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헌터의 성좌투자법-94화 (119/128)

9장 - 질곡의 시간

여주희는 맘 같아선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길드장 급이 들어와선 물어버리는 것을 봐 놓고 지나치긴 어렵다.

‘그래선 뒷맛이 나빠. 하지만 그보다 골치 아픈 건, 관리국이 제대로 준비하고 나온 것 같다는 것. 면면이 만만치 않아. 분명 뭔가 있는데···.’

지난 일주일간 정보를 수집하다가 분신이 28명이나 당했다.

여기서 일 평균 2명 정도가 당했던 걸 생각하면 하루 4명 페이스로 사라지고 있는 셈이니 두 배가 되어버린 거다.

거기에 분신뿐만이 아니라 본신이 은신해 있는 코앞을 관리국 요원이 지나가기 직전까지 눈치채지 못하기도 했다.

그 말은 새로 던전 안에 들어온 자들이 최소 A급 이상으로만 구성됐다는 거다.

이번 작전에서 관리국 측 목표가 10대 길드인 만큼 당연한 일이었지만, 간간이 분신이나 밖으로 내보내서 바깥 상황을 드문드문 파악한 여주희로선 그런 속사정까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에 더해서 이곳에 들어온 히어로나 관리국 전력을 다 파악하지 못한 채였다.

당연히 저 분신이 유성이 유물을 사용한 거라는 것 역시 몰랐다.

하지만 설령 유성의 존재를 알았다고 해도 정말 완벽한 기회가 아닌 이상 타란툴라가 그를 습격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생성 횟수를 너무 많이 소모했어.’

당연하지만, 분신을 형성하게 해주는 그녀의 가장 귀한 장비에도 제약은 있었다.

과거 그녀의 성좌였던 라트리로부터 계약의 대가로 받았던 것은 ‘라트리의 등불’이라는 신물이다.

피격 당하지 않는 한 본신과 같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신을 하루 최대 12명까지 생성 가능하며, 동시 유지가 가능한 건 셋까지.

하루에 하나의 분신이 충전되며, 횟수가 줄어드는 건 분신이 소멸하거나 직접 흩어버렸을 때다.

흩어버리면 비축해둔 분신 숫자는 차감되지만, 일일 생성 횟수는 차감되지 않는다.

분신이라는 게 몹시 소소한 기능인 것 같지만, 그 활용성이나 단순 전투력 보조해주는 수치가 이론상 본신의 최대 네 배에 달한다는 걸 생각한다면 과연 신물이라고 할만한 성능이다.

여주희 역시 가짜 분신을 조심스레 추격해가기 시작했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그 추격전 끝에 도착한 곳은 도시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그리고 여주희의 그 생각은 앞서 따라가던 석대성 역시 똑같이 하고 있었다.

“도발이 노골적이군.”

“대놓고 함정을 파 놓고 올 테면 와보라고 유인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함정은 아닐 거다. 이 아래쪽에 기존에 공략은 됐었잖아?”

“공략 본부 정보실 기록상, 수색한 결과 도시 남서부 지하는 타 길드에 의해 정리된 상태입니다. 적어도 네임드 급은 없는 게 확실합니다. 몇 번이고 수색했는데요.”

석대성의 말에 암살자, 길드 정보부장이 그리 답하곤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다만, 석대성은 나름대로 마음속 계산이 선 상태였다.

“놓치기 전에 따라 들어간다.”

결정에 토를 다는 자는 없다.

‘우리는 공략하느라 바쁘다. 하지만 저 빌런은 우리가 공략한 지역만 돌아다녔겠지. 따라서 뭔가 단서를 찾았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무엇보다 이 던전에는 정식 보스급이라 할 만한 놈이 없어.’

사실 이상한 점은 많았다. 게이트의 마력 반응이나 크기 치고 공략이 너무 순조로운 편인 것이 가장 그렇다.

‘이 정도 크기와 마력이면 최소 A급 대형 게이트다. 공략 계획도 제대로 세우기 힘든 이런 날림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면 원래라면 엄청난 희생이 났어야만 해.’

남부의 것이나 이번 동해안 것에 비하면야 당연히 하찮아 보일 지경이지만, 이렇게 저항이 약한 건 이상하다.

이런 경우, 정상적으로 지휘 체계가 잡혀있지 않았을 확률이 높았다.

예상 외로 공략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빠르게 진행하라 지시를 했지만, 그래서 최초에 석대성은 공략조를 최대한 사리라고 지시해뒀었다.

‘그리고 이러면 대개는 보스가 더럽게 강하지···.’

거기에 중간 보스급을 잡고 나온 일지의 대략적인 해석본은 의미심장했다.

“저주라고 했지?”

“비싼 돈 주고 불러온 축성 주문 익힌 버퍼들 기술이 안 먹히는 걸 보면 여길 지키고 있는 놈들이 생긴 거랑 달리 언데드가 아닌 건 확실합니다. 일지 내용도 그걸 뒷받침하고 있고요.”

“저 빌런의 분신은 버림 패겠지.”

“그럴 겁니다.”

분신은 이미 여러 번 처리했고 숫자 말고는 제약이 거의 없는지 끊임없이 튀어나오고 있다.

그렇기에 그게 버림 패라는 것 정도는 여기 진입한 모든 길드가 어렵지 않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빌런을 잡는 건 시간을 엄청 소모해야 하는 일이라 어떤 길드도 자신들의 귀한 공략 시간을 소모해 잡을 생각을 안 했다.

‘고작 하나가 뭘 하겠느냐는 거지.’

말 없는 시선이 파티 사이에 한 차례 오갔다. 의견을 말해보라는 뜻이다.

“이건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겠죠.”

“그래. 높은 확률로 보스방을 찾는 단서일 거다. 중요한 건, 다른 길드에게는 조금도 단서를 남겨두지 않는 거야. 확인 마치면 주변부터 싹 수색하고 혹시 모를 빌런의 준비도 치울 수 있으면 차단해 둔다.”

“가짜 흔적들 만들고 이곳 흔적은 반대로 지우러 왔다갔다 하려면 아주 바쁘겠군요.”

다만, 그리 말한 석대성조차 유성이 보스방으로 가는 ‘단서’가 아니라 아예 보스방으로 안내를 하고 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건 던전을 공략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선 상식적으로는 절대 가능할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정말 보스방을 찾았을 때, 석대성의 머리를 뒤흔든 건 짙은 혼란과 의심이었다.

* * *

저 멀리서 간격을 유지하며 따라붙는 석대성을 보며 난 눈을 빛냈다.

‘그래. 잘도 따라오는군.’

나오기 전, 보스방으로 향하는 제단 문은 이미 열어두었다.

이제 모퉁이만 돌면 23번 구역이 나온다.

이후 주변 수색 정도는 벌어질 게 뻔했기에 난 지하구역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곧장 다른 통로를 이용해 그대로 그곳을 빠져나갔다.

‘잠입한다고 해도 석대성과 정예들은 피해야 한다. 내부 구조나 은신처들이라면 수색하는 놈들 정도는 충분히 피할 수 있어.’

다른 지하 구역으로 빠져나오자마자, 서둘러 역으로 석대성의 뒤를 잡기 위해 달렸다. 서둘러 쫓던 나는 앞쪽에 숨어있는 누군가를 파악하며 곧장 물러났다.

내 감각의 전방 끝에서 확인했으니 높은 확률로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실력차가 있다고 해도 지금 내 실력에 이런 장비빨을 받은 상태라면 특급 각성자가 아니고서야 닿지 않을 정도는 됐다.

‘감각 능력치는 후방에서는 3분지 2 정도 거리까지만 반응하니까.’

물론, 그럼에도 놀라긴 했다. 이런 철렁하는 느낌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예상하더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종류다.

‘그나저나, 역시 있었나?’

설령 느꼈다고 해도 상관은 없다. 오히려 이 상태면 급한 쪽은 저쪽일 테니까.

정확히 누군진 모르겠지만, 높은 확률로 타란툴라일 것으로 생각했다.

관리국이나 히어로들은 석대성에게 걸리는 순간, 큰 꼬투리를 잡힐 상황이라 벌써 이리 대놓고 따라다니진 않을 것이다.

‘한창 바쁠 때기도 하지.

고작 첫 주 정도가 지났다. 남겨두고 떠난 인원은 나를 포함해 총 14인. 아직 공략 지역 전체를 둘러보기엔 시간이 부족했을 타이밍이다.

수를 쓸 생각이더라도 충분히 준비해 두고 유인해서 은폐할 수 있는 상황에서야 움직였겠지.

‘물론, 저게 타란툴라의 분신이라면 돌격해오겠지. 하지만 그때도 상대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상대가 그 여자라 가정한다면, 이런 상황에서 시비를 걸어올 확률은 몹시 낮았다. 어떻게든 이곳 정보를 최대한 파악한 후에 본체에 기억을 전달하려 할 확률이 높다.

‘이러면 안쪽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당장 보긴 조금 어렵겠어. 그러면 이제 석대성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인데···.’

함부로 건드려서 보스를 풀어주느냐, 아니면 침착하게 대응하느냐다. 전자가 좋은데 확률은 후자가 높아 보인다. 당장은 입구 근처의 은신처에 숨어들기로 했다.

‘괜히 지금처럼 뒤를 잡고 있다가 석대성이 바로 빠져나오기라도 하면 도미노다.’

그리고 내겐 아쉽게도 여기서 석대성의 대응은 침착한 쪽이었다.

네 사람은 급히 빠져나왔고 둘로 나뉘었다. 석대성과 전위는 입구를 지키고 다른 둘은 곧장 어디론가 달렸다.

파악했던 대로라면 금화의 공략조가 있는 방향이다.

‘좀 아쉽긴 한데, 그래도 이쪽이 낫겠지. 그럼 계획을 시행해 볼까?’

원 영상의 첫 공략조는 조심성이 없었는지 길을 막고 있던 쇠사슬을 치우다가 진형도 갖추지 못하고 곧장 교전에 들어가면서 전멸해버렸다.

내부의 보스가 자유롭게 풀려나서 공략이 어려웠던 것도 그래서였다. 보스방 외곽을 휘감아 길을 복잡하게 만든 사슬은 함부로 건드리면 봉인이 깨지는 종류다.

풀려나는 것과 정상적으로 공략이 진행되는 것 모두 장단점이 있다.

전자는 개입이 쉬워지며 석대성 쪽 전력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반면, 타란툴라를 붙여서 제거하는 건 힘들어질 것이다.

후자는 전자의 단점이 장점이 되지만, 석대성이 공략에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

‘그 말은 저쪽이 엘릭서를 안전하게 손에 넣어 협상 카드로 쓸 수 있게 된다는 말이지. 물론, 내가 그렇게 두진 않을 거지만.’

세상 만사가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라는 건 느끼고 있다. 절대라는 건 없으니 안전하게 공략이 이뤄진다면 그것도 고려해서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애초에 몹이 별로 없는 좁은 제단 지역이기도 했고 석대성과 그 네 명의 파티가 길을 싹 정리했는지 내려가는 길은 잔몹 하나 없이 깔끔했다.

그리고 나도 문제의 보스방에 도착했다.

수많은 쇠사슬이 움직일 틈도 별로 없을 정도로 방을 가득 메우고 있다.

‘저것에 닿으면 은신이 풀리겠지. 석대성도 수상하니까 물러섰을 거다.’

기이한 기운이 흘러다니고 있는 걸 보면 동화건 은신이건 버티지 못할 건 분명하다. 그럼에도 타란툴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의미하는 바는 간단했다.

먼저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있을 것이다.

‘그 여자도 여기 어딘가 숨어있다는 말이겠지.’

상대도 나와 같은 판단을 했다. 그렇기에 보통의 경우라면 숨어 있기가 어려운 공략 도중의 보스방 잠입이지만, 이번에는 시도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저쪽도 막 내가 들어온 걸 느꼈을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따라다닌 게 아니라면 내 정체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겠지만, 일단 안다고 가정하고 움직이고 있다.

나는 내부의 쇠사슬을 건들지 않도록 조심스레 움직이며 영상 속 미리 봐뒀던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괜히 떨리는군.’

자칫 빌런이 내가 숨는 자리 코앞에 대기 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된다.

물론, 나는 원거리고 타란툴라는 근거리인 이상 최적의 자리가 겹칠 가능성은 몹시 낮지만, 가능성이 아예 전무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날 공격하진 못하겠지만.’

저쪽도 여기서 뭔가 잘못 건드렸다간 자칫 잘못하면 보스전이라는 걸 모를 리 없으니 코앞에 자리를 잡은 것이 아닌 이상 공격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면 이제 석대성을 기다릴 시간이군.’

그리고 이후 한 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석대성을 비롯해 백이 넘는 각성자들이 제단으로 내려오는 것이 감각에 잡혔다.

“우선 전장부터 정리한다! 전위는 혹시 모를 상황 대비해서 입구 확실하게 틀어막아!”

“알겠습니다!”

“그 빚쟁이들 도착하는 대로 던져줘서 1차로 패턴 파악하자. 2차는 공적 세우고 싶은 말단 유망주들부터 먼저 자원 받아보고 없으면 7팀이 먼저 진입한다.”

빚쟁이를 던져준다는 건 조금 잔인한 느낌이지만, 어쨌거나 깔끔한 지휘다. 어차피 통로는 들어온 한군데뿐이다.

거기에 감각 상 내부에 느껴지는 기척은 인간 형태의 소형이다.

고위 각성자들이 저 입구만 틀어막으면서 버티고 사람 던져주면 보스가 도망친다거나 하는 일 없이 조금씩 패턴을 파악할 수 있다.

고작 A급 게이트다. 공략이 아무리 길어져 봐야 저리 최고위 길드가 작심하고 달려들면 하루를 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석대성이 여기서 알 수 없었던 건 전장 정리가 실수라는 것 그 자체였다.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은 아니라고 봤는데, 마음이 급했나?’

앞장서서 쇠사슬을 잘라내거나 치우던 전방의 인원들은 어느 정도 제거해나가던 도중 거대한 사슬 전부가 재가 되어 부스러지는 걸 멍하니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그 멈칫한 찰나는 몹시 위험했다.

“멍 때리지 마! 보스! 집중해!”

석대성이 연달아 고함치며 길드원들을 다잡으려 했으나 늦었다.

시야를 가린 검은 잿가루 너머에서 붉고 검은 섬광 수십 개가 날아들며 미처 대응하지 못한 B급 헌터 두 명을 그대로 절명시켰다.

보스는 제단 중앙에서 몸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검은 원구 일곱 개와 함께 허공에 부유하는 중이다.

형체는 사람 같이 생겼지만, 기이한 위치에 자리 잡은 귀나 허공에서 흔들리는 그 꼬리는 당연히 인간이 아님을 알린다.

얼굴은 부적 같은 것을 그려 넣은 검은 면사에 의해 보이지 않지만, 그 아래로 드러난 비틀린 입가는 보스가 분명 즐거워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쉬지 않고 기괴하게 움직이는 보스의 손가락을 따라 검고 붉은 섬광들이 방 전체를 수놓고 있다.

“이···멍청한 놈들아! 허둥대지 말고 당장 진형부터 잡아!”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죽어버린 두 헌터에게 하는지 모를 그런 말을 내뱉은 석대성은, 곧장 백여 개에 달하는 백색의 마법 화살을 형성해 날아드는 섬광을 일제히 요격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리 특급 각성자라고 해도 A급 던전의 보스급 괴물의 공격을 모조리 다 쳐내진 못한다.

하지만 어그로가 끌리는 것을 각오하고 저렇게 맞선 건 좋은 대응이었다.

자기네 길드 마스터가 빼지 않고 자신의 생존기까지 써가면서 시간을 끌자 금화 길드도 금방 전열을 정비하고 보스의 공격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그래. 저게 한국 내 주문계 중 3위에 있는 술사, 석대성이라 이거군.’

엘릭서를 지키는 보스인데다, 던전의 특성이 특성인 만큼 그 전투력은 던전 등급 이상이다.

대비는 했다지만, 계획과 다르게 급박하게 전투가 시작된 상황. 당연히 전투가 쉽사리 끝나진 않을 것이다.

난 침착하게 어둠 속에서 기회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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