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 설악산 전투
동굴이 보일 쯤 알람이 하나 떴다. 그리고 몸이 살짝 가벼워졌다.
‘아, 100레벨인가?’
지혜가 올라오면서 뭘 했는지, 아니면 청수 길드원들이 열심히 일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반가운 감각이다.
이러면 들어가기 전, 새로 등장할 기술과 특성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도 75레벨대까지 같은 쓸모없는 기술만 있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효용성이 확실했던 특성들과는 다르게 별의 투자자 직업 전용 기술은 애매한 것이 너무 많았다.
지분을 보유한 각성자의 능력치를 잠깐 증폭시키거나 장비 중인 아이템의 성능을 일시적으로 향상한다거나 하는데, 등급 제한도 있고 터무니없는 명성 점수도 요구했다.
그 높은 점수들이 의미하는 게 뭔지 짐작이 가긴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효율이 엉망이다.
기술 1레벨 기준 E급 능력치 1% 정도 증가하는 기술을 발동하는데, E급 각성자 한 명의 장비를 풀 세팅해 줄 명성이 든다면 믿겠는가?
기술 레벨 올려서 최대 레벨을 찍으면 S급과 10%가 되긴 하는데, 들어가는 명성 점수 증가 폭을 보면 말도 안 되는 교환비인 건 마찬가지다.
대략 기술 하나 발동하면 해당 등급 각성자 키우는데 드는 비용의 10% 정도가 들어간다.
‘마치 명성 점수가 남아도는 성좌가 다 죽게 생긴 자기 각성자를 버프 떡칠해서 살리기 위한 기술들 같았지.’
그런 기술들이 대략 10개쯤 됐다.
당연히 전투 특성이나 지난 생에 익히지 못한 기술을 찍을 잠재나 점수도 아까운 내가 그런 비효율적인 기술들을 찍을 이유가 없다.
그 외에도 뭐가 나올지 모르는 모든 기술 중에 무작위로 룰렛을 돌려 기술을 시전하는 등 기괴한 것들이 몇 개 더 있었는데, 그것들 역시 명성을 소비자원으로 했다.
직업 기술에 마력을 소비해 사용하는 기술 자체가 없었다는 말이다. 그게 내가 별의 투자자 직업 기술을 여태 단 하나도 익히지 않았던 이유다.
‘개중에 그나마 쓸모 있어 보였던 게 장비 강화랑 기적이었지.’
두 기술은 75레벨대에 등장했다. 물론, 효율이 똥망인 건 이쪽도 마찬가지다.
장비 강화는 기술 레벨 1레벨 기준 1강부터 확률이 1% 따위였고 실패 시에는 장비가 파괴되는 건 물론이고 시도할 때마다 정신 나간 것 같은 수준의 명성이 나갔다.
‘기술 레벨이 오르는데, 확률이 올라가는 대신 비용이 배로 늘어나는 건, 대체···. 진짜 어떤 놈이 이따위로 레벨 디자인을 한 거냐.’
그래도 성공 시 장비 능력치의 증가 폭은 100%였다.
장비 가치가 두 배로 뛴다는 소리인데, 나중에 정말로 명성이 남아돌면 내가 사용할 용도로나마 써먹을 순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문제의 기적이라는 기술인데, 이건 신앙을 자원으로 소모했다.
하지만 내가 이 기술에 주목하는 건 그게 아니다.
‘그 주의사항으로 적혀있던 게 중요하지.’
그건 ‘일부 기적은 발동에 필요한 신앙 점수가 없을 시 그에 상응하는 명성 점수를 소모해 발동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였다.
이 문구만으로도 이 기술은 추후에 잠재가 남으면 찍어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인터페이스로 넘어와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역시 기대되는 특성 쪽이다. 100레벨 대의 특성은 라인이 나뉘어 있지 않았다.
‘이번 건 전부 찍을 수 있단 소리군.’
75레벨까지 겪었던 것처럼 이전 단계에서 선이 나뉘어서 위로 올라가는 경우, 하나만 택할 수 있다.
반면, 그렇지 않고 위로 올라간 선에 가로줄로 특성이 모두 이어져 있으면 250레벨 이후에 해당 직업을 유지해서 얻을 수 있는 특성 점수와 잠재 소모만 감수하면 특성을 추가로 찍을 수 있었다.
이번에 찍을 수 있는 특성은 차례로 [투자자의 눈(1/5) / 빌드 관리자(1/3) / 주시자의 눈(1/2)]까지 셋이었다.
[투자자의 눈(S / 특성)]
- 소모 잠재 : 2,000(각 단계 당 두 배로 증가)
- 1단계 : 보유 각성자의 현재 및 잠재 능력을 대략 확인할 수 있습니다.
- 2단계 : [대략 -> 완벽히] / 개방된 특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3단계 : 일정 시간마다 선택한 대상(최대 3인)의 숨겨진 특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한계 등급은 당신의 현재 레벨(E급)을 따릅니다.
- 4단계 : 보유하지 않은 각성자의 능력과 잠재 확인이 가능합니다.
- 5단계 : 모든 대상의 현재 능력치 및 특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성을 본 후에 든 생각은 성좌들이 가진 능력이었다. 이 투자자의 눈에 속한 기능 중, 성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3단계를 제외한 전부다.
난 냉정하게 이 특성을 평가했다.
‘4단계까진 무조건. 5단계는 선택.’
5단계는 조금 애매했다. 괴물이나 각성하지 않은 사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같은데, 민간인 중 살려야 하는 사람을 찾는다거나 레이드 공략 때 적의 능력치를 파악하는 등의 쓸모는 분명 있을 것 같다.
다만, 저걸 특성 포인트 하나와 32,000이라는 잠재를 써가면서까지 찍어야 하는지가 고민이다.
그리고 다음 차례인 빌드 관리자는 설명은 짧았지만, 엄청나게 강렬했다.
[빌드 관리자(S / 특성)]
- 단계당 소모 잠재 : 8,000
- 1단계 : 빌드를 미리 찍어볼 수 있는 빌드 플래너를 개방합니다.
- 2단계 : 플래너에 숨겨진 직업 루트를 모두 표기합니다.
- 3단계 : 대상에게 적용된 빌드의 완성도를 평가합니다.
충격에 빠져 몇 번이고 다시 봤을 정도로 그 내용은 믿기지가 않는 것이었다.
‘미쳤다. 이건 정말 미쳤다.’
1단계부터 3단계까지 무조건 다 찍어야 하는 특성이다.
마지막 3단계가 소름이 끼치는 건, 빌드 계획서를 완성해서 제출하면 자동으로 해당 각성자의 잠재력을 가지고 내가 그 몇 할을 끌어냈는지를 평가해준다는 것이다.
마지막 주시자의 눈은 홀로 A급 특성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봤다.
그러나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주시자의 눈에 100레벨 특성 점수를 분배해버렸다.
[주시자의 눈(A / 특성)]
- 단계당 소모 잠재 : 5,000
- 한 달에 한 번, 보유 각성자가 있는 장소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 해당 기능은 시전자 상태에 관계없이 즉시 발동합니다.
- 1단계 : 언제든지 보유 각성자의 현 상황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 2단계 : 보유 각성자의 심리상태란을 관리창에 추가합니다.
주시자의 눈이 다른 것보다 더 좋아서 찍은 게 아니라 당장 필요한 기능이라서다.
‘한 달에 한 번 긴급 탈출 기능을 주겠다는데, 이 상황에서 어떻게 다른 걸 찍나···.’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나’도 보유 각성자에 포함되는지 이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포르세티의 인터페이스를 쓰던 때처럼 360도 이리저리 돌려도 보고 하늘에서 바라보는 평면 구도를 최대한 넓게 끌어보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범위는 좁긴 하지만 미니맵처럼 사용할 수 있겠는데.’
이런 잠입 상황에서는 몹시 유용한 기능이었다.
특성을 닫고 직업기술 창으로 돌아오니 100레벨 기술이 다섯 개방됐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애매한 것뿐이다. 그런데 개중에 딱 눈에 들어오는 특이한 것이 하나 있었다.
‘명성 투척이라니···.’
무슨 돈 지랄도 아니고 어처구니가 없다. 거기에 전문직 계열 주제에 공격 기술이다.
다만, 이게 눈에 확 들어온 이유는 몹시 드물게 몬스터의 자연 보호막을 무시하는 고정 피해 기술이라는 점과 투척하는 명성 수치에 아무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즉, 내가 가진 명성 점수가 무한이면 괴물에게 들어가는 피해량도 완전 관통되어 무한대다.
이런 건 아주 희귀한데, 그런 희소성이 반영되었는지 기술 등급은 무려 S급이었다.
‘특이하게 소모 잠재가 없는 기술이라서 익혀볼 만은 한데.’
거기에 깨알같이 1초간 기절할 확률 1%에, 시전 중 은신 기능이 붙어 있었다.
던지는 순간의 1초도 안 되는 시간이긴 하지만,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건 꽤 쓸모가 큰 기능이다.
기술을 익힌 뒤 명성 1점을 쓰겠다고 생각하며 기술을 사용하자 자연스럽게 검은색 동전 하나가 손에 잡혔다. 시전 대기 시간은 꽤 넉넉한 편이었다.
땅을 향해 던지니 바닥에 살짝 박히곤 사라졌다.
거기까지 하고 주시자의 눈 특성으로 생긴 화면 기능만 반투명하게 띄워둔 채, 나는 문제의 동굴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견했을 때는 분명 순찰 도는 놈이 있었는데, 자주 사용하는 통로는 아닌지 당장 입구 근방에 돌아다니는 어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곧 그 이유는 알 수 있었다.
‘배수로인가.’
양 측면에 난 홈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와 내가 들어온 이곳 아래로는 낮은 절벽과 계곡이 있는 것을 고려하면, 공사 중 지하수 따위가 터진다거나 폭우가 쏟아지는 걸 대비한 배수로 역할이다.
하수도 역할도 겸하는지 수로를 따라 풍겨오는 악취만 빼면 동굴 초입부의 이동은 꽤 편했다.
네 개의 제비 중 내가 가장 쉬운 걸 잡은 건 분명했다.
여길 다 올라갈 때까지는 천장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에서 간혹 떨어지는 물방울만 피하면 될 것 같다.
‘은신을 익혀뒀으면 좋았을 텐데.’
떨어지는 물방울을 피하다 보니 다시 피어오르는 아쉬움이다.
은신과는 달리 레인저의 위장은 방향에 따라 바뀌는 보호색 같은 거라 몸에 떨어진 물방울의 움직임 같은 것까지 숨겨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암살자의 은신도 바닥에 찍히는 발자국이라거나 물리력의 흔적을 없애주진 않지만, 그건 적어도 몸에 물방울이 떨어지면 그것까지 전부 은신 대상으로 보고 바로 흔적을 지운다.
‘시선이 닿으면 멈춰 설 필요가 있지.’
위장은 근거리에서 볼 때 움직여버리면 위화감이 생길 수 있었다. 암살자완 달리 레인저들이 이런 좁은 구조의 잠입은 꺼리는 이유다.
달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아 올라가는 동굴 구조를 따라가니 돌 조각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삼거리가 나왔다.
‘좌측에 넷. 우측에 여섯.’
전방으로 화면을 움직여 시야를 슬쩍 돌리자 두 명씩 짝을 지어 이동하는 순찰조가 보였다. 여기서부턴 최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계획을 아주 잘 짜야 했다.
그리고 멀리서 놈들 뒤를 따라가다 돌아오기를 몇 번, 통과할 각이 보였다.
‘오른쪽으로 통과해야겠는데.’
좌측은 2교대고 우측 방면은 3교대로 돌고 있는데, 원래는 우측 통로의 거리가 좀 길어서 그리 배치된 것 같다.
세 조가 빡빡하게 돌아가며 돌면 통과할 틈이 안 나왔을 텐데, 우측 통로에 자연적으로 생성된 자연동굴이 있었고 그쪽 어인들은 두 개 조만 돌면서 한 조는 번갈아 가며 쉬고 있었다.
그렇게 어인 분대 정도가 경계 중이던 첫 무리를 통과해서 나아가자 막다른 장소가 나왔다.
‘우측에 경계가 약한 이유가 있었나···.’
여기 막다른 장소는 각성자들을 가둬둔 곳이었다.
다만, 개중에 등급이 높은 인물은 없어 보였다.
열에 일곱은 피투성이인데다 팔다리의 힘줄이라도 잘라 놨는지 손목과 다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치료조차 제대로 안 된 것 같다.
‘이러면 서포터부터 찾아봐야겠는데.’
나는 지금 저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상태였다.
방 한가운데 박혀있는 토템 때문이다.
각성자들은 마력으로 스파크가 튀기는 우리 안에 갇혀서 고개를 푹 숙인 채 잠들거나 기절한 상태였다.
그래서 서포터로 추정되는 인물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토템 근처로는 가지 않는 게 좋겠고 간수도 기다려야겠지.’
화살을 날린다면 우리를 부수는 건 일도 아니지만, 그러면 바로 들킨다.
분명 주기적으로 상태를 확인하는 간수가 있을 거고 제물을 바쳐야 하는 걸로 보이니 사람을 빼내기 위해 열쇠도 가졌을 거다.
나는 토템에서 바닥을 타고 흐르는 불길한 기운을 피해 구석에 자리 잡고 은폐한 채 간수가 순찰하러 오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