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 질곡의 시간
당연하지만 양양에 주둔 중이던 길드와 부대는 난리가 났다.
조금 있으면 대한민국이 난리가 날 것이고 그 협상의 내용이 알려진다면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일 것이다.
“이게 대체···.”
“보고서 받으셨지 않습니까. 그대롭니다.”
급히 전문을 받고 비공정을 타고 날아온 서이수는 골이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짚고 책상 위 보고서만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아니. 너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설악산 전투 참여했으니 어느 정도는 짐작하셨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다른 쪽 전부 재껴두고서 길드장님을 지명해서 호출했던 건데요.”
“이씨-이···.”
미치겠다는 표정에 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슬쩍 삼켰다.
지금 이건 사실 독이 든 성배다.
내가 전면에 나서기에는 지나치게 과분하다.
따라서···.
‘얼굴마담을 세워야 하지.’
그 적임자로 금성 길드장인 서이수만한 인물이 또 없다.
마침 양양 작전의 사령관이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머리 좋은 사람답게 모든 걸 기민하게 파악한 것인지, 머리가 터질 것 같다는 듯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짓던 서이수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내게 물어왔다.
“내가 모른다고 해도 너, 할거지?”
“예. 저희 동맹 아닙니까. 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니 어그로 좀 끌어주셔야겠습니다.”
“하. 나 말고 영감님한테 시키지. 아···.”
“그건 타당성도 많이 모자라고 효과도 작죠. 여러모로 서 길드장님이 적임자인데요.”
북진 길드장의 경우에는 이종족 문제에 관해서는 사실 그간 강경파에 가까운 논조를 내왔다.
이번 계획에 필요하다고 해도 쉽게 받아주지 않을 것이고 모양새도 안 좋을 거다.
이건 이슈 몰이다. 이종족과 동맹을 맺는 것이 가능하다는 걸 전 세계에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사건이고 따라서 한국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릴 것이다.
“오랜만에 국뽕 하나는 끝내주겠군요.”
지난번에 지혜와 이야기에서 나왔던 것처럼 근래 한국에는 안 좋은 소식만 있고 국뽕이랄만한 게 없었으니, 찬성이건 반대건 간에 국내 이슈는 이 이야기로 도배될 것이다.
“이종족과도 대타협과 협상을 이끌어낸 세기의 협상가이자 개혁가. 좋지 않습니까.”
서이수는 한숨만 쉬었다.
“그리고 그때가 바로 우리가 석대성을 치기에는 가장 적기겠지. 이런 걸 준비하고 있었을 줄이야.”
“예. 이걸로 언론을 묶어둘 겁니다.”
“나는 기다리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지금 이 이슈를 이용해 막타를 넣으면 되는 거고?”
흔히 언로가 막히면 가장 이득을 보는 것이 어딜까?
일반인에게 물어보면 대개 최고 기득권인 10대 길드가 아니겠냐, 혹은 범죄를 저지른 기업이나 정치권이 아니겠냐. 그런 식의 말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식의 과한 이슈로 언론이 묶여버릴 때, 그 그림자에서 가장 강력한 힘과 권한을 가져가는 쪽은 관리국이다.
물론, 좀 이상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관리국이란 기본적으로 정의의 편이란 이미지가 있으니까.
그래서 빌런이나 잡고 헌터 범죄나 수사하는 평소 조용히 있는 권력 없는 기관 아니냐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다 싶어서 나서면 가장 무서운 게 헌터 관리국이다. 헌터법을 집행하는데 전혀 거리낄 것이 없어지지. 애초에 관리국은 헌터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으면 경찰, 검찰과 동일한 수사권도 가지고 있어.’
그리고 게이트 시대에 헌터와 연관이 거의 없는 기업, 정부, 언론, 군부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생각보다 관리국이 가진 권한은 막대하다. 칼을 빼든 헌터 관리국은 민간인을 제외한 국가의 모든 집단에 위협적이다.
대개 정부, 헌협, 재계가 언론을 통해 국민 여론을 입고 견제하기 때문에 억제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관리국이 작정하고 맘만 먹으면 정부건, 국회건, 재계건 군부건, 10대 길드를 위시한 헌터 협회까지 전부 상대가 안 된다.
집단 대 집단의 일대일로 붙는 거라면 정말 하루아침에 다 찢어버릴 수 있다.
‘내가 괜히 히어로나 관리국과 친하게 지내려는 게 아니지. 그래도 헌터 협회 쪽은 좀 버거우려나?’
하지만 그것조차도 히어로들에게 국제 지원 요청해서 그들까지 돕는다고 치면 못 버틴다.
애초에 예전 서이수의 서포터 개혁도 명분을 잡은 상태에서 여론과 국회, 정부를 이쪽 편으로 만든 뒤, 결정타는 관리국의 도움을 받아서 먹인 것이다.
즉, 영웅 협회와 관리국이 그들이 아는 것을 이용해 ‘엄격하게’ 법을 집행하려 들면 10대 길드 중에 피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아, 이런 짓은 절대 두 번 하는 거 아닌데···.”
“한국에서 ‘가장 센’ 여자면서 약한 척 좀 하지 마시죠. 서 길드장님이 작정하고 패려고 들면 A급 이하는 다 처맞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역으로 이게 안전할 텐데요.”
“아니, 그렇게 강조하면 내가 너무 원더우먼 같잖아! 그리고 이 일을 하는 동안에나 그렇지. 그런 이슈 잠잠해지면 생기는 적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거기에 이건 또 너~무 민감한 이슈인데···.”
“그다음에는 따로 계획해 둔 게 있습니다. 이어지는 큰 이슈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이 일 끝날 쯤까지 협상 카드로 써먹을 일 없는 거면 마력 발전기를 바로 공개할 거다. 이슈는 이슈로 덮으면 잠잠해진다.
“아니. 이거, 네 속도를 진짜 내가 못 따라가겠는데? 이게 젊음의 패기인가? 벌써 겁이 나려고 하네. 이 누나가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어요···.”
“아직 서른도 안 됐으면서 무슨 나이 든 척입니까? 그리고 저랑 몇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심란하니까 좀 져주는 척이라도 해!”
서이수가 집어던진 꽃병이 슬쩍 고개를 튼 내 옆을 지나 벽에 깊숙이 박혔다.
‘음, 역시 예전 그 제안은 절대 받지 않는 걸로.’
예전에 연인 제안을 받았을 때 좀 설렜긴 했는데, 역시 이렇게 센 여자는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그 우호적인 나가들이 지금 저 밖에 대기 중이라는 거지?”
“그렇죠. 어차피 일본이랑 중국과의 무역에 배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크지 않습니까. 협상이 어렵진 않을 것 같은데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냐. 진짜 가까운 거리나 내해에 가까운 곳을 제외하면 바닷길을 아예 쓰지 못한지도 벌써 20년이 넘었어. 조선업은 몰락 직전이지.”
“재계가 생각보다 심드렁할 수 있다는 말이군요.”
“물론, 그 정도야 충분히 설득할 수 있어. 무역 비용 절감 효과도 크고 조선업 종사하던 사람들에게 일자리도 찾아줄 수 있는 거고 경기가 살아나는 건 국가나 길드 입장에서는 환영할만한 일이지.”
“그렇다면 진짜 문제는···.”
“제대로 전쟁을 해야 한다는 거지. 제대로 전쟁을 벌이려면 중국, 그리고 일본하고 국제 공조가 되어야 해.”
서이수의 말이 맞다. 동해안에 자리를 잡은 적성 나가들을 치워버리고 트라바슈르와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가장 큰 이득을 보는 국가들은 단연 저 둘을 포함한 세 국가다.
그리고 그 부분에 관해선 재상과 이야기가 나왔던 것이 있었다.
“일본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하긴, 걔들도 저 나가들이 위협적이라는 건 실시간으로 겪고 있다지?”
일본은 가깝다. 당장은 부산에 막혀서 대규모 나가의 침공은 겪지 않는다지만, 이미 바다를 건넌 나가나 어인들이 일본 열도에 상륙해서 민간인을 공격한다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는 중이다.
“제 생각은 그쪽 국내 정세도 괜찮은 편이니, 이쪽에서 터놓고 이야기하면 진지하게 생각할 거로 봅니다. 그리고 중국도 경제가 아니라 군사적으로 접근한다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군사적으로?”
“배는 비공정에 비해 상륙, 보급 작전을 펼치기에 훨씬 유리하죠.”
“북쪽 아크리치를 말하는 거구나.”
“회담을 열어서 언제까지 장성 이남에서 웅크리고 있을 거냐고 한 번 도발해보시죠. 리치를 밀어낼 수 있으면 우리가 그들의 동쪽 전선을 해결해줄 수 있습니다.”
“하, 그 근시안적으로 굴던 나라가?”
“그거야 동북아시아와 이북까지 전부 자기들 땅이라고 생각하니 아까워서 그렇겠죠. 세상에 돈으로 해결 안 되는 건 없습니다. 더 큰 이득을 안겨주면 당장은 물러설 겁니다.”
그리고 그 더 큰 이득이라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가 않다. 지금 몽골과 러시아 땅이 비어있지 않은가?
“동북 삼성에서 레나 강을 경계로 서쪽은 중국이, 동쪽은 우리가 가진다?”
“정확히 3성 전부를 우리가 가지는 건 아니고 선양 라인을 경계로 삼아야겠죠. 우리가 국제적으로 지지해준다 하면 고민해볼 겁니다.”
“솔직히 그런 영토 관련은 허황한 것 같은데. 그건 그렇다 쳐. 그러면 일본은?”
우리 입장에서는 허황한 말이 맞다.
하지만 중국이기에 먹힐 것이다.
그리고 일본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일본이야 불만을 터뜨리면 연해주 지역 알아서 차지하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야 옛 이북 지역과 동북 삼성을 먹기에도 벅찰 텐데요.”
이렇게 인구가 늘었지만, 지금 수준의 치안을 쭉 유지하려면 우린 저 동북 삼성을 먹기에도 솔직히 버겁다.
“지금 우리 인구는 비공식 합쳐도 약 1억 남짓하지만, 지금 중국은 비공식 추정 인구가 30억을 넘습니다. 계속 폭발적으로 증가 추세고요. 북쪽으로 확장이 막혀서 영토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래. 나라 남서쪽에 인구 강국들이 대거 몰려있지.”
인도도 그 근방 인구 강국들도 과밀화된 인구를 생각하면 땅이 모자랄 지경이다.
원래 죽음이 가까우면 자손을 자주 보기 마련이다.
당장 그건 지난번 황은비네 가족만 봐도 보인다. 그리 잘 사는 게 아닌데다 편부가정이라 아내 쪽은 사별했음에도 이미 자식이 셋이다.
반면, 그렇게 죽음이 가까운 것치곤 생각보다 영토 내의 치안은 각국이 필사적으로 나름 잘 지켜내고 있는 편이었기에 각국의 출산 장려 정책까지 겹친 탓인지 세계 인구는 쭉 증가추세였다.
지금 집계된 것만 그저 수십 년 전과 비슷할 뿐, 비공식적 인구는 그 배에 달한다는 게 인구 통계학자들의 의견이다.
‘거기에 중국은 내전 이후, 각 지역이 군벌과 그 군벌과 연계한 문파들로 자치 정부를 이룬 걸 연방으로 억지로 하나의 국가 내에 봉합해둔 것에 불과하지.’
중국이 산해관 너머를 치는 시늉만 하는 것도 사실 그런 복잡한 이유가 얽혀 있다.
그런 정치적 상황이라, 저쪽도 국내적으로 희망을 품게 하고 내부를 통합할 수 있는 명분이 절실할 거다.
중국이란 나라가 그간 수십 년 동안 주변국에 패악질을 부리고 허세를 부려온 것이 있기 때문에 어딘가 쉽사리 약점을 보여주지 못할 뿐이다.
의외로 공동의 이익으로 묶여서 제 편이라 여기면 좀 고깝게 굴긴 하지만, 대범한 척하며 이것저것 퍼주는 나라기도 했다.
“저기 대륙 쪽도 항상 말은 강한 척하지만, 내심으론 손을 내밀어 주길 바랄 겁니다.”
“그렇게까지 허황된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그래. 네 말대로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는 일이긴 하지. 당장 해로 운송에 대한 경제적 이익만 추산해서 보여주더라도 두 국가도 동하긴 할 거고.”
결국, 서이수가 내 제안을 받았다.
“아시겠지만, 오히려 국내를 설득하는 게 더 힘들 겁니다.”
“그 말도 맞아. 외국 애들이야 우리가 조건 없이 동해안 필드를 싹 개방해 준다는데, 나쁠 것이 없어. 석대성이랑 그쪽 동맹 길드들 쪽이 발작할 일이지.”
이번에 형성된 동해안 필드는 사실 필드와 인접한 길드들엔 나쁠 것이 없다.
나 때문에 구상이 반쯤 망가지긴 했지만, 동해안 사태를 보자마자 석대성이 그린 그림도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이 안건이 터지면서 국제 공조의 그림이 나오면 그들은 곧장 반발할 것이다.
“국내 싸움에서 지면 이딴 큰 그림이고 뭐고 그냥 끝장이야. 알지? 저 녀석들이 나를 어떻게 하진 못하겠지만, 내 손발을 공격하거나 어쩌면 영감님을 쳐서 위협을 할 수도 있어.”
“온갖 더러운 일들이 벌어질 건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길진 않을 것이다.
질곡의 시간이란, 벼락처럼 끝나는 법이니까.
길어봐야 앞으로의 한 달이 승부처다.
다음날, 서이수가 세계 최초로 이종족 지성체와의 협상단을 데리고 서울로 가고 있다는 내용이 국내를 비롯한 전 세계 포털 사이트의 메인에 쫙 깔렸다.
그리고 나는 이번 일에 대해 블랙, 그리고 관리국 국장과 한 차례 회동을 가진 뒤, 타란툴라가 숨어 있는 그 문제의 히든 던전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