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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 헌터의 성좌투자법-87화 (87/128)

8장 - 이합집산

난 굳은 표정으로 앞으로 나아가려던 황은비를 붙잡아 뒤로 물렸다. 내가 아는 것이 맞다면 여기서 더 안으로 들어가면 큰일 난다.

“왜요?”

난 대답하는 대신 바닥에 스멀스멀 범위를 넓혀가는 보랏빛 진흙 같은 것을 검지로 가리켰다. 적진이니 들어가지 말라는 뜻으로 여겼는지 황은비도 일단은 더 질문하지 않고 멈췄다.

‘그렇다곤 해도 이 정도로 차이가 심한가···.’

슬쩍 살핀 히어로의 면면은 절대 약하지 않았다. A급이 둘, B급이 하나. 총 세 명의 히어로가 덤빈 것 같은데 전부 바이올렛 하나에 털렸다.

물론, 바이올렛이라는 각성자가 동급이나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 특히나 강한 빌드를 탄 빌런이라 그렇다.

‘대개 헌터들이 자기보다 강한 적을 다수의 협동으로 처리하는 빌드를 타는 게 정상인 걸 고려하면 특이하지. 히어로조차 좀 독특한 빌드를 타도 일대일 정도를 상정할 뿐인데, 이건 마치 자신이 보스가 된 입장에서 같은 인간을 잡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은 빌드니까.’

대놓고 빌런이 될 작정으로 계획적으로 빌드를 탄 경우로 지금은 연구가 부족하지만, 나중에는 헥서, 저주술사라는 빌드로 유명해진다.

‘쉘터 통제와 방어에 굉장히 강력한 모습을 보이는 빌드라 후기 빌드 연구가들에 의해 연구가 많이 됐지.’

이럴 줄 알았다면 내려오지 않고 그냥 갈 때까지 위에서 버텨보는 건데 그랬다.

양 손에 화염 고리를 다시 만들어낸 황은비와 화살을 시위에 걸어 겨눈 나, 그리고 계단 아래서 우리를 노려보는 바이올렛의 대치는 침묵 속에 몇 분간 이어지는 중이다.

“바론은 어쨌지?”

“죽였다.”

머뭇거리는 황은비를 대신해 앞으로 나선 내가 즉답했다. 지금은 심리적 압박을 가해야 하는 시점이다.

“···너희가?”

“기다리나? 당연히 놈은 오지 않아.”

물론, 한 시간 동안은 전우치의 산악도 안에 붙잡혀 있을 테니까. 오진 못하겠지.

아니면 나와서 공중에서 1층으로 뛰어내리는 걸 다시 감수해야 할 텐데, 내가 그 안에 있을 거로 생각했을 수도 있고 놈이 금방 빠져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재밌군. 그저 우습기만 하던 그 여자의 말보단 네 말이 더 흥미로운데.”

흥미롭다지만 표정은 살벌하다.

“그쪽이 거기서 당장 움직이지 못한다는 정도는 안다. 난 여기서 한 발자국도 더 들어가지 않을 건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볼까?”

내 자신만만한 선언에 바이올렛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그리고 난 동시에 황은비에게 거의 복화술 수준으로 몰래 낮게 속삭였다.

“어떻게 확신하지?”

“몽상수림.”

“살려둬선 안 될 놈이군.”

내 입에서 내뱉어진 기술명에 빌런의 보랏빛 눈에서 살기가 흘렀다. 지금 히어로 셋은 개박살이 난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전투불능이 된 것이 아니다.

‘몽상수림은 능력 절반을 훔쳐 쓰는 결계 저주지. 그리고 안에선 누구도 죽일 수 없다.’

그리고 각성자의 정신은 정신 능력치나 특성의 보조를 받기 때문에 절대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

술자에게 능력치가 가는 건 아니고 결계 자체가 의지를 갖춘 생명체로 술자를 제외하고 내부에 존재하는 이들의 능력치 절반을 가져간다.

지금처럼 방어하는 처지, 혹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강한 최종기 중 하나. 힘의 절반을 뺏기지 않는 만큼 술자는 죽는다.

그렇게 따지면 페널티가 없는 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이쪽은 치명상을 입어도 정신적 타격이나 전투력이 급감하긴 하지만, 죽진 않는데 술자는 죽을 수 있다는 뜻이니까.’

모든 결계술이 그렇듯 저주의 핵인 술자를 죽이면 깨진다.

다만, 저런 페널티가 있다고 해도 누구라도 능력치가 절반이 된 상태로는 동급을 이기기가 힘든 건 당연하다.

하물며 다수전에 강한 헥서 빌드인 이상에야 거기서 능력치는 더 떨어졌을 거다.

‘이제 저 히어로들의 절반을 완전히 망가뜨리면 반전하겠지.’

몽상수림을 펼치면 두 번 전투를 해야 한다.

반전하면 나머지 절반의 힘을 되찾은 자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의미다.

지금 저 각성자들을 꿰뚫은 가시들은 저주로 뺏은 반쪽, 절반의 힘을 전부 뽑아내고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 타이밍에 도착한 상황이다.

물론, 저대로 시간을 끌면서 반전하지 않는다는 선택도 있다. 여기는 놈들로선 적진이니 그렇게까지 하진 않겠지만, 시간을 들여 정신을 망가뜨리면 손쉽게 나머지도 처리할 수 있다.

저 상태론 무슨 짓을 해도 죽지 않으니 고문을 하기에도 좋은 능력이다.

당장이라도 날 죽이려 달려들 것 같던 일그러진 표정과 달리 바이올렛의 입에선 비아냥거림이 뱉어졌다.

“바론이 죽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안다. 이 결계 내에서 내 감각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외부 히어로들이 올 때까지 빠져나올 수 없는 결계에 갇혔다면 죽은 거나 다름없지.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는 세계구급 히어로만 셋이다. 그들이 이런 사건에 대응하지 못할 거로 생각하나 보지? 혼자 꽃밭에서 사시는군.”

“···그래. 틀린 말은 아니야. 바론 녀석의 즉흥 계획으로 움직이긴 했으니까.”

뒤에서 조용히 중얼거리는 황은비의 주문이 완성되어가는 걸 느끼며 그에 맞춰 나는 화살에 모이는 기운을 함께 증폭시켜갔다.

바이올렛 역시 최종기급의 뭔가를 준비하는지 주변에 마력 결정이 응집되며 허공에서 부딪치는 잔여 마력에 건물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하지만 증원이 올 수 있는 게 너희뿐이라고 누가 정했지?”

“이 나라 안에서 히어로 블랙과 그 동료보다 너희가 증원이 더 빠를 수 있겠나!”

갑자기 느껴진 불길한 예감에 내가 발악하듯 내뱉었지만, 당황한 내 쪽과 다르게 바이올렛은 여유로웠다.

“특급 히어로 블랙, 너희 나라의 자랑 중 하나였나? 그래. 괜찮은 실력의 히어로지. 분명 놔둔다면 우리보다 증원이 빠르긴 할 거야. 하지만 그것도 중간에 끊어버리는 놈이 없는 상황에서다.”

“공중으로 다니는 히어로를 무슨 수로?”

“블랙은 최속의 히어로라는 별명도 있다지. 하지만 거쳐 갈 위치를 알고 있다면 아예 날아오르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야.”

나는 그게 무슨 말인지 깨달았다. 블랙은 사이드킥 없이 홀로 활동하는 히어로다.

그러므로 자료나 정보를 얻거나 상황 파악, 협조할 인원을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라고 할 만큼 지부에 들린다.

그렇다면 영웅 협회 지부를 습격하면 당연히 블랙의 발을 붙들 수 있는 거다.

‘아닌 것 같아도 이 나라에 이미 붉은달의 조직원이 퍼져 있다는 건가? 아니면···.’

문득, 머릿속으로 회귀 직후에 보았던 것이 스쳤다.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맘에 안 드는 놈이라지만, 우리가 너희에게 동료를 내줄 이유는 없겠지. 이 나라는 붉은달이 떠오른다는 공포에 대해 잘 모르는 모양이지만, 이제 알게 되겠어. 그래. 준비는 충분히 했나?”

“황은비!”

내가 살짝 옆으로 비켜섬과 동시에 황은비의 입에서 화염 술사계의 대표적 최종기 중 하나, 플레어를 발동하는 시동어가 내뱉어졌다.

태양의 힘을 담은 황금빛 불꽃이 작열하고 벽을 타고 몽상수림을 태워나간다.

하지만 바이올렛도 놀고 있었던 게 아니었던 만큼 생명 계열 주문계 최종기, 공상수를 끄집어냈다.

아파트 통로 여기저기가 열리며 우주의 빛을 담은 뿌리가 튀어나오고 중간에서 타오르면서도 조금씩 태양의 힘을 삼켜나가고 있다.

‘공허 속성이 섞인 술법이라곤 해도 어쨌거나 생명 계열이니 상성은 플레어가 앞서지만···.’

힘 싸움이 성립된 이상 틀렸다.

이런 주문계 끼리의 힘싸움이 되면 결국 추가 투입하는 마력 싸움이 되는데, 이런 싸움에서 황은비가 바이올렛을 이길 거로 생각하는 건 지나친 낙관이다.

내 화살은 그 혼란 속에서 묶여있는 각성자를 풀기 위해 쏘아지려 했다. 그러나 쏘아내기 직전의 순간, 슬쩍 바이올렛을 곁눈질했을 때, 나는 그녀가 이미 그걸 예상했다는 걸 알았다.

공상수의 뿌리가 히어로들을 삼켜버리면서 내 화살은 무력하게 떨어져 나갔다.

“후퇴를···.”

히어로 하나를 구해내 보려던 의도가 실패한 건 아쉽지만, 애초 목적은 후퇴였다.

바이올렛이 저 자리에 묶인 만큼 원거리에서 유도 화살을 쏴 저격을 지속하며 힘을 빼고 지원을 기다리는 게 이 상황에서 가장 알맞은 전략적 판단이다.

그래서 내가 후퇴를 말하려 했는데, 황은비는 뭔가 믿는 것이 있는지 고개를 저으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내 예상으로는 슬슬 그녀는 마력에 한계가 올 때가 됐다.

‘어떻게 버티는 거지?’

그러나 금방 무너질 거란 생각과 달리 황은비가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도 버텨내면서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 여자···. 죽여놔야겠는데.”

바이올렛도 그 모습이 예상외였는지 미간을 좁히며 그리 중얼거린다.

빌런은 마력을 추가 투입하곤 황은비를 바라보는 중이다. 그리고 그 시선을 따라 황은비를 봤을 때, 난 황은비가 히어로로서 최서린과 대항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근간을 알 수 있었다.

‘이 현상은···. 회기가 발동하는 건가?’

저 네 가지 색으로 빛나는 힘이 끊임없이 빨려 들어가는 현상, 특급 특성 중 하나인 회기로 보인다.

‘육신 / 마력 / 정신 / 체력’의 네 가지 직접 전투 자원 중 한 가지라도 빈사에 이를 시, 모든 전투 자원을 다시 최대치까지 채워버리는 최상급 고유 특성이다.

그리고 이 특성은 지금처럼 힘겨루기 중일 때 특히나 빛을 발한다.

‘일정 시간 동안은 최대로 자원이 채워지기까진 회복이 멈추지 않지.’

지금처럼 기술을 사용하는 중이라면 일정 시간 동안은 전투 자원이 끊임없이 채워진다는 소리다. 술사 계열에 가장 중요한 마력이 못해도 1.5배 정도는 된다는 의미기도 하다.

빌런 최서린이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전투 도중 최소 한 번은 히어로 황은비에게 힘 싸움에서 져야 하는 거다.

방어적인 지구전 타입인 것까지 더해져서 두 라이벌의 싸움은 황은비가 최서린을 잡을 수도 없지만, 반대로 최서린도 제압하지 못하고 힘이 다해 돌아가야 하는 그런 흐름이 되었을 거다.

그리고 이러면 다시 시도해볼 만 하다.

아깐 마력을 좀 많이 밀어 넣은 선레이지였다면, 이번에 내 손에 다시 형성되는 것은 아스트룸이다.

‘확실히 지혜의 지분을 정리한 여파가 있긴 한데···.’

그런 탓에 마력이 넉넉지는 않다.

마력 능력치는 새로 지분을 받은 A급 유망주의 마력 수치인 A로 떨어진 상황, 설연화가 크면 마력 S급에 도달하기엔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그쪽은 아직 클 시간이 필요하다.

충전을 오래 하진 않고 첫 단계를 지나자마자 곧장 활시위에 걸었다. 저편에서 바이올렛이 이를 갈며 입술을 뒤트는 것이 보인다.

난 이번에도 몽상수림에 묶이고 공상수에 삼켜진 히어로를 구하기 위해 그쪽으로 활시위를 겨누고 마찬가지로 상대를 바라봤다.

데자뷰 같은 상황. 하지만 이번에도 바이올렛의 표정은 평온했다.

‘뭐지?’

그 사이 잠깐 일그러졌던 표정도 온데간데없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그게 의미하는 바를 난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론!’

무슨 수를 쓴지는 모르겠지만, 놈이 10분도 되지 않아서 거기서 빠져나온 거다.

내 활시위가 바이올렛 쪽으로 돌아간다. 황은비가 주문을 끊을 시간을 주고 탈출을 위해서다.

이제 알았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는 빌런의 시린 시선을 받으면서 마저 못해 화살을 날리려던 그 순간, 내 눈은 그 뒤편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쏴!’

바이올렛 뒤편 어둑한 곳에서 검은 공간이 열리며 누군가 총알처럼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익숙한 얼굴은 이 빌런 집단이 찾던 사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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