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이합집산
바닷속으로 들어가려 하기에 내가 지난번 구해뒀던 장신구를 사용하려 하자 트라바슈르가 제지했다.
[그럴 필요 없다.]
마차의 벽면을 가볍게 건드리자 안에 있던 물기가 싹 밖으로 빠져나가고 벽면이 생선의 아가미가 숨 쉬는 것처럼 맥동하며 내부에 공기가 차올랐다.
[우리도 숨 쉬는 생물이다. 많은 산소가 필요하지 않고 물속의 산소를 걸러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지.]
전방의 얇은 막 너머, 마차를 끄는 해마처럼 생긴 바다 괴수가 보인다.
그것들은 짧은 팔과 다리를 움직여 엉거주춤하게 네 발로 걸으며 마차를 바닷속으로 끌었고 이내 바닷속으로 들어가자 몸을 일으켜 빠르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홱 지나가는 바다의 풍경은 과거 대전쟁 시절 이전의 자료로만 보던 것들이라 몹시 신비로웠으나,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때는 아니었다.
“저희가 헤어지고 난 뒤엔 어떻게 된 겁니까?”
[몇몇 만만치 않은 것들을 피해 가며 옛 수하를 되찾았다. 그리고 병사를 빼내는 작업을 했지. 얼마 전까진 배신자 놈들도 너희와 전쟁 중이었으니 그 뒤를 혼란스럽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곤 트라바슈르는 짧게 덧붙였다.
[물론, 짐은 아직 군대도 물자도 부족하다.]
“예. 성좌님께 듣기론 그 때문에 나가들이 전쟁을 멈췄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겠지. 타즈샤르도 죽었고 짐에게는 신물이 하나 돌아왔지 않느냐.]
전투가 다 끝난 뒤에 히드라가 석상을 물고는 떠났다고 들었다.
[푸른 별에 돌아온 나가 지도자들은 너희보다 짐이 더 위협적이라 느꼈을 터. 자연히 짐도 빼앗긴 병사를 돌려받는 걸 잠시 멈추고 정비하던 참이다.]
“그래서 대화할 틈이 나온 거군요.”
[표식을 묻혀뒀으니 네가 해안가에 있다면 짐이 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알려주셔야 한다는 것이 뭡니까?”
당장 내일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라 마음이 급해 질문을 던졌으나, 트라바슈르는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재촉하지 마라. 품위가 없다. 대화는 안전한 곳에서 쉬면서 천천히 나누면 된다. 설마 짐이 손님 대접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할 셈이냐?]
표정과 기색을 보니 내 행동이 그들에겐 조금 실례인 것 같았다. 나가의 문화는 잘 모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그가 나를 해치려는 것 같진 않았기에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나가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고 훗날 트라바슈르의 도움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 그가 자리 잡은 곳을 알아두는 게 나쁠 건 없다.
급하면 위험하더라도 비공정 타고 그 근방 바다로 날아와서 불러보면 될 테니까.
[전날, 보여주었던 지도는 많은 참고가 되었다. 그래서 짐은 우선 이곳에 전초기지를 세웠지. 놈들은 너희와 싸우느라 바빠 아직 여기까지 손이 닿지 못했다.]
어디를 말하는가 했더니 괴수가 바다를 열심히 달려 도착한 곳은 울릉도였다.
격변 이후로는 무인도가 된 곳이다. 대개의 섬이 그렇듯 방어에 쉬운 지역 몇 군데를 제외하면 대부분 공도 정책이 펼쳐져 사람 없는 땅이 되었다.
동해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트라바슈르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나가는 건물들을 대부분 해저에 지을 줄 알았습니다만···.”
[보통은 그게 정상이나, 지금은 특별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우린 물을 다루는 종족이지. 내 집이 전장이 되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
한마디로 지금 전력이 모자라니 만약 전투가 벌어지면, 지금 지은 전초기지 근처가 전쟁터가 될 거라는 소리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물을 다루는 나가들의 특성상 순식간에 바닷속에 지은 건물은 깡그리 엉망이 될 게 뻔하다는 의미였다.
울릉도가 코앞으로 다가오자 근방에 항구의 구색 정도는 갖추려고 했는지 제방과 부두 정도는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부두 앞에는 이 마차를 끌고 온 것처럼 몇 마리의 해마 괴수들이 잠을 자거나 나가나 어인들이 던져주는 생선 따위를 받아먹고 있다.
우리가 마차에서 내리자 자기 왕을 알아봤는지 주변의 어인과 나가들이 몰려들었는데, 트라바슈르가 그들에게 그들에게 짧게 인사를 해주는 동안 일부가 나를 보며 수군대는 것이 느껴졌다.
“저를 보는 시선이 그리 좋진 않군요.”
[너희와 얼마 전까지 전쟁을 벌인 당사자들이다. 좋겠느냐? 저 중엔 너희 인간들에게 가족을 잃은 자들도 있을 것이다. 참으로 배신자 놈들의 업보가 크구나.]
입을 꾹 다문 트라바슈르를 따라 섬 안쪽으로 들어갔고 섬 중심부쯤에 이르러서야 움막 같은 것이 아닌, 제대로 된 건축물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제국의 전성기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것없는 만찬과 궁전이다만, 그래도 음식은 나름 왕이 먹을만한 것들로 추렸다. 들어라.]
미리 준비를 시켜 놨는지 그를 따라 들어간 식당에는 해산물로 만들어진 만찬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나가들은 꽤 대식가인가 보군요.”
[그럴 리가. 적당히 나눠서 취향에 맞는 것을 먹으면 된다. 남는 것은 전부 아랫것들에게 베풀어질 것이다.]
배를 채우고 괴수 가죽을 덧댄 소파에 기대어 앉아 디저트로 보이는 것이 나온 뒤, 나가 왕은 사용인들을 전부 방에서 물렸다. 대화할 준비가 된 것 같다.
[슬슬 배도 채운 것 같으니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우선 네가 먼저 말한다. 그리고 그 뒤에 짐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지.]
질문을 던지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처음은 이 질문이 가장 나을 것이다.
수십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인류가 답을 찾지 못한 것.
하지만 아마도 지성체 괴물들이라면 알고 있을만한 내용.
“이 게이트라는 건 대체 왜 열리는 겁니까?”
뭔가 말을 고르는 듯 한참 동안 고민하는 표정이던 나가 왕은 두 단어를 내뱉었다.
[이는 통합이며, 또한 시험이다.]
“···제가 가진 정보가 일천해서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상은 직접적인 말로 설명해줄 수가 없다. 그건 성좌들이 너희에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와도 통한다.]
그렇다면 저 두 단어가 줄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힌트라는 소리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몇 가지 정도는 더 말해줄 수 있겠군.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항상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진 자를 의심해봐야 한다. 그자가 뒷짐을 지고 있다면 더더욱 그렇지···.]
“그건 혹시···. 아!”
그중 마지막 뒷짐이라는 말에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통합과 시험. 인간에게 시험을 낸다면, 그 대상은 아마도 신들이겠지!’
동시에 지금 조용히 뒷짐을 지고 있는 자.
지금 그에 딱 걸맞은 신화가 하나 있지 않은가?
기독교였다.
그 신화의 주인이 이 모든 일의 원인이라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
기독교는 기원 후로는 사랑을 설파하는 종교지만, 그 주인의 이전 행보를 보자면 충분히 인간을 시험하고 자격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에겐 재앙을 내릴만한 신이다.
‘하지만 지금 이 게이트라는 게 트라바슈르의 말처럼 인간에 대한 시험이라면 대체 무엇을 위해서란 말인가?’
노아 때처럼 대홍수라도 일으켜 인간을 멸망시키기 전에 선한 자를 걸러낸다는 소리인가?
[생각할 것이 많아 보이고 뭔가를 알아챈 것 같기도 하군. 그러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라. 너희는 그저 헤쳐나가면 될 뿐이다.]
“머리가 복잡하군요. 제가 생각하는 게 맞는다면, 이 끝이 인간에게 해롭습니까? 이롭습니까?”
[가끔은 멍청해 보이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신들이지만, 그들의 행보에는 항상 큰 이유가 있다. 물론, 그들은 때론 피조물에게 잔인해지기도 하지.]
저 말이 의미하는 것을 나는 기민하게 잡아챌 수 있었다.
“신들의 행동에는 선악이 없다.”
[그러하다. 신들의 행동이 인간에게 선이 되게 하며, 해석하는 건 인간들의 일이다. 또한, 그건 다르게 대입하면 또 나가들의 일이기도 하지.]
그는 뭔가 신을 경외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그리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궁금한 것이 한 가지 생긴다.
“지난번 대화로 미루어보아 당신들 나가들은 신들에게 버림받은 것 같았습니다. 아닙니까?”
[그렇지 않다.]
“그 근거가 뭡니까?”
[설명할 수 없다. 그렇게까지 자세히 말한다면 분명 제약에 걸릴 것이다. 이 건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하지. 더 설명할 수도, 더 알려줄 수도 없다.]
거기까지 말하고 여전히 아리송해 보이는 내 모습에 깊게 한숨을 내쉰 트라바슈르는 주저하더니 뭔가 덧붙였다.
[다만, ■■을 찾아라. 거기에 답이 있다. 분명히 너희 땅에도 그에 대한 ■■이 있을 것이니···.]
나는 트라바슈르가 내뱉은 마지막 문장의 깨져버린 것처럼 들려오던, 문맥상으로 보면 아마 같은 뜻일 저 하나의 단어가 엄청난 힌트라는 것을 알았다.
눈을 부릅뜬 채 그를 바라보는 나를 향해 나가 왕은 피식 웃었다.
[역시 이 단어는 무리였나? 하긴, 아직 멀었으니···. 시간은 많으니 잘 추측해 보아라. 내가 알던 너라면 분명히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대화는 잘 새겨놓겠습니다.”
이 대화로 알아낸 확실해진 것은 하나다.
‘이 건에 대해서 더 깊게 파고들고자 한다면 기독교 계열 성좌들을 만나봐야 한다.’
활동하는 천사들은 극소수고 기독교계 성인, 용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분명히 일부가 알려진 채 활동하고 있다.
그들과 계약한 각성자들과 친분을 쌓다 보면 아마도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종교 특성상 그나마도 유럽이나 미주, 중동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한국에서는 찾아보기가 몹시 힘들었다.
북유럽 성좌들도 대부분 유럽에 기반을 두고 있는 만큼, 그들의 각성자를 케어하려면 내 성장을 위해서라도 유럽에 가긴 가야 한다.
‘지혜도 한동안은 사람 영입하고 체계 잡느라 바쁠 거고 한동안은 한국에는 별다른 사고도 없으니 석대성만 좀 귀찮게 만들어준다면 착실하게 성장할 수 있을 거다.’
다만, 그 전에 나와 같이 움직이는 용병팀을 좀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일단 신수빈은 필수고 안혜성 정도는 데리고 다녀도 나쁘지 않겠지.’
그 숫자는 전투인원 넷이나 다섯 정도에 예비 인원 셋 정도를 생각하고 있다.
[생각 정리는 다 했느냐?]
“아,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생각할 게 좀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묻고 싶은 건 트라바슈르 당신이 '왜 나가들과 싸우는가'입니다.”
이 말에 대해선 답변이 준비되어 있었는지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너희가 겪어온 것처럼 넘어오는 것들은 전부 이 땅을 차지하려고 한다. 우리도 마찬가지지. 그리고 또한, 너희가 겪었듯,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다.]
“뭔가 그래야 할만한 이유가 있군요.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아까 처음 나눈 대화와 연관이 있겠죠.”
[그 말대로다. 하지만 난 우리 나가가 굳이 너희와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건 왜입니까?”
[갈라진 세상이 다시 통합된다 한들, 너희 인간이 바다를 정복할 수 있겠느냐? 그것도 우리가 있는 바다를?]
확실히 격변 전까지 인간은 바다를 정복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나가들이 지금 저리 자유자재로 바다를 자기 생활권으로 누리는 걸 보면, 게이트가 없어지고 나가와 공존하게 될지라도 바다를 어쩔 수는 없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바다는 우리의 것으로 점지된 영토다. 너희는 그저 주인이 여행을 나가 쉽게 들어갈 수 있던 헛간 정도를 사용했을 뿐이지.]
“헛간···입니까?”
[거기에 온갖 오물이나 쓰레기를 버려두면서 집이 폐가가 되고 냄새가 배긴 건 좀 괘씸하나, 아무 조치도 하지 않고 떠난 주인 잘못도 있으니 탓할 일은 아니다. 짐은 너희 인간과 우리가 공존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래서 당신이 왕좌에서 쫓겨난 것이군요.”
[쫓겨난 적은 없다. 유폐되었을 뿐. 어쨌든, 짐의 생각은 그렇다. 신들의 생각이 어떻든지 그 말을 피조물이라 하여 우리가 모두 들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아까 그가 말한 것과 상통하는 내용이다.
“신들의 행동이 나가에게 선이 되게 하며···.”
[그리 해석하는 건 우리 나가의 일이다. 신탁을 곧이곧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지. 하물며 그게 판게아 이전의 모호한 신탁이라면 더더욱 그렇지 않겠느냐?]
판게아라면 지구의 대륙이 하나였던 시절을 뜻하는 것 같은데, 뭔가 아득하다.
신화가 합쳐지고 갈라진 세상이 하나가 되면서 역사 변경이 많았다고 들었으니 과거 인간이 증명했던 지식 같은 걸 신뢰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쉽게 와닿지가 않는다.
[이것으로 힌트는 다 줬다. 다음은 동맹에 관해 이야기해볼 시간이로군.]
“동맹 말입니까?”
[그렇다. 너희 인간들 정치체계는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르겠으나, 지도자는 있겠지. 전해라. 나가라자 트라바슈르가 너희와 미래를 논하고 싶다는 것을! 너는 내 연자로서 그들이 이 대화 시도를 납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그게 제가 오늘 당신에게 받은 환대와 정보에 대해서 치러야 하는 대가로군요.”
나가라자는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방을 나섰다.
나 역시 그를 서둘러 따라나갔다.
[너희 인간이 짐의 왕국을 되찾는 것을 도와라. 그리하면 분명 우리는 우방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짐은 해야 할 일이 많으니 나머지 일은 재상과 이야기하도록.]
그렇게 축객령을 받고 멀뚱히 서있는데, 곧 통역을 해주는 기물을 든 나가 한 명이 재상이라는 자에게 나를 안내했다.
[그대가 왕을 구했다던 인간이로군.]
몹시 깐깐해 보였다. 외교를 하는 데도 두 가지 타입이 있기 마련이다. 이쪽은 유들유들한 외교관이라기보단, 뭔가 벼랑 끝 외교 같은 걸 할 것 같은 인상이었다.
[시킬 일이 있다. 따라와라.]
“시킬 일···말입니까?”
[인간. 내가 왕의 안목을 의심하는 건 아니나, 이 일을 맡길만한 놈인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니냐? 따라오도록!]
지금의 나로서는 거스르기 어려운 상대인 데다, 트라바슈르는 몰라도 다른 자들에겐 아직 인간의 평판이란 건 최악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보면 여기는 반은 적진이라고 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적진 한가운데의 포로가 된 느낌으로 그를 쫓아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