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 질곡의 시간
내가 만들어둔 은신처를 발견하고 그곳에 권혁 요원을 눕힌 히어로들은 급한 처치가 끝나자 기가 막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 중이다.
“용케도 이런 걸 찾아냈네.”
“이 정도면 당장 누군가에게 들킨 상황이 아니라면 안심이겠어.”
뒤의 말은 누군가를 특정한 말이다. 혹시라도 여기 숨겨둔 그가 죽는다면 유일한 빌런인 여주희가 의심 당할만한 자리라는 의미였다.
말은 안 하지만 여주희도 눈썹이 살짝 꿈틀대는 걸 보면 이 공간의 존재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다.
“다만, 브레이크 중이니 시간이 지나면 튕겨 나갈 텐데,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게 걱정이다.”
“밖에 아군이 없을 것도 아니고 그건 운에 맡겨야지. 공략 자체는 9할 가까이 됐다며? 아까 석대성이 쓸어버린 것도 있고 하니까 남은 건 거의 없지 않겠어?”
“그래. 저 빌런도 계속 눈총을 주는 것 같으니 이만 신경 쓰지 말고 움직이자. 그쪽 빌런, 여주희라고 했지? 그래서 상황은 어떻지?”
“···마녀 보스는 수로의 물속에서 고속이동을 하는 중이고 금화 측은 막 흔적을 쫓아 지하로 진입했다.”
타란툴라가 아군에 합류하면서 좋은 점이라면 과감한 정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그 분신은 그때그때 공격받아 터져나가는 모양이지만, 페널티조차 없는지 여주희는 그때마다 새로운 분신을 끄집어냈다.
“그게 그 유물? 어떤 성좌의 물건이야?”
처음에는 날을 세우더니 이설화는 또 의외의 붙임성을 발휘해서 여주희에게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하는 중이다.
“쓸데없이 궁금한 게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
“외형적인 걸 다 제외하고 성능만 보면 역대급 물건이라는 판정이잖아. 신물에 필적하는 것 같다는 평가인데, 공개된 신물이 많은 것도 아니고 궁금할 수도 있지?”
등불이 한 차례 빛나고 벽면에 비친 여주희의 그림자가 형체를 갖추며 분신이 되어 걸어나온다. 대답해주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는지 여주희가 담담하게 신물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라트리의 등불. 첫 번째 과업을 완수한 뒤 15년간 대여를 받았지. 이후, 성좌와 계약이 끊어지면서 신물의 진정한 힘은 개방할 수 없게 되었지만···.”
“라트리라면 리그베다의 밤의 신이었나? 신물이 맞네.”
신물일 것은 예상하던 바다. 반대로 난 15년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계산해보면 대전쟁 시기 타란툴라가 실종된 시기와 대략 맞물린다.
‘붉은달도 저 신물을 가진 특급 각성자 여주희는 꽤 부담스러웠다는 거군.’
여기 모두가 생각에 잠긴 여주희의 입만 바라봤고 몇 초 뒤, 그녀는 결정을 내렸는지 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이유를 밝혔다.
“금화 쪽 숫자를 줄여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진입한 놈들의 수가 많나?”
“일곱.”
듣자마자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애매한 느낌이다. 그리고 그런 어중간한 느낌이라는 건 저쪽에서 인원 배분을 절묘하게 잘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생각보다 석대성이 현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그렇지 않고서는 보스를 단독으로 잡을 수 있으면서도, 우리 넷에 타란툴라까지 전부 한 번에 상대하더라도 시간을 끌 수 있는, 우리 입장에서 보기엔 저리 모호한 숫자로 여기 진입했을 수가 없다.
“이쪽보다 실력도 앞서는데 숫자마저 많으니 균형이 맞지 않는다.”
그 말대로 이대로 부딪친다면 수를 절반씩 나눠 우리 쪽을 차단하고 보스와 빠르게 승부를 보려고 할 수도 있다.
여주희쪽이 약간 힘든 느낌인데, 석대성이 근접전을 제외한다면 종합적으로 그녀보다 나으니 인원 한둘만 더 붙더라도 지금 상태의 보스는 잡아내고도 남을 것이다.
저들이 어쩔 수 없이 보스는 일단 처치하고 상황을 보자는 생각을 하게 하려면 금화의 숫자가 최소 둘 정도는 줄어야 한다.
“미리 부딪쳐두는 목적도 있겠지?”
···“그래. 한 번은 맞부딪쳐야 저들과 너희가 날 먼저 처리한다는 뒤통수를 칠 가능성이 사라지니까.”
어쨌거나 협력하기로 했으니 함께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의미다.
“석대성은 솔직히 좀 겁나는데···.”
“나도 금화 길드장과 싸우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거 일이 이상하게 풀리면 우리도 옷 벗어야 할 수도 있어.”
“분신으로 위치를 먼저 확인하고 퇴로에 충분하게 함정을 깔죠.”
“그래야지. 애초에 진짜 목적은 숫자 줄이기니까.”
* * *
흔적을 쫓아 지하수로에 진입한 석대성과 그 일행은 바로 미간을 구겼다.
“흔적이 끊기는군.”
“보스가 직접 움직이는 대신 수로의 물 속에서 이동 중인 것 같습니다.”
“헌터와치로 들어오는 보고는?”
유성 쪽이 여주희와 동맹을 맺으면서 분신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면, 석대성측에겐 반대로 게이트 내 설치한 그들의 게이트 통신 기지국이 있었다.
석대성은 보스가 향하는 곳이 수로라는 걸 확신하자마자 수로 입구인 것으로 확인된 모든 지역을 외부 인원들을 통해 포위, 길목을 지킨다는 수법을 사용했다.
“다만, 수로가 워낙 복잡해서 모든 출입구 지역을 제어할 수 있다 확신은 어렵습니다.”
“발악기 터졌잖아. 그 상태로 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해봐야 뻔해. 보고나 해봐.”
“7A에서 3분 전에 한 번, 4B에서 5분 전 쯤 한 차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견제는 했다고 하는데, 보스 측도 아군도 특별한 피해는 없습니다.”
“속도가 예상보다 빠르군.”
“예. 그 속도면 작정하고 추격해도 B급 이하로는 힘듭니다.”
“강제 브레이크 능력에, 그 자체로도 특급 네임드급이고 병력 통솔능력까지 생각한다면 봉인되어 있던 방에서 놓치는 순간, 게이트 자체가 특급 중형에 준하는 위력이었겠어.”
그리고 그 순간, 부하의 뒤를 노려오는 공격을 포착한 석대성의 양손에서 번개가 뿜어진다.
빌런의 분신으로 보이는 것은 서둘러 몸을 틀며 타격을 피했으나, 그 샛노란 뇌전은 그의 손짓에 따라 벽을 튕기며 목표를 향해 다시 달려 기어코 그걸 분쇄해버렸다.
“함정이 있을 수 있으니 경계는 하되 어지간한 수준은 그냥 몸으로 뚫고 간다.”
석대성은 기민하게 지금 이 습격으로 확인 가능한 상황을 모두 살폈다.
이 경우 둘 중 하나다.
빌런도 아직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스를 찾지 못했거나, 혹은 찾았더라도 추격 중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싸워봤는데 상대가 안 되니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거다.
“보스가 중요한 건 아니다. 둘 중 하나의 경우면 무리하지 않고 바로 물러난다.”
“둘 중 하나라고 하시면···.”
“빌런의 생포 혹은 사살, 그게 아니라면 보스의 처치. 둘 중 하나가 이뤄지면 바로 빠져나간다.”
안에서 시간이 너무 지체되는 중이다.
‘그래. 마치 계륵 같군.’
사실 왜 그런지 알고 있다. 지금 그의 이성이 요구하는 것은 당장 이곳을 빠져나가서 많은 걸 포기하고 망명하는 것이다. 그게 가장 안전하다.
당연히 엘릭서도 손에 넣고 빌런도 잡으면서 안에 숨어들었을 게 분명한 관리국과 히어로까지 모조리 일망타진할 수 있으면 그것만한 것이 없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건 안다.
다만, 감정적으로는 여기서 그 한 발을 빼기가 너무 어려웠다.
이걸 포기하면 망가질 길드내에서의 위신이나, 터져 나올 길드원들의 불만은 말할 것도 없다.
다 잡아 놓고 놓친 보스와, 역대급인 그 보상이 눈에 아른거린다.
거의 독 안에 몰아넣은 거나 다름없는 빌런은 잡으면 많은 문제가 해결되는데 그걸 풀어줘야 한다는 것도 분통이 터질 상황이다.
“마스터. 저쪽···.”
그렇게 석대성이 당장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서 일행은 보스의 흔적을 추적했는데, 저 멀리 감각 끝에 무엇인가 기척이 잡혔다.
“히어로들인가. 이젠 대놓고 돌아다니시는군.”
“어떻게 할까요?”
“깜둥이 놈과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한 압박은 역시 어렵겠지?”
“그렇죠. 오히려 저들이 우리를 압박하지 않겠습니까? 여기까지 쫓아왔을 정도면 분명 저들도 그 빌런을 봤을 테니 할 말은 있을 거고요.”
“일단은 빌런 처리에 대해 협력을 요청···아니다. 대화를 요청하는 척하다가 기습해서 처리하자.”
처음에는 주변에 누군가 숨어있는 게 아닌가 했으나 점차 접근하는데도 따로 느껴지지 않는 기척을 보면 인원은 저게 전부다.
은신에 능한 이들 몇 명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모두의 감각을 피할 실력자가 있을 확률은 낮았고 기습해서 한둘 처리하고 붙으면 질 리도 없다.
당장 심상치 않은 밖의 상황도 그렇고 협력이 그리 내키지 않는다.
차라리 처리해 증거를 인멸해서 밖에서 떠들 입을 줄이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석대성은 공격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걸 예상했다는 듯, 히어로와 관리국 연합으로 보이는 저쪽에선 일정 간격 내로 근접하자 바로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더 접근하면 바로 공격하겠답니다.”
“그런가. 예상은 간다만, 이유는?”
“이 게이트를 점거한 헌터측이 빌런을 은닉한 정황이 너무 확실해서 우릴 믿을 수가 없다는데요.”
“뒤통수 치지 않겠냐는 말이군.”
일단 기습하려던 것에서는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수하들이 모두 자신의 입만 바라보는 모습에 석대성은 정보부터 확인했다.
“여기서 보스 기동 예상 구역으로 돌아가려면 얼마나 걸리지?”
“···최소 5분 이상 지체됩니다.”
“길 비켜달라는 건 씨알도 안 먹히겠지.”
“저들도 나름대로 함정을 설치해둔 것 같은데요. 안 비킬 겁니다.”
정보부장이 기민하게 무엇인가를 발견했는지 석대성에게 짧게 속삭였다. 그리고 그게 의미하는 바에 석대성은 미간을 한 차례 더 구겼다.
“그건 저쪽에서도 보스를 잡겠다는 건가?”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저희 측에 넘겨주지 않을 수 있다면 그리하겠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히어로나 관리국 놈들이 원체 양심 없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건 너무 상도덕이 없는데?”
“그만!”
옆의 동료들 모두가 관리국과 히어로를 까대며 소란스러워진 분위기를 제지한 석대성이 바로 결론을 내렸다.
“정면 승부해서 뚫는다.”
“예. 몰살합니까?”
“아니. 어차피 함정도 있는 상황, 아까 계획처럼 기습 아닌 이상 도망치려 들면 다 잡아 죽이기도 힘들 거다. 쫓아내는 선에서 멈춰. 나중에 급해서 그랬다는 변명을 하려면 그 정도 선에서 관둬야지.”
적당히 어렵다 싶으면 저쪽에서도 물러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석대성의 생각을 벗어났던 것이 있다면, 저 중 두 명이 관리국 요원과는 대개 좀 다른 생각을 하기 마련인 정의 덕후들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를 대한민국의 암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김유성이었다는 거다.
너무 과한 행동은 막을만한 권혁 요원은 이미 은신처에 누워서 사경을 헤메고 있는 상황이라, 선제공격을 받은 히어로들의 반응은 생각 이상으로 격렬했다.
그리고 거기서 이어지는 상황을 겪는 순간, 석대성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하고 끊겼다.
“다 죽여! 전부 죽일 생각으로 해!”
기척을 죽이고 숨어있었는지 뒤에서 들어온 기습은 혹시나 했으나, 가당치도 않은 우연이라고 친다면 그럴 수는 있다.
그렇게 설마 했던 히어로와 빌런의 공조로 의심되는 공격을 겪은 충격이 약간 있었고 석대성이 그 전에 뭔가를 봤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건, 유성이 쏘아낸 화살이 보스방에서 그의 부하를 쏴 죽였던 것과 완벽히 일치한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석대성은 그게 의미하는 바를 깨달았기 때문에 격노하며 공격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 * *
석대성의 바뀐 명령에 히어로들과 함께 속절 없이 밀리면서도 그 반응을 본 유성은 피식 웃었다.
‘알아차렸나? 그러면 이게 슬슬 자신을 사냥하는 거라는 걸 짐작했겠어.’
물론, 대놓고 보라고 쏴 날린 거다.
그를 도발해서 최대한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짧은 순간이었고 바로 밖으로 빠져나갔으니 못 기억할지도 모르지만, 유성은 석대성 정도면 알아차릴 거라 생각했다.
물론, 당연하지만 그게 증거가 되진 않는다. 히어로들에게 건넨 캠도 그렇고 대부분 따로 조치하거나 생각을 해두고 썼다.
이건 기성품 화살 중 하나일 뿐이다. 좀 급이 있는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니 추격한다면 인원을 추릴 수야 있겠지만, 그것 만으로 유성을 특정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대한민국을 지배하는 권력의 일각, 10대 길드 금화다.
그런 자신을 향해 일개 히어로나 요원으로 보이는 자들이 노빠꾸로 공격해오는 이 상황이 사냥이라는 걸 모를 인물은 아니다.
‘이제 여주희가 잘해줘야 할 텐데.’
우리는 이 습격에 대한 석대성의 반응을 두 가지로 판단했다.
‘하나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바로 빠져나가는 것.’
그 경우, 이 건은 우리 손을 떠난다. 가능한 한 빠르게 보스를 잡고 여주희에게 엘릭서를 넘겨준 뒤, 브레이크까지 숨어있다가 탈출하면 된다.
‘다른 하나는 여주희를 쫓는 거지. 그리고 높은 확률로 쫓을 거다.’
빌런이 제 발로 기어나온 상황이다.
잡으면 모든 게 해결되는 상황인데 과연 손을 뺄 수 있을까?
유성은 계속 석대성에게 금덩어리를 하나씩 던져주는 중이다. 보스방의 위치가 그랬고 여주희와 동맹을 맺어 그를 눈앞에 집어던지는 게 또 그랬다.
그리고 여주희를 쫓아 금 덩어리를 손에 넣기 위해 움직이면 다시 보스를 마주하겠지. 그가 그것마저 손에 넣으려고 하면, 그때 쯤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놀랍게도 우리를 멀리 쫓아낸 뒤, 여주희를 마저 쫓으려다가 갑자기 정색한 석대성은 길드원에게 짧게 명령을 내렸다.
“그만! 더 쫓지 마! 철수한다!”
“예? 아니, 대장! 이제 저것만 잡으면···.”
“마스터!”
“더 시간이 끌리면 수습할 수 있는 시간조차 없다. 우리는 여기서 나간다. 이미 너무 오래 붙들렸어.”
당연하지만, 우리에겐 빌런에게 치명상을 입은 동료를 수습하며 수로를 빠져나가는 금화와 석대성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약간은 허탈하면서도 이제 목숨 위험할 일은 없다며 안심하며 그걸 지켜보는데, 저 멀리 통로에서 핏빛 섬광 수십 개가 이쪽으로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