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 설악산 전투
트라바슈르의 말과 달리 저들의 목표가 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몇 차례 맞은 화살과 창이 고통스러운지, 히드라가 괴성을 지른다.
속도를 어떻게든 줄이려는 건지 추격하는 두 나가는 괴수의 꼬리와 다리, 그리고 지느러미를 집요하게 노리고 있다.
[출구가 그리 멀지 않다. 느껴지는군.]
물 속에서도 총알 같은 속도로 추격해오는 고위 나가들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처럼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A급 대형 괴수를 추월하긴 어렵다.
그래서 대형 괴수의 진가는 좁은 공간이나, 도주 혹은 추격상황에 잘 나타난다.
‘그게 체급이니까. 그래. 그런 계산이 아니었다면 이런 나가 소굴로 트라바슈르가 뛰어들지 않았겠지.’
물론, 그렇다고 추격을 점차 따돌린다거나 하고 있진 않았다.
마력으로 가속할 때의 전력만큼은 저쪽이 더 빠른 것 같다. 나가 왕이 아까처럼 물을 건드려 방해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거리가 계속 좁혀졌을 것이다.
그 증거로 적들도 어떻게든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거의 다 왔다는 말도 있고 잠시 생각한 것이 있어 팬던트의 공기 방울을 주변으로 퍼뜨리며 트라바슈르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나간 뒤의 계획은 있습니까?”
[시간을 끌면 너희 인간 병력이 오지 않겠나. 저들도 바보는 아니니 네 존재를 눈치채고 있을 터. 인간이 접근하면 불리함을 알고 돌아갈 것이다. 그때 너와 나도 헤어지면 되겠지.]
“하지만 그건 너무 불확실합니다.”
얼마나 버텨야 할지도 모르고 나야 최악의 경우라도 순간이동으로 도망칠 수 있다지만, 이 나가에게 답을 듣기 위해선 둘 다 살아야 한다.
[뭔가 좋은 수라도 있나?]
“당신의 힘을 견디려면 어느 정도의 장비가 필요한 겁니까?”
[어중간한 것은 맨 주먹만 못하다. 하물며 작은 인간의 무기 따위가 손에 맞겠느냐···?]
거기까지 말하던 트라바슈르는 멈칫했다.
[잠깐. 지금 이 말, 어디선가 분명···.]
히드라를 향해 날아오는 화살을 한 번 튕겨내고 그런 말을 던진 나가라자는, 갑자기 뒤에서 오던 이들을 물의 흐름을 건드려 방해하던 것도 멈추고선 갑자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으하하핫! 그렇구나! 네가 바로 ‘그’였구나!]
한참을 껄껄대며 웃던 나가 왕은 명백하게 호의의 시선을 담아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뭔가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 그렇다면 이 인연이 이어진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 알 필요가 없다. 그리고 알아봤자겠지. 그 꿈이 정말 그것이라면, 분명 우리의 연은 다시 이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거기까지 하고 끊은 트라바슈르는 서둘러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신들과 모든 계약과 연이 끊어진 우린 더는 신계의 신물을 받을 수 없으나, 그대라면 빌려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갑자기 내게 기묘한 믿음을 보이며 ‘신물’을 언급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트라바슈르가 방향성을 제시한다.
[바루나님께 당신의 옛 종 트라바슈르가 아스트라를 원한다고 전해다오.]
“아···스트라? 하지만 그건···.”
그게 뭔지는 안다. 인도 신화이자, 동방 신화이기도 한 그 신화의 주신들이 자랑하는 강력한 신물이다.
하지만 도저히 내가 그 값을 치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대도 아직 미숙한 시기인가 보군.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그대로 전하면 된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이니. 정 걱정된다면, 값을 치르시지 않았던 과업에 대한 대가로 그것을 바란다고 적어라.]
내게 바루나와 대화할 수 있는 직통의 방법 따위는 없다.
그 정도 신이라면 애초에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을 공산이 컸고 예전 경우만 보더라도 그냥 무시할 확률이 높았다.
그렇기에 난 급히 포르세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바루나? 그 남자도 여자도 아닌 아저씨는 왜?]
[연락할 수 있긴 한 겁니까?]
[가능은 해. 아, 근데 원래라면 신들도 세대 간에 묘하게 급이 나뉘어서 함부로 연락 못 하거든? 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꼰대 기질이 다들 있어요. 그러니 다른 신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 돼.]
된다는 것 같긴 한데, 오늘 따라 이상하게 말이 길다.
[그런데 넌 매번 신기해. 이번에도 어떻게 내가 연락할 수는 있는 윗세대 신을 요구하네?]
포르세티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사이 놈들이 거리를 확 좁혀오고 있었다.
트라바슈르가 잠시 방해의 손을 놓았던 그 틈이 꽤 컸다. 그리고 거리가 좁혀졌다는 건, 화살과 마력창이 더 많이 날아온다는 소리다.
[신물은 아직인가?]
놈들이 좁혀오는 모습에 트라바슈르도 살짝 재촉하는 듯한 말을 건네왔다.
지근거리에서 계속 얻어맞는 피해가 누적되어서인지, 아니면 지쳐서인지 히드라의 속도도 느려지고 있다.
[···그쪽도 나름 정의, 법 따위를 관장하던 신좌라서 법의 신 커뮤니티에 속해 있거든!]
어지간하면 싫은 소리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난 여신을 좀 재촉하기로 했다.
[포르세티님. 지금 제가 위험한 상태라, 이유는 묻지 마시고 빨리 좀 부탁하겠습니다.]
[어. 그래? 뭐라고 전해주면 돼?]
나는 트라바슈르가 말했던 내용을 그대로 읊었고 가능하면 지금 내가 있는 곳을 보여달라고 덧붙였다. 이제 고작 백여미터 정도까지 거리를 좁힌 두 나가의 입가에 비소가 번진다.
더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무슨 이유가 있는 건지 트라바슈르는 히드라와 함께 멈춰 섰다.
아마 후자인 것 같다.
이젠 나도 느껴진다. 여기로부터 멀지 않은 장소에 외부로 나가는 통로가 있는 건 분명하다.
[이제 도망치는 건 포기하셨나 봅니다?]
[이제 도망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니라.]
트라바슈르의 말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뭍으로 나가나 여기서 싸우나 싸우는 건 필연. 이쪽도 고위 나가고 저쪽도 고위 나가인데, 전장을 여기로 택했다면 바루나에게 받아야 하는 아스트라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나가라자! 이제 그 자리에서 물러나 내려오실 때가 됐소! 우리 부친께서 놓친 그 자리! 이젠 우리 남매에게도 도전할 자격이 있겠지!]
[정말이지! 아직 한창때이실 텐데, 노망이라도 나신 겁니까? 되지도 않는 탈출은 그렇다 칩시다. 그런데 인간과 손잡고 탈출이라니요? 정말 다음 세대로 그 자릴 넘기실 때가 되신 것 같군요!]
두 나가의 도발에 트라바슈르도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원래라면 네놈들은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었을 자리가 눈앞에 다가오니 눈에 뵈는 것이 없나보구나! 왕에 대한 예의는 어디다 팔아먹었느냐!]
[예우? 우린 최대한 예우를 해드렸습니다. 형식상으로나마 마지막으로 신에게 선택받은 그 왕의 자리! 그래서 끌어내려 졌음에도 최대한 겉모습이나마 배려해 해드렸건만, 그걸 걷어차고 달아나는 건 당신입니다!]
[하루 대부분을 유폐되어 지내며, 돌아다닐 수 있는 건 감시하에서만 가능하고 너희가 필요할 때나 불러내 얼굴마담이나 시키는 그걸 예우라고 하나? 짐은 왕이니라!]
나가 왕이 잠시 느꼈던 그 성격답지 않게 말로 시간을 끄는 건, 나 때문일 것이다.
[하하! 그렇다면 왕으로서 죽으시죠! 버러지 같은 인간과 도태된 신수의 새끼와 길동무를 하실 테니 가시는 길이 외롭지는 않으시겠습니다!]
결국, 전투가 시작되려는 기미가 보이자 나를 슬쩍 바라보고 짧은 한숨을 쉰 트라바슈르가 손에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중성적인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울렸다.
[그래. 내게 선택받고 신명을 바쳤던 마지막 나가의 왕. 트라바슈르가 맞구나. 그렇다면 이 또한 운명이겠지. 그가 너를 통해 내 아스트라를 받고 싶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오랜 약조대로라면 절대 해선 안 될 일이다만···, 편법을 쓰는 것이기도 하니 변명 정도는 할 수 있겠군. 또한, 이는 오래전 빚을 갚는 일이니 그쪽에서도 눈감아줄지 모르지.]
뭔가 깊은 회한이 담긴 것 같은 목소리가 몸 속에 공명하듯 울리면서 그 감정에 휩쓸린 난 차마 어떤 질문도 던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신좌도 그리 내뱉은 뒤론 쭉 침묵하고 있다.
그저 잠시 뒤에 우리 등 뒤에서 물이 뭉치고 압축되어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을 뿐이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는지 빠르게 접근해오던 두 나가가 방해하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조금도 그 물의 흐름을 방해하지 못하고 반발력에 밀려나며 바닥에 볼썽사납게 몇 번이나 튕겨야 했다.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냐!]
[이건 설마···.]
타나리사라는 여성 나가 쪽은 뭔가 짐작 가는 것이 있는지 다시 접근해오는 티안슈와 달리 그 자리에 멈춰서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여유를 되찾은 트라바슈르는 팔짱을 낀 채, 히드라의 위에서 나와 함께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입이 열렸다.
[영광으로 알아라. 오래전 신의 시대가 끝난 뒤, 바루나스트라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되는 건 너희 세대에선 너희가 처음일 테니.]
그 무기는 내 앞쪽에 나타났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느낄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물이 그곳에 담겨 있었다.
그것이 원한다면 내 몸속 수분의 마지막 한 톨까지 전부 가져갈 것이고 반대로 베푼다면 이 세상 모든 갈증에 시달리는 이를 먹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너희에게 내려주었던 모조품이 아니니 조심히 다루라. 자칫 과한 것을 바란다면 너를 파괴할 것이다.]
무심한듯한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와 내 주변을 울리고 그 목소리를 슬픈 표정을 지으며 듣던 트라바슈르가 조심스럽게 아무것도 없는 물속의 한 지점을 움켜쥐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래 전 우리의 신이시여. 그러나 많은 것을 바랄 필요도 없겠지요. 물속에서 이 아스트라만큼 강력한 물건은 존재치 않으니, 그저 쏘아내는 것만으로도 뒤를 급습하는 상어처럼 적을 조용히 침묵시킬 것입니다.]
그리 담담하게 최대한의 존경을 담아 걱정에 답한 나가의 왕은 담담하게 신물의 시동어를 읊었다.
[그는 올가미를 쥐고 질서를 보는 자. 바루나스트라!]
정말 일순간이었다. 그 어떤 화려한 효과도 무시무시한 마력의 격류도 없었다. 그것은 그저 조용한 암살자처럼 목표만을 침묵시켰다.
흉험하게 돌진해오던 나가 전사 티안슈의 몸에서 핏물이 터져나가지 않았다면, 저 멀리서 달아나던 타나리사가 실 끊어진 연처럼 쓰러지지 않았다면 그게 쏘아진 것도 몰랐을 것이다.
[이걸로 추격은 없겠군. 놈들의 장비를 회수해야겠다. 한동안 쓸 장비로는 나쁘지 않겠어.]
그 시체에 하나씩 접근하면서 나는 신물이 가진 위력에 전율했다.
‘이게 신물인가.’
표정만 봐도 안다.
이 둘은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 조차 몰랐던 것 같다.
나가 전사 티안슈는 온몸의 장기가 뭔가에 관통당한 것처럼 죽어있었다. 예상해보자면 자기 몸 속의 수분이 탄환이 된 것처럼 몸에서 제멋대로 날뛰었던 것 같다.
그리고 트라바슈르가 활과 화살을 회수하겠다며 다가간, 여성 나가 타나리사의 육신은 참으로 기괴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물 속에서 체내의 모든 수분을 뺏기곤 말라 비틀어져 죽었다.
[아직 너희 군대는 도착하지 않은 것 같군.]
우리가 나온 통로는 아담한 크기의 호수였다.
“그렇군요. 어찌 됐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정말이다. 보스를 제외한 나머지 중 가장 위협적이던 S급을 죽였고 정찰대도 존재를 모르던 S급 하나를 추가로 더 죽였다.
거기에 A급 대형 네임드로 우리 앞길을 막았을 히드라는 그가 타고 떠나면서 자리를 자동으로 비우게 된다. 그러면 저기 남은 건 A급 네임드 둘 정도뿐이다.
‘문제의 정령 소환만 막으면 거의 피해 없이 양양으로 갈 수 있다.’
원래도 할만했던 난도가 확 내려가는 것이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이다. 오랜 인연에 반가운 것과는 별개로 나는 나가의 왕이고 연자는 인간이지. 앞으로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대개 집단이란, 개인에 우선하는 법이니.]
“어디로 가실 겁니까?”
[짐을 따를 무리가 없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 인간이 이긴다면 돌아서는 이들도 생기겠지. 일단은 남쪽으로 갈 것이다.]
“나쁘지 않군요. 이 나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제주라는 섬이 나오는데, 비어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남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면 인간이 살지 않는 섬이 많죠.”
제주도를 인간에게 우호적인 편인 이 나가 왕이 차지해준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거기에 동남아는 큰 섬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비워져 있으니, 트라바슈르가 나가들을 데리고 그리로 떠나준다면 앞으로 여정에 큰 근심거리 중 하나가 해결되는 셈이다.
[참고하지.]
히드라의 상처가 재생되는 것을 잠시 기다리던 나가의 왕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곤 한 마리 괴수와 함께 멀어져갔다.
나도 인제에서 올라온 군단에 합류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