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이합집산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나가들이 한창 뭔가를 작업 중인 공사현장이었다.
“···음.”
뭘 하라는 건진 감이 오는데 내일까지는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처지라 시간을 확인받을 필요가 있었다.
[가라. 가서 재주껏 저들을 도와주도록.]
“그건 문제없지만, 내일까지 급한 약속이 있습니다. 적어도 아침까지는 돌아가야 합니다.”
[일에 토 달지 않는 것은 좋군. 하지만 무엇이 문제냐? 돌아가고 싶다면 나를 찾아라. 신하인 내가 왕의 손님을 붙잡아둘 그 어떤 명분도 없다.]
정말로 별 기대 없이 시킨다는 느낌이다. 분명, 처음에는 시험이라 생각했는데 이래선 오히려 저쪽에서 기회를 준다는 느낌이었다.
[너는 노예도 아니고 일시적이지만 왕의 손님이라는 귀한 신분을 받게 되었지. 네게 그런 자리를 허락한 분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걸맞은 태도와 자신감을 보이도록.]
나가 사회를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자신감 그리고 체면과 사적 친분을 중시하는 전사 사회군.’
그러니 임시 신분에 걸맞게 당당하게 굴라는 것 같다. 그냥 자신감 있게 나서면 될 것 같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자칫 과해서 말이 앞서기라도 하면 허풍쟁이로, 그보다 심하면 만용이 심한 인물로 찍힐 것이고 그렇다고 너무 몸을 사리면 겁쟁이로 낙인찍힐 것이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겸양을 미덕으로 삼진 않겠군.’
기민한 눈치로 자기 위치를 파악해서 요구할 수 있는 것과 요구하지 못할 것을 구분해야 한다.
“돌아간다면 다시 이곳으로 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게 시험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돌아올 방법도 있어야겠죠.”
계속 퉁명스럽던 나가 재상의 표정은 지금 내가 내뱉은 말에 조금이나마 풀렸다..
[돌아갈 때는 네가 내렸던 선착장의 관리인에게 왕의 손님이라는 말을 하면 될 것이다. 여기 인간은 네 녀석밖에 없고 미리 이야기는 해뒀으니 시비에 휘말리진 않을 테지. 이곳으로 돌아올 때는···.]
그는 품에서 약간 조잡한 지도를 꺼내 들더니 한 지점을 찍었다.
나중에 지도라도 선물해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여긴 정동진이군요.”
[너희는 그런 이름으로 부르나 보군. 우리는 나히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선착장 관리인에게 따로 물건을 전달해 둘 테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거든 거기서 받은 물건을 사용해 돌아오면 된다.]
그렇게 떠나려는 모습에 난 급히 외쳤다.
“아,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을 텐데 그 부분을 좀 해결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요구에 잠시 침묵하던 그는 자기가 매고 있던 목걸이를 풀어서 내게 던져주었다.
‘나가와 인간하고만 통역되는지 아니면 아예 통일언어를 쓸 수 있는 물건인진 확인해봐야겠지만, 이런 소소한 득템도 나쁘진 않다.’
별의 상점에서 구매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다 점수니 얻을 수 있는 건 이럴 때 얻어두면 좋다. 그렇게 나가 재상이 떠나고 나는 그 자리에 홀로 남겨졌다.
‘뭐, 모든 일에 있어선 먼저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지.’
괜한 자신감에 무턱대고 나서봐야 일만 키울 뿐이다. 사람이건 나가건 지성체고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이상 협력 체계 정도는 이미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이 현장을 한참 지켜보고 내가 내린 결과는 몹시 단순했다.
‘여긴 채석장이군.’
거기서 도출되는 결론에 살짝 감탄이 나왔다.
‘그런가. 여기가 지금 나가들이 하는 작업의 기초인 거다.’
여기서 물류가 이동하는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나가들이 하는 일의 모든 그림을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나가 재상은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은 것이다. 나가 왕인 트라바슈르와 재상의 의도는 짐작이 간다. 이곳 울릉도 나가들의 생활에 내가 끼어들고 직접 부딪치라는 거다.
그럼으로서 마냥 인간에게 적대적이기만 할, 호전적이거나 어려서 맹목적으로 생각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중립적인 인물들에게 인간의 이미지를 재고시키라는 뜻이다.
‘어딜 가나 냉소적이고 고집이 센 인물은 있겠지. 하지만 그런 사람은 어떤 사회라도 2할을 넘기는 힘들다.’
더불어 지금 이곳 울등도의 나가들은 직접 대화하고 부대낄 수 있는 인간은 오직 나 혼자뿐인 상황, 즉. 내가 인간의 모든 이미지를 결정한다는 뜻이다.
다만, 그것만 생각해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무를 맡길만한 자격이라. 그건 내게 외교관이 지녀야 할 능력을 기대한다는 뜻인데···. 알겠군. 이건 외교관으로서의 덕목을 시험하는 거다. 문제는 출제자가 생각하는 덕목이 뭔지 확신하기 어렵다는가 거겠지.’
나는 다시 한창 채석장에서 작업 중인 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지금 당장은 할 일을 먼저 찾아야 할 때다.
그런 의도는 일단 일을 하면서 생각해도 늦지 않다.
‘채석장에서 일하고 있는 건 전부 전사로군.’
감독하는 나가의 고성이 터지며 바쁘게 돌아가는 작업장에선 모든 인부가 삽에 마력을 밀어 넣으며 바닥을 깨거나 돌을 다듬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내 시선은 한쪽으로 향했다.
지금 가장 일손이 부족한 곳이 어딘지는 금방 나온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들의 작업 현장을 방해하지 않을만한 작업을 하는 곳은 오직 한군데뿐이다.
‘딱 봐도 저게 이런 단순 작업에선 내가 나가에 비해 크게 밀리지 않으면서 비슷하게 할 수 있는 일이겠지.’
보통 나가보다 몸집이 작은 어린 나가들이나, 어인들이 어디론가 돌을 나르고 있는 곳. 내가 아무리 각성자고 저기 있는 나가 정도 전투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해도 건축 속도에서 따라갈 수는 없다.
‘애초에 팔이 여덟 개다. 저 미친 작업능력을 내가 어떻게 따라가냐.’
섬세한 일이나 작업 따위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를 하면 그 사이에 나가는 최소 네 명 분량을 혼자서 하는 거다.
그리고 서먹한 관계의 인물이 있다면 가장 접근하기 좋은 쪽은 그 사람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어린아이에게 다가가는 거라는 건 흔한 접근방법이다.
종족과 종족 간의 만남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경우도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나가들은 내가 끼어들어 일하는 것을 막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내가 일하는 동안 그 어떤 나가들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고 내가 땀에 절어서 떠날 때도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 아직 이 정도로는 경계심을 풀기엔 무리라는 거겠지.’
그렇다면 될 때까지 하면 된다. 나가 지도자들도 당장 바로 동맹하자는 것은 아닐 테니 여유 시간은 충분하다. 일을 마치고 복귀한 한밤중의 선착장에는 나가 선착장 관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착장 정도를 맡기에는 상당한 고위 나가로 보인다. 나는 그가 나가 왕국의 해군과 관련된 인물이 아닐까 추측했다.
[그쪽이 그 인간이로군? 이건 재상께서 전달하라던 물건이니 받으시오.]
그가 내게 건네주는 건 아주 고풍스러운 문양이 양각되고 가죽과 진주 따위로 화려하게 장식된 소라고둥이었다.
“소라로 만든 고둥이군요. 이걸 불면 되는 겁니까?”
[바닷속에 넣고 불면 늦어도 한 시간 내로는 우리가 보낸 해마가 도착할 거요. 물론, 당신네들 인간은 육지생물이니 물속에서 호흡할 방법은 있어야겠지.]
그건 지난번에 구한 물건이 있으니 어려울 건 없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작은 함을 하나 내게 내밀었다.
[그건 급할 때 쓰라고 주는 물건이고 바닷속에 던지면 우리 전사들이 해수를 데리고 마중 나갈 것이오. 왕의 손님이라 주는 것이니 함부로 사용하진 말았으면 좋겠군.]
“잘 쓰겠습니다.”
함을 살짝 열어보니 특이하게도 진주 같으면서도 붉은색인 보석류가 세 가지 들어있었다. 나는 그것을 품에 넣고 관리인이 태워주는 해마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조금 놀라긴 했다.
‘아무리 전선이 형성돼서 나가나 인간 모두의 땅이 아닌 경계지대라지만, 정동진이면 나름 우리 인간 세력권의 코앞인데 대체 어떻게 보내주겠다 했더니···.’
아주 특이하다. 정말 특이했다.
나는 지금 동해안 바닷속 깊은 곳 해저 절벽이 보이는 장소, 그 상당한 깊이의 심해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타고 왔던 해마 마차가 정차한 그 지하의 해저 동굴에서 나가 주술사가 만들어준 물방울을 타고 수면을 향해 올라가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꼼짝없이 밤을 새우겠군.’
그 생각대로 강릉에서 양양까지 달린 뒤에 양양에 주차해둔 차를 타고 서울에 복귀하니 이미 시간은 아침이었다.
그리고 블랙과는 점심 약속이었으니 잘 시간은 거의 없을 것 같다.
“피곤해 보이는데.”
블랙은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그런 말부터 꺼냈다.
“그래 보입니까?”
“뭐, 나 정도니까 아는 거지. 별로 티는 안 날 거야. 내 감각 능력치는 꽤 높은 편이니까. 특출난 A급이라면 느끼긴 하겠지.”
동해안 사태가 끝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상태다.
그간 연달아 치른 격전으로 인한 피로도가 풀릴 시기가 아니었는데, 거기다가 밤을 새우면서 컨디션이 정상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나 역시 초인이라 그리 부담된다는 느낌은 아니었는데, 그런 미세한 걸 본인도 아니고 타인이 잡아내는 걸 보면 감각 능력 차이가 크긴 크다.
“밤을 샐 일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건 만나자는 거랑 관계가 있는 건가?”
“뭐, 그런 셈 치죠.”
“그래서. 용건이 뭐야?”
나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조금 돌렸다. 블랙 같은 고위 히어로를 만날 일이 흔한 기회는 아니라서 그냥 용건만 말하기는 좀 아쉽다.
“거미 쪽은 진척이 좀 있습니까?”
블랙은 뚱한 표정으로 제 눈앞의 에스프레소만 스푼으로 슬슬 저었다.
“아니. 그놈의 분신만 열 번 넘게 결딴낸 것 같은데. 본체는 감감무소식이다. 두 녀석이 너무 신을 내서 그런지 그 분신마저도 요새는 밖으로 안 내보내는 것 같고.”
“그거 아마 그 엘릭서 던전에 숨어있을 겁니다.”
“그 안에 들어가 있다고? 그럴 것 같진 않은데. 마지막으로 머무른 것으로 보이는 장소의 흔적이 벌써 한 달 전이야. 그 히든 던전, 등급이 특급 판정인데. 10대 적폐들이 살벌하게 견제하는 그 안에서 한 달 동안이나 버티고 있다고?”
“이제 거기 말고 없잖습니까.”
블랙의 스푼이 멈췄다. 그는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입을 달싹였지만, 이내 다물었다.
“그래. 그렇긴 하지. 대놓고 외국으로 튄 것도 아닌데 이렇게 못 찾는 게 말이 안 되니까.”
“하지만 들어가긴 어렵다는 거겠죠.”
“안 그래도 시도는 해봤다. 그 망할 적폐 새끼들, 대놓고 덤비진 못하면서도 아주 눈이 시뻘게져서 시비를 걸어오던데, 더러워서 마지막으로 미뤄뒀어.”
그럴만 하다. 정말 그 안에 있다는 건 헌터 협회 쪽도 자존심 문제기도 했고, 거기는 그들의 영역이기도 하다. 히어로들이나 관리국이 그런 걸 핑계로 들어오게 두고 싶진 않겠지.
“아무리 블랙 당신이라도 그 안에 들어가서 깔끔하게 빌런만 잡고 빠지긴 힘들 겁니다.”
“그렇겠지. 거기 미로니까.”
“그래서 할 일을 조금 제안드리고 싶군요.”
나는 가방에서 보고서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내가 과거의 정보를 토대로 역으로 거슬러서 만들어낸 가짜 보고서와 북진, 금성에서 급히 만들어준 보고서였다.
“···금화 X파일?”
“꽤 재밌을 겁니다.”
안락의자에 살짝 기대서 내가 건네준 자료를 넘기던 블랙은 다 읽더니 비틀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거 꽤 재밌는데.”
나는 그런 그에게 마주 미소 지었다.
“놀라서 바위 속에 잔뜩 웅크린 물고기를 꺼내려면 어부들이 떠나줘야겠죠. 아니, 이 경우는 고래 싸움에 어부지리를 노리는 괘씸한 새우를 끄집어내자는 거겠군요.”
“10대 적폐들이 다시 한 번 붙으려는 거군. 이건 북진 영감님이랑 이수 녀석 생각이냐?”
역시 저 위에서 고급 정보를 받아보는 사람이라서인지 이것만으로도 바로 사실관계를 알아챈다. 나는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너희 의도에 끌려가는 느낌이긴 하지만, 이건 기분 좋은 끌려감이군. 석대성 그놈은 좀 후려칠 필요가 있었지.”
“진척 없는 거미 문제 해결도 이게 실마리가 되어줄 겁니다.”
“좋아. 이건 돌려주지 않아도 되겠지?”
“사본이니, 필요하다면 가져가시죠.”
“좋은 인연으로 엮이는 것 같은데, 일 다 끝나면 언제 한 번 대작이라도 한 번 하자고.”
“좋죠.”
그렇게 내가 던진 작은 돌맹이가 대한민국이라는 고인 호수에 파문을 던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