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 헌터의 성좌투자법-64화 (64/128)

7장 - 설악산 전투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렸음에도 간수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포기해야 하나?’

여기는 퇴로가 될 가능성도 적어서 지금 구하지 않으면 끝이다.

탈출 시점은 잠입한 누군가가 잡혀간 본대를 탈출시키는 때다. 그때 마력 유동 때문에 자체 봉인해둔 헌터 와치의 통신 기능을 사용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너무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는 없다.

결국, 내가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움직이려는데 저 멀리서 뭔가가 바닥에 쓸리는 소리와 돌가루들이 여기저기 튀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간수다.’

다시 내가 구석으로 기어들어가자마자, 통로 너머에서 인간과 유사한 상체에 여덟 개의 팔과 붉은 피부, 그리고 뱀의 몸뚱어리를 가진 5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일반적인 뱀 인간류 괴물이나, 리자드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나마 뱀 인간의 상위 종으로 분류되는 라미아 정도면 그 위험도를 보통의 이 생명체와 동급에 둘 수 있겠다.

인도 신화에서 묘사되는 나가와 비슷한 모습에 괴물의 명칭은 나가가 되었다.

인간은 알아들을 수 없는 저들만의 언어 체계가 있는 듯 보였고 인간 이상의 지성을 가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놈은 여덟 개의 팔 중 하나를 들어 제 코를 막은 채 뚱한 표정으로 내가 숨은 장소의 반대편으로 가더니 팔 여섯 개로 벽면을 몇 차례 빠르게 누른다.

나는 그 과정을 눈을 부릅뜨고 외워두었다.

‘토템을 저기서 끄는 거군.’

그 말은 토템이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해로운 물건이라는 거다.

토템의 기운이 사라지기까지 대략 10초 정도 기다린 나가는 허리에 달린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외울 수 있다면 저 모양을 외우고 열쇠가 작동할 때 모습을 확인하는 것이 몹시 중요하다.

‘거기서 놈이 나갈 때 기습해야 할지, 아닐지가 갈리니까.’

물론, 나는 어지간하면 기습하고 싶지가 않다. 암살자와 다르게 레인저는 흔적을 숨기면서 적을 죽이기가 너무 어렵다.

놈은 어떤 열쇠가 맞는 것인지 한참을 여러 열쇠를 꽂아가면서 돌렸고 그 말은 저래도 될 정도로 보안 장치는 그게 전부라는 소리다.

거기에 우리 문이 열릴 때 특별한 마력 유동이라거나 하는 것도 없었다.

‘위험도가 낮은 각성자들이니 저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긴 모양이야.’

계산을 마친 나는 놈이 떠날 때까지 침착하게 그 과정을 기다렸다.

불운한 각성자 한 명이 기절한 상태인지 바닥에 질질 끌리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입구에 내동댕이쳐졌다.

나가는 다시 토템을 작동시킨 뒤, 왼쪽 최하단 손으로 전사로 보이는 각성자 하나의 목덜미를 잡은 채, 그를 질질 끌며 감옥 방을 나갔다.

놈의 기척이 적당히 멀어지길 기다려 나는 토템을 정지시킨 뒤, 품에서 조립 도구를 꺼내 들었다. 실린더형 자물쇠라 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는 것이 이상했는지 안에 남아있던 이들 중에 이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사람이 있었기에 손가락의 위장을 풀어서 슬쩍 보여주었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모습이 심각한 상황임에도 슬쩍 피식하는 미소를 짓게 한다.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뒤, 나를 바라보던 각성자에게 향했다.

“서포터. 치유계 서포터가 여기에 있습니까?”

내가 그의 귀에만 대고 작게 내뱉은 말에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다행이다. 치유계 서포터가 있다면 여기서 한 시간을 넘게 소비한 보람이 있다.

“리더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이 남아 있습니까?”

“어떻게···.”

“작전 중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서포터와 리더에게 전할 테니 말해주시죠.”

“지금 남은 사람 중에선 내가 여기서는 아마 가장 등급이 높을 겁니다. 좀 더 나은 사람도 있었는데 아까 그 팔 여럿 달린 뱀 인간이 전부 끌고 가서···.”

“일단 서포터부터 구해서 데리고 오죠.”

난 그가 가리킨 우리로 가서 묘사한 복장과 유사한 서포터 한 명을 둘러업어 중앙 우리로 데려왔다.

뺨을 몇 번 때리자 고통스러운 앓는 소리를 내던 서포터가 한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개를 들었다.

“누구···.”

“어찌어찌 몰래 회복시켜놨나 보군요.”

목소리가 들리며 허공에서 내 머리만 드러나자 숨을 들이마시며 비명을 참는다. 서포터는 잠시 숨을 고르며 진정한 뒤, 내 말에 답했다.

“뭐, 틈틈이 어떻게든 했죠. 밖의 토템이 좀 많이 문제였는데 무슨 방법인진 모르겠지만 끄셨나 보네요. 정신력으로 저항 불가능한 종류는 아니라서 버텼었는데, 이쯤 와선 답 없다 생각하고 절망해서 포기하고 잠들었죠.”

서포터가 말하길 밖의 토템은 수면을 유도하고 자연 치유를 저해하는 기능이 있어서 마력으로 저항해야 하는데, 들킬 순 없으니 간수가 올 때마다 마력을 풀고 한동안 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치유하기가 정말 힘들었어요. 깨어나더라도 바로 잠이 오니까. 그래도 저희 쪽은 다 끝냈어요. 다만, 저 기묘한 힘이 흐르는 감옥 쇠창살 탓에 탈출 방법은 막막했죠. 그보다 지금 서울 쪽에서 우리를 구하러 온 건가요?”

“아닙니다. 정찰 작전 중입니다.”

여자는 내 말에 크게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혹시 모를 급발진을 막기 위해 현 상황을 알렸다.

“혹시 아실지 모르겠지만, 이곳 점봉산 주변에 어인들이 쫙 깔렸습니다. 당장 여길 빠져나간다고 해도 살 확률은 낮을 겁니다.”

“네. 그건 잡혀 오면서 봤어요.”

나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이쪽 분이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하고 치유계 서포터 분이 계시니 전원 몸 상태는 정상으로 만들 수 있겠죠. 나가 간수의 순찰이 몇 시간마다입니까?”

“대략 틈이 여섯 시간 정도 되네요. 다만, 지금처럼 사람 데려가려고 오는 경우가 있다 보니 정확하지는 않죠.”

치료를 위해 자기 마력을 직접 소모해야 했을 서포터니 거의 정확할 거다. 나는 생각을 정리한 뒤, 그들에게 현 상황과 어떻게 탈출해야 할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인제 방면에서 군단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자세한 작전 내용은 정보가 새나갈 수 있어 말할 수 없는 걸 양해해 주시고 결론만 말하자면, 대략 하루 내로 이곳을 칠 겁니다. 전쟁이죠.”

그 말에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내 입 모양에 집중했다. 나는 앞선 정찰조가 어떻게 됐는지 우리가 왜 여기 들어왔는지를 설명한 뒤, 그들이 해야 하는 걸 말했다.

“그러면 우린 내부에서의 혼란을 틈타서 뚫고 도망가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리고 그리 동시다발적으로 움직여주는 것이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가급적 군단이 오는 한계령 삼거리 방면으로 도주해야 하겠죠. 당장은 여기 감옥 내부에 밖에 토템 작동을 해제할 암살자나 레인저가 하나 이상은 필요하다는 건데···.”

“그거 그 뱀 인간이 눈치채지 않을까요?”

“어차피 계속 볼일만 보고 급히 나가던 걸 생각하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나는 이들이 지금 생각하는 것이 뭔지 알았다.

“다 같이 준비하고 있는데 놈이 혹시 사람 하나를 더 잡아가려고 오는 게 걱정되시는 거군요.”

“···그렇죠. 그 상황에서 사람들이 어떤 돌발 행동을 벌일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런 변수를 모두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나가를 한 번 처리하면 다음 순찰 때까지는 시간이 있다는 소리죠. 놈을 잡고 여기서 놈들의 교대 텀 정도만 더 대기해주시면 됩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는 저희가 저걸 잡을 수 있다고 장담을 못 하겠어요. 지금 장비도 없고 지형도 불리하게 싸워야 할 텐데···.”

그 탓에 날 붙잡고 싶어 보이는 그들을 향해 나는 냉정하게 답했다.

“희생 없이 빠져나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마시죠. 저나 여기 들어온 다른 대원들도 모두 목숨 걸고 들어왔습니다. 작전에 지장 있는 행동은 할 수 없습니다. 걱정되신다면 아예 미리 나와서 간수를 기습할 준비를 하시죠.”

“···차라리 그게 낫겠군요. 더 붙잡지는 않을게요. 다른 우리 열고 사람들 깨우는 것만 도와줘요.”

징징대지 않고 바로 포기하는 모습은 다행이다.

‘이성적이라는 뜻이니까.’

당연히 이들도 자신들만으로 여길 빠져나갈 가능성이 작다는 걸 안다. 이 상황은 여기 있는 인간 모두가 서로의 탈출을 돕는 미끼다.

그들을 도와 사람을 한군데 모으는 걸 도운 뒤, 그 구석진 감옥방을 벗어난 나는 왔던 길을 돌아 나갔다.

좌측 통로의 어인들은 여전히 똑같은 행동 중이라 기다려서 통과하는 건 어렵지 않았고 이제 문제는 좌측 방면 2개 조 어인들이었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됐는데···.’

나는 특별히 무리하지 않고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슬슬 외부에서 김지성이 소란을 일으킬 때가 됐다.

동굴 밖에서 고함이 들려오기 시작하고 순찰을 하고 있던 어인들도 뭔가를 전해 들었는지 이내 저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뭔가 대화를 나누면서 빈틈이 나왔다.

내부에도 생선 괴물들은 많았지만, 비슷한 상황이라 통과는 일사천리였다. 그렇게 쭉 오르막길 직선 통로를 따라가던 내 앞에 사거리가 등장했다.

‘뭔가 온다!’

뭔가 엄청난 속도로 올라오는 모습에 나는 급히 튀어나온 종유석 뒤에 웅크리고 앉았다. 소리를 들으면 나가인데, 놈들의 시야는 엄청나게 높은 편이다.

가만히 있는 상태 기준으로 레인저의 동화는 암살자의 은신보다도 감지가 어렵다. 사거리 꺾이는 부분에 앉아서 시야에만 안 잡히면 그 문제의 네임드가 아닌 이상에야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 올라온 나가는 갑주 장식이 화려한 게 꽤 정예인 걸로 보였지만, 네임드급은 아닌 것 같았다.

놈은 내가 숨은 사거리를 살피기는커녕 팔에 각성자 하나를 낀 채 급히 내 반대편 오르막길을 쭉 돌진해나갔다.

‘저쪽이군.’

나가가 올라온 쪽에 각성자들이 잡혀 있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려갔고 그곳에는 예상대로 각성자들이 있었다.

다만, 이곳엔 아까 같은 토템이 설치되어있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좀 당혹스러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나가가 갇혀있는데···.’

중앙의 거대한 우리에는 나가 하나가 똬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잠이 들지 않은 각성자들이 그 나가를 향해 어떻게든 뭐라고 대화를 시도하려는 모습이 보였다.

“푼다. 나간다. 나. 나가라자.”

내가 들어오자마자 그 나가는 정확히 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문의 자물쇠를 가리켰다.

그러자 대화를 시도 중이던 우리 안의 각성자들 시선도 일제히 내가 서 있는 입구 방향을 향했다.

“이봐, 나가라자씨! 누가 온 거면 우리가 할게!”

내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며 같은 말만 반복하는 나가를 대신해 입구 방향의 각성자들이 급하게 목소리를 냈다. 아까와 다르게 여기는 우리가 전부 1인실이다.

감옥 창살에 흐르는 마력장 탓에 원거리 치료가 불가능하니 서포터가 있다고 해도 모든 문을 다 열어줘야 했다.

“이봐, 구원 온 거 맞지!”

나는 그들 앞에 천천히 얼굴만 깠다. 저 구석진 곳에 정찰 본대에 있던 각성자들이 기절해 있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 감옥방에는 기억 속 어디서 한 번쯤은 얼굴을 본듯한 각성자들이 있었다.

여긴 꽤 고등급이라는 소리다.

안타깝게도 목표로 했던 A급은 없었지만, 그래도 나만 여기 들어온 게 아니라는 걸 고려한다면 여기 들어온 목적은 어느 정도 이룬 셈이다.

“일단 우리부터 좀 풀어줘. 그놈들이 한 시간마다 와서 시간이 별로 없다.”

막 얻은 정보에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급히 나가던 나가의 움직임도 그렇고 가운데 붙잡혀있는 묘한 위압감을 흘리는 저 나가도 그렇고 뭔가 걸리는 게 많다.

서둘러 그들이 있는 우리를 열고 그중 서포터들이 나쁜 몸 상태에도 급히 마력을 짜내 다른 각성자들을 치료하고 깨웠다.

“장비가 하나도 없으니 쉽지 않겠는데···.”

“그런데 저 나가는 뭡니까.”

내가 입을 열자 풀려난 각성자들도 고민에 빠지는 모습이다. 모습을 보니 그들도 아는 건 거의 없이 그저 대화를 시도하니 받았던 모양이다.

대전쟁까지 산전수전 다 겪은 나도 인간과 대화를 시도하는 나가라는 건 처음 본다.

‘대전쟁 시기까지 동해안의 수많은 나가를 생포해서 온갖 시험을 해봤지만, 대화에 응한 놈은 없었다. 언어 체계를 해석하는 것도 불가능했어. 하지만 저 나가는 분명 우리말을 했다.’

대전쟁 전, 세계의 필드를 차지하고 눌러앉은 게이트 너머 지성체 중에 인간과 유의미한 대화를 나눈 외계 종족은 ‘마녀’와 ‘도플갱어’ 그리고 ‘뱀파이어’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도플갱어는 인간을 먹어서 인간처럼 이야기하려 했을 뿐이지, 실제로 그 종족에 대한 제대로 된 대화는 이뤄지지 않았으니 마녀나 뱀파이어가 유이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정보부에서 본 바로는 대화하는 것은 자신들이 원래는 인간 출신이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나마도 그 이상의 질문에는 대화를 꺼렸지.’

머릿속으로는 생각을 굴리면서도 나는 현 상황을 이들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그나마 우리 정찰 본대 인원들도 있던 덕분에 설명의 수고는 많이 덜 수 있었다.

“음···. 같은 나가한테 갇혀있는 것도 그렇고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그렇고 엄청 신기하긴 한데.”

“이거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 봐도 되는 것 아닌가?”

“아니야. 내버려두자. 적의 속임수일지도 모르잖아.”

“저거 양쪽 팔에 차고 있는 게 특이해 보이는데···.”

대체적으로 여론은 두고 나가자는 쪽이다. 그러나 갑자기 몇 사람의 표정이 확 바뀌고 그들이 앞으로 나섰다.

“아, 잠깐! 이거 우리 사부님이 풀어주라는데?”

“이쪽도 방금 들었다.”

사부님이라는 건 아마 성좌일 것이다.

서너 명 정도가 서둘러 그리 말하면서 여론이 바뀐다.

그들의 배후 성좌가 누군지 들어보니 대부분 불교나 동양 신화를 기반으로 한 성좌들과 계약한 각성자였다.

성좌들이 자기 계약자를 죽일 리가 없으니 결론은 정해졌다. 우리가 우리를 열고 나가의 양 팔에 묶여 있던 구속구까지 풀자, 묵직한 마력이 동굴 감옥을 가득 메웠다.

“이거 우리가 괴물을 풀어준 것 같은데?”

“아니 미친! 이거 최소 특급 보스잖아! 잘 풀어준 것 맞아?”

“하하···. 우리처럼 장비가 하나도 없는 건 저쪽도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당장 그쯤까지는 아닐걸? 그래봐야 까불면 다 죽겠지만.”

당황하는 이들부터 후회하는 사람들이나 순식간에 넘어간 주도권에 허탈해 하는 반응까지 다양하다. 나 역시 잔뜩 긴장해서 그 나가를 바라봤다.

그 난장판을 보던 나가가 자신의 손 하나를 목에 가져다 대고 입을 열자 목소리가 곧장 해석되어 들렸다.

[인간들. 따라와라. 여기서 나가게 해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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