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 동해안 사태
그렇게 의심스럽지만 당장은 뭘 할 수 없는, 그런 내용을 미뤄두고 이번에 특성 추가로 열린 기능을 살펴보려는데 포르세티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펠릭스가 내일쯤 너희 나라에 입국할 거야. 대충 이틀 정도면 거기 방어선에 도착하겠네.]
[생각보다 빨리 오는군요?]
이 속도면 비공정이 아니다.
비행기를 타지 않고는 불가능한 속도다.
[지혜랑 네 이야기를 좀 했는데, 흥미를 보이더라고.]
[지혜 쪽입니까? 아니면 접니까?]
내 쪽이라면 아마도 빌드의 문제다. 그리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지혜 쪽이라면 그쪽 길드 내부 문제로 이적 요청일 수도 있겠다.
[네 쪽인 것 같아. 지혜가 특정 상황에서는 특급이라는데도 심드렁한 표정이었는데, 빌드를 만든 게 너라고 말하니까 이것저것 물어오더라. 그래서 직접 만나보라고 했지.]
[펠릭스는 이미 완성형이니 빌드 자체보다는 그걸로 전투하는 것에 있어 뭔가 불편하다거나 하는, 그런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겠군요.]
[그렇겠지? 아무래도 지금 나랑은 데면데면해서 정확한 걸 말해주진 않더라.]
아직 어색할 법도 했다. 포르세티와 오딘의 거래는 계약의 인수가 아닌 모든 권리를 양도하고 발생하는 비용을 이쪽에서 처리하기로 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고위 성좌에서 하위 성좌로 거래될 때 주로 쓰는 방법이라는데, 확실히 합리적으로 보인다.
‘현명하네.’
계약 시 약조한 내역이 차질 없이 지원되는 한, 성좌가 바뀌었다고 각성자 쪽에서 계약을 파기할 방법은 없다.
그래도 급이 떨어지는 성좌가 주인이 되면 당연히 암암리에 불이익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건 그걸 피하는 방식의 계약이었다.
다만, 그런 조치를 했다고 해도 펠릭스로선 이제 자신을 관리하게 된 것이 결국 포르세티인 셈이니 급이 떨어진 기분일 거라 그리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지금은 너희 쪽을 주시하고 있다 보니 펠릭스의 문제는 아직 파악하진 못했어. 지금 남은 잠재력이 얼마인지는 자료 보내줄게. 어쨌든, 혹여 네가 죽을지도 모르니 그전에 만나 보고 싶은 모양이야.]
기억 속 대전쟁을 겪은 내 악착 같은 생존력을 고려하면 지난번처럼 보스를 상대하는 거면 모를까 고작 이 정도 상황에 죽을 것 같진 않지만, 여신의 말대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
[뭐, 본인 문제가 아닌 지인의 문제일 수도 있겠죠. 뭐가 됐든 만나봐야 알겠네요.]
[어쨌든, 너보고 길드 소속 빌드 전문가냐고 묻더라. 지금이야 작은 길드에 들어갔지만, 이전에는 그런 거 아니었고 정체도 잘 모르겠다 하니까 만나봐야겠다고 하던데?]
이것까지 들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짐작이 간다.
‘각 길드의 연구자들이야 빌드 수집에 열을 올리니까. 그런 되지도 않는 것으로 펠릭스의 빌드를 노렸나 보군.’
정확히 어떤 이유로 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빌드 문제라면 나는 자신 있었다. 그리고 펠릭스가 정말로 그 시간 내로 온다면 양양 공략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난 좋은 소식을 뒤로하고 다시 새 인터페이스에 집중했다. 상점을 선택해 들어가자 곧바로 화려한 광고창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지구와 달리 성좌 사회에서는 기독교도 활발하게 활동 중인 건가?’
가장 큰 광고판에 자리 잡은 것은 지구에서의 활동이 작은 기독교 계열이었다. 좋고 잘 보이는 위치에 있는 건 대개 각 신화의 세계적인 영향력 순인 것 같다.
길드 숙소 방에 누워 이것저것 클릭하다 보니 몇 가지 특이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 성좌도 광고를 낼 수 있군.’
내가 처음에 시도했던 스팸 메시지는 정말 무식한 방법이었나 보다.
그런 작은 광고를 낸 것은 별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성좌였다. 그런 만큼 이런 구석진 창에 올라오는 배너는 그리 비싸지도 않을 것이다.
상점창 내부에 AD플래너로 넘어가면, 광고 영상의 시청으로 해당 세계관 관련 소소한 할인 쿠폰을 얻는다거나 배너를 구매한다거나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특기할만한 점은 각 지역 특색에 맞춘 화려하고 이색적인 장비의 수요가 몹시 많아 보였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품절이라는 표시와 함께, 하단에 해당 장비를 제작한 것으로 보이는 성좌의 연락 코드가 적혀있었다.
‘하긴. 스킨은 못 참지.’
성좌들도 그건 마찬가지인가보다.
상점에는 성좌들이 임무 보상으로 내려주는 갖가지 장비, 장신구, 물약, 소모품부터, 업적 상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성좌들만 줄 수 있던 특수한 전용의 특성들까지. 대부분 명성 점수만 있으면 구할 수가 있었다.
그 장비 상세 정보를 확인하며 어떤 식으로 사용할지, 누구에게 주면 좋은지 따위를 정리하다 보니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갔다.
‘유물은 내가 판단을 잘못한 건가?’
유물이나 성물이라 불리는 물건 매물은 낮은 등급의 것들 외에는 전부 문의하라는 문구나 명성 점수가 아닌, 작은 숫자라도 신성을 그 구매 재화로 하고 있었다.
이래선 유물과 성물을 구매한다는 생각은 그저 망상일 뿐이다.
‘아니. 아니야.’
다르다. 이걸로 이전과는 분명 달라졌다.
‘이 기능이 있다면 이전과 달리 유물과 성물의 성좌들 사이에서 도는 그 가치를 가늠할 수가 있다. 성좌들과 내 정보 격차는 크게 줄어들었어.’
상점에 올라온 유물, 성물의 상세 정보를 기반으로 그 가치를 분석하면 된다. 지금처럼 컨설팅을 통해 성좌들 사이에 도는 이야기를 수집해 정리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에 값이 없는 물건은 없다.’
그건 설령 신좌들이 기적을 발하기 위한 힘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명성 가지곤 구매할 수 없다면 그건 그저 지불할 명성이 부족했을 뿐인 거다.
‘명성으로 안 된다면 지구에서의 무형의 가치나, 혹은 각성자의 지분 같은 걸로 거래하면 된다.’
그리고 이런 가치에 대한 정보 수집은 다른 두 개의 능력, 스타넷이나 성좌 도구로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이게 옳은 선택이다.
내 눈은 이제 상점창과 광고를 넘어 경매장 버튼으로 향했다.
[다음 경매는 7일 후에 개최됩니다]
경매장은 검은 화면에 그런 간단한 문구만이 나온 상태로 나를 반겨주었다. 경매 등록이라는 인터페이스도 있었는데, 경매 주최 측에 제안서를 보내는 형식이었다.
다양한 물품이 올라와 입찰 기한이 있고 언제든지 구매할 수 있는 그런 편리한 인터페이스일 거로 생각했는데, 상설로 열려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고풍스러운 디자인도 그렇고 뭔가 좀 고급진 느낌이다.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건 올라올 물품이 별로 없을 경우일 텐데, 아마 심사기준이 엄격한 거겠지. 물건 대부분은 상점에 직접 올릴 수도 있고 흥정도 가능했으니까.’
이걸로 확인할 것은 전부 확인했다.
나는 미리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던 장비와 장신구의 구매 버튼을 눌렀고 구매한 물건들은 프로필에 등록된 창고 주소가 없다는 말과 함께 임시 보관함에 저장되었다.
“혹시 창고 같은 것도 구매가 가능한 건가?”
열심히 손을 놀리며 상품 검색으로 확인해보니 건설 항목과 대여 항목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건설 항목 같은 경우는 구매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있었는데, 구매 조건에 방주라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세계관이 보유한 토지 따위가 필요한 모양이다.
그래도 창고 대여는 써먹을 데가 있어 보인다.
‘일반 식품 같은 건 아무리 찾아봐도 카테고리에 없지만···.’
아무 효과가 없는 상품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놀랍게도 꽤 평범한 느낌의 식품이 있긴 있었다.
대개 그런 직종의 성좌가 판매하는, 소소한 버프를 주는 것들이 있었다.
다만, 저것들로 길드를 먹일 걸 전부 구매하려면 창고 대여 비용도 그렇고 나가는 명성 점수로 허리가 휘청일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대전쟁 시기로 가면 급할 때 주변 팀원들을 먹일 정도는 되어 보인다.
“그리고 지구로 가져오는 건 이런 식인 건가. 앞으론 가져오는데 드는 명성 점수도 고려해야겠네. 지분이 있으면 보유 각성자로 인정되는 것 같고···.”
임시 보관함에서 물건을 어떻게 보내나 했는데 성좌들이 임무 보상으로 보낼 때와 물건이 등장하는 방식이 같았다.
보유한 각성자를 지정하고 배송을 하면 허공에서 물건이 등장했다.
물론, 장비 등급에 따라 명성 점수가 추가로 나가는 것도 같았다. 혹시 구매 대행 사업 같은 걸 할 수 있을까 했는데, 어림도 없다는 느낌이다.
‘꼼수는 없단 말이군. 특성으로 인한 할인율 가지고도 장사는 어렵고.’
난 쓴웃음을 지었다.
일전에 포르세티만 해도 자신은 상점가에서 10%의 할인을 받는다며, 은근슬쩍 자신과 협력하는 것의 장점을 내게 어필했었던 적이 있다.
‘그래 봤자 물건 내게 보내줄 때 거래 수수료라며 전가했던 금액을 생각하면···.’
그때 거래 수수료라고 떠넘긴 게 7.5%였다.
내가 직접 구매하는 것과도 이제 큰 차이가 없다.
‘뭐, 오딘쯤 되면 할인율이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 특성에서 말하는 최대치 25%가 그 최대 할인율일 것이다.
훗날 레벨이 올라 그쯤 되면 일반 성좌들 대상으로는 대리 구매 사업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그런 거래를 받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아마도 성좌들 자존심이나 정치적 문제거나 하겠지.’
어쨌든, 이번 구매로 내 전체적인 스펙이 크게 올라간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다음날, 호출을 받아 금성 주둔지로 가자 내 플렉스를 알아본 건지 서이수도 그걸 언급했다.
“못 보던 장비네?”
“아. 이건 성좌님이···.”
“잠재력이 진짜 제대로 있긴 있나 봐? 장신구까지 풀 세트로 챙겨준 걸 보면?”
“뭐, 지난번에 그 화살 생각하면 괜찮은 신인이 나온 건 분명하지.”
옆에서 들려온 말에 난 이미 회의실 테이블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대략 열 명 정도의 인원이었고 난 눈썰미로 이들이 정찰, 정보 수집 따위의 임무를 전문으로 맡는 직군이라는 걸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화살 언급을 하는 걸 보니 그 비공정에 타고 있던 각성자들임은 틀림없다.
“뭐, 간 덩이 하나만큼은 확실히 큰 건 알겠던데! 그 적진 한복판을 가로질러서 설악산에 정찰 나와 있었다며?”
“아무리 고위 유물이 있다고 해도 종합 등급은 고작 C급이라던데. 단독 정찰이라니, 간이 크긴 크지.”
“저희 길드 작전 지역 때문에 설악산 상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죠. 우연이 좀 겹쳤습니다.”
“그게 좋다는 거야. 우리도 여기 도착하자마자 다 알아봤다고. 하라고 준 임무가 아닌데도 대충 될 대로 되라 면피하는 게 아니라 기회를 잡기 위해 꼼꼼하다는 거니까. 딱 정찰대나 정보부에 어울리는 인재지.”
“들어보니까. 순간적으로는 A급에 준하는 실력을 낼 수 있다던데. 맞나?”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데 서이수가 손뼉을 치며 주의를 집중시켰다.
“자자, 정찰 직군들! 직업병 때문에 정보 수집에 열심인 건 알겠는데, 다들 소개나 좀 하고 시작해요?”
“그러지. 난 이번 임무에서 대장을 맡게 된 이성훈이다. 이중에선 유일하게 A급이고 빌드는 암살자 쪽이다. 더 궁금한 게 있다면···.”
“그건 직접 알아보죠.”
“직접 알아보도록.”
거의 동시에 내뱉은 말에 이성훈은 씩 웃어 보였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군.”
“난 정찰 1팀장을 맡을 유수화야. 대충 B급과 A급 사이 정도로 평가받아. 가면서 서로 협조할 일 많을 텐데, 그럼 2팀장? 잘해보자고?”
“제가 2팀장입니까?”
내가 서이수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네가 종합 C급 평가라지만, 순간적으로는 A급이라는 거고 그러면 어지간한 B급보다 낫겠지. 대장은 맡기 힘들어도 팀장 정도는 충분하니까. 다만, 네가 데려갈 B급 중에서 좀 불만 가지는 녀석들이 있을 것 같은데···.”
서이수와 두 간부 시선이 하루 새 화려해진 내 장비로 향했다.
“저 정도 장비면 좀 무시하는 놈은 있어도 대놓고 시비 털지는 않겠는데.”
“확실히 그렇네요. 그리고 최대한 성격 괜찮은 놈들로 몰아넣을 거니까, 괜찮을걸요?”
“그런데 부팀장이 김지성 그 자식이잖아. 그놈 엄청 말 안 듣는다고.”
“그런데 직군 간 알력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거 알잖아요. 암살자랑 궁사 맞추려면 지금 선택지가 없어요. 그렇다고 금성 길드장님이 청수 길드랑 친분 다진다고 경력 챙겨주시려는 건데, 이걸 내 밑으로 넣을 수도 없는 거고.”
“차라리 부대장은 어때? 내가 낙오되거나 죽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이성훈이 슬쩍 서이수의 눈치를 보는지 눈을 굴리다 내뱉었는데, 이건 좀 무리수다. 당장 자신의 상관급으로 올린다는 말에 유수화부터 얼굴을 찡그렸다.
주변의 다른 간부진 급도 표정이 떨떠름했다.
살짝 싸해진 분위기에 서이수가 빠르게 정리를 했다.
“됐어. 그렇게까지 멋대로 끌어올리면 나중에 말 나올걸? 애초에 부대장은 A급이 맡아야 하는데, 당장 급도 안 맞잖아? 두 단계를 뛰어넘을 순 없지. 김유성. 2팀장 자리, 잘할 수 있지?”
“충분합니다. 그리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그 말을 망설이지 않고 담담하게 받자 분위기가 다시 화기애애하게 풀렸다.
‘김지성이라···.’
프로필 사진에 적힌 건 아주 그리운 얼굴과 이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회귀 전 나의 옛 상관이다.
능력치는 대전쟁 기준 A급 평가였지만, 유물이나 전투 센스 등을 고려한다면 S급이란 평가를 받았던 암살자 계열의 각성자다.
워낙 말도 없고 과거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던 사람이라, 설마 이 비공정 추락 사건의 몇 안 되는 생존자였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당연하지만 친해질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출발하기 전에 팀원들 안면이나 최대한 익혀 놔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