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 동해안 사태
정신이 들었을 땐, 하늘 위였다.
그리고 눈앞에는 검진표로 보이는 검은 받침대에 뭔가 쓰고 있는 금성 길드장이 있었다.
“정신이 드니? 바이탈 보니까 슬슬 깨어날 것 같더라.”
“해룡은 이겼습니까?”
“이겼으니까 이렇게 설렁설렁 날고 있겠지?”
확실히 비공정의 움직임은 안정적이다. 비공정 내부의 의무실인지 나 말고도 열댓 명의 헌터들이 침상 위에 기절한 듯이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부상자가 적군요.”
“거의 하루가 꼬박 지났는데 경상자는 당연히 다 치유하고 퇴원해서 놀고 있지. 양팔이 결딴난 너처럼 여기 있는 녀석들은 최소 어디 한군데 제대로 당한 녀석들이고.”
서이수 길드장의 말을 듣고 팔을 움직이려 들자 칼로 쑤시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딱 봐도 무리한 기술 억지로 썼던데. 블랙 말로는 레인저 계열 최종 기술이라 하고?”
“250레벨이 되어야 찍을 수 있는 기술이긴 하죠.”
레벨업으로 모이는 포인트를 따로 아껴둔 것이 아닌 이상, 이 기술의 최대 레벨을 찍으려면 레인저 한 길로만 350레벨은 되어야 했다.
마스터할 경우, 아스트룸의 엑스트라 기술, 아스트라가 열리게 된다. 결사대 랭킹 2위였던 신궁이 그 여덟 발의 화살을 연달아 쏴 날리던 그 장관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 그걸 보고 그 많은 기술 중 이걸 첫 최종 기술로 택했지.’
정작 기술 마스터할 능력치는 안 돼서 최종 기술은 이것저것 얇고 자잘하게 익혔다.
그런데 지금 상황을 보면 오히려 그게 더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블랙은 네가 갓 각성했을 리가 없다는데. 맞아?”
“아뇨. 그때 각성한 것이 맞습니다.”
“헤-, 반한 여자한테까지 너무 인색한 거 아닐까?”
지금 이 여자가 뭘 기정사실로 하려는 건가?
나 자신의 평판과 체면을 위해 곧장 반박했다.
“···설마 그게 진심이었습니까?”
“어? 뭐야! 이거 좀 기분나쁜데? 객관적으로도 나 정도면 반할 만 하지 않니? 뭐, 길마라고 하면 이미지가 늙다리 같긴 하지만, 난 나이도 어린 편이고 돈도 많잖아. 거기에 예쁘고 네 생명의 은인이고?”
그리 말하며 얼굴을 내 쪽으로 확 기울이며 들이민다.
객관적으로도 상당한 미인에 10대 길드장 중 유일한 홍일점인데다 거대 길드의 수장인 만큼 그 매력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는데, 금성에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다.
아까처럼 순간적으로 감사와 안도의 감정이 확 쏠리는 상황, 내가 지금 실제 나이처럼 어린 편이었다면 운명이라고 느낄 만도 했겠다.
회귀 전 기억이 없었다면 뭐, 두근거렸을지도 모르지.
이번에 직접 대화를 나눠보게 된 금성 길드장의 인상은 자기가 가진 무기를 잘 활용하는 여우 같은 여자라는 느낌이다.
물론, 정말로 이 여자와 깊은 관계가 된다면 갖춘 능력도 그렇고 금성이 가진 힘도 있으니 시간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을 테고 그보다 더 좋을 순 없겠지만, 딱 봐도 그런 건 아니었다.
‘눈만 봐도 그 정도 쯤이야···.’
보면 딱 봐도 진심이 아닌 게 느껴진다.
회귀 전 기억까지 내 인생으로 친다면, 나도 그걸 판단할 정도는 살았다.
내가 흔들림 없이 차분하게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하자 결국, 서이수는 혀를 차며 물러났다.
“재미가 없네. 신입 특유의 풋풋한 맛이 전혀 없어! 블랙 녀석 의견에 공감하긴 싫지만, ‘갓 각성한 것 아니다’에 이 누나도 한 표!”
“어. 음. 누나···? 원래 이런 식으로 영업하십니까?”
“왜, 미인계 쓰니까 좀 그래 보여? 사업에 그런 거 가려가면서 어떻게 성공하겠어.”
“공감은 합니다만···. 뭔가 치사한 느낌인데요.”
“원래 이런 건 이용할 건 다 이용하는 거야. 우리 길드 미인, 미남계 성공률은 10대 길드 중 압도적 1위지! 우리 친애하는 적폐들이 매번 나한테 찾아와서 발작하지만, 지들이 사랑한다는데 어쩌겠어.”
그때, 문이 열리며 블랙이 안으로 들어왔다. 하품하는 것이 몹시 지루해 보인다.
“말로는 적폐 아니라더니. 이제 인정하는 거냐?”
“틀린 말 아니잖아? 나 빼고는 다 적폐 맞지. 명준 오빠도 몇 년째 지만 계속 1등이야? 거 적폐네 적폐.”
“됐다. 내가 보기엔 이 녀석은 물어보면 답해줄 놈 같은데, 유도신문이나 네 되지도 않는 미인계 같은 건 집어치우자고. 그래서. 설명은?”
“신좌님께 받은 성물의 힘입니다.”
쓰고 나면 질문이 나올 건 뻔했기 때문에, 이번엔 변명을 준비해 뒀다.
“뻔하지만, 그럴 리 없다고 말하긴 어려운 답이군. 하지만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
“능력치야 그걸로 올렸다고 치지만, 기술을 익히려면 레벨을 올려야 할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짧은 시간에 올릴 수 있는 레벨이 아니다. 그걸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잘 아는군.”
“그건 고유 특성입니다. 이걸로 충분히 설명되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고유 특성. 그래서 성물을 받았다? 말은 되는군. 그러면 네 재능이 그 정도라는 건가? 이건 지금 각성 당시 순수 능력치 측정상으론 D급 하위권이었던 네가 특급 잠재력을 가졌다 주장하는 건데?”
“안 될 건 없지 않겠습니까?”
침묵이 흘렀다. 내 말대로 그런 예시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초기 능력치 E급에서 S급이 된 사례도 찾아보면 있긴 있었으니까.
아카데미가 각성자 육성의 기본이 되면서 그런 재능들은 중간에 테스트로 대부분 다 확인이 되니까 요즘은 잘 나오지 않을 뿐이다.
블랙은 피식 웃고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뭐, 상관없겠지. 지금까지의 인상으론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으니까. 너, 알아보니까 길드에 들어갔던데. 그 길드로 좋은 소식 있을 거다. 선물이야.”
“뭡니까?”
“난 히어로라 어차피 내 몫은 다 국제 영웅 협회로 들어가거든. 그리고 그중 일부가 활동비로 적립돼. 그게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돈도 아니고 이미 내 활동비는 넘치니까. 뭔 말인진 알지?”
무슨 말인지 알겠다. 블랙은 이번 해룡전의 자신의 공을 줄여서 그 일부를 내 몫으로 넣어주겠다는 거다.
“해룡 저거 지금 추정으론 사체 값만 못해도 4천억 정도가 나올 거라니까. 세금 떼고 참여한 인원들 여기저기 분배하더라도 그 몫이 절대 작진 않을 거다.”
“대형 괴수라서 그런지 확실히 돈이 많이 되긴 하네.”
“그보다는 저거 체내의 전격 기관이 거의 반영구기관이라서 값이 빵튀기 된 거라고 하던데. 이 경우는 연구 목적이건 실용성이던 부르는 게 값이겠지.”
“고맙습니다. 사양하지 않고 잘 쓰죠.”
그 정도 금액이면 한창 길드를 키워야 할 시기에 단비 같은 수입이 될 것이다.
이걸로 자칫 지혜가 활약하면서 작아질 수 있는 길드 내에서의 내 입지도 잘 유지될 것이고 특히 내가 주장했던 비공정 구매에도 청신호가 켜진 셈이다.
“너. 이름. 김유성이었지. 기억해 둘 테니까 잘 커서 함께 일하는 날이 오길 빌지. 난 바로 고성으로 날아갈 생각이라, 먼저 떠날 생각이다.”
블랙의 마지막 말은 내 방향이 아니라 서이수 쪽으로 고개를 틀어 내뱉었다.
“네 태양 까마귀. 그거 재소환까진 꽤 걸릴 텐데?”
“설마 내가 그 정도를 못 버티겠냐.”
“그건 그러네. 나도 부상자들 후방에 내려주고 곧바로 따라갈 테니까. 죽지 말고 잘 막고 있어. 이거 왠지 잘하면 각이 나올 것 같네.”
“그래. 긍정적인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긴 해.”
그렇게 블랙이 떠나고 난 문득 떠오른 것을 서이수에게 물었다. 당사자인 나도 모르는 빚을 그녀가 내게 졌다는 게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빚이라는 건 또 뭐였습니까?”
“아, 그거? 네가 특급 두 명 추천해서 우리 길드에 보냈다며. 그거 갚은 거야. 아니었으면 내가 거기서 그 개고생 해가면서 생판 남인 널 구하진 않았겠지?”
“두 명···?”
최서린이야 확실히 그런데, 강소연 같은 경우는 대전쟁을 기준으로 해도, 지금을 기준으로 하더라도 A급을 벗어날 수 없다.
지금 기준으로면 S급에 가까운 A급이고 대전쟁 기준이면 A급 중 약한 정도다.
“너 아니야? 내가 알기엔 네가 확실한데.”
“강소연, 최서린씨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아, 그러고 보니 넌 소연이가 B에서 A급으로 알고 있었겠네. 내부 측정으로 잠재는 확정 A+급으로 판정이 났어. 내 빌드 태우면 특급 찍고도 남을 거야.”
그 정도라면 기존 정보가 잘못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강소연은 빌런 조직인 붉은달에 들어가는 바람에 성좌의 집중 관리나 지원을 거의 못 받았는데도 A급 빌런 취급을 받았지.’
확실히 지난번 만남을 생각해보면 강소연은 자기 빌드에 대한 고민이 하나도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가 그 중요한 빌드를 생판 모르던 타인인 나한테까지 도움을 받으려고 할 정도였으니까.
빌드 대충 찍었는데 A급 빌런이 됐다는 소리다.
“잘 됐군요.”
“그래. 이걸로 그 빚 갚은 거다?”
“그 정도면 목숨 값이라 쳐도 셈이 좀 남는 것 같은데요.”
“그도 그러네. 뭐 해줄까? 데이트?”
“장난은 그만 하시죠.”
“그럴까? 하지만 나랑 데이트하는 게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 얼마나 대단한 제안을 하려고 이걸 거절하는 건진 모르겠네.”
그녀의 말대로 일반적인 헌터들의 입장에선 절대 나쁜 조건이 아니었다.
이 제안은 단순히 한 번 데이트하자는 게 아니다. 아까의 도발과 이어지는 것이다. 가볍게 사귀자는 의미였다.
서이수는 내 잠재력을 알았으니 바로 옆에서 영입을 지속해서 시도할 수 있다는 목적을 이룰 수가 있어서 좋다.
나도 그것으로 한국 최고 서포터와 함께 언급되며 여기저기 이름값이 올라가는 효과를 누릴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잘 알려지지 않으면서도 헌터계 내에서는 암암리에 알려진 실력자 정도를 노리고 있기에 전혀 필요가 없는 혜택이었다.
“뭐, 좋아. 그럼 그쪽이 원하는 걸 말해봐요.”
“부탁드리고 싶은 건, 전쟁 끝나고 대규모 게이트가 생성되면 저희 길드를 금성에서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그 특급 두 명을 인연이 아니라 빚으로 생각해 청산하시려 든다면, 그 잔여분으로 이 정도는 부탁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내 말을 들은 서이수는 조금 전까지의 장난스러운 얼굴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업가의 표정이 되었다.
“글쎄. 네가 뭘 원하는지는 알겠는데, 난 능력주의자라서. 개중 하나로 데려갈 수야 있지만, 적재적소에 쓸 뿐이지 특별히 특혜를 주거나 하진 않을 텐데? 네 잠재력이야 알겠지만, 너희 길드가 그 정도 능력이 되겠어?”
“그건 이번 전쟁에서 지켜보시죠. 아마 실망하진 않을 겁니다. 이 전쟁으로 떠오르는 최고의 신예는 저희 길드가 될 테니까요.”
서이수도 유지혜가 이번 동해안 사태 동안 하는 짓을 보고 나면 생각이 바뀔 거다.
그리고 그걸 보여줄 기회는 아주 빠르게 찾아왔다.
정비를 마친 비공정과 금성 길드장이 고성으로 다시 떠나려고 할 때, 인제 방면 방어선으로 죽음의 군단과 어인 병력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어수선한 느낌이네요.”
“블랙하고 서이수 길드장이 적 지휘관으로 예상되는 해룡을 요격해서 잡았으니까.”
“지금 자랑하는 거 맞죠?”
“난 아직 환자니 입이라도 털어야지. 그러는 너도 여기서 실력은 제대로 보여줬다면서.”
“아직 주력기는 써보지도 못했는데요.”
내가 설악산에 올랐다 돌아오는 동안 벌써 몇 차례 성벽 위에서 어인 병력을 향해 랩터를 잡을 때 선보였던 마르스를 쏴 날리며 실력을 보여준 모양이다.
청수 길드는 확실하게 아군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좋은 위치에 배정을 받았다.
그때와는 위력도 사거리도 극적으로 변한 만큼, 10여 분마다 한 번씩 저 멀리 날아가 일대의 뭉쳐있는 괴물들을 쓸어 버리는 기술의 존재감은 적에게도 아군에게도 압도적이었다고 전해 들었다.
[저 정도 숫자면, 이번에는 확실히 보여줄 수 있겠네.]
[그렇겠죠.]
본격적인 명성 벌이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