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이합집산
블랙과 헤어지자마자 주저 않고 계획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몇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첫째는 몇몇 인물을 만나는 것이고 둘째는 큐브 던전을 터는 것이며 마지막은 거미와 금화를 엮어 놓는 것이다.
‘거미는 아직 무너진 게 아니다.’
단지 잠시 국외로 주요 조직원들을 잠시 피신시켰을 뿐, 관리국이나 히어로들이 찾아내기 힘든 말단의 점조직을 전부 흩어 놓은 것이 아니었다.
시선만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걸 막으려면 구심점인 타란툴라를 죽여야 하지.’
우리가 빨리 석대성을 압박하지 못해 거미의 수장이 석대성에게 당하는 것도 나쁜 그림이 아니고 반대로 석대성이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견제에 타란툴라에게 역습을 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미래를 다 예상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일을 만들고 어떻게 되는지 지켜봐야겠지.’
모든 게 끝나면 나가 쪽 일을 마무리를 짓고 개인적으로 선별한 인원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간다.
당분간 길드와 떨어져 혼자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래도 직업 특성 덕에 비록 30분이라지만, 원래 실력을 찾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간 만큼은 기억 속의 나보다 훨씬 낫다.
일전에 길드 사이에 던져준 엘릭서에 대한 정보는 내가 큐브 던전에 대해 아는 것 중에선 개인적으로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었지만, 거기엔 그것 말고도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큐브 계열 던전은 개인 역량으로 기연을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지.’
큐브 던전에는 늦게 발견되어 몹시 아쉬웠던 것들이 아주 많다.
‘거울 미궁 클리어 보상인 마력 발전기와 마력 추출기 도면은 가능한 한 빨리 얻어야 한다.’
이 둘이 지금 시기에 발견되었다면 아마 에너지 혁명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너무 늦었지.’
안타깝게도 대전쟁 발발 후, 강대국 몇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국가가 멸망을 선언 할쯤에야 발견된 것들이라서 당시에 전 세계적으로 열풍이던 쉘터 건설의 핵심축 정도로만 쓰였다.
‘이 던전을 클리어한 각성자도 이걸 공개한 대가로 거대 쉘터 하나의 주인이 될 수 있었지.’
마력 발전기가 상용화되면 위험한 일이 싫어서 힘든 일을 하는 반쪽 각성자들에게 일자리를 찾아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에너지는 많으면 좋다. 각성자들이 쓰지 않아서 흩어지는 마력만 거기 주입하더라도 에너지 산업에 혁명이 일어날 것이다.
마력 추출기는 죽은 게이트 생명체의 육신에서 마력을 결정으로 추출해내는 장비다. 이게 만들어지면 지금은 쓸모없다고 버려지는 게이트 부산물들도 남김없이 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은 전부 큐브의 거울 미궁 속에 있었다.
‘당시의 자칭 전문가들 말로는 거울 미궁의 추정 면적이 거의 한반도에 필적한다고 했다.’
그 정도면 초대형 게이트를 넘어서는 수준이다. 물론, 그런 곳이 개인에 의해 공략된 것에는 특수성이 있었다.
첫째로 거울 미궁에는 괴물이 없으며, 방해물은 같이 들어온 사람이나 기관장치뿐이다.
둘째로는 큐브 던전 대부분의 특징이지만, 한 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 숫자가 제한되어 있다.
셋째로 탐사를 돕는 거울이 있었다. 거울에 손을 대면 주변 범위 내에서 거울이 빛나면서 어디로 이동할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일정 높이 이상 뛰어오를 수 없다거나 하는 자잘한 규칙이 있지.’
뭔가 제약이라도 걸린 것처럼 기이한 공간은 모든 장소가 연결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분리되어 뒤틀려 있는 것이라고 한다.
지구의 상식으로 전혀 판단할 수 없는 장소로, 공간이 얽힌 것처럼 천장이 바닥이 되며 일정 거리를 더 걸어가다 보면 벽이 천장이 되기도 한다.
시점이 바뀌며 경사가 생기기도 하고 일순 뒤집혔다 돌아오기도 하는 등 기이한 공간 구조로 되어 있었다.
‘저 안에서 미아가 되면 죽는다.’
내부는 보상 방을 제외하면 모조리 검은 쇳덩이로 만들어져 있을 뿐, 생명체도 식량도 뭣도 없다.
워낙 넓이가 넓어서 자칫 나오는 길을 기억하지 못하면 출구 근처를 사정권으로 둘 수 있길 바라며 운에 맡기고 돌아다니다 굶어 죽는 것이다.
‘큐브 내에 가고 싶은 장소가 어디든 길어도 한 달 이내로 갔다가 돌아올 수가 있다고 했어.’
거울 미궁을 클리어하고 아까 언급된 물건을 가지고 나온 공략자가 그리 인터뷰를 했었다.
이 미궁을 공략한 인물은 초인적인 기억력과 특유의 기억법으로 유명한 각성자였는데, 해당 큐브의 클리어가 가능했던 것도 십 년이 넘도록 이 미궁 공략에 매달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자칫 회귀자라도 위험할 수 있는 이 큐브를 공략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데는 비슷한 근거가 있다.
‘마치 내 안에 두 가지 부류의 기억이 혼재하는 것 같다.’
두통이 있었던 날, 그날의 기억은 떠올리려고 하면 마치 바로 앞에서 생생하게 보는 것처럼 재생된다.
그 부분은 따로 값을 치렀으니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는 X튜브 영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거울 큐브의 클리어 영상은 암울하던 상황에서도 세계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고 영상도 많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클리어 당시의 무편집본은 정보부에서 일하다가 본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건, 공략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보부 선임이 군기 잡는다고 공략 영상을 보게 시켰던 건데, 그게 도움이 되기도 하는군. 대략 하루 정도 걸렸었나?’
이 던전은 그렇게 클리어가 됐지만, 거울 미궁은 큐브 던전의 일부였기 때문에 던전이 사라지거나 하진 않았다.
‘공략 여지가 남았다 보니 그 후로도 망한 세상을 비관하면서도 대박을 노린 탐험가들이 지도와 몸뚱어리 하나만 들고 무모한 도전을 시도하기도 했었지.’
내 자신감에는 다른 이유도 있다.
이 큐브 던전은 모든 종류의 순간이동 계열 능력이 봉인되지만, 그게 성좌가 가진 기능보다 우선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초입부에서 한 번쯤 실험해 보면 된다.’
여차하면 순간이동으로 빠져나올 수도 있었고 설령 기능이 없어서 고립된다고 하더라도 나 같은 경우, 별의 상점이 있으니 포기만 않으면 안에서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다.
큐브 던전에서 그렇게 몇 가지 기연을 획득하면, 블랙이 석대성을 치기 전에 가능한 한 빨리 엘릭서가 있는 히든 던전으로 갈 생각이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보통 A급 중에서도 최상위나, 보통의 특급 각성자들이나 들고 다닐 숫자의 유물로 떡칠한 채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다 끝날쯤에는 장비 빨로 A급 각성자 취급 정도는 받을 수 있겠어.’
감회가 새롭다.
전생에는 끝까지 넘지 못했던 벽이다.
그만큼 A급과 B급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큰 벽이 있었다.
‘특급으로 판정되는 괴수를 최전선에서 공략하는, 핵심 공략조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게 갈리지.’
포르세티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 성좌가 A급 이상 각성자에게만 큰 투자를 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다.
‘···각성 전에는 어지간히도 살기가 어려웠나 보군.’
지금 찾아보려는 소년은 서울 지역에 유일하게 인위적으로 유지하는 북한산 소형 필드 옆, 우이동의 판자촌에 살고 있었다.
필드라고 해봐야 거창할 것은 없다.
서울의 유력 길드들이 주기적으로 돌아가며 소탕하고 고위 각성자들도 혹시 모를 고등급 게이트가 나오나 항시 순찰을 하는 지역인데다 경계지역은 전부 군 병력이나 관리국 직원이 상주하고 있다.
다만, 주변 지역의 집값이 내려가는 건 필연이었다.
서울에서 못사는 사람이나 불법 체류자들, 난민들이 흘러들어오는 지역이기도 했고 그런 만큼 민가에 침입하는 괴물에 의한 인명 사고도 자주 났다.
‘주기적으로 청소야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하급 몬스터를 다 막을 순 없으니까. 웃긴 건, 2차 대격변 이전까지는 여기 주변에 그렇게 부촌이 많았다던데···.’
그래서인지 주변 풍경 하나는 좋긴 하다.
제멋대로 지어진 판자촌 길을 따라 구불구불 좁고 복잡한 길을 한참이나 걸어간 뒤에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계십니까?”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물론 기대하진 않았다,
오늘 만날 사람이 각성할 인물이긴 하지만, 지금 내 감각을 피할 순 없을 것이고 안에 잡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로 연락처가 있는 것도 아니라, 프로필 상으로 적혀있던 주소만 보고 왔더니 아직 집에는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다.
‘꽤 늦게 왔는데도 없나.’
그렇게 다 돌고 마지막으로 다시 돌아오자며 돌아서려는데, 섬뜩한 감각이 내 목덜미를 스쳤다.
‘위험···!’
그리고 별의 강화를 쓰면서 정말 간신히 단검을 꺼내 공격을 쳐낼 수 있었다. 다만, 반응이 늦어서인지 쳐내는 과정에서 팔 하나를 당했다.
‘힘줄을 노렸나? 낭패군.’
오른손에 아예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당연하지만, 궁사는 팔을 하나라도 쓸 수 없으면 전투력이 급감한다. 내 눈앞에 적으로 나타난 이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처음엔 반사적으로 내 목적이었던 그 소년이 아닌가 했는데, 역시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너무 안일했나?”
여태 이런 상황을 쭉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창이 내질러온다.
내가 지금 사태에 상당히 이바지했다는 걸 알고 왔다면 뭐라도 한마디 할 법한데, 전혀 반응이 없는 걸 보니 분신인 것 같다.
원래라면 별의 강화가 들어간 만큼 해볼 만한 싸움이었을 텐데, 역시 원거리는 암살자한테 기습을 당하면 너무 힘들다.
점점 빨라지는 연격에 한 손만으로는 창격을 다 쳐내기가 버거워진다.
나는 시간을 끌기 위해 판잣집 위로 뛰어올랐고 타란툴라의 분신 역시 놓칠새라 뒤따라 뛰어오른다.
그런데 그 직후 그 분신은 창을 거뒀다.
“···뭐지. 설마 본체인 건가?”
그러나 무기를 거둔 그것은 한쪽을 쳐다보더니 여기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참나, 사람 보낼 것이지 대체 여긴 뭐 하러 직접 왔습니까? 놀라서 한참을 찾았네.”
“너는···.”
그리고 내 입에서는 반사적으로 의문이 튀어나왔다.
“대체 어떻게?”
이 녀석은 내가 찾던 소년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 수준이 예상과 다르다.
‘잘해야 지금쯤 막 각성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러면 아무리 잘해봐야 D급이나 C급이다.
각성 당시의 등급이 높던 인물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짐작하기엔 소년은 벌써 최소 B급의 각성자였다.
“그놈의 빌어먹을 제약 때문에 말은 할 수가 없고 그냥 그쪽도 내 존재만으로도 예상되는 게 꽤 있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소년의 손에는 편의점에라도 들려오던 길인지 삼각김밥과 커피를 담은 봉투가 하나 들려있었다.
문득, 한 가지 예전에 가졌던 의문이 떠올랐다.
“설마 그때 그 황정윤 쪽이라 생각했던 그 시선···.”
“시선? 황정윤? 그건 또 누구야. 아! 혹시 유지혜라는 여자애랑 차 타고 가던 그때 말하는 건가? 그때 긴가민가 했었는데 용케도 그걸 눈치채셨네. 그거 나 맞아요.”
한때 묻어두고 있던 의문이다.
유 회장을 만나고 나서 돌아갈 때 분명 시선을 느낀 것 같았는데 관리국 쪽에서 받은 자료상으론 황정윤 쪽 사람은 당시 그 시간에 근처에 있지도 않았다.
“강시후, 넌 회귀한 건가?”
강시후는 침묵했다.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아예 몸짓으로도 의사 표현을 할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답답해 보이는 그 표정이 답은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면 회귀를 나 혼자 한 건 아닌가?’
그리고 상황을 보면 강시후 역시 내게 우호적인 것 같다.
정황을 보니 그간 그가 날 타란툴라에게서 지켜온 것 같은데 그 절망적인 상황을 본 회귀자가 많아서 나쁠 건 없었다.
‘문제는 회귀가 우발적이냐, 아니면 특정한 이유로 말미암은 것이냐. 그게 문제겠지.’
전자라면 미친놈이 있을 수가 있다. 반대로 후자로 선별되어 회귀한 것이라면 회귀자는 많을수록 이득이었다.
‘이러면 1억짜리 두 번째 기억을 빨리 봐야 할 필요가 있겠어.’
포르세티와는 제대로 계약을 맺었다.
그녀의 하급 각성자들에 대한 컨설팅은 내가 꾸준하게 하고 있고 그 대가로 저등급은 투자 없이도 최소 5%의 지분을 보장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점수는 지금도 착실하게 쌓이고 있었고 정말 중요하다면 투자하지 못할 것도 없다. 다만, 그것도 토르와 만난 뒤에 해야 할 것이다.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강시후에게 청수 길드에 대한 가입 권유를 해봤지만 바로 거절했다.
“당장은 여유가 있지만, 난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쪽도 어지간하면 당분간은 관리국의 시야 내에서 움직이시죠. 지금 시기가 워낙 위험해서 내가 쭉 지켜보고 있었지만, 앞으론 이런 행운은 없을 겁니다.”
“···그러면 연락처라도 좀 교환하자.”
“그러죠.”
이미 판자촌은 떠난 모양이다. 하기야 B급 헌터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데 용병 일이라도 해서 먹고살고 있겠지.
최후의 결사대 3위, 대전쟁 시기 한국 최강의 능력자는 회귀자인 것 같았다.
‘결사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나도 딸려서 회귀한 건가? 이러면 원래 계획은 물 건너갔군. 그래도 급은 좀 떨어지더라도 이런 유망주가 강시후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니까.’
특급 능력자를 내 용병팀에 넣고 한동안 청수 길드에서도 써먹으려던 계획은 물 건너갔지만, 다시 한 번 내 회귀의 비밀이 중요하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