명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사전에 다 논의된 사항이잖아? 깊게 연루되어 있을 고위 간부급들은 전부 사정 봐주지 않고 길든 짧든 일단 집어넣기로? 어기면 김수철 그 개자···인간이 우리한테 개지랄할 텐데?”
“분명 그랬습니다만, 이건 사안이 좀 커서요.”
“커? 네가 크다고 말할 정도면 대체 얼마나 큰 건이길래?”
서이수가 고개를 갸웃했고 김한성은 심드렁한 표정의 서이수나, 졸고 있던 정상철 길드장을 비롯해 모여있던 다른 길드장들 모두가 화들짝 놀랄만한 숫자를 내뱉었다.
“그녀가 말하는 정보가 사실이라면 금화 자산 중 약 4조 3,700억 가량을 국고로 환수 가능합니다.”
“그거면 거의 우리가 파악한 금화 자산 절반에 가까운 거 아닌가?”
”아뇨. 그녀가 아는 바로는 그게 대략 금화 자산의 2할 정도라는데, 그 말대로면 총자산이 20조가 넘는다는 말입니다. 저희가 파악하고 추정한 것보다 두 배 이상 많죠.”
“···아니. 누군데 그런 정보를 알아? 누가 전향을 한 거야? 석대성 사조직이나 다름없는 그 금화에 그럴만한 인물이 있어?”
“금화의 지원부장인 장하린과 제 4 공략조장 김형석이 함께 사법거래를 요청해왔습니다.”
그 말에 길드장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그럴만한 인물이었던 탓이다. 장하린은 금화에 영입된 지 그리 오래된 인물이 아니다. 어린데다 능력까지 출중하니 충분히 딴 마음을 품을만하다.
“예. 뭐, 도주하려던 간부급 하나를 잡아오기도 했고 그 정도면 정상참작을 해주는 게 낫지 않을까 해서 제 개인 판단으로 안건에 올린 겁니다.”
영입 문제 때문이 아닌, 가져온 정보 때문에 서이수가 단호하게 불가를 외치지 못하곤 ‘끙’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분명, 그 추가적인 환수 자산이면 골치가 아픈 예산 문제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하는 걸 뒷짐을 지고 구경이나 하던 다른 길드장들이 하나같이 몸을 일으키며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서 길드장?”
“큼···!”
그리고 그 분위기를 눈치챈 서이수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며 쌍심지를 켰다. 하지만 심지어 후원자인 북진의 영감님까지 헛기침하는 걸 본 서이수는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이수야. 뭐시냐? 우리도 지난번 전쟁 때문에 인원 수급이 절실해서 말이다.”
“아니. 이-씨. 이 아저씨들이 진짜···!”
“거, 길드당 붙잡은 간부급 길드원 몇 명 정도씩이면 그리 많은 것도 아니지 않나. 그 장하린이야 서포터기도 하고 서 길드장이 가장 고생하고 있으니 우리가 양보하지. 어때?”
“아니! 그러면 내가 대표로 블랙 그 개자식이나 관리국이랑 정부부처에 불려다니면서 욕 처먹어야 하잖아요! 이게 장하린 하나 가지고 생색낼 일이에요?”
“아니. 그거야 뭐···.”
하지만 결국 결론은 거래를 받아들이는 쪽이었다. 서이수가 무슨 정의의 사도도 아니고 욕 좀 처먹는 걸로 그만한 돈을 환수할 수 있는 걸 포기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세 명! 그 이상은 안 돼요. 그마저도 무조건 자잘한 거라도 그쪽에 핑계를 댈만한 정보를 부는 녀석만이고! 괜히 능력 있다고 떼쓰지 말란 소리인 거 알죠. 알겠어요?”
그런 사소한 협잡이 있기도 했지만, 금화를 찢어버리고 삼정에 엄청난 벌금을 물려 반쯤 몰락시키는 일은 차근차근 잘 진행되었다.
“뭐, 그런 일이 있었어. 내 발목에 족쇄 채우는 느낌이긴 하지만, 관리국 면 세워주면서 길드를 투명하게 운용하도록 하는 법안들이 꽤 제출될 거야. 청수 길드도 문젯거리가 되지 않게 준비해둬.”
“예. 그럼 나가 측은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당장은 동맹은 아니고 공식으로 사절단 보내서 교류하기로 했어. 그쪽에서 반쯤 협박처럼 한 이야기도 확인받아봐야겠고. 그 나가 왕이 그만한 힘이 있는 동맹인지는 봐야지.”
어차피 이런 큰일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다 보니 강 건너 불구경하는 기분이다. 의견 정도야 서이수에게 제시할 수 있겠지만, 어떤 식으로 풀리든 믿고 맡기는 수밖에 없다.
내게서 석대성이 살아나갔다는 걸 듣자 회귀자 강시후는 인상을 있는 대로 구겼지만, 그 녀석 역시 모든 걸 우리가 통제할 수는 없다는 내 생각에는 동의했다.
“그런데 말이야.”
“예. 말씀하시죠.”
“그 장하린이 대체 왜 너희 길드에 파견을 보내달라는 거야?”
그에 대해 짐작이 가는 건 딱 하나뿐이다.
“···음.”
그리고 이게 그 묘한 여자의 감이라는 건지 내가 침묵했음에도 서이수는 곧바로 정답을 맞혔다.
“이거, 너 다친 거랑 연관 있지? 이 누나의 촉이 그렇게 말하는데.”
“뭐, 게이트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장하린씨가 제게 목숨 빚을 지긴 했는데, 그걸 갚고 싶은 모양입니다.”
“그래? 뭐, 결연 맺고 있는 길드니까 크게 문제가 될 건 없긴 한데, 장하린씩이나 되는 녀석을 보내면 너무 편애하는 걸 보여주는 느낌이고 그건 서로의 길드에 안 좋거든?”
“어차피 부상 회복되는 대로 유럽으로 떠날 생각입니다. 한 번 물어봐 주시고 혹시 이유가 그 빚 갚겠다는 것 때문이면 장하린씨에겐 그리 말해주시죠.”
내 말에 서이수가 이번엔 침묵했다.
“혹시 문제가 있습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음···. 장하린을 파견 보내는 것도 괜찮겠네. 한동안 사건 잠잠해질 때까지 국외로 나가 있는 게 하린이한테도 좋긴 할 거고.”
그리고 몇 주 뒤, 한창 전우치와 서경덕이 보낸 유망주 중 먼저 연이 닿은 두 명과 한창 친분을 다지던 내게 서이수는 장하린을 보냈다.
“야, 오랜만이네?”
“형님. 유럽에 가신다면서요?”
“···이거 꼭 가야 해? 귀찮아.”
그것도 불청객 세 명을 추가로 딸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