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헌터의 성좌투자법-80화 (80/128)

8장 - 이합집산

일단 호기심은 뒤로 밀어둔다.

중요한 건 지금 해야 할 일이다.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만나야 할 인물은 총 셋이다.

현재는 활약하지 못하는 유망주 혹은 비 각성자면서 앞으로의 대세에 결정적 영향을 줄 만한 인물이 한국 내에 고작 그것뿐이라는 의미기도 했다.

‘강시후, 한유림, 황은비.’

방금 만났던 강시후의 빌드는 암살자였고 사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대전쟁 시기 별명은 지역이나 소속된 집단명에 붙여서 별명을 지어줬다는 걸 생각하면, 저런 범용적이고 단순한 별명을 가졌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강시후가 상대적으로 괴물 상대로는 힘이 경감되는 암살자를 가지고 그런 평가를 받았다는 게 굉장한 부분이다.

그건 타고난 전투 감각이 엄청나다는 의미다.

대개 암살자는 인간형을 상대할 때만 강한 힘을 발휘했고 대전쟁 시기에는 단순히 인간형만을 상대로 하는 전투력은 크게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아마 타란툴라와는 이미 몇 번 붙어봤겠지.’

적어도 분신으로는 못 이긴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그쪽에서 강시후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자신의 분신을 아낀 것 같다.

아무리 분신이라고 하지만, 지난번에 겪었듯 동급도 약점을 모른다면 밀린다. 못해도 B와 A사이라고 봐야 하는데, 사실상 반 등급은 위나 다름없는 적을 상대로 압살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건 타란툴라의 유물은 유지시간은 몰라도 분신 생성 횟수 혹은 대기 시간에는 제약이 있다.’

한국 내에서 지금처럼 홀로 보호를 받기 어려운 곳을 돌아다니지만 않는다고 할 때, 타란툴라 본인이 직접 나서지 않는 한 습격당할 가능성이 낮다는 걸 확신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찾아가는 두 번째 인물, 한유림은 전투계 각성자가 아니다.

이 시기면 나이는 삼십 대 후반일 것이고 아주 늦게 각성했다. 생산계 각성자로 특이하게도 S급 잠재를 가지고 생산 빌드를 탄 경우였다.

‘그래서 대전쟁 전까지 눈에 거의 안 띄었어.’

물론, 이게 말 그대로 신의 한 수가 된 선택이다. 전투 직군으로는 간다고 해봤자 나이가 너무 많아서 등급을 충분히 올릴 시기가 되면 은퇴 각이다.

기껏해봐야 주문계를 타면 10년 정도 전성기를 누릴 텐데, 무기, 방어구, 세공 같은 제작 계열의 생산계로 성공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전투계를 선택할 시의 스탯 분배는 당연히 전사계다.

‘어쨌든 이 사람은 한국에서 유일하게 세계 1위다.’

대격변 이전이건, 이후건 그 모든 생산 직군 각성자 중에서 S급 판정을 받는 장비를 생산할 수 있었던 건 이 사람이 유일하다.

또, 아주 훗날의 일이었지만 인간이 생산한 장신구에 특수능력을 부여한 것도 이 사람이 유일했다.

한국은 전투계열의 어떤 계열에서도 확고부동한 세계 1위를 배출하지 못했지만, 생산 직군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장인을 배출해냈다.

사신이라 불리던 아까의 강시후조차 격변 이전 빌런 잡는 암살자로 유명했던 확고부동한 최강자, 히어로 크로우에게는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았다.

따라서 한국 각성자 중 전투 계열 최고 순위는 강시후의 암살 계열 2위나 혹은 대전쟁 시기에는 이미 사망하고 없었지만, 서폿 계열 2위로 평가 받던 서이수로 보는 게 가장 정확하다.

‘대격변 이후 괴수들의 부산물이나 규격 외 전리품을 다룰 수 있던 것도 이 사람 뿐이지.’

장비를 획득한다고 그게 전부가 아니다. 장비의 유지보수를 하려면 최소한 해당 등급의 한 단계 아래 정도 되는 장인이 있어야만 한다.

거기에 지도력도 있어서 결사대의 전반적인 살림을 관리했다.

다만, 늦게 각성한데다 격변 이전에 레벨을 올리는 게 더뎠고 본인도 딱히 의욕이 없었던 탓에 시간을 많이 낭비한 쪽인데, 게이트에 데려가면서 레벨만 갖춰줘도 순식간에 유명세를 떨칠 것이다.

‘후기 빌드에 맞게 맞춤으로 최적화해주고 레벨업을 돕는다면 청수 길드에 큰 힘이 될 건 분명하다.’

좋은 보급형 장비가 많이 풀리면 각성자들의 생존력은 올라간다. 장인 특성이 있는 성좌들이나 드물게 후원하기 때문에 이쪽은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전투직군 하나 잘 키워놓는 것보다 세계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이쪽이 더 클 수도 있다.

“계십니까?”

퇴근한 뒤, 개인 작업장에서 늦게까지 연습했었다더니 그 말대로다. 서울 외곽에 지어진 작업장은 한밤중임에도 쇠 두들기는 소리가 난다.

몇 번 작업장의 문을 두들기자 전신이 땀에 전 남자 하나가 물을 끼얹고 아무렇게나 수건으로 턴 듯한 모습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누구십니까?”

“여기가 한유림 선생님 작업장이 맞습니까?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내 명함을 받아든 한유림은 유심히 보더니 내 얼굴을 한 번 쳐다봤다.

“내가 한유림은 맞는데. 여긴 어떻게 알고?”

“김철민 장인. 아시죠? 소개받고 왔습니다.”

“철민이가? 아, 그러고 보니 이런 이름의 길드에 가입했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김철민 장인은 그리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한유림과의 접점을 만들기 위해 청수에 영입했다. 나름대로 짬 있는 생산계 각성자로 나쁘지 않은 장인이었다.

“저희 길드에 영입했는데, 장인 몇 분 추천해달라 하니 선생님을 추천하시더군요.”

“내가 그 녀석 덕분에 이걸 시작하긴 했지. 참나, 그 자식. 내가 헌터 장비나 게이트 재료 만지는 거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라니까···.”

“헌터 하실 생각은 없으시다는 건 들었습니다.”

“그걸 알면서 여긴 왜 오셨소? 뭐, 난 지금 다니는 직장에 불만 없어요. 영입하러 온 거면 번지수를 잘못 찾아왔는데. 솔직히 재미야 있지만 이게 직업으로 할만한 일은 아니지.”

그럴만 하다. 이 아저씨. 이리 후줄근해 보여도 중소 건설사 부사장이다. 일전에도 설명했듯 대한민국에서 헌터만큼 버는 직업이 있다면 건설회사나 연구소를 찾아봐야 한다.

‘헌터 세계에 얽히는 걸 꺼렸다고 했지.’

애초에 이 사람 정도면 이미 억대연봉자다.

외곽이라곤 하지만 서울의 안전한 지역이 이리 넓은 지역 차지하고 취미로 개인 작업장 차려놓은 것만 봐도 그건 알아보지 않아도 확실하다.

따라서 설득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해야 한다. 그렇기에 난 그저 계약서부터 슬며시 그에게 내밀었다. 내가 내민 서류를 잡아챈 한유림이 내용을 다 읽는 걸 기다려 나는 슬며시 제안을 던졌다.

“지금 회사, 좀 불편하시지 않습니까. 이참에 사장님 소리 한 번 들어보시죠.”

30대 후반이면 임원은 어색하지 않지만, 건설 회사의 부사장이라 치면 많이 젊다.

내가 영입을 위해 따로 정보를 알아본 바론 회사 창립 위원 중 하나라서 성장하던 시기에 빠르게 부사장 자리에 앉았었지만, 회사가 커가면서 외부 인사가 영입되면서 많이 불편해진 상태다.

“투자는 그쪽에서 전부 다 하고 지분은 30%나 준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요?”

“길드가 작은 건설 회사 하나 정도 거느리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흰 신생 길드입니다. 젊고 경력 있는 적임자를 찾는 건 당연하죠. 그리고 이 계약서에 문제가 없다는 건 한 사장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굳이 한유림을 제작, 생산계 각성자로 작업하게 강요할 필요는 없다.

‘그 능력을 썩힐 이유가 없지. 어차피 생산이나 전투 때의 건축 이런 것 다 관리하던 사람이고.’

중요한 건 안전 따위를 강조하며 레벨링을 시키는 것이고 취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충분히 여유를 주고 부추기는 것뿐이다.

“사장님이라, 음. 듣기는 좋은데···.”

돈 문제는 그리 어렵진 않았다.

지난번 해룡 잡고 블랙이 내 몫으로 돌려준 그 돈, 지혜가 내가 벌어온 거니 따로 계획 있으면 쓰라면서 예산을 배정해줬기 때문이다.

한유림을 영입하는 과정에서 별의 상점에서 장신구 사다가 팔 생각마저 하고 있었는데 돈이 굳은 셈이다.

“정 그러시면 변호사 만나서 한 번 더 내용 확인해보시죠. 용건은 다 전달했습니다. 그럼 좋은 답변 기다리겠습니다. 관심 있으시면 명함의 연락처로 전화 주시죠.”

난 정말 미련 없다는 듯, 용건은 끝났다는 듯 가볍게 그에게 묵례해 인사를 하곤 돌아섰다.

원래 있던 회사에서의 문제 정도는 능력으로 헤쳐나갈 힘이 있는 사람이니 괜스레 다른 대안이 있다느니 하는 식으로 압박하는 건 좋지 않다.

그저 소개받고 좋은 제안 던지고 가는 것이고 복잡한 설득보다는 대답을 기다린다. 딱 이 정도가 좋다.

“알겠어요. 제안 자체는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 좀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바로 거절하긴 아쉬웠는지 나름대로 긍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이제 황은비 하나 남았나?’

라스트 히어로 황은비. 말 그대로의 의미다.

결국, 어떻게든 버티던 중국이 무너지고 그때까지도 국가 체계를 어떻게든 유지하던 지구 반대편의 미국도 차례로 무너지면서 세계 헌터 협회 건, 영웅 협회건 결국 모두 해산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여전히 히어로라고 주장하며 세계 각지에 흩어진 히어로들을 모아서 소규모 팀을 유지, 그 명맥을 어떻게든 유지하고 부르면 어떤 쉘터건 아무 조건 없이 도우러 가던 인물이 황은비다.

‘그래서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 마지막 영웅.’

절망적인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몹시 낭만적인 이름이다.

더불어 지금은 내 손으로 빌런이 아니게 만든 레드문의 최서린, 검은 마녀와 라이벌에 화염 주문계 능력자로 정확히 대척점에 있던 히어로기도 하다.

능력 자체는 간신히 특급에 걸친 정도로 단순히 능력만 놓고 보면 앞선 두 사람보다는 못하다.

‘이것마저도 라이벌 취급받던 최서린과 비슷하네.’

그럼에도 그 해낸 일과 의지력만큼은 한국 최중요 인물로 분류하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이쪽은 내일로 미루자. 그나저나 그 레드문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원래 역사에서 그들이 최서린과 강소연에게 처음 접촉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가 지금이다.

‘분명히 뭔가 용건이 있으니 들어왔다가 눈에 띈 최서린을 영입해간 것일 텐데···.’

이 놈들도 아주 큰 문제다. 대전쟁 시기에도 살아남아 쭉 빌런 활동을 하는 조직이고 그 위험도는 거미와는 비교조차 되질 않는다.

히어로물 영화 따위에 나오는 진짜 악의 집단이 있다면 이놈들이다. 그걸 굳이 표현한다면 무질서한 혼돈 그 자체. 이 망할 놈들에게 멸망한 쉘터만 몇 개던가?

지금도 가끔 레드문 짓으로 판명되는 사건은 그 광기가 장난이 아니지만, 대전쟁 이후에 특히 악질적으로 변하는 게 이들이었다.

쉘터를 장악해 온갖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범죄도시를 만들어 놓고 떠난다거나 맘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사람이건 괴물이건 모조리 파괴하고 지나가는 등, 쉘터 거주민들에겐 공포의 대명사가 된다.

‘황은비도 결국 최서린 손에 죽었지.’

대전쟁쯤 되면 저 빌런 집단의 특급 각성자들 수가 결사대의 각성자 숫자를 넘어갔다. 그럴 지경이니 대전쟁 전에 자신들을 억압하던 히어로를 자칭하는 집단을 이제는 자신들이 우위인데 내버려둘 리가 없다.

하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아서라. 타란툴라만 해도 벅찬데 레드문을 신경 쓸···.’

그리 생각을 이어가다가 퍼뜩 뇌리를 스쳐 간 것에 순간적으로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잠깐, 이거 설마?’

원 역사에서 레드문이 한국에 들어온 이유가 뭔지 알 것만 같았다.

‘거미다. 타란툴라야.’

놈들의 목적이 뭔지 알았다. 아마도 이쯤 한국 뒷세계를 일순간 장악해버렸을 조직, 블랙 스파이더의 타란툴라를 자기네 조직원으로 영입할 수 있을지 확인해보려고 들어온 것이다.

원래라면 아마도 거절했을 것이다.

‘이러면 대전쟁 때면 이미 특급 각성자던 타란툴라가 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는지 알 것 같다.’

세계 최악의 범죄조직 레드문은 감히 자신들의 제안을 거절한 빌런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던 거다.

한국이라는 국가를 장악했다는 보호막이 없어진 타란툴라는 황은비처럼 고작 일개 특급 각성자에 불과하다.

‘지금처럼 막막한 상태라면···.’

타란툴라의 상태는 막말로도 좋지 않다.

이런 상태면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

* * *

“거절한다.”

“뭐?”

그리고 유성이 그런 생각을 하기 조금 전, 거미의 수장. 여주희는 자신의 은신처에 침입한 두 명의 A급 각성자와 대치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유성에게서 분신을 후퇴시킨 건, 그간 귀찮게 방해하던 강시후 탓도 있지만, 만만치 않은 상대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유물 재소환 조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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