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이합집산
서이수가 그 어색한 침묵에 몸서리치더니 북진 길드장을 툭툭 쳤다.
“뭐야, 영입 제의 안 해요? 맨날 계약 끝나면 북진으로 오라며 엄포 놓잖아.”
“이놈아. 내 아무리 사람 수집에 열 올려도 딸내미 같은 꼬맹이 걸 건드리진 않는다. 이 녀석, 니가 침 발라 놓은 거 아니냐?”
서이수는 그 말에 일시 정지된 것처럼 굳었다.
정상철의 뭔가 못마땅한 표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난 오랜 옛 기억에서 이게 뭔 느낌인지 찾아낼 수 있었다.
‘···이거 여자친구 아버님을 뵙는 느낌인데?’
그리고 서이수도 그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일시 정지 상태에서 벗어나선 그녀가 소리를 빽 질렀다.
“자, 잠깐만! 이 분위기 뭔데!”
“이수야. 벽에도 듣는 귀가 있다는 걸 잊었느냐?”
“아니! 이번엔 또 누구야! 누가 배신잔데? 아. 뭐, 내가 좀 들이대면서 영입 제의한 건 맞는데···. 아. 좀! 뭘 딸내미 뺏는 도둑놈을 보는 것처럼! 이거 예진이 주변 남자애들한테 짓는 표정이잖아!”
지난번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그때 내게 영입 제의할 때는 가볍게 툭 던지듯 만나보기만 하자고 반 농담 식이었던 거라면, 이건 지인에게서 제대로 관심이 있는 게 아니냐는 추궁이라 저리 반응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만큼 북진과 금성 길드장 사이에는 뭔가 특별한 유대가 있는 것 같다.
“아니냐?”
“참나, 이건 누가 봐도 내가 아깝잖아요.”
자뻑스러운 말이었지만, 장난스러운 어조기도 했고 객관적으로도 사실인 건 맞아서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서이수가 ‘아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당했네! 영감님 이거 지난번에 나한테 당한 거 복수한 거죠?”
“알면 됐다. 그래. 김유성이라 했지? 방금은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이 맹랑한 꼬맹이가 맨날 어른을 놀려먹어서 갚아주려고 잠깐 장난 좀 쳐봤다.”
“아뇨. 조금 놀라긴 했지만, 두 분께서 친하신 것 같아 보기 좋습니다.”
물론, 그리 말하는 난 애초에 처음부터 안색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본 정상철은 투덜거렸다.
“흠···. 더럽게 놀려 먹는 재미가 없는 게 이명준이 부류인데.”
“와, 그걸 척 보고 알아요? 사실 나도 좀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뭐, 대충 짐작이 가야 하지 않겠나? 우리 첫째 딸내미. 쥐고 휘두를 수 있는 걸 선호하는 건 변하질 않는구먼. 명준이 그 녀석이야 네가 어쩔 수 없으니 좀 못한 녀석 택하는 게 이상할 건 없지.”
“아, 좀! 누가 보면 진짠 줄 알겠네요. 오해 말아요? 상철 아저씨랑 나랑은 거의 수양딸 같은 관계라서 그래.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가 아저씨 부하기도 했고 어릴 때, 내가 예진이네서 같이 컸거든.”
그리고 이 대화에서 몇 가지 의문이 해결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놈의 서포터 개혁이라는 게 가능했던 거군.’
정상철 북진 길드장이 그녀의 뒷배다. 정확히는 뒷배였다.
사실 말이 안 됐다.
아무리 특급 각성자고 관리국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 헌터 공화국인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기득권을 때려잡으며 그런 개혁을 하려면 얼마나 많은 행운이 필요할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빌런조직의 테러, 암살자, 정치공작, 언론 등 온갖 수단으로 방해가 들어와야 정상이다.
하지만, 서이수의 행보와 그걸 가로막는 싸움은 고상한 정치적 수 싸움에 가까웠다고 알고 있다.
북진 길드장이 겉으로는 좀 콱 막혀 보이긴 하지만, 자신만의 선은 있어도 정의관은 확실한 사람이라 서이수가 개혁의 칼을 빼 들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두 분이 저를 부른 건, 서울에서 금화 길드와 맞서는 것 때문이군요.”
내가 작게 내뱉은 말에 두 사람은 바로 조용해졌다.
“말투까지 아주 똑같구먼. 예전 명준이 그놈아랑.”
“조금 다르죠. 그 사람하곤.”
중요한 건, 이들이 어디까지 해줄 수 있는가와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가다. 이미 청수 길드는 이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상태니, 이 대리전에 올라타는 수밖에 없다.
“10대 길드 사이 파벌이 어떻게 나뉘어 있는 겁니까?”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다만, 눈치 빠른 거 보면 네가 점찍을만하구나.”
“영감님도 이제 실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본격적으로 이야기해보죠. 창천하고 명성은 중립. 우리 둘이랑 청해, 대한이 한 편이고 일원, 태백, 삼정, 금화 이렇게 넷이 반대편에 서 있어요.”
10대 길드 중 1, 10위는 중립에 2, 4, 5, 8위 길드와 3, 6, 7, 9위 길드가 대립하는 구도라는 소리다. 당연히 순위와 그 북진이 껴 있는 전투력만 봐도 이쪽이 질 리가 없는 싸움이다.
다만, 원래 역사에서 한쪽이 확실히 찍어누르지 못한 이유는 짐작이 갔다.
먼저, 기본적으로 북진은 아크리치에게 매여 있다.
‘그리고 지금은 청해가 쪼개지는 그림이라서 그렇군.’
거기에 금화가 이 사건으로 치고 올라갔다.
‘그뿐만이 아니지.’
반대편의 태백이나 삼정이나 금화나 전부 원래대로면 이번 동해안 사태와 형성된 필드로 후에 크게 큰 이득을 보는 길드들이다.
세 길드 모두가 동해안 필드가 형성된 지역 근처를 세력권으로 두고 있다.
똑같은 이득을 볼 수 있는 북진은 애초에 옛 북한 쪽 필드를 해결하기도 바쁘고 동쪽 필드까지 신경 쓰게 됐었으니, 그 부담에 오히려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처지다.
고성 사태의 책임도 일부 피할 수는 없었을 테니 자연히 발언권이 약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이 창천 길드장에게 친분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묘한 거리감과 살짝 아쉬워하는 소리를 하는 걸 보면···.’
원래는 창천이 중립이 아니었을 확률이 높았다.
‘내가 모르는 대한민국 뒤편에서의 치열한 다툼이 있었겠지.’
자연히 그걸 중재한 것이 상징성이 있는 한국 1위의 길드라는 건 쉽게 유추할 수가 있다.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젊은 시절의 이명준 역시 원래는 서이수 같은 개혁파였을 터다,’
그가 중간에 마음을 바꾼 건, 대한민국이 두 쪽으로 찢어지고 내전이 일어나거나 하면서 나라가 망조가 드는 걸 막기 위한 대타협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반응을 기다리는 두 사람에게 답했다.
“저희 청수 길드를 칼로 쓰시겠다는 거군요. 과거 북진 길드장님께서 서 길드장님을 칼로 쓰셨던 것처럼.”
“예전 중재안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끼리는 직접 손을 쓸 수가 없어요. 거기에 이 사태가 이렇게 마무리되고 시간이 가면 힘이 균형을 이룰 가능성이 크니까.”
“그건 청해 때문이군요.”
“그래요. 거기 난리가 난 거 알 사람은 이제 다 알겠지. 연이 닿아서 청해를 끌어들이긴 했는데, 거긴 뭐라고 해야 할까. 파벌이 너무 나뉜 길드라 중립에 가까웠죠.”
“이수야. 나는 명준이 그놈이 의심이 간다. 청해 거기도 그때 중재하고 빠지면서 연결해준 것 아니냐. 이명준이, 그놈은 변했다. 내부 사정을 알고 청해를 이짝 우두머리로 삼게 했을 가능성이 크지.”
“···전 명준 오빠가 그렇게까지 중립으로 완전히 돌아서지는 않았을 거라 믿고 싶어요.”
서이수는 한숨을 내쉬며 그리 말했고 정상철은 혀를 찼다.
‘쉽지 않겠어.’
이 대한민국에서 창천의 눈을 피할 수는 없다. 그가 타의에 의한 중립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서 변해서 스스로 중립을 택하는 거라면 내 행보에도 견제가 들어올 것이다.
그래도 나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걸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저희 길드야 선택의 여지가 없겠죠.”
살짝 빼는 듯한 그 말을 하는 순간, 내 전신이 물속에서 잠긴 것처럼 기이한 압박에 휩싸였다.
“넌 적이냐, 아니면 아군이냐?”
“상철 아저씨. 힘 빼요? 유성 헌터는 명준 오빠랑 달리 C급이라고.”
압박 탓인지 옆에서 아련하게 들리는 것처럼 서 길드장의 말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정상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외부는 여전히 왁자지껄하다.
압박은 오직 내게만 집중되는 것 같았다.
“이 세상에 회색 따위는 없다. 뒤로 빼는 자들은 항상 사고를 치지.”
난 숨을 참아 그 압박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며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리고 내뱉었다.
“적입니다.”
“···뭐라?”
어처구니없어하면서 압박이 풀렸다.
숨이 탁 내쉬어진다.
나는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서둘러 낮은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내 말이 이어짐에 따라 정상철의 얼굴도 자못 진지하게 바뀌었다.
“언젠간 이 대한민국을 한 손에 쥐고 흔들 생각이니, 적과 아군인지만 묻는다면 결국 적이겠죠. 따라서 물으셔야 할 건, 적인지 아군인지가 아니라···.”
“‘어떤 뜻을 품고 있는가’다?”
“그렇습니다.”
“이수 녀석, 이번에도 아주 재밌는 녀석과 사귀었구나. 그래. 그놈처럼 의뭉스럽게 구는 놈보단 이렇게 야심이 큰게 나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어떠냐, 네 뜻이라는 건?”
“더 나은 나라를 만들려면 대한민국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으로선 이것 말고는 해드릴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협력하는 데는 이 말로 충분하겠죠.”
잠시 생각에 잠겼던 정상철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향이 어찌 되었든 하나가 되는 게 맞겠지. 이명준이 그놈과는 다른 답이로구나. 두 번까지는 속아도 바보가 아니라 했으니, 믿어보마.”
“아저씨. 벌써 가시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정상철을 보며 서이수가 따라 일어났다.
“내가 여기 있어봐야 우리 애들이나 더 다치겠지. 해골바가지들 한 놈이라도 더 깨부수러 가야 하지 않겠나?”
“아저씨. 그러니까 예진이가···.”
“아빠! 진짜 엄마가 얼굴 잊어버리겠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옆 테이블에서 지혜와 대화 삼매경이던 정예진이 따라 일어나면서 말했다.
“음. 아빠가 이번에는 금방 해치우고 돌아오마.”
“그렇게 똥폼 잡아봤자 하나도 안 멋있거든!?”
“크흠, 네 엄마한테는 이 아빠가 아직도 가장 멋있을 거니까 괜찮아!”
“엄마가 그 말 하면 웃기지 말라고 전해달라던데.”
북진 길드장은 그 마지막 말을 듣곤 더 있어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경공이라도 쓰는 것처럼 바람과 같이 사라져 버렸다.
“아빠라는 건 저런 건가···.”
“뭐, 저 집구석이 좀 유별나긴 한데, 난 저런 것도 좋다고 생각해.”
작게 중얼거렸는데 서이수는 그걸 또 받아줬다. 그리고 나는 대화가 이어진 김에 슬며시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창천 길드장도 이런 걸 당했습니까?”
“어. 나 그때도 있었는데, 질문이 똑같네?”
“그는 뭐라고 답했습니까?”
“너랑 정 반대. 아군이라고 했지. 그리고 이렇게 답했어.”
서이수가 말해준 창천 길드장의 답은 꽤 기억에 남았다. 그는 ‘그렇다면 대한민국 전부를 내 아군으로 만들겁니다.’라고 답했다 한다.
그새 재잘거리기 시작한 세 여자 사이에 있기도 좀 그래서 나는 슬쩍 그 자리를 빠져나왔고 포르세티는 그걸 기다려 말을 걸어왔다.
[그래도 우리 아빠보다는 나은 것 같은데? 딱 저거랑 지혜네 부모 사이의 어딘가가 가장 이상적인 부모 같아.]
그러고 보니 여기도 딸 사랑이 끔찍한 부녀관계가 하나 더 있었다. 요새 지혜에게 딱 붙어있더니 옆에서 그 대화를 다 들었나 보다.
내 낯간지러운 말은 언급하지 않아줘서 참 고마웠다.
[토르 아저씨가 날 잡고 너 한 번 보재. 빌드 관련해서 문제 생긴 모양이라 조언을 받고 싶은가 봐. 네가 하는 일 듣고는 바루나도 한번 만나고 싶다더라. 당장 확정된 것만 이 정도고 이 지역 성좌들한테 문의도 좀 왔어.]
“이 지역 성좌라면···.”
[가장 적극 대화하려는 건 전우치라는 성좌야.]
“전부 약속 잡아주시죠. 부탁하겠습니다.”
[알겠어. 날짜 잡히는 대로 연락해줄게.]
“아, 약속 날짜는 일주일 정도 여유를 주셨으면 합니다.”
[왜? 뭐 있어?]
블랙이나 관리국 쪽 인맥과 가능한 한 빨리 대화를 나눠봐야 하고 트라바슈르와 했던 약속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 며칠간 해안가에 있어도 오지 않았지만, 유성은 일주일 정도는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약속이 잡히긴 했는데···.’
약속대로 서이수는 블랙과 약속을 잡아주었다. 다만, 약속장소는 나흘 뒤, 서울이었고 그 말은 그때까지만 트라바슈르를 기다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3일째가 되던 날, 겨울비가 쏟아지던 밤, 트라바슈르는 바닷속을 달리는 마차를 타고선 뭍으로 올라왔다.
[타라. 할 이야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