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 이합집산
양양은 수많은 각성자들과 대형 길드가 모이면서 북적거렸다. 이번 승리로 강릉 남쪽이 어인들과의 최전선 중 하나가 되면서 양양의 역할이 몹시 커졌다.
“고성이랑 강릉 양쪽을 전부 지원할 수 있는 위치라서 양양이랑 속초가 전략적 요충지가 됐어. 아마 앞으로 보급 담당하는 부대와 기업, 북진의 지부 정도가 입주하겠지.”
“그런가?”
“정확할 거야. 수송 시간을 맞추기에는 산을 타고 수송하는 것보단 해안가를 따라 수송하는 편이 나을 거니까. 수송 루트는 수도권에서 서울-양양 고속도로 타고 쭉 온 다음에 내려가거나 올라가겠지.”
“관련 주식이 좀 오르려나요?”
부친에게 점수 좀 따보려는지 기대감을 드러내며 물어오는 지혜였지만, 어림도 없을 것이다.
“대신 그만큼 위험도 크겠지. 영향이야 있겠지만, 생각보다 그리 많이 오르진 않을걸? 지금 우리에겐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여기서 뭐가 또 있어요? 이제 수도권은 비상사태도 해제된다던데?”
“피해를 본 길드들에겐 미안하지만, 지금 이 사태는 신생인 우리 길드로서는 아주 큰 기회야. 지혜 네가 생각보단 큰 활약을 못한 느낌이긴 하지만, 그건 여기 전선에 몇 달 정도 남아서 몇 번 최종기 쏴 갈기면 될 거고···.”
“아···. 저, 그거 하지 않을 순 없겠죠?”
난 물끄러미 바라만 봤다. 말이 안 되는 건 저도 알았는지 지혜가 딴청을 피웠다. 말은 저렇게 해도 성실한 애니까 며칠 전 양양에서 하트빔 한 번 시원하게 쏴 날렸던 것처럼 시키면 또 할 거다.
[그렇지. 원래 처음이 어려운 법이라니까?]
뒤에서 들려오는 추임새는 무시하고 나는 지혜에게 지금이 왜 기회인지 설명해갔다.
“여기 강릉은 수복했다고 해도 부산하고 강릉 사이에 괴물들이 쫙 깔린 건 알지?”
“네. 동해안 필드라고 벌써 이름 붙여놨던데.”
“그러면 거기 있던 길드들, 지금 어떻게 됐을까?”
“아! 설마?”
“그래. 그 설마지. 헌터 보호법은 알지?”
“알죠. 각성자 법이랑 길드법, 헌터법까지 내용은 전부 달달 외웠어요!”
그러면 지혜도 내가 한 말이 뭔지 잘 알 것이다.
나는 그녀가 직접 정리해서 설명해볼 수 있도록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면 포기하고 길드 해체 절차 밟은 경우도 있을거고? 대부분 대기 상태에 들어갔겠네요!”
“그래. 지역 방어에 실패하면 길드 면허가 정지되니까. 소속 길드원들은 전부 염가 세일이지. 전국의 각 길드 스카우터들은 대기업 빼면 지금 엄청나게 바쁠걸?”
기본적으로 헌터 길드 면허는 지역을 방어하라고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그걸 해내지 못하면 당연히 면허가 정지된다. 그리고 면허정지가 되면 참 재밌는 상황이 벌어지는데, 길드장을 제외한 모든 길드원이 대기명단에 올라간다는 것이다.
헌터 협회에서 책정한 각성자의 몸값, 그 절반만 대상 길드 법인에 이적료로 지급하면 남은 계약 기간에 상관없이 해당 헌터와 계약할 수 있다.
“그런데 솔직히 길드에 좀 불리한 것 같긴 해요. 특히 작은 길드들은···.”
”그건 지혜 네가 길드장이니까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 이건 냉정하면서도 공정한 거야. 그간 얼마나 길드 운영을 잘해왔는지 시험받는 면이 있어.“
”확실히 그렇긴 한데.“
그리고 너무 걱정해줄 필요도 없다. 지혜는 그 단서조항들까지는 다 외우진 못했나 보다. 아니면 깜빡했든지.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서 필사적으로 이번 사태 방어전에 참가하거나 했을 거니까. ‘해당 지역의 수복 혹은 방어에 온 힘을 다했을 경우.’라는 단서조항이 있거든. 그럼 유예기간을 줘. 지혜, 아직 조금 더 공부해야겠는데?
“아. 그런 게 있었던 것 같긴 해요.”
“어쨌든, 이 제도가 방위 임무에 실패한 길드에게 책임을 물으면서도 동시에 어딘가로 합치거나 다른 곳에서 빨리 자리 잡도록 돕는 측면이 있어.“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각 지역의 대형 길드 정도 되면 전부 자기 영역이 있으니까요. 그런 영역을 잃으면 들어오는 것 없이 돈만 나가겠죠.“
”새로 자리 잡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비대해진 조직을 정비하도록 강요하는 거지. 반대로 길드에 충성하는 핵심 각성자가 있다면 이득도 있어.“
”구조조정이 가능하다?“
정답이다. 어쨌거나 주변 안정화 게이트, 점거하고 있던 필드, 이권, 시설 따위가 싹 날아간 해당 지역 길드 입장에선 들어오던 광고, 길드 공장과 지역 사업장 따위에서 들어오던 수입까지 싹 끊겨버린 상황이다.
‘거기에 그 많은 시설을 다시 지어야 하기까지.’
각성자에게 나가는 급여부터 아직 길드 사업을 할 생각이라면 건설비까지 나갈 돈은 엄청나게 많은데 비대해진 덩치에 걸맞지 않은 수입으로 재정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다.
저 위에 법 만드는 사람들도 뭉그적거려서 그렇지 주먹구구식으로 만드는 건 아니다.
적어도 저렇게 국방에는 법에 감정을 배제하는 것이 옳다. 괴물한테 인간의 영역을 빼앗기는 시대에 맞춰 아주 효율적이고 냉정하게 만들어진 셈이다.
그리고 내가 이런 걸 아주 잘 알고 지혜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내 몸으로 직접 겪은 일이니까. 동해안 사태에서 쌓인 경력으로 이제 좀 먹고살 만해지려나 싶었는데, 전혀 그런 거 없었지.’
원 역사에서의 동해안 사태는 지금 수습되는 형태보다도 최소 몇 배는 더 골치 아픈 사건이었다.
강원도 북부에서는 고성 참사나 몇몇 사고 탓에 사상자가 꽤 나왔지만, 전체적으로는 큰 사상자는 없던 채로 인간의 땅만 거하게 잃으면서 소강상태가 됐다.
새로운 필드가 생겼다곤 하지만, 그런 건 보통 안정되기 전까지는 대부분 상위 길드의 차지고 그런 상황에 지금 설명한 일 때문에 중, 하위권 헌터들만 대규모로 실업자가 된 것이다.
’시장에 풀린 자유 헌터가 엄청났지.‘
내가 쌓은 경력 가지고는 어디서 뭐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상황이 왔고 헌터가 되고 초기 경력을 완전히 망치게 된 결정적인 사태였기에 이렇게 수습되는 국면을 보니 어쨌거나 감회가 새롭다.
‘그리고 석대성 금화 길드장이 그걸 노리고 후퇴를 주장했을 거라는 악명을 얻기도 했지.’
이 사태 직후에 금화가 삼정을 누르고 9위에서 7위까지 뛰어올랐으니까. 이때 무너진 길드의 알짜배기 각성자들을 금화에서 가장 많이 확보했었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기민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이런 일에서 이득을 보기는 몹시 어렵다. 그만큼 석대성 헌터가 동해를 잃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고 물밑에서 빠르게 움직였다는 뜻이다.
다만, 뜬소문 같은 악담만 돌았을 뿐이었다.
그것도 금화에서 적극 대응하면서 금방 수그러들고 잊혀졋었다.
이걸 문제 삼으려면 사전 접촉 같은 걸로 말이 나오거나 해야 물고 늘어지는데, 어디에도 증거가 남지 않았고 증언하는 사람도 없이 그저 소문만 무성했던 걸로 기억한다.
‘아마도 문제로 삼을만한 힘을 가진 길드가 없으니까. 다들 입을 다문 거지.’
괜히 건드렸다간 원래부터 좀 더러운 금화의 소문을 생각하면 좋을 일이 없었을 테니까. 이번에는 그런 길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마저도 석대성 쪽에서 미리 손을 쓸 수가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내가 조사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석대성에겐 악재를 계속 던져줘야 한다.’
청수가 크는 것에 있어서 석대성은 방해다. 머리는 좋은 사람이고 나름의 결단력도 있지만,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도덕적인 측면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성향이다.
‘능력만 보면 아까운 인재인 건 맞지만, 나중에 빌런이 된 것만 봐도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내가 그리는 한국 통합에는 방해되겠지.’
엘릭서에 거미를 엮어서 던져주는 것도, 지금 이 과정에서 급히 움직이며 각성자들에게 접촉했을 석대성을 언론과 접촉해서 평판을 떨어뜨리는 계획도 그 과정의 일환이었다.
내 시선은 양양 본부 연회장 한편의 히어로에게 향했다.
나름 승전을 기념한다고 이번 사태를 해결한 주요 인사들을 초청해서 열린 연회인데, 블랙은 전혀 주변 사람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는지 인상을 팍 쓰곤 구석에 앉아 안줏거리나 집어 먹는 중이다.
“여기 있었네!”
지혜와 나누던 대화가 내 상념으로 끊긴 틈으로 누군가 끼어들었다.
“뭐 보고 있어?”
서이수의 시선이 내 시선을 따라 블랙에게 향했다.
“참 사교성 없어. 그치?”
“블랙은 항상 혼자 다닙니까?”
“뭐야, 저 재미없는 녀석한테 용건이라도 있는 거야?”
“비슷합니다.”
혹시 모를 거미의 발악을 관리하는 것도, 금화의 등 뒤를 찌르는 것도 10대 길드랑 이야기할만한 건은 아니다.
한동안은 영웅 협회나 관리국 쪽과 더 밀접하게 지내야 한다.
“음, 그편이 빌런 잡기 좋다고 대개 혼자 다니는 편이긴 한데, 적어도 이번에는 아닐걸? 외국 히어로들 들어왔으니까 그쪽이랑 협조하겠지. 그보다 바쁜 거 아니면 따라올래? 물론, 지혜도!”
어디로 가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서이수가 손을 들어 연회장 중앙을 가리켰다. 손가락이 따라가는 곳을 향하자 거구의 도인 같은 차림의 중년인이 있었다. 북진 길드장이었다.
북진은 한창 옛 휴전선 라인에서 투닥거리고 있다고 들었는데, 승전연이라고 하니까 잠시 들린 것 같다.
“이건 제가 목적이 아닌 것 같은데요.”
“물론, 그렇긴 한데 우리 영감님이랑 안면 정도는 익혀두라고. 블랙 녀석이야 그다음에 불러줄 테니 따로 이야기하든지.”
지혜만 가도 충분할 걸 나를 왜 데려가려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조건이라면 내게 나쁠 건 없다.
“그럼 부탁하죠.”
서이수를 따라 북진 길드장에게 가자 익숙한 얼굴을 하나 만날 수 있었다.
“어. 김유성 강사님?”
“와, 예진아! 잘 지냈어?”
그리고 그 대답은 나 대신 옆의 지혜가 했다.
“어. 지혜도 안녕. 이수 언니랑은 이미 아는 사이인가보네. 나야 뭐, 강릉에서 보호받으면서 편하게 있었지.”
내 수업에서 잠깐 함께했던 북진 길드장의 딸, 정예진이다.
그녀는 내가 왜 여기 있냐는 표정이다.
그 사이 정상철 길드장은 이쪽을 힐끗 보고는 서이수와 먼저 마주앉았다.
“우리 길드 전무님. 청수 길드에 들어오셨어. 우리 이번에 꽤 활약한 거 알지?”
“뭐, 네 이야기는 오면서 아빠한테 지겹도록 들었어. 솔직히 턱도 없을 건 알지만, 우리 아빠네 산하 길드로 들어올래?”
그 맥없는 목소리에 지혜가 고개를 갸웃한다.
“왜 이렇게 자신감이 없어? 한국에서 북진 정도면 자신감 넘쳐야 하는 것 아냐?”
“당장 나부터가 아빠 길드는 들어가기 싫어. 뭔가 땀내난다니까? 그렇다고 내가 운영하는 수도권 쪽 산하 길드에 들어오기엔 네 체급이 너무 커졌잖아.”
옆에서 서이수와 대화를 나누던 정상철 길드장이 움찔 굳어버리는 게 보였다. 계속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서 있기도 뭐했기에 나는 슬며시 서이수의 옆자리에 앉았다.
“저런, 우리 영감님. 충격받으셨나 보네. 그러게 평소에 행실을 잘하셔야···.”
“크흠!”
“네네. 그러니까 집에도 좀 자주 들어가시고 통금도 좀 풀어주시고 그러셔요.”
통금이라니. 정예진도 나름 C급 헌터에 A급 잠재력이라서 좋은 특성과 빌드, 그리고 장비로 떡칠한 걸로 아는데 누가 봐도 과보호였다.
“이쪽은 김유성 헌터. 이번에 임팩트 있는 것도 하나 있었고 쭉 궂은 일 맡으면서 꽤 활약했죠. 묘하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을 사건에서만 활약한 탓에 대중이나 스카우트들에겐 잘 알려지진 않는 모양이지만요.”
“니, 전쟁하면서 내가 자료 빠뜨리는 거 봤나? 해룡전 자료는 인상 깊게 봤다. 깡도 있고 감도 있더구나. 그래. 내가 북진의 정상철이다.”
“김유성입니다.”
가벼운 악수 후 침묵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