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 질곡의 시간
아마 지금쯤 이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복잡한 계산이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머리가 복잡한 건 석대성이겠지.’
석대성 역시 관리국에서 뭔가 조처를 해뒀을 것이고 보스 때문에 저렇게 이목이 끌렸으니 그 뒤를 쫓는 타란툴라를 보고 관리국이 움직일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할 거다.
거기에 대개 저런 발악 패턴이 나온 뒤에는 어떤 괴물이건 급격히 약화한다. 그리고 그건 인원 소수로도 잡아볼 만하게 상황이 변한다는 의미다.
‘석대성에게 가장 좋은 건 관리국이 나와서 타란툴라만 정확히 처리해주는 거겠지만, 그놈도 일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진 않을 거라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겠지.’
최악의 경우, 블랙이 일전에 말했던 범죄자 은닉을 명목으로 삼아 반 억지로 석대성 자신을 체포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민감한 시기에 잠시라고 하지만 조사를 받는다는 건, 수많은 건에 엮여서 덤터기를 쓸 수도 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 몰린 이상, 타란툴라를 직접 잡아다 관리국에 넘길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그게 석대성 입장에서는 가장 깔끔하고 혹시 모를 공격이 있더라도 잠시 숨겨둔다면 도리어 중상모략이라며 여론전에서 역공마저 가능해지는 최고의 한 수다.
‘그건 그렇고 일단은 좀 빠져야겠는데.’
석대성이 부하들과 합류해서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기 시작하자 급격히 거리가 좁혀지고 있다.
난 곧바로 보스 방향에서 갈라지는 것을 택했고 석대성은 나를 힐끗 바라본 뒤 헌터와치에 대고 뭐라 지시한 뒤에 무시하곤 보스가 향한 쪽으로 계속 달렸다.
현재 보스가 향하는 곳은 아직 이 던전의 처리되지 못한 괴물들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리고 난 원 역사의 영상을 통해 보스가 거기 도착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의 저주는 전부 저 보스로 말미암은 것이었지. 괴물은 대부분 정리되어서 이제 그리 많은 수가 남진 않았겠지만···.’
영상 속에서 보다는 훨씬 많다. 그 말은 큰 규모는 아니어도 군대 수준의 병력이 웨이브로 몰려들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저 정도 전투조가 고작 그런 웨이브를 버티지 못할 리는 없겠지만···.’
그렇게 시간이 벌리면 곧이어 폭탄이 터질 것이다.
그건 보스몹이 일으키는 강제 브레이크다.
주문계 중에 간혹 강력한 보스들은 게이트를 강제로 터뜨리는 경우가 있다. 원래는 이렇게 연달아 브레이크까지 가진 않았지만, 지금 보스는 이미 빈사 상태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석대성에겐 몹시 치명적인 일격이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치명적인 게 아니라, 그와 헌터 협회에 정치적으로 치명적이다.
‘보스는 한정된 이런 내부 공간보다는 게이트를 터뜨려 밖으로 나가는 편이 유리하다고 생각할 거다. 반면, 석대성 너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입구만 잘 지키고 빌런만 잡으면 괜찮을 거로 생각하고 있겠지.’
난 잠깐 추격이 오기 전 자유로워진 틈을 타 하늘로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신호탄이 올라간 지 1분도 안 되어 관리국 각성자 둘이 합류한다. 이미 변신은 푼 상태였고 내 모습을 확인한 요원들이 질문을 던졌다.
“증거는?”
난 말 없이 머리의 캠만 툭 건드리는 것으로 답하곤 내가 겪은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석대성을 붙잡아두려면 놈이나 이곳의 나머지 길드들이 변명도 못하게 그 빌런을 게이트 외부로 도망치게 유도해야 한단 소리군.”
“어차피 빌런에게도 추적을 붙일 것 아닙니까?”
“그래. 그 빌런도 블랙이 벼르고 있긴 하지. 하지만 우선순위는 그런 잔챙이가 아니야. 블랙도 이번에는 10대 길드 해체에 더 집중할 거다.”
“그래. 그건 금화를 잡을 기회에 비하면 중요하진 않지. 큰 걸 위해 치어를 놔주는 건 흔한 일이니까. 증거는 차고 넘치게 모았다. 금화는 확실히 잡을 수 있을 거고 삼정도 어느 정돈 타격을 줄 수 있겠지.”
“일단, 다른 이들은 표식을 보고 합류하게 하고 이동하죠. 석대성이 제가 간 방향으로도 추격을 붙였을 거라 예상합니다.”
두 명의 암살자 직군 요원과 함께 석대성의 뒤를 쫓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 밖 평원을 새까맣게 메운 괴물 군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석대성 놈, 싸울 생각인가? 수색한다고 인원이 많이 흩어진 것 같은데, 저게 되려나?”
“그런가 본데.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간 표정이군. 뭐, 저 석대성이 직접 나서는데 저 정도는 해결하겠지. 그보다 빌런은 안 보이는데?”
그 사이 다른 요원들도 표식을 보고 합류해서 상황을 함께 지켜보는 중이다.
설마 했으나 석대성은 고작 백여 명 가량의 길드원을 데리곤 그대로 족히 수천은 되어 보이는 병력을 상대로 전투 준비에 들어갔다.
“저건 단기 결전을 보려는 거다. 시간이 끌리면 흔적도 사라질 거고 보스가 어디로 숨을지 모르니까. 오늘 하루가 다 지나갈 때까진 고작 해봐야 9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
“수는 많이 보이지만 몇 마리 제외하면 급수가 형편없어. 하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이 게이트를 공략하던 석대성이 남아있는 괴물의 수준에 대해선 잘 알고 있겠지.”
“구천뇌운. 석대성이 탄 빌드의 최종기. 지금처럼 최대 전개는 아니라지만, 실전에서 써먹는 놈은 저놈뿐일 걸? 리스크가 있는 만큼 위력은 대단하지. 석대성이야 저 기술 레벨도 엄청 높고.”
확실히 들어보니 석대성 자신에게 잘 맞는 빌드를 탔다는 느낌이다.
최소 시전시간이 존재하는 종류라 어지간히 타이밍을 잘 잡지 못하면 사용하기 힘든 최종기다.
길드원들이 자신을 빙 둘러치며 방어진을 펼치게 둔 뒤, 석대성은 허공에 떠올라 주문을 시전하며 손바닥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러자 하늘 위 새겨진 복잡한 원진으로부터 소용돌이치는 검은 구름이 형성되어 빙글 돌기 시작했다.
대략 5초 정도 구름이 형성되는 시간이 끝나자 손바닥 위로 형성된 작은 마법진을 향해 모든 구름이 몰려든다.
[구천뇌운!]
석대성의 입에서 시동어가 내뱉어지자 전방에 넓은 직사각형 모양의 공간의 일그러짐이 발생한다.
그리고 일그러진 공간으로부터 조금 전 마법진 속에 삼켜졌던 검은 구름이 안개 혹은 연기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게이트 보스가 보낸 병력을 집어삼킨 뇌운은 보스가 숨어있는 평원 밖 숲 속까지 퍼져 나가는 중이다.
구름 속에선 노란 뇌광이 끊임없이 으르렁거리고 괴물의 고통스러운 괴성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아스트룸처럼 고위 기술들은 대개 단계를 구분해 위력 조절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조절 없이 최대치로 전개한 형세, 그 탓인지 석대성은 몹시 지친듯한 표정으로 바닥에 내려앉았다.
괜히 마법을 해제해서 죽지 않은 놈이 나오면 귀찮아져서인지, 석대성과 금화 길드는 마법 지속 시간의 끝까지 기다리는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지만, 그 어떤 괴물도 반대편으로 빠져나오지 못했다.
“보스는 도망갔나?”
“왜인진 모르겠지만, 저 숲 속에 그대로 있는 것 같은데.”
“그러면 석대성이 유리해진 건가? 개입해야 하나?”
“···잠깐.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수를 준비해뒀던 건 석대성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마법의 효과가 다 끝나고 금화 길드가 다시 추격하려는데 검은 구름이 사라진 지면 아래가 갈라지며 괴물들이 땅속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거 보스 쪽도 만만치 않은 걸?”
하지만 숨는 것에 성공한 괴물의 수는 많지 않았고 금화는 빠르게 숲 쪽으로 전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더 만만치 않은 것, 내가 예상했던 장면이 결국 현실에 그대로 일어났다.
우리가 들어와 있는 게이트가 갑자기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낸다. 아마 게이트에 입이 있다면 비명을 질렀다는 표현이 잘 어울렸을 것이다.
“아니, 여기서 브레이크라고?”
“보스가 발목 잡아 놓고 왜 바로 도망치지 않나 했더니 강제 브레이크를 일으키려는 거였어.”
“이러면 브레이크까지 얼마나 걸려? 이 중에 게이트 상태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있나?”
“상태로 보아 이틀 쯤 걸릴 겁니다.”
계속 침묵하며 상황을 보던 내가 짧게 단언했다. 여기 대전쟁까지 다 겪은 나보다 더 게이트에 전문가인 사람은 없을 거다.
“그러니 슬슬 움직이죠. 어차피 이 상황에서 석대성이 할 수 있는 건 둘 뿐입니다. 후퇴하거나, 아니면 무리하거나.”
“후퇴하겠군.”
“무리하겠어.”
그리고 거기서 영웅 측과 관리국 측의 의견이 완전히 갈렸다. 갑자기 시작된 가벼운 말다툼과 시간 낭비에 나는 이걸 끊을 필요를 느꼈다.
“우선 제 말을 좀 들어주시죠. 상황이 어떻게 되던 석대성이 가장 먼저 할 일이 밖에 지시사항을 가지고 전령이 될 인원을 내보내는 것과 타란툴라를 추격할 거라는 것까지 이 두 가지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겠네. 당장은 보스가 우선순위에서 조금 밀린다는 거군.”
“하지만 어차피 타란툴라 역시 알려진바 대로면 보스를 쫓을 테니 크게 달라지는 건 없지 않아?”
“그러니 후퇴하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께서 제가 확보한 증거를 들고 가셔서 입구를 맡아주시죠.”
“석대성의 성향대로라면 아마 열에 아홉은 남은 시간 동안 브레이크 사실 자체를 은폐하려고 들겠지.”
“그렇다면 그 지시는 길드 전력을 끌어다가 다음 순번 길드의 진입을 막는 거겠어.”
시간을 벌어야 하니 히어로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면 이 자식들 다음 순번이 누구였지?”
“이번은 대한 길드 차례였던 것 같은데.”
중립 길드 포함해서 가능한 순위와 진형 균형을 맞춰가며 순서를 분배했던 걸로 알고 있으니 맞을 것이다.
“입구 막고 대한 길드에 연락해서 그쪽도 전력 불러달라 하는 쪽으로 하자.”
“빨리 가야 할 겁니다. 금화 길드 마스터 정도의 꼼꼼함이라면 이미 진입하면서 입구를 최대한 경계하라고 해뒀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면 전령도 끊어야 하고 입구도 뚫어야 한다는 말이군.”
“우리 생각보다 입구 쪽 인원이 많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는데···.”
“거봐, 이래서 우리가 후퇴 쪽에 집중해야 한다고 한 거라니까. 애초에 맨날 그 자식들이랑 부딪치는 우리 관리국보다 너희 히어로들이 더 잘 안다는 게 웃기잖냐.”
”아니, 그건 좀 억지 아니냐?“
나는 다시 시작된 묘한 두 집단 간의 알력을 무시하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언의 압박 아닌 압박을 받은 요원과 히어로들도 서로 눈치를 보더니 가장 선배격 인물들 위주의 논의 끝에 빠르게 인원 분배를 마친 뒤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날 따라온 인원은 셋. 이설화, 권혁, 조성훈으로 열세 명 중에 열 명이 입구 돌파 방면으로 빠졌다.
“넌 뭔가 짐작이 가는 게 있는 거지?”
“이 보스라면 브레이크를 일으킨 뒤 바로 지하수로로 향했을 겁니다. 숨겨져 있던 제단의 존재도 그렇고 탈주를 추격할 때 움직임과 택한 도주로만 봐도 이곳을 잘 아는 존재인 건 정황상 확실해졌습니다.”
난 차분하게 지하 수로에 내가 파악한 것만 해도 비밀 통로가 많았다는 걸 그들에게 설명했다.
“그러니 지하수로로 먼저 움직이면 보스 흔적을 따라 추격할 빌런이나 석대성 측에 비해 우리가 한 발 먼저 자리 잡고 앞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아군의 면면을 가늠해봤을 때, 이 수준이면 함정 없는 정면 승부는 어려울 것 같았다. 따라서 미리 보급품을 가져다 놓은 제단구역에 가장 먼저 도착해야 하는 건 필수다.
‘수준은 얼추 A급 턱걸이가 둘에 중견 A급이 하나. 수준이 낮은 건 아니지만, 조합도 평범하지 않고 상대는 더 나쁘다. 어지간해선 상대가 안 되겠어.’
호흡이나마 맞춰봤으면 싸워볼 만은 한데, 벌써 셋 중 둘은 히어로에 한 명은 관리국 요원이라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따라오신 세 분, 호흡은 좀 맞춰보신 분들입니까?”
“어, 아니?”
“그러면 정면으로 부딪치는 건 가능한 피하죠.”
“그건 또 왜?”
그러자 하나 있던 관리국 요원이 핀잔을 준다.
“히어로들은 생각을 안 하고 사나? 석대성 쪽도 정예만 추려 움직일 건 분명하고 빌런 역시 그간 확보한 정보대로면 분신 셋은 자신의 수족처럼 움직인다. 거기에 보스야 말할 것도 없어. 합 한번 맞춰보지 못한 우리는 이중 최약체란 소리다.”
“아니, 권혁씨?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예. 이건 이설화 히어로 말이 맞습니다. 당분간 서로 목숨을 맡겨야 하는 동료니 서로 멘탈 건드리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석대성도 그간 뒤를 어느 정도 생각하고 움직였겠지만, 이젠 마주치면 묻어버릴 생각 만반일 테니까요.”
“목숨? 아, 그렇겠네!”
내 말에 별 생각 없이 사는 편인지 이설화 히어로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머리가 나쁜 건 아닌지 알아듣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더는 보는 눈 따윈 없다는 건가? 있어도 못 나가게 하라고 지시해뒀을 테지. 보스야 괴물이고 빌런 쪽도 이 정도 혼란이면 암살 정도론 이제 티도 안 나겠어. 더는 거리낄 게 없어졌다는 거군.”
모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고 여기 옆의 동료가 게이트 내에서 자신의 등을 지켜줄 유일한 아군이라는 걸 깨달았는지 모두의 표정이 그제야 진중해졌다.
“···그렇겠군. 알겠다. 조심하지.”
관리국 요원도 아까의 말실수에 대해 가볍게 사과를 건넸고 히어로측도 쿨하게 그걸 받으면서 분위기는 풀렸다.
“암살자가 둘, 디버퍼와 궁사가 각각 하나씩이군요. 그러면 진형은 사방진을 택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른 의견 있으면 말씀해주시죠.”
“일리 있군. 정찰을 최우선으로 하려는 거겠지?”
“예. 기동 시에는 시야 확보와 광역 정찰을 최우선으로, 전투 시에는 디버퍼를 전방에, 암살자를 양 측면에 둬서 견제, 원거리에서 요격하다가 무리다 싶으면 다 같이 빠집니다.”
그게 현 상황에서 가장 나은 행군 진형이라는 것에 모두가 동의했고 디버퍼인 이설화를 전방에 앞세운 채, 어느새 도착한 지하 수로의 계단을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