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 설악산 전투
[원래 쓰던 주술은 제물을 바친 물을 활용하는 거야. 기운은 석상에 담지만, 바쳤다는 행위 자체는 물에 남아있거든. 그래서 그걸로 고대 물의 정령을 소환하려는 거였어.]
뒤에서 나레이션처럼 포르세티의 상황 설명이 들려온다.
[그런데 나가쪽 주술쪽에서 히드라는 신수 취급하거든? 이런 고결한 존재를 부르는 주문에선 바치면 안 되는 제물이라는 거지. 그래서 주문을 틀었어. 히드라 속성까지 고려한 거지!]
고려했다는 건 아마 독성이었겠지. 히드라의 독은 유명하니까. 그래서 저런 오수의 정령 같은 게 튀어나온 것 같다.
나도, 옆에서 같이 뛰고 있는 슐츠도 뛰느라 전혀 대꾸할 상태가 아니라 슬쩍 말을 돌릴 수도 없다 보니 포르세티의 재잘거림은 계속 이어졌다.
[재밌네! 이런 예측 어려운 제대로 된 모험은 오랜만이야! 그간은 너무 예전에 먹어본 것 같은 인스턴트 식품을 먹는 느낌이었달까? 유성! 저거 우리가 어떻게 못 하니? 기왕 재밌어진 거 우리가 주인공이 되면 최곤데!]
“···우리 성좌님 신 나셨네.”
저 소리를 나만 듣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안긴 채 업혀가던 터라 여유가 있는지 지혜가 그렇게 중얼거린다. 그렇지만 부추기지 말라는 살벌한 내 눈총을 받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던 말던 흥에 취한 여신은 즐거운 모양인지 계속 떠든다.
자기가 키웠던 용사나 발키리라던가 현 상황에는 하등 쓸모없는 추억 이야기가 쏟아지다가 우리가 동굴에서 확실히 벗어나고서야 멎었다.
“이제부터가 중요하겠습니다.”
동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정령의 모습에 슐츠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겠죠.”
“다른 사람들은 잘 빠져나왔을지 모르겠습니다.”
안에 있는 사람 중 제때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은 위험할 것 같다.
그만큼 나가 신전 밖으로 터져 나오는 오수의 물결은 어마어마했다. 더 무서운 건, 그 물줄기가 자연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이다.
“으엑···. 이거 완전 색이 똥물인데.”
순식간에 언덕의 식물들을 썩어들어가게 하는 독성에 지혜가 질색했다.
“똥물보다 더 심한 것 같다만.”
“아, 저기 이수 언니네요!”
지휘부는 다른 통로를 택해 빠져나왔는지, 멀리서 모습을 드러냈고 나는 활을, 슐츠는 검집에서 검을 다시 뽑아들고 전투태세를 취했다.
저성 오수에 휘말린 인원들도 어찌어찌 마력으로 몸을 보호하면서 물에 잠기지 않은 고지대로 올라가고는 있다. 반면에 휘말려 익사하거나 독기에 휘말려버린 이들도 상당했고 실시간으로 그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유성. 중요한 건, 결국 나가 주술사가 싸우려 하느냐, 그겁니다.”
나가 주술사가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막을 방법은 없다. 히드라가 나왔던 연못으로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포위망에선 벗어나는 거니까.
그 경우는 지휘부가 수색 정도만 한차례 시도하고 곧장 양양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겠죠. 아까 동굴 아래를 통해서 빠져나가려 한다면 잡을 방법은 없으니까요.”
“저걸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막막한데, 솔직히 그냥 가줬으면 좋겠어요.”
지혜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주술사는 가능하면 여기서 잡고 가는 게 좋아. 우리로선 놈이 싸워주길 바라야겠지.”
“놔두면 귀찮아질 거라는 건 동의합니다.”
그리고 지혜는 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지만, 저런 것도 충분히 공략할 방법이 있다. 그게 아니면 예전 서울은 고대 정령 군주를 소환했을 때 그대로 다 쓸려나갔을 거다.
[자, 기뻐하렴! 우리 지혜는 똥물 조심하고?]
“윽···.”
“놈들이 싸우려고 합니까?”
[어쨌거나 쟤도 저걸 소환했으니 뭐라도 해야 수지가 맞지 않을까?]
명성 점수가 조금이라도 들었을 텐데, 정보 선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포르세티가 곧장 우리에게 나가가 싸우려고 한다는 정보를 전달해줬다.
“호전적이군요.”
성향상 예상했던 바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나가들이었지만, 얕은 보호막을 피부 위로 얹은 채 오수 속에서 돌아다니는 나가들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 싸워보려는 의도는 아주 잘 드러났는데, 신전이 있던 자리 한가운데가 싱크홀이 일어나는 것처럼 무너져내리고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지혜야, 저게 공략의 열쇠야. 저 나가가 왜 저런 짓을 할까?”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내가 지혜에게 질문을 던졌고 지혜도 바로 답을 내놨다. 이게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배운 적 있어요. 정령의 힘을 쓰는데도 많은 마력이 필요하다는 거죠?”
“그래. 시전하는데 들어간 마력을 다 쓰면 소환자 자신의 마력을 써야 해. 제물을 바치거나 하면서 제약을 줄였다고 해도 소환류는 대부분 마력 부담이 엄청나지.”
저 많은 오수를 자연을 거슬러 산 아래로 흘러가지 않도록 조정하려면 엄청난 마력이 지속 소모될 것이다.
그 때문에 저 나가가 우리가 빠져나가는 사이 공들여 주문을 외워 지반을 무너뜨려 버린 거다.
“그러면 저 땅 한쪽을 뚫어서 물이 흘러가게 하는 방법은 어떨까요?”
“할 수 있겠어?”
지금 크레이터 밖으로 물이 흘러넘치는 구조가 아니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물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다.
그런 대단위 주문을 사용하는 걸 소환된 정령이 두고 볼 리도 없었고 여기에 그런 주문을 쓸만한 사람도 몇 없었다.
내가 지혜에게 저리 물어본 건, 그녀가 이 자리에서 그걸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혜처럼 파괴력에 특화된 최종 기술 혹은 특급 주문계 각성자의 것 두세 개 정도가 동시에 퍼부어져야 한다.
그래야 유의미하게 한쪽 면을 뚫어서 저 물을 내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면 위에 언급한 방해나 인원 문제도 문제지만, 고위 전력의 낭비로 말미암은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저 나가 주술사도 만족하고 그냥 도망가는 걸 택할 확률이 높다.
“음. 힘들겠네요.”
지혜도 결국 그런 계산을 해봤는지 내 말을 인정했다.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지반이 무너져 내린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나가 주술사가 몸을 드러냈다.
아까 신전의 공터인지 이젠 빛을 잃은 제단이나 중앙의 연못, 우리가 지어놓은 골조 구조물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 상태로 놈은 도발하듯 오연히 주변 산봉우리나 절벽 위에 자리 잡은 인간들을 바라본다.
그 모습에 슐츠와 나는 시선을 교환했다.
“대놓고 잡으러 와보라는 것 같은데···.”
“오지 않으면 이대로 저 정령과 남은 병력을 데리고 구룡 전선으로 내려가겠다는 거겠죠.”
“하지만 공략하기엔 지형이 너무 안 좋군.”
슐츠의 말대로 동그라미 세 개를 그려놓은 것 같은 구조 중 지하수 연못 밖 도넛 모양의 솟아오른 육지만이 인간이 지형 문제없이 싸울 수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외곽 두 원 사이의 가장 넓은 크레이터 호수 공간에선 예의 그 오수의 정령이 그 거대한 몸체를 드러낸 채 돌아다니고 있었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정령 자체가 돌진해오는 때도 있겠고 정령의 분체가 공격해온다든지, 해일을 일으킨다거나 물대포 따위를 쏴 날리는 것.”
“예. 주술사 자체의 패턴도 생각해야겠죠. 많은 인원이 공략할 수 없게끔 공간을 잘 제약해 놨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대부분이 흩어진 상태라서 협동하기도 쉽지 않다. 저리 진입하다가 각개 격파당하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포기하고 물러나기는 모호한 수준이지. 어떻게든 저 정령 소환으로 우리에게 피해를 주겠다는 괴물 놈의 악의가 느껴지는군. 역시 저런 게이트의 제약에서 벗어난 고위 지성체 괴물은 까다로워.”
“지휘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헌터 와치로 서이수의 지시가 들려왔다.
[여기에는 공략조만 남고 나머지는 한계령 삼거리에 합류해서 양양으로 달린다. 저거에 그대로 어울려줄 이유가 없지. 명단을 불러줄 테니···.]
서이수가 명단을 부르기 시작했고 슐츠는 거기서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헌터 와치의 기능을 켜고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이쪽은 청수의 용병으로 있는 펠릭스 슐츠. 궁금한 것이 있는데, 질문 좀 해도 되나?”
[말하시죠.]
“판단 근거가 뭐지? 여기서는 상대해주지 않는 것이 낫지 않나? 누가 봐도 저기는 사지다. 남는 인원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승산은 확실한 건가?”
[우선, 나부터 남는데. 내가 죽을 곳을 찾아 들어가진 않겠죠?]
서이수 정도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포터다.
그것만으로도 할 말을 잃게 하는 소리긴 했다.
“딱히 반박하기는 어렵군.”
그래서인지 펠릭스의 목소리도 누그러졌다.
그래도 질문에 답해줄 생각은 있었는지 서이수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여기서 저건 붙잡아둬야 해요. 어디로 갈지도 모를뿐더러 저게 대가리가 잘 돌아가서 인제 방면을 휘젓기 시작하면 큰일이거든요?]
“아···.”
그 말에 듣던 내 머릿속에서도 문제점이 바로 떠올랐다.
“고성과 인제 사이에 남겨둔 어인 군단···.”
[그래. 옆에 김유성 너지? 바로바로 알아들어서 좋네. 저게 그놈들 쪽으로 합류해버리면 골치 아파. 북진 피해서 도망가면서 서울을 노리든, 그대로 남하해서 구룡 옆구리를 들이치든, 뭐가 됐든 우리 전략이 꼬여.]
“그렇군. 당위성은 이해했다. 다만, 다시 묻지. 우리 승산은 확실한 건가?”
그리고 이어진 서이수의 목소리는 명백히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저게 여기가 어딘지 깜빡했던 모양이야? 바로 한계령으로 연락병 보냈어. 이제 통신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못해도 10분 내로는 도착하겠지.]
이전과 달리 통신 범위에서 헌터 와치로 통신하는 건 그리 어려울 게 없다.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이 한계령 쪽에 연락이 닿을 거다.
“아, 비공정···!”
[빙고. 아무리 길어도 한 시간 내로 장혁수랑 석대성이 지원군 끌고 이리 날아올 거야.]
장혁수는 대한 길드의 길마로 주문계 특급 각성자다.
[한시간이 뭐야, 바로 코앞인데? 지금쯤 둘 다 구룡 전선에 있을 거고 아니라고 해도 강릉에서 여기까지도 뭐···. 다시 말하지만, 구룡 쪽에는 일부 공략조 뺄 정도의 여유는 있어.]
적어도 공략조 퇴로 하나만큼은 확보됐다는 소리다.
[설명은 됐을까, 슐츠씨?]
“그 정도면 충분하네.”
헌터와치에선 서이수의 지시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슐츠가 우리 둘을 바라봤다.
“이렇게 되면 헤어질 시간이군.”
“무사하시길 빌죠.”
슐츠와 짧게 악수를 한 뒤, 나와 지혜는 곧장 점봉산을 빠져나와 한계령 방면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게 설악산 전투의 마지막이었다.
“왔군.”
그리고 한계령 진지 지휘부에 도착하자 한창 시체 떼거리를 처리하고 전장 뒷수습 중인 인제 군단에 합류할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미안하지만, 쉴 틈은 없어. 우린 바로 움직일 거다. 이젠 시간 싸움이니까.”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본부장님도 막 도착하신 것 아닙니까. 놈들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필드 한복판이라 통신이 안 돼서 정확하게 알 순 없지만, 당장 전령을 통해 전달받는 내용만 보면 이것도 저것도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것 같더군.”
“하지만 양양을 점령하면···.”
“바로 우리에게 몰려오겠지. 어차피 예상한 것 아닌가? 아, 서 길마하고 주력이 빠져서 그런 거라면 좋은 소식도 있어. 조금 전에 전령이 고성을 탈환했다더군. 그래서 양양으로는 블랙이 올 거라고 한다.”
그제야 마음이 좀 놓였다. 블랙이 온다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거다.
그리고 전장의 흐름이 아주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인제 군단은 양양을 점거했고 북진은 그대로 고립된 고성 방면의 어인 군단을 박살을 내며 내려왔다. 그리고 양양의 전투는 생각만큼 빡빡하지 않았다.
“이게 이렇게 풀리나···.”
“그러게요.”
본대 쪽에서는 적의 판단의 근거가 우왕좌왕하다 자중지란이 벌어졌다고 생각했지만, 포르세티로부터 정황을 전해 들은 우리는 적이 양양을 거의 포기하다시피 했던 그 이유를 알았다.
트라바슈르가 돌아가면서 나가를 쪼개놓았기 때문인데, 그 탓인지 적 해류족 연합군단은 동해에 전선을 형성하고 삼척에 웅크리는 걸 택했다.
그렇게 인간 측이 강원 북부를 완전히 탈환한 채로 동해안 사태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