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이합집산
말은 대부분 남자 쪽이 했고 뒤에 서 있는 조용한 여자 쪽은 말이 없다.
하지만 여주희는 둘 중에서 위험한 게 뒤에 묵묵히 서 있는 쪽이라는 걸 직감하고 그쪽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왜? 이래 봬도 세계 최대 범죄조직인데. 지금 네 문제쯤이야 해결해 줄 수 있다니까?”
그녀는 그들의 제안에 다시 한 번 거절의 말을 내뱉었다.
“나는 너희 같은 범죄자가 아니다.”
“뭐?”
대화를 나누던 남자 쪽은 두 번이나 똑같은 외침을 내뱉으며 어처구니없어했다. 그는 여성으로 보이는 빌런에게 물음을 던졌다.
“야, 이 녀석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리고 뭐 믿고 이리 당당해?”
“모르지. 하지만 확실하군.”
유성이 그 외견을 봤다면 그녀가 바이올렛이며, 붉은달의 간부 13인 중 한 명이 되는 여자라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물론, 지금 시점에선 꿈에서라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인물일 것이다.
“눈만 봐도 우리 쪽으로 돌아설 녀석이 아니다.”
창을 앞으로 겨누는 여주희의 모습에 정장을 입은 남자 쪽이 세검을 꺼내 든다. 하지만 그 자세는 공격적인 쪽이라기보단 수비적인 자세였다.
그들은 여기서 여주희와 싸울 의사가 전혀 없었다.
“이봐, 덤비면 상대는 해주겠는데, 우린 이만 갈 거야. 할당량 맞추려면 시간이 빠듯하단 말이지.”
여주희 역시 말은 도발하듯 했지만, 덤벼오지 않는다면 싸울 생각은 없었다. 특급 히어로 셋의 압박에 그녀는 지금 궁지에 몰려있었다.
‘이 자들을 미끼로 삼는 것도 방법은 방법이겠지만···.’
세계 최대 빌런 조직을 건드리는 건 득보단 실이 크다. 이들이 물러나 주기를 바라면서 이대로 조용히 있는 쪽이 변수가 작았다.
“돌아가지.”
“어. 그래.”
그리고 바이올렛은 돌아선 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여주희에게 경고를 남겼다.
“네 생각이 어떻든지, 또 이 나라 수준에서 네가 뭘 하든지. 우린 신경 쓰지 않는다. 하지만 네가 이끄는 것이 누가 봐도 우리 같은 조직인 이상, 선을 넘는다면 그때는 선택해야 할 거다.”
뒷 말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세계구급으로 나아갈 생각을 한다면 오늘처럼 그냥 물러날 일은 없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여주희도 직감적으로 느꼈다.
‘저들이 진심으로 나왔다면 여기서 죽는 건 나였다.’
감각으로 어렴풋이 파악되기엔 남자 쪽은 싸워볼 만했다. 하지만 저 여자 쪽은 붙었으면 도주하는 게 한계. 남자 쪽에서 발을 묶는다면 죽는 수밖에 없다.
“잠깐. 해줄 말이 있다.”
“뭐지?”
그들도 그녀도 지금 하는 말이 이번 영입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안다. 여주희의 입이 짧게 달싹였고 바이올렛은 코웃음을, 정장의 남자는 흥미로워하는 표정을 짓곤 떠났다.
그렇게 두 빌런이 떠나고 여주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그저 가족을 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잘못이 있다면 세상이다.
그러니 자신은 범죄자가 아니라 생각했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처음 조직을 세울 때의 원칙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래서다.
신념이 있는 조직은 절대 쉽게 붕괴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고집 때문이기도 했다.
‘모든 것은 필요한 자의 손에, 받은 것은 반드시 돌려준다.’
전자는 자신만의 정의, 후자는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원칙. 물론, 누가 봐도 비틀린 신념이라고 말할 것이다. 여주희는 그걸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다.
‘그래. 누가 봐도 선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혹시 모를 우연이나 타인의 연민에 기대기보단, 내가 직접 하겠다.’
타인이 정당하든 정당하지 않든, 상관치 않고 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 빼앗는다는 점에서. 그들의 목적을 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주희는 선악을 구분한다면 그녀가 세운 조직이 악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범죄자는 아니라 생각했다. 무질서하게, 아무 목적도 이유도 없이 세상에 혼란을 일으키고 악을 행하는 붉은달이라는 조직은 그녀도 들어보았다.
‘그들과는 다르다. 애초에 법이란 건 사회 구성원들의 합의일 뿐이야. 범죄자의 낙인이라는 것도 기득권이 제멋대로 구성해놨을 뿐이다.’
그런 그녀를 굳이 따진다면 무정부주의자일 것이고 물론, 그것만으로도 검은 거미는 훌륭한 빌런 집단이긴 했다.
하지만 승리하면 된다. 악이 승리하면 악은 정의가 된다.
‘법이 심판할 수 없다면, 이미 범죄자가 아니지. 우리의 존재 자체로 약자들에게 제구실하지 못하는 저 기득권들의 존재 의의가 시험받게 하는 거야.’
아무도 그녀와 그녀의 조직원들에게 법의 잣대를 강요할 수 없다면, 이미 사회의 규칙을 바꾼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어쩌다 이렇게까지···.’
잘 세운 계획이라 생각했었다. 그 신념하에 열심히 끌어모은 조직원 중, 머리 좋은 이들만 추려 모아서 수십 번을 회의하고 시뮬레이트 한 뒤에야 시작한 대한민국 장악 계획이었다.
잘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꼬여버린 상황이 막막하다.
그리고 그녀가 보기엔 원인을 되짚어보자면 두 가지 정도로 보였다.
‘로텍의 둘째에 대가를 치르게 하려던 조직원을 방해한 자. 그 과정에서 휘말리게 한 것은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너무 사소한 시작으로 악연으로 깊게 엮였다.’
김유성이라는 남자, 그리고 당시 휘말렸던 최서린과 강소연의 동생, 강휘성 탐정이 하는 짓이 너무 까다롭다.
전자는 큰 틀을 짠다는 측면에서 정신을 차려보면 조직을 압박해오고 있었고 후자는 상황에 맞춰가면서 그간 공을 들여 대한민국에 뿌리내려둔 조직의 작은 근간들을 하나하나 부수는 중이다.
까다롭기는 후자가 까다로웠고 위협적인 건 전자다. 후자는 계산은 서는데 전자는 계산이 서지 않는다.
그녀는 몰랐지만, 강휘성은 원래라면 별다른 사건 없이 동해안 사태에 실업자가 되어 한량처럼 지냈다.
그리고 얼마 뒤 있을 두 여자의 실종과 빌런화에 붉은달을 찾는데 죽을 때까지 매달렸었기에 거미와는 엮일 일이 없었다.
한 명의 인생이 바뀐, 유성이 불러일으킨 나비효과였다.
‘하지만 그것도 그 소년만 아니었다면···.’
강시후라던 소년. 분명 B급 정도로는 막기 힘든 그녀의 분신을 너무도 쉽게 처리하는 이레귤러. 그가 보호하는 동안에는 본체가 직접 나서지 않는 한 김유성을 죽일 방법이 없다.
그래서 변수를 만들고자 마지막에 저 둘에게 그 이름을 넌지시 던져보았던 것이다. 궁지에 몰린 이쪽도 뭐든 할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동원하고 있었다.
* * *
황은비를 만나러 가기에 앞서 전우치의 방에 초대를 받았다.
“우리의 유명인사시군? 자, 와서 앉게나. 고리타분한 예의라거나 본도는 신경 쓰지 말고 누워도 좋다네!”
몹시 유들유들한 인상의 서생, 그게 전우치의 첫인상이었다.
방은 이곳이 동양 성좌의 거처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전우치는 산수화를 그대로 그려놓은 것 같은 도원과 한가운데 지어진 팔각정 위에 부채를 펴고 나른한 자세로 누워있었다.
난 정자세로 그의 앞에 앉아서 먼저 자신을 소개했다.
“고선배를 뵙습니다. 김유성입니다.”
“오래전의 선배라, 재밌구만.”
내 호칭에 전우치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저를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뭐, 그냥 불러보면 안 되나? 하계의 인간이면서 동시에 성좌라니, 특이하잖나. 물론 본도도 인간이었던 시절이 있는 건 마찬가지지만, 동시에 성좌는 아니었거든.”
첫 인상을 보면 직설적으로 이야기하는 타입은 아니다.
구전으로 묘사되는 전우치는 환술의 달인이고 그런 속이는 종류의 기술에 능하다는 건 그가 돌려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부류임을 짐작게 한다.
“저와 한담을 나누고 싶으신 것 같군요.”
“정답이다. 서로 알아가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넌 우리 사이에서도 꽤 주목 받고 있거든. 적어도 여기 한반도에서 우리 눈을 벗어날 순 없지.”
이 참에 몇 가지 궁금한 것을 묻기로 했다.
“운사께선 조선 시기의 인물인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어떻게 신선이 될 수 있었던 겁니까?”
“이거 머리에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생각이 많으면 단순한 것도 놓치게 되는 법이니 주의하라고. 그런데 우리 친구는 뭐, 나처럼 신선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
“될 수 있다면 되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나도 그런 영생불멸에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다.
전우치의 손짓에 그의 우측에 족자 하나가 열린다. 그는 그 안에서 탁자 하나와 호리병, 잔 두 개를 꺼낸 뒤 내게 하나를 권했다.
술을 따른 그는 호쾌하게 잔을 들이켰고 나도 내 앞에 놓인 잔을 들이켰다. 술은 쓴 맛 없이 달달했다.
그렇게 말 없이 분위기를 안주 삼아 술이 몇 차례 들어가고 전우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역사의 개념을 믿지 마라. 또한, 시간의 개념도 믿지 말아라.”
“예? 그게 무슨 뜻인지···.”
지금 전우치가 한 말 중에 전자는 포르세티에게 들은 적이 있지만, 후자는 처음 듣는다.
“각 세계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다. 역사만 이어붙인 게 아니다. 시간도 선후가 뒤바뀌고 흐름도 제멋대로다. 즉, 세상을 조각조각 가르고 이어 붙여 누더기처럼 기워버렸다는 말이다.”
전우치는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유들유들하던 첫인상은 온데간데없다.
“넌 내가 신선이 된 지 너희의 시간으로 얼마나 지났다고 생각하나? 정말 그게 너희 역사 속의 수백 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느냐?”
“···그 말은.”
“눈에 보이는 시간을 믿지 말라는 건 그런 의미다. 중요한 건 성좌가 가진 힘이다. 네가 봐야 할 것은 그것이지. 역사가 누더기처럼 기워지고 끼워 맞춰지며 이상해졌지만, 대개는 오래 산 성좌가 강하다.”
무슨 말인지 알았다.
“수정된 역사에서 이름값이 높은 자. 그자의 전설이 실제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군요?”
“정답. 본도가 천겁을 벗어나 신선이 된 것을 햇수로 따지자면 만 단위가 넘는다. 날 고 선배로 칭한다면 넌 참으로 까마득한 후배야. 너는 동방의 신화들이 왜 지금 침묵하는지 아나?”
“기독교 때문입니까?”
“어렴풋이 감은 잡았군. 그렇다면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알겠지.”
“힘이 남아있는 신화가 침묵하는 것이 말이죠.”
그러고 보면 묘하다. 대한민국은 이례적으로 토착 신화가 대부분 죽어버리고 기독교가 세를 과시하는 땅이 되었지만, 강대한 옆 나라들은 역사상으로 신화가 패배한 것 같은 묘사가 거의 없다.
지금처럼 이리 조용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다.
“자세한 걸 말할 순 없으나 삼신, 십이지신, 상제 같은 고위 신좌는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야. 다 이유가 있으니까. 태백금성께선 계속 뭔가를 시도하고 있지만, 뭔진 몰라도 그게 쉬운 일은 아닐 테지.”
전우치는 마치 뭔가를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었다.
“그래. 예정된 미래를 바꾸는 건 재밌더냐?”
“······!”
내 놀란 표정을 보며 신선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그래. 그 표정을 보니 바로 맞춘 모양이야.”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점괘가 다 틀어지니 누군가 운명을 뒤틀고 있다는 걸 모르기도 어렵지. 아무리 지금의 법칙이 우리 손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어느 정도 범위 내에서는 통한다. 네 옆에 있는 그 철없는 신좌도 짐작은 하고 있을 테야.”
“그러면! 그렇다면!”
내 입에서 반쯤 힐난의 외침이 터졌고 전우치는 어느새 쥔 부채를 내 쪽으로 가리키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기묘한 압박이 내 입에서 분노의 고함이 터지는 것을 막았다.
“왜? 우리가 모를 거로 생각했느냐? 인세가 멸망으로 치닫는다는 걸? 우리 역시 온갖 역경을 넘어선 이들일진대, 너무 얕보는구나.”
오히려 저렇게 도발하듯 나오면 머리가 식으며 침착해진다. 순간적으로 뻗쳐올랐던 열이 가슴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에게 물을 질문을 고르는 데 집중했다.
내가 숨을 가다듬자 전우치의 표정도 처음의 유들유들하고 싱글싱글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참으로 얄미운 느낌이 드는 얼굴이다.
“우린 멸망해야 하는 겁니까?”
“필연을? 아니면 당위를?”
“당위를 묻는 겁니다. 이걸 당신들이 가진 힘으로 막을 수 없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으니까요”
“그걸 구분할 수 있는 걸 보면 나처럼 잔머리는 좋군. 당위를 말하자면 별의 모든 신좌들이 인정했다. 지금 너희가 겪는 것은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러면, 이걸 저희가 이겨낼 수 있긴 한 겁니까?”
“가능성만을 따지자면 상당하다. 물론, 너희에겐 이상한 것투성이겠지. 갑자기 왜 이런 괴물들이 튀어나오는지. 신들이 정말 존재하는 것도 신기한데 왜 인간을 적극 도와주지 않는 것인지. 의문투성이겠지.”
그랬다. 지구의 수많은 종교가 입을 연 신들의 목소리에 전율하면서도 의문과 불만을 품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신좌든 성좌들이든 기다리라는 말만 반복했다.
물론, 나는 트라바슈르와의 대화에서 조금 깨닫는 것이 있었기에 그에 대해 신좌를 추궁하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그의 말대로면 인간의 가치와 신좌의 시선은 다르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것들에 대해 이상하다 생각해본 적은 없나?”
“···예.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것들이 나오죠.”
“또 다른 것은?”
“격변 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이런 상황을 비슷하게 예상한 이야기들이 이상하게 많이 작성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래. 나가 왕과의 조우로 어느 정도 그 이유를 짐작할 테야.”
맞다. 어렴풋하게 그 세계가 원래 흩어지기 전, 인간 외에 전설 속에 묘사되던 생명체들을 따로 그들만의 방주처럼 보관해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건 찢어두었던 조각을 덧붙이는 것이지. 그리고···.”
“들은 대로 시험이겠죠. 하지만 이게 대체 뭐를 위한 시험입니까?”
전우치는 그에 뭐라 대답하려고 했으나, 이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어딘가를 향해 분에 차서 외쳤다.
“아니. 망할! 역시 안 되는데? 화담 이 썩을 자식아! 될 것처럼 말하더니! 욱!”
도원 같던 공간은 순식간에 깨져나가며 평범한 가정집의 게임방처럼 변했다. 그리고 전우치의 모습도 있어 보이는 신선의 모습에서 방구석 게임 폐인처럼 변해버렸다.
그리고 뭔가 속에서 올라오는 듯, 가슴을 움켜쥔 전우치는 화장실로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다가 중간에서 피를 한 사발 쏟아냈다.
“대체···. 이게 뭡니까?”
“시부레. 내 환술로 방에 강제로 과거를 좀 불러왔지. 방금은 8천 년쯤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어. 거기서라면 시스템을 속이고 정보를 전달해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이거 대가를 크게 치렀는걸?”
그때 그 방구석에 꽃잎이 휘날리는 원형 통로가 생겨나며 잘생긴 미남자 하나가 걸어 들어왔다.
“운사, 아예 실패한 건 아닐 텐데?”
“화담. 이 자식아···.”
전우치는 타격을 꽤 심하게 입었는지 그 눈에 책망하는 빛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