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 동해안 사태
괴물들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주전장인 강릉 방면에서는 지금도 먹구름으로 어두운 하늘에 폭우가 퍼붓고 수시로 해일이 밀려들고 있다.
강릉에 지어진 요새야 그럴 때마다 서포터들이 합심해서 보호막을 치는 것으로 해일을 막아내는 중이지만, 언제까지고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 있는 지휘부에서 후퇴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도 빠르게 결판을 내지 못하면 상대에게 유리한 전장이라 계속 피해를 강요받기 때문이다.
“지금 공중은 미세하게 우세하지만, 네가 빠지면 그나마도 백중세일 거야.”
“됐어. 목숨 걸 각오도 안 된 놈들 데리고 시간만 죽치고 보내봐야 달라지는 것 없어. 난 고성만 구원하고 빌런 잡으러 갈 거다. 서이수, 나는 상황에 맞춰서 가능한 히어로답게 행동할 뿐이야.”
“고성 돕는 걸로 면피하려고 도망치는 게 아니고?”
“도망쳐? 내가? 아깐 뭐라고 했지만, 석대성 그 자식이 틀린 말을 한 것 아니다. 그놈은 냉정하게 잘 파악했어. 최소한 여기서 시간 끌어봐야 죽도 밥도 안 되는 것은 아는 거지.”
그녀의 도발에 피식 웃은 블랙으로부터 답지 않은 침착한 답변이 돌아오자 서이수는 슬쩍 그를 까려고 생각해뒀던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 상황이면 그놈 말대로 다 버리고 지원 온 후에 싸우든지. 아니면 남쪽이나 북쪽에 피해가 발생하는 걸 감수하고 전력 모아서 놈들과 건곤일척의 결전을 하던지. 둘 중 하나는 해야 해. 전략적으론 그게 맞다.”
“히어로가 그런 말 해도 되는 거야? 넌 당연히 반대해야 하는 것 아닌가?”
“당연한 소릴. 내가 왜 총대를 매냐? 난 히어로니 그런 말 할만한 사람은 아니지. 이 나라 기득권은 너희고 결정은 너희가 내리는 거다. 그러니 겁쟁이들이라고 내게 욕먹는 거고. 금성 길드장님. 악역이면 좀 악역답게 굴자고.”
“싫은데? 왜 내가 나쁜 년이 돼야 하는데?”
“악역도 멋진 악역이 있는 법인데, 너희가 지금 하는 짓은 참···. 돈과 권력은 가지고 싶은데 혹시나 손가락질받거나 손해 입을까 이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선 결단 못 내리고 뒤로 빼지. 아주 꼴이 가관이야.”
매번 듣는 블랙의 기업, 길드 혐오가 튀어나오려는 기미에 서이수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딴청을 부렸다.
“너도 안 맞는 짓 그만하고 히어로나 하는 게 어떠냐?”
“됐어. 인기 있는 건 좋지만 바쁘고 가난해서 싫어.”
즉답에 혀를 찬 블랙은 삼족오라 이름 붙인 제 까마귀 소환수를 불러냈다.
“특급 히어로에게 가난하다는 것들은 너희 10대 적폐들뿐일 거다. 빨리 타기나 해.”
“적폐 아니거든요? 우리 길드 애들 기부천사야. 그리고 얼마나 자원봉사도 많이 하는데!”
“그걸 네가 하는 건···. 됐다. 하여간 한 마디도 안 지려고 한다니까. 공기부터 모아둘 테니까 마력 아끼게 보호막이나 쳐. 먼저 가던 애들 따라잡을 거니까 위로 올라갈 거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풍계 술사 계통인 블랙의 몸 주위로 주변 공기들이 압축되어 주변에 구체처럼 몰려든다. 그리고 그 작업이 마무리되기가 무섭게 서이수가 손을 휘둘렀다.
“그럼 간다.”
두 사람 주변으로 원구형의 보호막이 형성되어 공기를 붙잡는다. 그러자 까마귀가 날갯짓을 해 지면에서 살짝 떨어져 부유한다.
그리곤 그대로 날개짓의 속력을 높여 성층권까지 수직으로 날아올랐다.
“자! 오빠 달려!”
“아니. 애냐?”
“이딴 거 아니면 솔직히 너랑 할 말이 없는걸? 심심하잖아. 기분 좀 내는 거지.”
그렇게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며 고성 방면을 향해 쭉 날아가던 그들은 저 하늘 끝 멀리 꿈틀거리며 날고 있는 거대한 생명체를 보았다.
“야, 서이수. 저거 뭐냐? 우리 뭐 환술 같은 거 걸린 거 아니지?”
홧김에 뛰쳐나왔는데 적의 전략 일부를 우연히 엿보게 된 느낌이다.
블랙 녀석도 황당한지 되지도 않는 헛소리를 했다.
“걸렸겠냐고.”
뭣보다 정신력 특급에 S급 정신방어 특성을 보유한 그녀가 걸렸을 환술이면 인류 중에 그 기술에 안 걸릴 각성자가 하나도 없다.
“딱 봐도 보스몹이잖아.”
구름 위, 몸을 구불구불 뒤틀며 고요한 솜사탕 바다 위를 헤엄치듯 날아가는 그 뱀 같은 형상은,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확연하게 보일 정도로 거대한 해룡이었다.
전선 어디에도 목격담이 없었으니, 아마도 해일을 보내 시선을 가리면서 하늘로 날아오른 모양이다.
제 소환수에게 구름 속으로 숨어들라는 명령을 내린 블랙이 서이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 거냐. 돌아가서 알리고 움직여?”
“지금 우리 위치가 오대산을 막 벗어났으니, 거리상 저쪽은 설악산 초입쯤? 헌터와치 작동할 거리까지 보고한다고 돌아갔다가 오면 놓치지 않을까?”
헌터 와치는 서로의 마력으로 통신을 주고받을 수 있는 근거리가 아니면 마력탑의 중계 범위 내에서만 작동한다.
그리고 강릉은 마력이 섞인 비로 쭉 악천후인 상황이라 기존보다 중계 범위가 낮아져 있다.
동해안에 브레이크가 터진 상황이라 필드화 될 때까지는 일반적인 통신 상태도 몹시 불량할 것이다.
“그래. 그랬다간 정확한 경로는 놓치게 되겠지. 그러면 일단 추격한다 치고 저거 목표는 어딜까?”
“어디긴 어디겠어? 둘 중 하나겠지. 지금 거리 쭉 유지하면서 쫓아가자.”
열에 아홉으로 목표가 고성 아니면 인제 방어선일 건 뻔한 소리다.
“잠깐만.”
“왜?”
“앞선 비공정 선단. 지금 저쯤 지나고 있지 않겠냐? 그리고 거기 전력이면···.”
기본적으로 어인들은 산속에 자리 잡지 않는다. 그건 적 병력 지원이 올 때까지 단독 보스전을 시도할 시간이 있다는 소리다.
보스를 떨굴 수만 있다면, 그래서 산에서 떠나지만 못하게 할 수 있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다.
잠시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은 바로 의견이 일치했음을 알았다.
그들은 특급 보스의 감각보다 조금 여유를 잡는 선에서 구름 속에 숨어 바짝 추격하기 시작했다.
* * *
‘기록대로면 비공정 선단이 추락해서 농성했던 곳은 귀면암 방면이었다.’
여러 판단 하에 미술관 방면에서 북상해 쌍다리 계곡 방면에서 설악산으로 파고들었다.
작전 구역인 갈직교 방면에서 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방향을 잃을 염려는 없지만, 양양에서 이동 중인 적 병력과 불편한 동거를 계속해야 한다.
백담계곡 쪽의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것도 마찬가지로 길을 잃을 염려는 없고 적도 갈직교 방면보다는 적지만, 그 근방에 혹시라도 흔적을 남기게 되면 그쪽 포위망을 뚫고 가야 하는 아군 퇴로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46번 국도로 가는 길에 적이 쫙 깔렸을 텐데, 지금 내 실력으로 여기서 더 올라가는 동안 들키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지.’
그래도 북쪽 계곡과 남쪽의 길에 대놓고 적 병력이 있는 만큼 틀어지더라도 방향을 잡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해가 진 상황도 도움이 된다.
그렇게 한밤중에 하늘을 울리는 소음과 함께 비공정이 설악산으로 날아오는 걸 목격했던 때는 내가 대청봉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여기서 귀면암까지는 약 5km가량.
실제는 그것보다는 더 되겠지만, 그래 봤자 초인들에겐 큰 의미 없는 숫자다.
다시 달려가려던 그때, 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멈춰 섰다.
그리고 그것은 여기서만 느낀 것이 아닌지 양폭대피소 방면 쯤에서 날아가던 비공정도 급히 속력을 줄이는 것이 보였다.
바보가 아니라면 거의 특급의 보스가 내뿜는 기운이라는 것 정돈 느낄 것이다.
다만, 하늘에서의 습격은 전혀 예상치 못하는지 비공정은 이리저리 동체를 회전하며 전조등과 후면등으로 지상을 비출 뿐이다.
‘온다.’
결국, 정전기를 일으키며 번갯불을 튀기던 새카만 구름 속, 푸른색의 무엇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전격을 내뿜는 거대한 뿔이 달린, 비공정의 동체보다도 거대한 해룡의 머리가 보인 것은 일순간일 뿐이었다.
마치, 바다뱀이 물속에서 몸을 튀기듯이 압축되었던 몸이 쏘아져 그대로 비공정 한 대를 치고 지나가며 오랜 세월 일해온 대격변 시절 비공정 모델에 안식을 선사해줬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산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던 해룡의 꼬리는 혼자만 쉬지 말라고 친절하게 옆을 지나가던 다른 비공정 한 대도 후려쳐서 바닥에 떨궈버렸다.
허공에 비공정을 구성하던 파편이 흩날리고 사람이건 짐이건 가릴 것 없이 아무 대비도 되지 않은 상태로 적진 한복판인 설악산 속으로 떨어져 내린다.
‘안타깝지만 끼어들 때는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요 비공정 추락지 위치만을 기억하며 전장에서 멀어지려던 그때, 내 바로 위쪽 구름을 뚫고 집채만 한 까마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얼마 전 좀 무례하게 굴던 익숙한 히어로의 얼굴 하나와 마찬가지로 여러 매체에서 익숙하게 얼굴을 봐왔던 특급 서포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건···!’
절대로 원래 있던 일이 아니다.
애초에 블랙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빌런을 잡던 영웅이었다.
이건 명백하게 변수인 셈이다.
머리가 팽팽 돌아가며 현 상황을 계산해본다.
‘남은 비공정은 다섯 대. 원래부터 공중전에 능한 괴수를 상대로는 쉽지 않겠지만, 애초에 그런 것을 상정하고 만들어진 거지.’
기습이 아니었다면 원래 역사처럼 그리 쉽게 다 박살 날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서포터들이 급습에 제대로 대응할 틈이 없었고 비공정이 제대로 진형을 갖출 틈을 주지 않아서다. 그리고 다들 사기가 떨어지고 혼란에 빠져서 탈출하고 일단 살고자 하면서 생긴 문제였겠지.’
지금처럼 대신 위협을 가해주고 시선과 시간을 끌어주며, 버팀목이 되어줄 자들이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다.
“별의 강화.”
계산을 마친 나는 곧장 나지막하게 기술명을 외쳤다.
‘안혜성 덕분에 힘 능력치는 내 전성기 이상이다. 마력 역시 마찬가지지.’
강화로 올라간 힘 능력치는 현재 A등급이다. 마력 역시 넘쳐흐른다.
그 말은 B등급 시절 막 쏴 날리던 성명 절기의 수준이 아니라 배워놓고도 서포터의 온갖 버프나 도핑 없이는 함부로 쓰기 힘들었던, 자체 제한을 걸어놨던 기술들을 무리 없이 쓸 여건이 됐다는 뜻이다.
‘다만, 활대가 버텨줄지 모르겠는데.’
가져온 것 중 가장 특수한 재질로 만들어진 화살을 꺼내 들어 마력을 집중한다. 과열하기 시작한 화살의 깃부터 타오르고 화살 주위로 피어오른 불꽃이 중첩되며 새빨간 용암 빛에서 점차 주황색으로 변해간다.
물론, 원래라면 완벽한 기회를 잡고 써야 하는 기술이다. 새어나가는 마력 파장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지만, 이 정도 마력이 뿜어진다면 저쪽에서도 아예 눈치채지 못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다른 쪽에 신경을 쓰느라 보스가 상대적으로 노리는 것을 신경 쓰지 못 하길 바랄 뿐.
다행히 공중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전투로 보스가 이쪽을 신경 쓰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자기 몸에는 자신이 있는 거겠지.’
블랙은 허공에 거대한 바람의 팔을 만들어 마치 지니라도 된 것처럼 해룡을 잡아 바닥에 찍어 누르려고 시도하는 중이다.
그의 까마귀 역시 특급 소환수라는 명성에 걸맞게 허공에서 내리찍는 꼬리나 뿜어내는 뇌격을 곡예비행으로 깔끔하게 피하면서 되려 불타는 검은 깃털을 날려 조금이지만 뚫린 비늘 사이로 피를 흘리게 하고 있었다.
비공정들도 그쯤 돼선 전열을 수습한 뒤, 까마귀를 상대하며 틈틈이 날리는 해룡의 뇌격이나 주변에서 생성한 수압 칼날을 깔끔하게 요격하고 있었다.
그 사이, 점점 과열되고 중첩되는 마력에 화살은 노란빛을 발하고 있다.
주변으로는 마력 아지랑이가 피워 오르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딱 이 단계에 오기 직전쯤 마력 탈진이 다가와서 쏴 날려버렸겠지만, 지혜와 동급이 된 마력은 아직 여유가 있다.
이 기술은 마력을 충전하면 할수록 강해진다. 화살은 어느덧 노란빛을 넘어 백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다만, 화살을 들고 마력을 집중시키는 내 팔도 계속 무거워지는 화살의 무게가 부담되기 시작했다. 몇 번 이 기술을 써봤지만, 이런 현상은 나도 처음이었다.
‘A급의 근력으로도 버티기가 힘든 건가?’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마력이 급격히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청백색으로 변하려는 화살이었지만, 이대로라면 마력이 다 빨려 탈진이 온다. 그리고 그건 여기선 자살행위 그 자체. 나는 어쩔 수 없이 마력 주입을 멈췄다.
레인저 계통 250레벨대 최종 기술의 하나, 아스트룸이 쏘아질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