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 설악산 전투
점봉산으로 가는 길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그러다 보니 승리의 여운이 사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기이할 정도로 기척이 느껴지질 않는군.”
“병력이란 병력은 전부 다 밀어 넣은 게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숫자가 안 맞잖나.”
“당장 주변 요새나 진채에서 견제 하나 없는 것도 이상한데.”
아무리 우리가 주변 요새를 전부 무시하고 지나가기로 했다고 하나 이 정도로 아무 대응이 없으면 등이 가려울 수밖에 없다. 조용히 행군하던 지휘부도 고개를 갸웃하며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그 짧은 시간에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나보네.”
그 뒤를 따라 걷고 있던 나는 뭔가 떠오를 듯 말 듯한 느낌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원래 흐름에선 이 사태의 보스급 주술사가 이런 소환을 시도한 적은 없었다.’
바뀐 것은 우리가 해룡을 떨어뜨리고 인제 방면의 공세를 막아냈다는 두 가지뿐이다.
북진 길드의 반전이나 우리가 양양 방면의 길을 타기도 전부터 이미 소환을 시도하고 있었다는 정황이었다.
그렇다는 건 주술사가 가진 정체성이 굉장히 모험적이며, 호전적인 인물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가라자를 향해 겁쟁이라고 했던 보스 경호원들의 말로 미루어보아 트라바슈르는 우리 인류와 싸운다는 것과는 뭔가 다른 노선을 가졌던 게 틀림없다.’
이번 사태에 보스급 혹은 네임드 나가가 한둘이 아니었음에도 이 보스가 나가 왕을 직접 가둬 두고 있던 것도 그런 근거를 더한다.
인류 역사만 봐도 죽이기 어려운 군주를 신하가 구금하고 있다는 건, 이용하기에 따라서 강력한 명분이 될 수도 있지만, 그만큼 반대로 공격받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다.
‘타즈샤르라는 점봉산 보스는 나가에도 파벌이 있다면 가장 과격한 주전파란 소리지.’
그리고 그런 과격파 나가가 데리고 있던 천자를 놓쳤다는 보고까지 받은 거다. 그 말은 일반적으로는 저지르기 어려울 정도의 사건까지 벌일 수 있다는 의미다.
만약, 상식을 벗어난다면 어떤 수가 있을까?
그리고 지금 분위기에 그것을 대입해본다.
‘내가 트라바슈르와 헤어지고 본대에 합류한 뒤, 조금 전 전투가 끝나기까진 대략 여덟 시간이 좀 넘게 지났다.’
그걸 생각하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거의 유일한 수가 하나 있다.
“언데드.”
내 입에서 나온 말에 각자의 가정을 늘어놓던 참모진의 시선이 전부 뒤쪽의 나를 향했다. 표정을 보니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가정 같다.
“우리가 북진과 연계한 것처럼 아크리치와 나가 보스가 연계했다면 어떻습니까? 이번에는 정확한 근거는 대기 어렵습니다. 단지 가정에 불과하죠.”
“북쪽의 그 해골하고? 그리 생각하게 된 이유를 알 수 있겠어?”
지금은 지휘부에 함께하고 있는 서이수도 이번 주장만큼은 흥미로웠는지, 내게 설명을 요구했다. 나는 바로 조금 전 스쳐 갔던 논리를 차분히 그들에게 설명했다.
“그렇게 두고 이 상황을 보면 설명됩니다.”
“아크리치가 유물 같은 걸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군.”
“그리 따지면 진지를 전부 비워둔 것도 정리가 되데?”
저리 진지를 비워둔 것은 통제할 언데드가 없는 상태에서 무작위적으로 시체들이 일어날 테니, 적 아를 가리지 않는 언데드 군세로부터 남은 병력을 지키기 위함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길마. 확실히 지금 상황이 설명되는 이론은 김유성 헌터의 생각뿐이니 대비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일단, 유물인지 뭔지 모를 물건의 범위는 점봉산 전역이라고 봐야 하겠네.”
“예. 그게 아니면 우리 발목을 잡기엔 전혀 유효하진 않겠죠.”
“그런데 어인이 아무리 자기들 피지배계층이 대부분이라지만, 그 많은 병력을 전부 제물로 던져줄 생각을 하네. 내 팔 봐, 지금 소름 돋았다?”
“신소리는 그만하시고 정리 좀 하시죠.”
김한성이 한소리 하자 서이수가 너스레를 떨던 걸 멈추고 진지한 표정을 한다.
“그래. 일단 후방에 남겨두고 온 부대는 못 버틸 거야.”
“시체가 다시 일어나더라도 충분히 이기지 않겠습니까?”
난 그리 말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고작해봐야 좀비나 구울 정도일 것이다. 물론, 아까 죽인 네임드 상어 같은 게 다시 일어나면 귀찮겠지만, 남겨둔 병력이 못 이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그런 생각은 서이수의 한마디에 정리되었다.
“전리품.”
“아!”
나도 그제야 남겨두고 온 군단이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 거라는 이유를 알았다.
“지금쯤 아군이 한창 전리품을 챙기고 있을 거란 말이지. 전령을 보내더라도 늦을 확률이 커. 우리가 거기 남아있었다면 무난하게 막겠지만, 저쪽도 그 정도는 알고 있겠지.”
“막혀있는 곳으로 전령과 물품이 오고 갔다면, 김유성 헌터 말대로 하늘을 통해서였을 테죠. 그렇다는 건 나가 보스에게는 특별한 정찰 수단이 하나 정돈 있다는 소립니다.”
“일단 보급부대 쪽이 큰 피해를 받을 거고 시체들이야 막긴 막을 거야. 다만, 한계령까지 후퇴하겠지. 물자가 부족할 테니까.”
“조금 전 전투에서 다 퍼부었죠. 양양에서 쓸 걸 고려하면 더 쓰는 건 곤란합니다.”
서이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능숙하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이런 건 시간이 생명이니까 우선 전령 보내서 시체가 일어났다면 한계령 삼거리까지 후퇴하고 거기 세운 진지 끼고 버티라고 해. 이쪽 걱정은 말라 전하고. 괜히 우리 구한다고 작전 계획에도 없는 짓을 하면 곤란하니까.”
“적 요새도 하나 살피겠습니다.”
“그래야지. 정말 비어있어야 더 확실해지니까. 그리고 김유성의 말대로 해골이랑 연계한 거면 규격 외 급 게이트가 필드화하면 거기서 나온 지성체끼리는 연합할 수 있다는 게 확실해진 셈이네.”
그때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겨울인 걸 고려하더라도 지나치게 차가웠다. 그리고 진눈깨비처럼 흩날린다.
서이수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을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인위적이지?”
“안개를 일으키려는 것 같습니다.”
김한성의 답처럼 벌써 설악산에는 여기저기 운무가 끼기 시작했다.
“기상을 조절하는 게 이렇게 귀찮을 줄은 몰랐는데. 적어도 저 주술사만큼은 이번에 꼭 죽여놔야겠어. 화염, 그리고 바람 계통 탄 헌터 전부 불러모아 봐.”
“전부 태워버릴 생각입니까?”
“당하고만 있을 순 없잖아? 어차피 한계령 선에서 막겠지.”
설악산 동쪽과 남쪽 방향 산림에는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지시를 내린 서이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짓까지 해가면서 소환하려는 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뭐가 됐든 하게 둬선 안 된다는 건 분명하겠네.”
“뭔지 단정하긴 어렵겠지만, 물과 관련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정에 가까운 것도 슬슬 말해볼 만한 때가 된 것 같아 내가 슬그머니 그 병기가 물을 부리는 것일 가능성을 언급했다.
“물이라···. 그러면 수중 호흡도 염두에 둬야겠는데. 너무 신경 쓸 게 많아지는 느낌이네. 그래도 그것도 생각해둘 필요는 있겠어.”
우린 속도를 좀 더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로막는 것도 없이 고속으로 이동한 군단이 빠져나왔던 점봉산 신전 입구 근방에 도착했을 무렵, 우리를 가로막은 것이 있었다.
“이 미친 생선 대가리들이···.”
그 광경을 본 김한성의 입에서 분노에 찬 으르렁거림이 새어나온다. 지휘부뿐 아니라 너나 할 것 없이 그 광경에 모두 분노를 표하는 중이었다.
구릉지를 가득 메운 건 그 단위가 천이 넘어가는 듯한 좀비 떼거리다. 정확히는 어디 한군데 뚫려 죽고 좀비가 된 민간인이라는 게 정확할 것이다.
[처리한다. 놈들이 무슨 수를 쓸지 모르니 다들 체력 안배 잘하고 병력은 3교대로 돌려.]
서이수의 담담한 목소리가 헌터와치를 울렸다. 그리고 그때 아군 후방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발밑에! 강한 놈들이 있습니다!”
[들었지! 놈들이 땅속에 주력을 숨겨놨다. 대지 계열 쓸 수 있는 주문계 모아서 전투가 벌어질 지점의 지면을 끌어올려서 대응해! 나머지는 튀어나오는 놈들을 처리하는 데 집중한다!]
바닥에서 간간이 튀어나오는 건 고위 각성자들의 시체거나 나가, 어인들의 시체였다. 전방에 세워둔 민간인은 좀비들은 시선을 끄는 미끼였던 셈이다.
안개 탓에 흐릿한 시야 너머,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좀비를 처리하며 아군은 사원으로의 길을 뚫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전투를 벌이던 도중, 뒤에서 급히 뛰어오는 전령이 있었다.
“뒤쪽 안개 너머로 대규모 좀비 떼가 오고 있습니다.”
“아까 전투에서 죽은 놈들이 이제야 도착했나 보네. 하지만 됐어. 어차피 입구는 코앞이야.”
아크리치처럼 좀비를 엮어 괴물을 만든다거나, 강화를 시킨다거나 고위 언데드가 나온다거나 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 수준이 높지는 않다.
입구를 끼고 정예를 배치해두면 무리 없이 막을 것이다.
오래지 않아 신전 입구 앞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일전 정찰했을 땐, 잡혀 온 민간인으로 빽빽했던 입구 앞의 나가 주둔지는 싹 비워져 있었다.
그리고 동굴 앞에는 말뚝 박힌 벽을 세워놓고 놈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암살자가 안 보이는 게 걸리네. 다들 조심하자.”
그 연속적인 전투에도 지치지도 않는지 서이수는 최전방에 나서서 연거푸 제어기나 보호막을 걸며 입구를 뚫는 데 주력했다. 그리고 거기서 반가운 얼굴도 하나 만날 수 있었다.
“살아계셨군요.”
“김지성 부팀장! 혼자 살아남은 건가?”
“민간인 일부랑 같이 은신처에 몇 명 더 있습니다. 불러올까요?”
“아니. 그건 위험할 것 같은데.”
지금 상황을 보면 여기로 오는 동안 후방에서 밀려오고 있는 시체 떼거리에 휩쓸릴 것이다. 나는 곧장 그를 지휘부에 데려갔다.
“김지성, 여기서 뭔가 특별한 거라도 본 게 있나?”
“해골용 하나가 날아오는 걸 봤었습니다.”
“타고 있던 건?”
“후드를 쓰고 창 같은 걸 든 놈 하나하고 지팡이를 든 해골바가지 하나를 보긴 했는데, 내렸는지는 확인 못 했습니다.”
“묘사를 들어보면 악령 군주랑 리치 하나를 보낸 것 같은데.”
그게 지원군이라면 정보가 없던 놈이 나오는 셈이다. 그 사이 나가들이 어떻게든 막으려던 신전 입구가 뚫렸다.
아까 좀비떼가 뿌려졌던 구릉에서 숫자의 폭력에 귀찮고 시간이 끌렸던 게 문제였을 뿐, 아군 전력은 명백히 우위에 있었고 나가들은 속절없이 동굴 안쪽으로 쭉 밀려나는 중이다.
파죽지세처럼 뚫고 들어간 지휘부는 일전 정찰에서 특급 나가 전사를 마주했던 복도를 넘어 문제의 제단 방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망할 해골용이 지원군이 맞았군.”
용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후드를 깊게 눌러쓴 악령 군주와 리치가 각각 제단의 한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호수가 펼쳐져 있었고 호수 너머 건너편에는 빽빽하게 무기가 꽂히고 홈을 파서 만들어둔 마법진 같은 것에 뭔가를 뿌리며 끊임없이 주문을 외우는 나가 주술사가 있다.
“저기 화살 한 방 날려볼 사람? 손님 대접이 시원찮네. 우리 왔다고 간단하게 인사만 좀 해줘.”
누굴 말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서이수의 요청에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나가를 향해 원거리 공격이 날아갔다. 우리의 공격에 리치나 악령 군주는 딱히 대응하지 않았다.
“역시 보호막이 있네.”
제단 주변에 집중된 장막이 충돌 순간 원구형의 보랏빛 막을 펼쳐내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래도 공격을 받다 보면 보호막이 까일 텐데, 움직이지 않는 건 이상하군요.”
“그건 아마 저게 정답이겠지.”
김한성이 가리킨 곳에는 불길하게 빛나는 검은 구슬이 올려진 탑이 있었다. 정확히는 리치와 악령 군주가 하나씩 지키고 있는 장소였다.
“감정, 탐지 기술 가진 얘들 다 불러.”
그들에게서 나온 답은 보호막을 강화하는 종류라는 것이 일관된 해석이었다.
“결국 저걸 깨야 한단 소리군.”
“그렇겠지. 저걸로 강화된 상태면 다 소환할 때까지 버틸 수 있다는 계산인 걸 테니까.”
“공간이 좁아서 많은 인원으로 포위하긴 어렵습니다.”
“그거 전부 호수 때문 아니야? 공사가 불가능해?”
“하면 하겠습니다만, 뭔가 꺼림칙해서.”
그리고 난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십중팔구 호수 안쪽에서 나가의 매복이 있을 겁니다.”
“네가 들어갔던 그 지하수 통로가 여기까지 연결되어 있다는 소리?”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놈들 대부분이 지상에서 생활보다 물에서의 생활을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엄연히 추정치일 뿐이지만, 사전 계산상으로도 아직 적 고위 전력이 다 나왔다기엔 모자랍니다.”
“좋아. 우직하게 뚫어야 한단 소리잖아. 우선 양쪽 가로막은 놈들 급수부터 알아봐. 급할수록 침착하게 가야지.”
서이수의 탐색전 지시로 설악산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