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 질곡의 시간
원거리 딜러 직군에 육체, 정신적인 것을 포함해 가장 중요한 능력치가 무엇일까?
헌터 중 누군가에게 그리 묻는다면 많은 이견이 있겠지만, 결국에는 한가지로 수렴될 것이다.
- 위치선정 능력 -
아무리 훌륭한 빌드를 탔다고 할지라도, 자기 등급 이상의 센스를 가져 어떤 상황에서도 공격을 우겨넣을 수 있는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도 보스에게 맞는 순간 반쯤 끝이다.
보호막이나 버프를 둘둘 두른 서포터가 아닌 이상, 후열 직군 중 동급 게이트 보스급에 처맞고 빈사가 되지 않으려면 진짜 장비가 탁월하거나, 특별한 특성이 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유물이 있거나 해야 한다.
그렇기에 원거리 딜러들에게 헌터의 능력치를 평가하는 헌터 프로필에서 오직 한 가지만 재능을 주겠다고 하면 위치선정 능력을 최대치로 올려달라고 할 것이다.
‘위치선정이 미쳤군.’
레이드 전투가 벌어지고 석대성의 움직임을 코앞에서 본 내가 속으로 내뱉은 감상이다.
나보고 저 석대성의 위치선정 능력치를 평가하라고 한다면 최고점인 40점을 줬을 거다.
교전이 벌어진지 이제 고작 2분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석대성은 현재까지의 보스의 패턴을 분석해 자신이 유지해야 하는 거리를 완벽하게 파악해냈다.
내가 그걸 분석할 수 있는 건, 다년간의 정보부 분석 경험이 있고 지금처럼 안전한 위치에서 보고 있으니 가능한 이야기지, 실전에서 석대성과 같은 위치선정을 할 수 있는가를 누가 물어본다면 바로 고개를 저을 것이다.
석대성만 해도 저 정도다. 대전쟁 이전 헌터들 중에 이렇게나 재능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의 주력은 대전쟁이 시작됨과 동시에 등장한 ■■■■을 막지 못한다.
분명, 기억 속 끝의 것보다는 이전 일임에도 이런 식으로 알 수가 없는, 비어 있는 기억들이 있다. 억지로 생각하려 할 때마다 두통이 일어날 뿐이다.
‘···아마 이것도 다음 기억과 연관이 있겠지.’
석대성이야 그때 이미 빌런이라 참사를 피했지만, 저 창천의 이명준이나 북진의 정상철, 금성의 서이수, 지금은 활발히 활동 중인 블랙을 비롯한 수많은 히어로들까지. 수많은 특급 각성자들이 그때 다 죽었다.
‘그 전에 필드는 전부 정리되어야 한다. ■■■■의 상대는 전쟁이 아니라, 전투가 되어야만 해.’
확실한 건 있었다. 패배한 이유는 그 전투가 일개 전투가 아닌, ‘전쟁’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온전치 않은 기억임에도 머릿속에 깊숙이 박혀있었다.
회귀 전의 나인지 아니면 기억을 보낸 미래의 나인지는 아직 정확하지 않지만, 그만큼 중요하므로 이렇게 강한 감정을 담아 회상하는 장면을 넣어둔 것일 터였다.
그러는 사이 안정을 찾은 금화의 공략조가 조금씩 유효타를 내기 시작했다.
몇몇 강력한 공격들이 보호막을 관통해 미처 회피하지 못한 몸 몇 군데에 원거리 공격을 적중시키자, 보스의 반응이 바뀐다. 마녀는 잔상을 남기며 순식간에 저 멀리 제단 뒤편으로 쭉 밀려난다.
“이런 씹. 저런 이동기가 있다고?”
“하, 어쩐지 던전이 더럽게 쉽더라니···.”
“뭐하나! 잡소리 말고 당장 추격해! 주문계 괴물에게 시간 주지 마!”
금화 정예 전투조 사이에서 이런저런 욕설과 탄식이 터져 나오고 팀장들은 흩어지려는 분위기를 다시 수습한다고 고함을 쳤다.
예배라도 보는 곳이었는지 화려한 회당은 고작 방 수준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꽤 넓은 편이었고 뒤편으로도 아직 공간이 많았다.
우습게 보고 힘으로 찍어누르려던 마녀가 금화의 호흡이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이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것 같다.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는 멀어졌지만, 그렇다 해도 각성자의 시야면 전황을 살피거나 공격하는 데 문제가 없다.
오히려 나 외의 은신 중인 상대가 혹시 움직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 예배당 구석진 장소들에 정신을 집중했다.
“추격은 하되, 장거리 공격은 조심! 큰 기술을 위해 후퇴했을 수 있다!”
조금 방심해줬으면 했지만, 금화는 적이 후퇴했음에도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
지금 대략 5분간의 전투 동안 보스는 시종일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모든 전투를 벌였는데, 단지 그것만으로도 순수 전투력만큼은 최소 S급 게이트 네임드급 이상의 전투력을 지닌 보스라고 봐야 한다.
벽 끝까지 물러난 마녀는 제단의 벽면을 손으로 건드린다.
복잡한 마법적 도형이 벽면에 한 차례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내 벽면 전체가 어딘가로 연결되어 소용돌이치는 검은 연기를 뿜어내기 시작한다.
“정지! 진형 잡고 방어 기술 준비! 페이즈 2로 예상된다. 종류는 괴물 소환이나 후방 화력 지원!”
금화의 전투조는 석대성이 내리는 지시에 추격하다 말고 거리를 유지한 채 전방으로 서포터와 전위들이 방어 계통 기술을 준비했다.
석대성의 예상은 적중했다. 소용돌이치던 벽면 너머로부터 붉은 눈동자들 수천 개가 일제히 눈을 뜬다. 그리고 뱀처럼 꿈틀거리는 크기가 제각각인 검은 괴물들이 톱날 이빨을 드러내며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예언의 때와는 시기도 대상도 다른가? 아주 이상한데···. 달의 선조들이 기록한 예언이 빗나갈 리가···.]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였지만, 난 그걸 분명히 들었다. 급히 돌린 고개에 잡힌 석대성 역시 순간적으로 미간을 구긴 것으로 보아 통일 언어 장비가 있어서 그걸 들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차피 대화를 걸어봐야 답해주지 않을 확률이 높았기에 무시하고 공략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수많은 저주를 쏟아내고 기괴한 생물들을 끊임없이 뽑아내며 금화에 희생을 강요하던 보스몹이었지만, 그들도 이런 괴물들과의 전투에는 이골이 난 전문가들이다.
큰 변수가 없다면 공략에 성공하는 게 당연하다.
보스는 피로 만들어진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라서 공략본부가 기록했다면 아마도 3페이즈라고 명명되었을 전투를 치렀지만, 결국 지친 모습으로 구석에 몰린 상태였다.
‘이러면 그 발악기 정도가 남았나? 나야 그게 뭔지 아니까 안 움직이지만, 그쪽은 정말 안 움직일 거냐?’
석대성의 지휘는 좀 당해줬으면 싶을 정도로 깔끔했고 그 탓에 3페이즈의 전투도 계속 일방적이었다. 그는 보스가 날아오르자 도주를 생각할 거라 판단하고 순식간에 중앙의 본대와 외곽의 네개 조로 인원을 분산했다.
공격이 집중될 입구를 외곽의 네 조가 돌며 번갈아가며 회전하며 타격을 분산하고 중앙에 자리 잡은 본대는 끊임없이 공중을 견제하는 전략이다.
말은 쉬워 보이지만, 많은 훈련이 되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그리 진형을 다시 짜는 사이에 상대도 놀고 있지만은 않는다.
이대로 내버려두면 석대성이 공략에 성공하고 엘릭서를 가져가고 만다. 하지만 나도 저쪽도 상대가 먼저 움직여주길 바라는지 은신을 풀지 않고 끝까지 대기 중이다.
차라리 나 혼자였다면 이미 손을 썼겠지만, 지금은 내가 먼저 움직이는 건 하수다.
거기에 상대가 타란툴라라면 급한 건 내 쪽이 아니다.
‘죽을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지.’
긴급 탈출기가 있다곤 하지만, 은신한 상대를 대상으로 제때 발동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다. 그러니 저쪽에서 먼저 움직이지 않는다면 난 이대로 대기하는 쪽이 차선에 가깝다.
결국 우리 중 누구도 움직이지 않은 채, 보스가 발악 패턴을 보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충격파가 제단 전체를 뒤흔들며 보스를 포위한 채 조심스레 접근해가던 전위들을 멀리 튕겨냈다.
[내 피는 영생의 저주요. 독이 스며든 구원일지니···.]
마녀가 무슨 뜻인지 모를 주문을 중얼거리자 전방으로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지고 마녀의 상체가 그대로 열리며 검은 피가 전방으로 뿜어진다.
접근하다가 부지불식간에 그 검은 피를 뒤집어쓴 전위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아무래도 사람 같이 생겨서 더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는데, 저 정도까지 올라온 이들 중에 그런 인원은 없겠지만, 비위가 약하면 구토를 할 정도라는 건 확실하다..
“자폭인가···?”
석대성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오판이다.
오히려 지금 전력을 다해서 최종기들을 발동해 퍼부었다면 어쩌면 저 발악기 발동을 막았을 텐데, 이미 최적의 시간은 지나갔다.
좌우로 상반신이 완전히 열린 마녀의 몸속, 불길한 기운을 내뿜으며 뛰고 있는 검은 심장 속에서 그 안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기운을 내뿜는 순백의 물질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정확히 한 방울, 마녀는 그 병에서 한 방울만을 꺼내 제 입에 집어넣었다.
치이익!
고통을 참는 것 같은 울음소리, 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은 냄새와 함께 마녀의 육신이 다시 재구성된다.
뒤늦게 금화의 전투조가 그 자리에 공격을 퍼부어보지만, 몸 전체를 없애버렸음에도 다시 처음부터 재생되는 모습에 결국 기가 질렸는지 그 누구의 지시도 없었는데도 공격이 멈췄다.
그리고 파충류와 인간을 합쳐놓았던 모습에서 이젠 누가 봐도 사람이라 봐야 할 정도의 모습이 된 마녀는 좌중을 한 차례 둘러보더니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시간과 장소가 다른데도 어찌 되었건 죽을 운명이라는 건가?]
언뜻 보면 마녀가 엄청 유리한 상황 같지만, 저리될 때까지 쓰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저 상태를 봐라! 정상적인 물건은 아니야. 오래 못 버틴다. 반면에 우린 아직 여력이 남았으니 겁먹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한다고 생각하고 밀어붙여!”
석대성은 잠시 일었던 동요를 가라앉히고 다시 냉정한 표정이 되어 지시를 내렸다.
마녀는 전신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쉼 없이 검은 피를 쏟고 있다. 처음의 여유가 있는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몹시 고통스럽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이어진 공략, 보스는 첫 전투 때와는 여태까지 썼던 모든 기술을 동시에 사용하는 중이지만, 전투는 일방적이다.
이미 대부분의 전투 패턴이 눈에 익었고 모든 종류의 기술이 퍼부어지는 만큼 위협적이 됐지만, 동시에 뭔가로 연계가 쉽지 않은지 공격의 섬세함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회가 올 것 같긴 한데···.’
전투 시간도 슬슬 45분여를 향해 가고 있다. 전투 시작부터 3페이즈까지가 대략 30분, 하지만 발악기 패턴이 완전 회복인 탓에 시간이 끌린 탓이다.
대개 보통 한 번의 전투를 위한 여력 분배를 30분에서 40분 정도를 잡는다. 여기는 주변 공략이 다 끝난 곳이니만큼,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여력을 남겨두거나 하진 않았을 거다.
그렇다는 건, 슬슬 서포터 직군 쪽에서 한계가 올 때라는 소리다.
그리고 결국, 기회라 할만한 순간이 왔다.
그건 방해가 없었다면 무난하게 해결이 될 만한 실수였다.
“온다! 지원!”
발악기 이후 생긴 새로운 패턴, 검은 기운에 휩싸여 후방 방어를 도외시한 채 한 방향을 무차별적으로 돌격해가는 공격인데, 치유 지원을 받으면 별 무리 없이 막을 수 있는 패턴이었다.
막아내면서 충격량에 근육이 찢어지는 게 문제인 공격이니 막아내는 동안 즉각 근육회복이 되도록 약간의 치유만 유지되면 되는 수준이다.
문제는 그 타이밍에 치유가 끊겼다는 거다.
자신이 막겠다며 지원을 외친 전위는 자신의 치유 차례였던 그 서포터의 안색이 당황으로 푸르죽죽해진 걸 알았을까? 그리고 그걸 알아채고 급히 지원조장이 다른 서포터를 부르는 것까지.
방해만 없었다면 무난하게 후속타쯤에 치유가 들어가며 놓칠 뻔한 검과 방패를 다시 잡아채며 막았을 거다.
하지만 그건 은밀하게 날아가 미간을 꿰뚫은 화살과 등을 찌르고 들어간 단검이 지원조장의 지시에 반응하던 세 명의 서포터를 죽여버림으로써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근육이 찢어지는 걸 버티지 못하고 검과 방패를 놓친 탱커는 몸에 그대로 들어오는 충격에 입에서 피를 뿜으며 튕겨 나갔고 그걸 지나친 보스는 그대로 입구를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즉각 그 뒤를 이어 달리는 자가 다섯. 그중에 나도 있었다.
타란툴라는 설마 했으나 그게 본신이었는지 옆에 생성한 분신 셋을 퍼뜨려 혼란을 줌과 동시에 자신은 그대로 보스의 뒤를 쫓았다.
나 역시 금화가 정신을 차리기 전, 마찬가지로 타란툴라의 분신 모습을 한 채 급히 그 뒤를 따라나갔다.
그 뒤로는 흉신악살의 표정을 한 석대성이 세 번째. 다만, 그는 이쪽이 암살자들이라는 걸 경계하는지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상황을 지속적으로 살필 여유가 있던 공략본부장으로 보이던 자, 약간 반응은 늦었지만, 속도만큼은 저중에서도 수위권일 금화 정보부장이 그 뒤를 잇는다.
물론, 반응 속도의 차이만 있었을 뿐, 금화 길드의 공략조 전원이 온갖 욕설과 함께 그 보스방을 이어서 빠져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