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이합집산
어떤 큰 사건이 있었다 할지라도 일이 끝난 뒤의 인생은 물 흐르듯이 조용히 흘러간다.
여러 히어로들과 함께 붉은달의 빌런들과 맞붙은 것도 벌써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래서. 그 빌런은 잡혔대요?”
“아니. 영국 공주도 돕고 있다는데, 영 쉽지 않은 모양이야.”
바이올렛도 타란툴라도 잘 숨어있는지 발견됐다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보는 지혜의 얼굴이다. 바쁠 텐데, 그간 얼굴 한 번 못 봐서인지 만나러 양양까지 올라온 것 같다.
“히어로 하나 길드에 있는 게 썩 나쁘진 않은 것 같아요.”
“그거야 네 성격상 길드를 투명하게 운영하니까. 그래서. 요새 길드 운영은 잘 되어가?”
물론, 모르고 묻는 건 아니다.
아주 잘 되고 있다.
A급 각성자 하나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고 청수 길드는 이제 전투조만 세 자릿수에 이르는 중견 길드로 급격히 성장하는 중이었다.
“이제 동해안 사태 여파도 수습되는 것 같고 슬슬 이적시장에 쓸만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요. 추천해준 사람들은 다 접근해봤는데, 유성 오빠 안목만 확인했고 영 성과는 없고?”
“다른 데서도 접근했나 보네.”
자유로워진 인물 중에 앞으로 잘 될 인물이나, 실력있는 사람들 리스트를 쭉 뽑아줬었다. 영입은 대부분 실패한 모양이다.
사실, 예상한 바다. 그런 여건이 되어 훗날 잘나가게 되는 것도 그럴만한 길드에 있기 때문에 잘 되는 것이다.
선수쳐서 영입에 성공하지 못하면 그런 재능은 다들 바보가 아니니 다른데서도 알아보고 채가기 마련이다.
“접근했거나, 아니면 아예 헌터일에는 관심이 없거나? 그것도 아니면 조건이 안 맞는다거나. 그런데 김 전무님. 이렇게 여기서 쭉 죽치고 있어도 돼요? 엉? 이러다가 확 자리에서 밀려나는 수가 있어요?”
“뭐. 누가? 내가?”
“칫···. 여기서 월급루팡하지 말고 뭐라도 좀 해봐요! 길드원들이 전무 얼굴을 잊어버리겠네.”
지혜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잘 안다.
전투능력이나 보여준 게 아니라도 청수 길드는 지금 인맥 때문에라도 날 버릴 수가 없다.
사실, 그 모든 걸 떠나서 그냥 이건 그간 지혜가 알게 모르게 나한테 의지해오던 것이 있어서일 것이다.
“다 필요한 일이라서 여기 이러고 있는 거야.”
물론, 그런 것 치곤 근래 나의 일과는 무미건조하게 반복되는 중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큐브 던전으로 향해 알고 있는 남은 기연들을 회수하고 오후에는 내게 넘어오는 길드 업무를 본 뒤, 해가 질 무렵 울릉도로 떠난다.
그렇게 나가들의 일을 돕다가 새벽에 돌아와 두 시간 정도 짧은 눈을 붙이면 하루가 마무리된다.
그걸 나가 쪽을 제외하면 이미 조사로 알고 있는지, 지혜가 옆에서 계속 찡찡대기에 못 이기는 척 품에서 설계도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지금 함부로 건드리다간 피 보는 거.”
“킁, 뭔가 돈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개코냐?
내가 내민 설계도를 한참 동안 이리저리 살펴보던 지혜는 이내 고개를 돌리더니 활짝 웃어 보였다.
“뭔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렇겠지. 그거 거울 미궁 클리어 보상이야. 우리 세계 기술이 아니니 알아볼 수 없을 수밖에.”
잠시 무슨 말인지 인지하지 못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갸웃하던 지혜는 이내 경악성을 내뱉었다.
“뭐야! 그게 오빠가 한 거였어요?!”
“그래. 괜히 이목 끌기 싫어서 비공개로 해뒀어.”
“아니! 왜?”
보름 전, 거울 미궁이 클리어 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났다. 클리어 난이도 EX급으로 평가받은 큐브가 뜬금없이 하나 깨져버렸으니 당혹스럽긴 했을 것이다.
큐브 진입 기록을 살펴본다. 뭐다 하면서 클리어 자를 추측하려는 시도들도 많긴 했지만, 애초에 큐브 던전 속에 있는 큐브들이 한두 개도 아니고 진입하는 장소도 전 세계에 흩어져 있다.
큐브 던전 같은 경우는 들어가면 일정 시간 내로 어딘가 도전을 해야 하니, 안에서 지키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것만 공개했어도 영입 실패한 사람들 몇 명은 더 영입했을걸요? 그게 아니더라도 우리 길드 광고 효과가 엄청날텐데요? 오빠도 알겠지만, 요 근래에···.”
하기야 요 근래에 한국이 사고만 터졌지 뭐 세계적으로 해낸 일이 딱히 없긴 했지. 나라에 국뽕이랄만한 것이 하나도 없긴 했다.
“됐어. 아는 사람만 알면서 여기저기서 견제받지 않는 게 더 좋은 거야. 지금은 실리를 따질 때니까.”
지혜도 내가 길드 행사나 활동 같은 것에 있어서 외부에 드러나는 건 피한다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
“하아···. 뭐, 오빠가 싫다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이 도면이 무슨 보상이었는지 알겠네요.”
“그래. 난 클리어하면서 그 보상의 상세 내용을 봤으니까.”
잠시 뜸을 들인 나는 지헤에게 도면의 정체를 말해주었다.
“마력 발전기. 그리고 마력 추출기.”
“마력···발전기요?”
“둘이 묶어서 세트고 공해 같은 게 없는 무한동력 시대가 온다 이거지. 각성자 수가 적당히 유지되는 한, 각성하는 것만으로도 먹고는 살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 사실이 말하는 바에 지혜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와. 미쳤네. 우리 빨리 이거 만들죠? 자본은 우리 아빠가 대고···.”
“아니. 우리도 발전기 양산 준비 정도는 해둔 채로 공개하긴 하겠지만, 우리만 만들진 않을 거야.”
“네? 대체 왜?”
“이쪽 마력 발전기랑 배터리 도면은 전 세계에 무료로 특허 공개. 우리만 가지고 있을 건 이쪽 마력 추출기지.”
“아니, 정 힘들면 그냥 특허 출원하고 특허료만 받아먹어도 되는 걸···.”
지혜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이건 가지고 있어봐야 짐만 되는 물건이다.
“지혜야. 생각해봐. 이거 특허 지킬 수 있겠어? 지킨다고 치면, 전 세계에서 집중되는 이목에 견제나 압박은 버틸 수 있고? 아직 건재한 세계 에너지 자원 카르텔들은? 길드 하나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다.”
“···우리나라 10대 길드라도 그건 힘들겠죠. 눈 꼭 감고 삼켜버리면 죽는다는 말이네요.”
“그래. 이 오른쪽 도면은 분란만 일으킬 물건이야. 하지만 왼쪽은 다르지.”
“도면은 하나만 있었다?”
“핵심은 우측 발전기 도면이고 독점할 수만 있다면 엄청난 돈이 되는 건 맞지만, 이건 정치도 얽혔고 국가 단위로 해야 하는 사업이지. 반면, 우리 같은 일개 길드가 돈을 벌 수 있는 건 왼쪽 도면이고.”
발전기 도면 가지고 연구하던 과정에서 나온 물건이라 하면 적당히 변명 정도는 될 것이다.
“그렇게 발전기 쪽이 상용화될 때쯤, 우린 개인 헌터나 길드를 상대로 이걸 만들어서 팔 거다.”
그리고 그걸로 들어오는 막대한 자금은 그 사이 내실을 다진 청수 길드가 재도약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일단, 이 도면은 네가 가지고 있어.”
“에-. 제가 이거 먹고 튀면 어쩌려고요?”
“그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거겠지. 위험한 물건인 건 너도 슬슬 느끼고 있을 거고.”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는 사람이 찌르면 약점이 된다는 말이네요. 독식하려면 오빠 입을 막아야 한다는 거고?”
“지금 청수 길드의 힘만 가지곤 날 어찌하기는 어렵지. 거기에 너랑 나는 포르세티님 문제도 있잖아. 계산적으론 그렇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난 네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믿어. 그건 당장 공개하진 않을 거니 잘 보관해 둬.”
저건 급한 상황에서 국가 단위의 협상카드가 될 수도 있는 물건이다. 어떤 변수가 벌어질지 모르니 바로 공개해버릴 필요는 없었다.
“으···. 일 좀 떠넘기려고 왔더니 일거리를 만들어주시네요. 거기에 확실한 변명거리까지.”
난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지혜의 이마를 툭 밀었다.
“날 부려 먹으려면 아직 10년은 이르다. 길드장. 더 커서 와라.”
“칫! 난 이미 다 컸거든요? 오빠야말로 아직 여친도 없는 주제에!”
“뭐?”
포르세티가 준비한 그 수많은 녀석 중에 승리자가 정해졌다는 건 또 금시초문인 일이다. 멍한 표정의 나를 향해 얄밉게 혀를 쓱 내민 지혜가 떠나고 목소리가 들렸다.
[···재미없어져 버렸어. 유성. 부디 내게 또 재밌는 걸 만들어주렴?]
난 믿기 어려웠으나 슬쩍 들려온 포르세티의 확인사살은 부정할 수도 없었다.
“아니. 진짭니까?”
[아니. 대체 그 하트가 왜? 그 멸치 자식은 대체 왜 거기에 꽂히는 거지? 물론, 내가 그런 동심을 노리긴 했지만, 애새끼도 아니고 설마하니 진짜로 그딴 걸 보고 꽂혀서 귀엽다고 급발진하는 놈이 생길 줄은···.]
“그래서 누굽니까?”
[너 졸졸 따라다니는 그 애. 그 비쩍 마른 멸치 같은 놈이 내 귀한 딸내미 지혜를 채 갔어.]
도저히 믿기 어려웠지만, 그 묘사에 딱 맞는 놈은 한 명밖에 없다.
“···신수빈이요? 진짜로? 그 녀석이?”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네.]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보니 하루가 멀다고 빌드 같이 연구하자고 찾아와서 내 귀한 시간을 뺏어 먹던 놈이 이번 주 들어선 잘 안 찾아오긴 했다.
“이거 대실패인데요.”
신수빈이 지혜랑 비교하더라도 명백히 우위인 능력 있는 녀석은 분명한데,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지혜랑은 전투 시에 서로 큰 도움이 안 된다.
[그러게 말이야. 그런데 유성. 넌 연애 안 하니? 아니면 못 하는 거니?]
“제가 그런 거 할 시간이 있는 놈으로 보입니까?”
[애초에 지혜도 시간은 없었어.]
“시간이 없어서 '못' 하는 겁니다.”
[그런 뜻 아닌 거 알면서? 얄밉네.]
그러고 보니 회귀 전, 이 시점에 사귀었던 전 여친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혜가 포르세티님을 졸업해버려서 심심하신 건 알겠는데, 두어 달 내로 유럽으로 갈 테니 좀 참으시죠. 그때쯤이면 주문한 비공정도 올 거고 심심하시면 유럽으로 날아가는 동안 혜성이 통해서 지켜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 몰라. 비공정 출발하면 그때 말해. 난 저쪽이나 보고 있을게.]
그리고 어김없이 울릉도에 찾아가 말없이 일을 도와주러 가려는데 웬일로 재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하면 됐다.]
“시험은 통과한 겁니까?”
[아니. 아직 멀었지. 하지만 임무를 맡기기엔 충분해 보이는군.]
“대체 이건 뭐하는 시험이었습니까?”
내가 뭔가 해냈다기엔 내가 일을 돕는 작업장들의 나가들 반응은 바뀐 것이 전혀 없다.
[어제 처음으로 내가 너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요?”
[그게 전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왜 일을 맡길 수 있는 게 되는 겁니까?”
[그건 그들의 눈에 네가 슬쩍 거슬렸다는 거지. 발톱의 때만도 못하게 여기던 인간의 존재가 거슬렸다는 거다. 네놈의 노력이 그들의 일에 도움이 됐다는 뜻이지.]
내가 아리송해하자 재상은 더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 나가는 배타적이다. 네 녀석이 왕의 손님이라 뭐라 하긴 어렵고 네가 일을 그만두고 빠졌을 때, 일이 힘들어지면 불만이 나올 수 있으니 내게 빨리 치워달라는 거다.]
“그건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는 거군요.”
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
관계에 있어선 무시보다는 거슬리는 게 낫다.
[그래. 정답이다. 하지만 당장은 거기서 더 일해봐야 역효과만 나겠지. 중요한 건 인식이 조금이나마 바뀌었다는 거다. 인간, 외교관에게 필요한 덕목이 뭔지 아나?]
“고견을 말씀해주시죠.”
[지식, 논리, 용기, 소신, 신뢰, 인내, 냉정, 화술, 그리고 경험과 여유. 세상에 많은 덕목이 있고 뭐든 갖추면 좋겠지만, 저 열 가지 정도가 외교관이 갖추면 좋은 덕목이다. 물론, 그 모든 걸 이런 짧은 시간에 볼 순 없다.]
“그중에 몇 가지만 보려 했다는 말이군요.”
[그중에서 나는 네 가지 정도를 네게 바랐지. 이 시험으로 볼 수 있다 예상했던 건 용기, 인내, 냉정. 그리고 신뢰 정도다.]
“용기, 그리고 인내를 보신 건 분명하군요. 하지만 제가 신뢰를 얻었다거나 냉정함을 보였다기엔···.”
[자신에 대한 무시에 분노하지 않는 건 냉정이며, 신뢰는 이미 왕을 설득한 것만으로도 얻었다. 오히려 거기서 한 가지를 더 봤지.]
“뭔지 모르겠군요.”
나머지 덕목 중 뭔가 더 봤다는 건데, 그럴만한 게 있었는지 모르겠다.
[여유다. 그건 은연중에 드러나는 것이지. 바쁘게 물과 뭍을 오가던 걸 보면 넌 여유가 없는 자일 것이다. 하기야, 그대는 왕께서 인정한 자. 인간 사이에서도 그만한 자리에 있을 터. 바쁘지 않을 리 있을까?]
그럼에도 겉으로는 그 조급함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말 같다.
‘뭐, 저쪽의 복잡한 정세를 잊고 안심하고 쉴 수 있는 곳이라 그런 게 겉으로 드러났나 본데.’
어차피 피하기 어려운 것. 내친김에 쉬는 셈 치자고 생각했는데, 그게 도움이 된 것 같다.
[외교에 있어선 급해선 안 된다. 조급함을 먼저 보이는 순간, 지는 것이다. 우리가 동맹을 맺으려는 과정에서도 분명 많은 난관이 있을 터. 그러나 조급할 필요는 없다.]
“뭘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도 놀고 있던 건 아니다. 너희 인간 포로를 몇 명 잡았었다. 힘 있는 자는 아니고 하층민 계급 정도로 보이더군. 그를 통해 너희 정치 체계에 대해서 좀 들을 수 있었지.]
“좀 많이 달랐겠군요.”
[너희 인간의 체계야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면 그만이지. 그저 그 정보로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것 정도가 중요했을 뿐이다. 너희 지도자와 연이 닿게 되면 우리를 도우면 이 근해의 바닷길을 열어주겠다고 전해라.]
“···어디까지를 말하는 겁니까?”
[일이 잘 풀리면 너희가 말하는 동남아시아라는 곳까지. 안 풀리더라도 배신자들만 다 치우면 동북아시아는 우리가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저희 인간이 내어줘야 하는 건 뭡니까?”
[너희 영역 내의 섬이라 불리는 모든 장소에 대한 권리. 그리고 바다의 소유권이 전적으로 우리 나가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뒷 말은 재상이 아니라 어느새 우리 곁에 다가온 트라바슈르가 했다.
[말데나사르, 그가 네 시험을 통과한 모양이로군.]
[이름은 인정할만한 자인 것 같아서 이제 제가 막 말해 주려 했습니다만···.]
[이름이라는 게 한 번 듣는다고 바로 외우긴 어려운 것. 하물며 종족이 다른 이름이어서야. 여러 번 들어 나쁠 건 없지 않겠나?]
[그것도 그렇군요. 그럼 저는 일이 많아서 빠지겠습니다. 이야기들 나누시지요.]
말데나사르가 떠나고 트라바슈르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그대는 돌아가겠군.]
“예. 그런데 아까 하신 말. 셈이 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셈이 맞지 않는다?]
“육지에 속하는 모든 섬을 드린다면, 저희도 뭔가 받아와야죠.”
[그래. 일리가 있는 말이로군. 뭘 원하나?]
“섬 지역을 제외한 근해 정도는 받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 외의 몇몇 예외 지역이라거나 세세한 것은 각국의 외교관들과 논의하셔야겠지만. 그건 제 일은 아니겠죠.”
육지에서 몇 해리까지, 근해의 영역 정도는 받아야 셈이 맞을 것 같다. 배타적 경제 수역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아마도 아예 이 협상 자체가 성립을 못 하진 않을 것이다.
‘나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해상 무역이 가능하다는 건 생각보다 크다.’
당장 바다 자체가 어차피 우리의 것이 아닌데 거부감이야 있겠지만, 실리를 따진다면 결국 동맹을 맺는 쪽으로 갈 것이다.
중국과 해로만 이어지더라도 한국 경제에는 엄청난 이득이 생긴다.
트라바슈르도 나와 마찬가지로 외교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일리가 있다는 정도에서 선을 그었다.
자세한 건 재상과 다시 이야기하라는 투다. 반면, 그가 관심이 있는 건 전쟁 쪽인 것 같다.
“당분간 공세를 벌이기는 좀 힘들 겁니다.”
[일전은 급히 방어하느라 총력전이었단 말이군.]
“예. 저희 인간들도 사정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아마 당신이 우리에게 협상을 해오지 않는다면 이번에도 필드로 남겨두자는 의견이 대세일 겁니다.”
[놈들은 어떻게든 너희 땅을 차지하려 들 것이다. 이젠 배신자들의 수뇌부도 상황파악이 됐을 것이고 북쪽의 해골과 연계하며, 이 대륙 북방에서 너희의 힘을 흩어놓으려면 중간 땅을 차지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겠죠.”
그래서 부산이 그렇게 오랜 세월 나가들에게 공격받지 않았나.
결국엔 뺏긴다.
부산 땅이 완전히 끊겨버리면서 일본과의 연계도 끊겼고 그 길목을 빠져나온 나가들이 황해의 섬들에 자리를 잡으면서 곳곳에서 비공정을 주술로 공격해대는 탓에 중국과의 연계도 쉽지 않아졌었다.
[그러니 네 언변에 모든 것이 달렸다.]
트라바슈르와 헤어진 뒤, 재상과 며칠 간 이쪽에서 먼저 제시할 협정 초안을 작성하는 걸 도왔다.
사흘 뒤, 해마를 타고 울릉도를 떠나는 내 곁에는 나가 사절단이 함께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