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 질곡의 시간
석대성은 오르막길로 올라가다 멈춰섰다. 그가 그리 반응할 만큼, 섬광은 대부분 금화 쪽으로 날아왔다.
기습적으로 타이밍을 잘 잡아 일방적으로 퍼부어진 공격은 제법 매서웠으나 그 수가 확연하게 줄어들었기에 석대성은 어렵지 않게 막아냈다.
이상하게도 마녀는 다른 집단 쪽은 힐끔거리기만 했다. 뒤를 치는지만 확인하는 모습. 그러면서 금화측에 공격을 집중하는 중이다.
그렇기에 여주희도, 우리도 잠자코 지켜보는 중이다.
석대성이건 보스건 둘 다 상태가 완전하진 않지만, 죽다 살아난 보스에 비하면 석대성의 상태는 상대적으로 양호했기에 당장 일대일로 붙더라도 박빙일 것이다.
다만, 석대성이건 그 부하들이건 보스에게 쉽사리 싸움을 걸지는 못했다.
‘당장 우리도 문제겠지만, 그것뿐만은 아니지. 다 틀렸나 했더니 보스가 도와주는군.’
조금 전까지 싸웠던 우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다. 이 상황에서 보스를 먼저 잡으려 하면 우리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가 없다.
부하들은 또 부하들대로 당장 보스를 잡고 싶은데 석대성이 내린 지시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있는 거다.
“이거···, 보스가 생각보다 더 영리한 것 아니야? 위험하겠는데.”
“일이 잘 풀렸기에 망정이지, 저런 게 게이트 브레이크와 함께 뛰쳐나왔다고 생각하면···.”
“상황이 좋게 흘러가고 있으니 일단은 지켜보죠.”
그 꼴을 보고 있던 내 옆의 둘은 눈치 상 보스가 이 애매한 분위기를 읽는 것 같다는 느낌이란 의견을 제시했지만, 난 그게 아닌 걸 안다.
아마 여기선 오직 나만이 마녀가 석대성 집단을 최우선으로 공격하는 이유를 알 것이다.
‘아까 보스가 한 말. 분명히 예언을 말했지.’
트라바슈르도 그렇고 지성체 괴물 보스, 네임드급이 슬며시 암시했던 그것이다. 그리고 원래대로라면 저 마녀가 받았을 예언은 봉인된 후, 풀려난 뒤 얼마 안 되어 이 게이트에 갇혀 죽게 되는 운명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바로 저 눈앞에 있는 금화의 길드장일 것이다.
그걸 고려한다면 보스가 어떻게든 자신의 사인(死因)인 석대성을 죽이려 드는 게 이상할 것이 없다.
“이···, 별의별 게···.”
결국 맘처럼 풀리지 않는 상황에 석대성이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리자, 뭔가 말할 기회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금화의 길드원들이 의견을 내는 것이 들렸다.
“마스터! 이리 머뭇거리기보단 결단을 내려주시는 게!”
“이거 보스까지 있습니다.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일방적으로 저희만 공격하고 있는 지금 저 보스 상태로 봐선 우리가 그냥 빠져나가게 둘 것 같진 않습니다. 무작정 후퇴하려다간···.”
석대성의 모습을 보니 부하들이 그러면서 슬쩍 아래로 내려가 전방을 막아서고 버티고 서는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이다.
“전부 닥쳐! 이러다 항명이라도 하겠어, 어?!”
“아니, 그건···.”
“마스터, 그런 뜻이 아닌 건 아시지 않습니까?”
그 와중에도 석대성이건 그 부하들이건 찰떡같은 호흡을 자랑하는 중이다. 수비 태세로 번갈아가며 보스의 공격을 막으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그 사이로는 딱히 파고들 틈이 나오질 않는다.
“그럼? 그래서 어쩌자고? 여기서 저 자식들이랑 끝장 승부라도 봐? 한 명이 줄어들어서 균형까지 맞아버렸는데?! 그러다 보스 뺏기고 저놈들까지 놓치면?”
서슬퍼런 석대성의 기세에 부하들이 합죽이가 된 듯 말을 흐리는데, 그중 서포터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꽤 강단이 있는지 기죽지 않고 의견을 냈다.
“그럼 저희가 남아서 기회를 보겠습니다. 보스는 이대로 빠져나가시죠.”
“···남겠다고?”
“밖의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건 사실이고 그래서 빠져나가시려는 거 아닙니까? 어차피 저희가 여기 온 것도 저거 잡으라고 부르신 거였죠. 이대로 시도도 못 해보고 저걸 놓치는 것도 아쉽지 않습니까?”
합리적인 판단이다. 여기 인원을 일부 남겨두면 보스의 추적도 차단할 수 있을 것이고 인원을 분배해 세력균형만 어떻게 맞춰두면 똑같이 보스를 잡고 엘릭서를 손에 넣을 가능성이 있는 건 금화도 마찬가지다.
잠시 뭔가를 고민하는 듯 말이 없던 석대성은 씩 웃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진 않군. 좋아. 그러면 정보부장하고 전위장만 나와 함께 나간다. 남은 셋이서 기회 잡아봐. 당연하지만, 따로 추가 지원은 없을 거다. 여기 인원만으로 해결해야 해. 괜찮겠나?”
“맡겨주시죠!”
“그래. 무리하진 마라.”
결론이 난 것 같다. 하지만 그때 난 그렇게 빠져나가는 석대성의 서늘한 시선이 빠르게 한 차례 타란툴라와 나, 그리고 묘하게도 그런 의견을 제시한 서포터를 응시하고 지나간다는 걸 깨달았다.
석대성을 지속해서 주시하고 있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것이다. 타란툴라도 히어로들도 심지어 금화 길드원들조차도 당장 보스에게 촉각을 집중하고 있었기에 보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잠깐, 이거 설마···?’
나를 비롯한 둘이야 악명높기로 유명한 금화의 보복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 없지만, 마지막 길드원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 거두지 않던 그 싸늘한 시선은 뭔가 이상하다.
물론 그건 정말 찰나였기에 착각일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걸 그냥 넘기진 말아야겠다 생각하며 그 사실을 한편에 담아두었다.
상황이 변하며 석대성이 그렇게 빠져나가자 보스는 슬쩍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쓱 물러났다. 물론, 그만큼 물러났던 우리나 금화의 세 사람도 다시 거리를 좁혔다.
그렇게 슬슬 물러나려는 보스를 따라 세 집단이 서로 견제하며 추격하게 되자 그 사이에선 싸늘한 긴장감이 흘렀다.
* * *
수로를 빠져나오자마자 석대성은 입가에서 미소를 싹 지웠다.
“정보부장.”
“예!”
“넌 다른 길로 몰래 다시 들어가서 하린이 정리해. 할 수 있으면 같이 남은 둘도 상황 봐서 처리하고. 우리가 빠져나가고 관리국이 곧 여길 들이치겠지만, 너라면 알아서 잘 빠져나올 수 있으리라 믿겠다.”
생각지도 못한 지시에 옆에서 함께 달리던 두 간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석대성은 틀린 지시가 아니라는 듯, 자신의 단호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장하린은 금화 길드 지원부서의 수장이다. 당연히 알고 있는 정보가 아주 많다. 아마도 그런 정보를 가지고 관리국과 사법 거래를 하려는 것이리라.
검증된 S급 잠재력의 A급 각성자다.
그런 그녀가 이적한다고 하면 그런 과거쯤은 그냥 묻고 슬쩍 힘을 발휘해줄 반대편 길드는 차고도 넘친다.
“아, 항명한 것 때문입니까?”
“너희가 언제부터 내 명령에 그렇게 토를 달았나?”
“죄송합니다.”
석대성은 피식 웃었다.
“왜. 너희도 이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고 싶나?”
“탈출···? 아! 아뇨.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제 충성심은···.”
“알아. 알지. 네가 그럴 리 없다는 건. 하지만 너희랑 달리 장하린은 이런 식으로 한국을 떠나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실치 않은 녀석이야. 그런데 이 타이밍에 저런 식으로 떨어지려는 거면 줄을 갈아타려는 거겠지.”
“···확실히 하린이는 좀 그렇죠.”
제 잘난 맛에 살던 여자니 이런 망명자 생활은 받아들이지 못할 거다.
물론, 석대성도 입맛이 썼다. 괜찮은 서포터란 서포터는 대부분 금성에 들어가 있는 시대다. 조직 운영 능력까지 있는 저런 검증된 서포터를 또 어디서 구할지 생각하면 막막하다.
하지만 이건 앞으로 망명하면서 떠돌이 유목민, 혹은 용병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된 금화 입장에선 조직 체계에 대한 문제다. 배신에는 끔찍하게 대응해야 한다.
기존에도 금화는 그런 쪽으론 꽤 빡빡한 편이었지만, 이제는 조직을 범죄조직 수준으로 칼같이 운영해야 한다.
“그럼 다른 두 친구도 시험하신 거군요.”
“그래. 그 녀석들도 아예 생각이 없다면 거기선 한 번이라도 장하린을 말리고 같이 나가겠다고 해야 했다. 그랬다면 내가 그들까지 상황봐서 처리하란 지시를 내리진 않았겠지.”
“그럼 전 지시하신 것 수행하러 가보겠습니다.”
다른 수로 입구가 있는 방향으로 빠지는 갈림길에서 정보부장이 떠나려는 걸 잠시 붙잡은 석대성은 그의 손을 꽉 쥐곤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절대 무리하지 마라. 장하린에게 한 말이랑은 달리 진심이다. 네가 죽거나 붙잡혀버리면 금화엔 대안이 없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암살 임무를 맡은 정보부장이 떠나고 게이트를 빠져나오라는 지시를 헌터와치로 내린 뒤, 석대성은 마지막으로 빠져나온 방향을 바라보며 이를 뿌드득 갈곤 중얼거렸다.
“그 둘. 어떤 놈들인진 모르겠지만, 날 건드린 이상 쉽게 죽을 거란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 * *
그러는 사이 지하의 전투도 다시 재개되고 있었다.
세 집단 중 둘이 서로 신뢰할 순 없다곤 해도 동맹이었고 그 반대편의 다른 하나는 이중 조합 균형이 가장 좋은데다 세 팀 중 가장 강했기에 기묘한 대치가 이어졌지만, 보스 때문에 그건 애초에 오래 이어질 수가 없었다.
마녀 역시 이미 브레이크 중이니 이 순간만 어떻게 모면한다면 살 수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보스로선 뒤를 바짝 쫓아오는 우리 추격을 떨쳐내야 했으니 공격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재밌는 건 도주 중인 보스의 공격이 이번에는 타란툴라 쪽에게 가장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저 마녀, 마치 이 상황을 짐작하는 것 같네.”
“여러모로 눈치가 비상한 것 같긴 합니다.”
그리 대화를 나누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달리던 금화 측의 서포터가 가장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쪽 관리국하고 히어로들, 차라리 우리하고 손을 잡죠. 빌런이랑 거래를 한 것 같은데, 굳이 지킬 필요가 있어요?”
“엘릭서는 너희한테 넘겨야 하고?”
조성훈은 기민하게 빌런과의 거래 여부에 대해선 말을 돌리며 화제를 바꿨다.
그 대응에 타란툴라 쪽에서 그 격전 와중에 금화 쪽에 단검을 집어던지며 우리에게 경고를 날리는 것이 보였다. 듣고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때, 그 단검을 쳐내면서 순간적으로 장하린은 뒤로 몸을 뺐다. 그렇게 동료에게서 잠시 거리를 벌린 그녀는 이번엔 우리가 아니라 자기 동료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다들, 길마 따라서 정말 외국으로 망명할 생각이야?”
“설마, 너. 대성 형님을 배신하자는 거냐?”
“배신은 무슨, 뭔 조폭 놀이하는 것도 아니고 이게 그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할 건가? 지금 돌아가는 상황 보니까 길드 조각날 건 뻔해 보이고 그러면 다들 각자 살길 찾아야지.”
그 폭탄발언 탓에 저 멀리 멀어지는 보스와 타란툴라를 내버려둔 채로 여기 여섯 모두가 잠시 수로에 삼각형의 자리로 일정 거리를 두고 대치하게 됐다.
“장하린 네가 언젠가 이럴 줄 알았지. 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년이···.”
“이기적인 게 아니라 현명한 거지. 잘 생각해. 우린 헌터야! 무슨 범죄조직원이 아니라! 계약기간 끝나면 더 좋은 조건 찾아 떠나는 용병, 혹은 스포츠맨에 가깝지.”
“배신할 거면 너 혼자 해라. 괜한 사람 끌어들이려고 들지 말고. 물론, 그 뒷감당은 할 각오해야겠지?”
“그래? 못할 것도 없지. 물론, 나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어. 그간 좋은 대우 받아왔고 그래서 길드에 충분히 헌신했다고 생각해. 하지만 인생 전부를 함께할 의리는 없잖아?”
주로 대화하고 있는 건 덩치 큰 남자와 장하린 둘 뿐이다.
다른 하나는 덩치 옆에서 팔짱을 낀 채 동료의 언쟁을 조용히 지켜보는 중이었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물론, 우리는 팝콘 각이었다. 보스를 반드시 잡아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보스가 타란툴라를 잡아준다면 우린 사실 나쁠 게 하나도 없었다.
이쪽도 마찬가지다. 석대성이 떠났다곤 해도 당장 브레이크 발생 전까지는 포위된 상황에서 동료가 늘어나서 나쁠 건 없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는데.”
“저 녀석들도 돌아가는 상황 파악할 눈치는 있다는 거지. 보기 좋은 건 아니지만, 사람이 살길 찾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고. 어. 잠깐 저거···?”
그리고 그때, 이설화가 포착한 걸 나도 조성훈도 봤다.
장하린과 잠자코 듣던 다른 헌터 하나의 시선이 기민하게 오가고 장하린이 먼저 덩치에게 공격을 가한 것.
그리고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장하린을 제압하러 가려던 덩치의 다리 하나가 잘라며 허공을 날았고 균형을 잃은 그는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자세를 잡지 못하는 그에게 장하린의 제어기가 연달아 머리를 때린다.
“후-, 됐나?”
“그래. 기절한 것 같다.”
“맘 같아서는 그냥 여기다 유기하고 싶은데, 영웅 분들도 있으니 일단 다리는 다시 붙여줘야겠네.”
그리고 그 광경을 쭉 지켜보던 이설화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래서. 다 끝났어요?”
“네, 뭐···.”
아무래도 배신하는 걸 직관시켜준 게 뻘쭘한 상황인 건 누가 봐도 당연한 거라 장하린은 머리를 긁적이며 떨떠름하게 답했다.
“아까 그 엘릭서 욕심은?”
“아까 그거야 지금 이거 때문에 한 거고 신경도 안 써요. 뭐, 그걸로 따로 관리국 측에서 해둔 계획이라도 있나요? 그럼 협조하죠.”
“이쪽도 딱히 없긴 한데···.”
“그새 튀었네. 쯧, 빌런 녀석. 눈치도 빨라.”
“상황이 바뀌었으니 우리가 의리를 지킬 이유가 없다는 걸 그 빌런도 잘 아는 거겠죠.”
애초에 히어로가 빌런과 지킬 의리가 있을 리 없다.
타란툴라도 보스도 그 짧은 시간에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도 먼저 타란툴라의 본체가 빠져나가고 남은 분신을 모두 처리한 보스도 곧장 달아난 것 같다.
“통수에 통수는 뭐, 이 업계에선 일상이니까. 그런데 그쪽 뭐, 고육계나 사항계 이딴 건 아니죠?”
“네? 이 상황에서요? 히어로 살인이나 상해죄까지 추가되면 괘씸죄 때문에 사법 거래로도 안 될 것 같은데요.”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봤는지 이설화가 한 되지도 않는 가정에 장하린이 맹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최대한 사근사근한 어조로 저리 답했다.
“이렇게 우리 다섯 명이면 안에서 버티는 건 어렵지 않겠군요.”
잠시 흐른 침묵에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난 우리라는 걸 강조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석대성이 미쳐서 같이 죽자는 식으로 나오지 않는다면야 그렇겠지. 아까 은신처. 거기로 갑시다.”
“그래. 그 안이면 농성하기에도 나쁘지 않겠네. 뭐, 여기서 난 꼭 보스를 잡아야 하겠다는 사람은 없지?”
나를 비롯해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조금 전까지는 적이었던 우린 이젠 한 팀을 이뤄서 지하 수로를 되짚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