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이합집산
나는 서둘러 히어로팀에 합류해 이 사실을 알렸다. 마침 그들도 벙커에 민간인들을 대피시킨 뒤 지상으로 다시 나오던 중이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몸통이라도 소각할 걸 그랬군요.”
“살아있다고 확신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바론이라는 빌런하고 엇갈려서 놈이 시체만 챙겨갔을 수도 있고요.”
“목이 잘렸는데 살아났다고 생각하니 좀 소름이 끼치네요.”
나도 그게 살아난 게 어이가 없긴 했지만, 히어로들도 마찬가지로 황당했는지 한마디씩 했다.
“설령 그렇더라도 수색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그렇죠. 대중에 협회가 잘 처리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라도 찾아내긴 해야 하니까. 일단 이동하죠. 도망친 자리를 가 봐야 추격을 하든 말든 하니까.”
일행은 전투가 벌어졌던 아파트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다들 몸 상태는 좀···.”
“아, 잠시.”
어떻냐고 물으려는데 그들 중 가장 베테랑 히어로의 헌터와치가 울렸다.
“장정호입니다.”
[장 선배, 나야. 이제 통신이 되는 걸 보니까 해결은 좀 했나 보지? 아까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는데, 거기 안쪽은 어떻게 된 거야? 여기 지부 앞에서 습격도 그렇고 느낌이 영 구려서 계속 시도하다가 이제 닿은 거야.]
블랙의 목소리다. 든든한 목소리에 히어로들의 표정이 급격히 밝아졌다.
“아, 수철아. 일단 당장 급한 건 해결했는데, 아직 사태가 안 끝났다.”
뜻하지 않게 블랙의 본명을 알았다.
[목소리만 들어도 그건 알겠는데, 어차피 곧 도착하니까 요점만 말해봐.]
장정호는 블랙에게 우리가 겪은 일을 차분하게 설명해갔다.
[빌련 놈은 둘, A급과 거의 특급 하나. 특급은 생명 술사고 A급은 세검을 쓴다? 외모 묘사도 그렇고 이거 어디서 많이 들었던 인상착의다 했더니, 예전 중국에서 마주쳤던 그 두 연놈이군. 장 선배, 용케도 살아남으셨어?]
“그놈들이 그 정도냐? 네가 기억할 정도야?”
[당연하지. 그것들 최악의 국제범죄집단인 레드문 조직원이야. 기억 못 하기도 힘들어.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건 놈들이 우리나라에 관심을 안 보여서 그렇지.]
“악명은 들어본 적 있긴 해.”
[선배도 국제적으로 놀게 되면 그 새끼들 지겹게 볼 거야. 그때 내가 두 놈한테 기습받고 시작하는 바람에 죽을 위기를 한번 겪었는데. 선배, 그 놈들 중에 여자가 능력치 뺏지 않았나?]
“어. 덕분에 엄청 고생했다. 거의 B급 시절 수준으로 떨어지던데.”
[선배가 B급 떨어질 정도면 주변 동료는 C급이 간당간당했겠군.]
“그래. 이런 사기적인 기술은 생전 처음 겪어본다.”
[그때 느낀 바론 그렇게까지 사기는 아냐. 특정 계열 최종기 정도? 좁은 공간에선 더럽게 강하지만, 원거리에 약해. 범위가 그리 넓지 않아. 함정에 빠지지만 않으면 거리 벌리고 필드 깬 다음에 상대하면 그만이지.]
“근거리 상대로만 강한 거군. 그러면 넌 상성이 괜찮겠는데?”
[그렇지. 난 능력치 뺏겨도 S급이랑 A급 사이 정도고···.]
헌터 와치 너머 블랙 쪽에서 바람 소리가 들리다가 이내 ‘쾅!하는 소리가 터졌다.
그 충격으로 비산한 흙이나 먼지 따위가 가시자 그 자리에는 히어로 랜딩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자세로 떨어진 특급 히어로가 있었다.
“내가 그때 그 연놈들 몸에 구멍 뚫어서 보냈었는데, 먼저 처맞고 시작해서 중독된 거 아니었으면 거기서 추격해서 죽였을 거야. 오, 너도 있었냐?”
“또 보는군요.”
“인사는 나중에 하고. 그래서 기습해서 죽였는데, 뜬금없이 살아나서 도망쳤다 이거지. 흔적은?”
“그게···.”
우리도 도착해서 열심히 살펴봤지만, 흔적이라고 할만한 게 전혀 보이질 않는다.
“넌 오면서 뭐 못 봤냐?”
“전혀.”
그때, 우리 쪽으로 공 같은 것 하나가 굴러 왔다. 그 목 위의 얼굴을 본 블랙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나도 살짝 놀랐다. 꽤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일대일로 자기보다 높은 등급의 각성자를 죽인 거다.
“이놈은···.”
“바론 그 자식 목이죠. 뭐겠어?”
“네가 여기서 그년 목 날려버렸다는 녀석이냐?”
“그 년이 바이올렛 말하는 거면 날려버리긴 했는데 확인사살을 깜빡하고 안 해서. 히어로 아재들 번거롭게 만들어 버렸네.”
“음···. 아무리 봐도 B급으로 보이는데, 상성인가?”
빌드 상성을 말하는 거다. 가끔 빌드에서 너무 상성 차이가 날 때에는 등급을 뛰어넘어 이기는 경우가 있다.
특히 암살자 같은 경우는 기본적으로도 한 등급 위 정도는 기습으로 죽이는 경우가 종종 나오기에 크게 이상할 건 없지만, 직접 겪어본 블랙은 이놈들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냥 내 실력이 쩌는 거지.”
“그런데 꼬마야. 말이 짧다?”
“뭐야, 꼴통처럼 굴면서 선배 대접은 받고 싶어요? 이런 캐릭터가 아니었지 않나?”
그 즉시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치고 불꽃이 튀는 것 같은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서로 마력까지 피워올리며 하는 기싸움에 주변 사람들이 오히려 당황했다.
“야야, 수철아! 애잖아.”
“그, 블랙 선배님. 그래도 큰일 해낸 친구인데···.”
주변에서 히어로들이 말리려는데, 블랙은 손사래를 쳤다.
“하여간 우리 히어로 동료들은 아직도 날 잘 모른다니까.”
그리곤 굳혔던 표정을 펴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저나 이거 딱 내 과네. 야, 너 맘에 든다. 혹시 내 직속 후배 할 생각 없냐? 히어로 할 생각 있으면 내가 잘 키워줄게.”
“영협 같은 블랙 기업에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꼴통은 그쪽 하나면 됐고. 어차피 아재 도움 없이도 나 혼자서 잘 클 수 있으니까 빨리 추격이나 하죠. 이거 놓치면 엄청 귀찮아져.”
“그래. 그래야지. 음, 그 보라색 여자. 지난번에 봤을 때 성격이 좀 더러운 것 같았어.”
제안을 던진 블랙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는 표정이다.
“그래서. 천재소년? 어디로 튄 것 같냐. 난 이거 짐작이 가는 게 있는데.”
“뭐? 야, 김수철. 그걸 알면 바로 추적해야지!”
옆에서 아우성거리는 상황에도 블랙은 강시후 쪽만 지긋이 바라봤다. 그 시선을 받으며 강시후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고 이내 한 방향으로 쥐고 있던 단검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 그 단검은 그대로 그 벽을 그대로 뚫고 들어가버렸다.
따로 엄청난 마력을 실은 것도 아니고 그냥 좋은 재질 단검으로 던졌는데 사라졌다는 건, 뒷공간이 완전히 비어 있다는 소리다.
그게 의미하는 바에 모두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아깐 정보가 모자라서 경우의 수가 많았지만, 꼴통 아재가 올 때까지 이 정도 시간밖에 안 됐는데 여기 오면서 발견하지 못했다는 건, 지상도 하늘도 아니라는 거지. 그럼 뻔하고.”
“그렇지. 땅 파고 튀었어. 이거.”
블랙의 뒤에서 소환되어 튀어 나간 거대 야수가 벽면을 그대로 후려치자 벽이 무너진다.
그 뒷공간으로부터 땅 속으로 파고 내려가는, 나무 줄기 따위로 지지 되는 급조되고 투박한 통로가 우리 눈 앞에 등장했다.
“서쪽은 가봤자 바다. 거기에 관리국과 너무 가깝고 곧 경계도 쫙 깔릴 테니 소용이 없다는 거군요.”
“그렇지. 지금 동쪽 방면은 내가 쭉 훑으며 온 방향이고. 나는 놓치더라도 내 소환수가 놓칠 리는 없거든.”
“좋아. 그럼 바로 추격하자!”
“아니. 장 선배, 가긴 어딜 가?”
“뭐야, 쫓아가는 거 아니었어?”
블랙은 고개를 저었다.
“이 중에 대지 술사나 생명 술사인 사람?”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술사 보조도 없이 지금 저런 지하굴 속에 생명 술사를 상대로 기어 들어가자고?”
“어. 음. 그게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 정돈 알지?”
장정호 히어로는 헛기침을 몇 번 했다.
블랙의 말처럼 추격하는 건 좋지만, 이미 중간을 막아 놨다거나 미로화 시켜놨을 확률이 너무 높았다.
바로 대응하며 추격하기에는 이미 타이밍을 놓쳤다.
“선배. 열혈인 건 좋은데, 이미 따라 추격하는 건 골든타임 놓쳤으니까 생매장되고 싶은 거 아니면 헛짓거리하지 말고 본부에 보고부터 해.”
“그렇겠네. 뭐라 보고할까?”
“땅속에서 이동 속도 추정해서 포위망 깔고 혹시 모를 국내 놈들 조직원 지원부터 막아야 한다고 전해. 계엄령까지 때릴 수 있으면 좋은데, 이미 동해안 사태가 끝나버려서 그건 아쉽네.”
“오케이. 다른 건?”
“손 남는 대지 술사 전국에서 다 차출하라고 전달해줘. 레드문이라고 하면 국장도 발등에 불 떨어진 것처럼 굴겠지. 어쨌거나 목이 날아갔어. 어중간한 시간 가지곤 회복 못 해. 이참에 한국을 우습게 본 걸 후회하게 만들어 줘야지.”
“그러면 이 사건은 종결입니까?”
내가 묻자 블랙은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여기서부턴 히어로들 일이다. 빠져. 내가 헌터들 자발적으로 우리 돕는 걸 좋아하긴 하는데, 이놈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그거야 나도 안다. 다만, 못 잡을 경우가 걱정일 뿐이다.
“이번 일 어그로가 걱정이면 이 추격 과정에서 내가 최대한 가져갈 테니, 너희한테까지 큰 피해가 오게 하진 않아. 그래도 뭐, 당연히 몸조심은 해야 할 거고.”
“아재, 솔직히 좀 못 미더운데.”
“그럼 꼬맹이 너도 참여하던가?”
“···하, 그러죠. 이거 처리 실패하면 다른데 손 벌려야 하니까. 그럴 바엔 꼴통 아재 도와서 해결하는 게 낫겠지.”
“그 꼴통은 좋은데, 대체 내가 왜 아재냐? 너랑 내가 나이 차가 얼마나 난다고?”
강시후는 그 말에 뭔 개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블랙을 바라보더니 툭 던졌다.
“아재 지금 30대 아니었음? 나 10대임.”
내가 알기로 지금 강시후가 10대 후반이고 블랙이 막 30이긴 한데, 팩트는 팩트였기에 블랙은 뭐라 답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솔직히 내가 봐도 앞자리 숫자 2차이는 좀 컸다.
“아재 맞네.”
확인사살까지 당하자 블랙은 소환수를 꺼내더니 그 위로 곧장 홱 날아올랐다.
“도울 생각이면 영웅 협회 본부로 와라, 꼬맹이.”
그리곤 대답도 듣지 않고 급히 하늘로 비상해서 멀어졌다.
다른 히어로들도 헌터와치로 뭔가 연락을 받았는지 서둘러 주차장의 차를 끌고 온다.
“그···. 전 아직 예비 영웅일 뿐이고 뭔가 하진 않을 거니까 오늘 협회 진술 같은 거 끝난 뒤에 길드 쪽으로 찾아갈게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황은비도 내게 꾸벅 인사하고는 선배 히어로들에게 합류해선 급히 떠났다. 강시후는 저 멀리 멀어지는 블랙의 소환수를 바라보며 익숙하다는 듯 투덜거리는 중이다.
“참나, 안 태워주는 걸 보니 우리 아재 뒤끝 작렬하시네···.”
이번에도 나보고 들으라는 투다.
“강시후.”
내가 그에 대해 확신을 얻고자 녀석을 불러세웠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영협 방향으로 멀어지며 말했다.
“대장. 내가 암시한 거로 이미 과해. 이 이상은 잘못하면 내가 반동을 입을 수 있어. 성좌도 아닌 내게 그 대가는 죽음이야. 그러니 속도를 좀 더 냈으면 좋겠네. 최소한 두 번째를 열지 않으면 이야기가 되질 않아.”
“음···.”
그는 이미 내 특성과 능력까지 전부 알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대장의 모든 사정을 다 아는 건 아니니까 서두르라는 재촉은 아냐. 이쪽도 아직은 잘 흘러가고 있으니 큰 문제는 없어. 다만, 이대로는 그저···.”
더 말할 수 없는지 강시후는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튀어나온 대장이라는 말이 주는 뉘앙스가 좀 더 확신하게 만든다.
저 흐린 뒷말로 예상이 가는 건 아마도 ‘반복’일 뿐이라는 건가?
“그, 이쪽이라는 건?”
“그것도 알잖아? 확신을 받고 싶은 건 알겠는데, 스스로도 아는 걸 묻진 말라고.”
마지막으로 그리 말하며 돌아본 강시후는 꿈길을 열곤 공간을 넘어 사라져버렸다.
블랙에게 말한 다른 쪽에 손 벌려야 한다는 말이 무엇인진 확실하다.
난 그 말에서 나를 제외한 회귀자들 사이에 나름의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 역시도 알아챌 수 있었다.
'이 건은 지금은 히어로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나?'
어쨌거나 내 사전 계획에는 없던 일이다. 이 일까지 신경 쓰기엔 내 일정이 너무 빡빡하다.
'바다 쪽, 트라바슈르의 보호 하에 있다면 설사 일이 좀 잘못되더라도 붉은달이 날 쉽게 발견하진 못하겠지.'
만나기로 한 유망주들은 굳이 국내에서 만날 필요는 없다. 그 정도는 따로 조율하면 되는 일이다. 난 지금은 이 사건에서 멀어져 나가 쪽부터 신경 쓰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