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 폭풍속으로
끼워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는지, 최서린이 밝은 표정으로 다가온다. 이야기가 길어진 걸 보니 강휘성이 이것저것 주의사항을 이야기한 모양이다.
“뭐야, 쟤들이 뭐래?”
최서린은 내 얼굴을 보더니 미간을 구기며 질문해왔다.
표정 관리가 안 됐던 모양이다.
“별일 아닙니다.”
감정이 추슬러지지 않아서 그런지 내뱉는 말에는 약간의 무력감이 담겨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대한민국은 상대적으로 낫다고 하지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포칼립스에 준하는 사태를 세 번이나 겪은 세상이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주요 도시들은 치안이 괜찮고 인권도 상당히 보장되지만, 지방으로 가면 망한 나라에서 몰려온 불법 체류자들이나 난민들로 북적인다.
사람이 그리 귀하지 않은 세상이고 경제는 군사 경제와 게이트 산업, 그리고 건설 산업 위주로 돌아간다.
“아니긴 뭐가 아니냐. 목소리가 뚱한데. 저 인간들한테 뭔 소리 들었나 보네.”
최서린은 내 옆에서 관리국이 이래서 싫다. 어떻다. 그리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히어로나 관리국의 힘이 강한 건 그럴만 하다. 전 세계적으로 빌런 조직이 계속 생기고 사라지는 이유는 몹시 단순했다.
저런 불법 체류자나 난민, 그리고 집 없고 돈 없는 부랑자들이 살기 힘들면 뭘 하겠는가? 전부 빌런 조직 말단으로 들어가는 거다.
그런 걸 상대하는 관리국이나 히어로는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난 최서린의 목소리를 배경 삼아 이번 사태에 대해 생각했다.
‘회귀는 만능이 아니다. 현실은 현실이다. 그런 건가? 아니면 내가 평범한 놈이어서?’
인류가 망하기 전, 가끔 읽던 소설에선 회귀하면 그 정보를 가지고 승승장구하고 방해는 아주 쉽게 깨부순다.
그러나 현실에는 실제로는 조금 다르거나 생략된 사소한 부분들이 있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끝판왕급에서 작은 단서를 찾아 바로 견제가 들어온다.
상대해야 할 인원이 70억 명인 일반인에 비해 각성자인 초인들의 숫자는 엄연히 한정되어 있다.
노력을 기울인다면 감시하지 못할 정도도 아니다. 그걸 간과했다.
‘각성자 전부가 사회 중상류층에 속하고 혹여 반사회적 성향을 띄게 되면 잠재 위험도가 몹시 높다. 그래서 전부 감시 대상인 것.’
그렇기에 권력자와 권력 기관의 눈이 지속적으로 스쳐 간다. 체제에 위협이 될 수도 있는 행동을 보이면 바로 잡아내고 조치에 들어간다.
이번 일이 그랬다. 나는 별것 아니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포르세티를 통한 두 번의 습격 회피. 그게 문제였다.
그 사건으로 남은 증거는 나를 지켜보던 자들에게 은신 능력, 혹은 공간이동 능력 따위의 추가 정보가 되었다.
‘틀린 정보고 이런 일이 있을 줄 알더라도 행했겠지만, 반응은 예상했어야 했다.’
그래야 즉석에서 계획을 바꿔야 하는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이번 일도 일 대충 하는 인간에게 걸렸으면 그냥 넘기려면 넘길만한 일이다.
또한, 나 혼자만 성공할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개인으로서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순간까지 성장하면서 기다리고 기다렸다면 없었을 일이다.
‘되려 이 시기 관리국이 유능하기에 그런 작은 단서를 놓치지 않은 거지.’
인류의 힘이 강해지길 원하는 나로선 기뻐해야 하는 일이다.
‘큰 목표를 가지고 최선을 다했기에 오히려 눈에 띄었다.’
눈이 좋은 인물들은 그런 부분까지 넓게 보는 것이다.
내가 상대할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그렇다고 이런 일을 그만둘 수는 없지. 조금의 시간도 낭비할 수 없다. 처음부터 쭉 집단으로 성장해야만 해. 아니라면 인류 멸망은 막을 수 없어.’
인류 최후의 날이라 불렸던 그날의 전투, 그건 고작 개인의 힘으로 뒤집을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어떻게든 영향력을 넓혀가야 한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행운으로 바꿔야만 한다.
‘이리 감시 받는다면 계획의 변경은 필연이고 당장 운신의 자유는 억압될 테지.’
하지만 다르게 본다면 이름값 있는 영웅과 인연을 쌓을 기회고 관리국에 영향력을 뻗을 기회기도 했다.
‘이번은 내가 성급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후회할 일은 아니야.’
내가 유일하게 성좌들과 직접 흥정할 수 있는 인물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목줄을 쥘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들은 모른다.
나는 최고의 무기인 ‘정보’에서 언제나 앞서나갈 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이렇게 의도치 않은 일에 휘말리는 일은 언제든지 생기겠지.
왜냐면 나는 복잡한 계획을 세우고 회귀한 것이 아니다. 돌아오고 난 후의 그 짧은 시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울 틈도 없었다.
앞으로 내 반대편에 설 인간들은 머저리들이 아니고 나도 천재는 아닐 것이다.
앞으로도 계획은 몇 번이고 바뀐다.
인간인 이상 성공만 할 수는 없다. 실패도 있을 것이다.
‘나 혼자 안 된다면, 집단의 힘으로 승승장구할 수는 있다.’
같은 이해관계에 묶인, 도와줄 사람이 늘어나다 보면, 언젠가 이런 방해는 들어오지 않거나 들어오더라도 누군가 대신 쳐낼 날이 올 것이다.
‘지금도 굳이 따지자면 계획에 실패한 것도 아니지. 아주 사소한 오차일 뿐이야.’
그간 평범한 범재, 정찰대원이었던 내가 그간 해낸 일을 되새긴다.
빌런인 최서린과 강소연을 인류의 편에 서게 했고 차기 관리국 국장 이민호와 로텍의 후계자 중 하나인 정영하와 인연을 이었으며, 전생에선 빛을 보지 못했던 각성자 둘을 살려냈다.
이미 나는 쭉 원하는 것을 얻어왔다.
새로운 직업으로 내 장래가 더 밝아진 것도 확실하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머릿속을 잠식해가던 무력감을 어느 정도는 떨쳐낼 수 있었다.
* * *
김유성과 그 일행을 신입 에이스가 있는 곳으로 보내고 그쪽 관리국 지부에 연락을 돌린 김현우는 살짝 미간을 구겼다.
“그렇게 경고까지 해야 했나? 은신 혹은 공간이동. 뭐가 발견되기 전까진 지금 수준으로 감시만 유지해도 충분하잖아. 솔직히 의심을 경고해서 우리가 얻는 이득이 없는데.”
“빌런은 아닐 거야. 그러니 주시하는 것 알리고 허튼짓 못하게 경고하는 게 나아.”
“근거는? 네가 방금, 그리고 오기 전 했던 이야기랑은 조금 말이 다른 것 같은데? 공간이동 능력에 주목했던 것 아니었어?”
이번 거미라고 명명된 빌런 조직이 세 개의 A급 던전 일시 브레이크라는 대사고를 만들면서, 처음 김유성의 자료를 접했을 때 이들이 생각한 것은 정체를 숨긴 조직의 A급 능력자의 발견이었다.
“처음에는 알리바이 만들려 그랬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 그래서 마지막으로 직접 대면해보려고 온 거야. 하지만 이미 아니라는 쪽으로 기울어있었어. 영상도 싹 다 돌려봤잖아? 우리 오빠는 일머리는 나쁘지 않으면서 꼭 이런 부분에서는 헛똑똑이라니까.”
“그러는 넌 일머리가 나쁘잖아. 나눠 가진 거지.”
그리 말하면서도 김설아는 따로 설명을 해주진 않았다.
힌트는 줬고 머리는 좋으니 그녀의 오라비도 곧 깨달을 것이다.
“그런가. 정말 빌런이었으면 처음부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쪽이 유리했겠지. 유능함을 강조하면서 관리국에 스파이로 들어와서 알리바이 확보하려 했다기엔 좀 행동이 엉성하고?”
“어. 관리국에 들어올 생각도 없어 보여. 되려 그랬다면 의도가 명확한데. 신입 이민호를 통해 뭔가 하려고 한다기엔, 그 녀석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야. 그렇다면 이 정도 조직이 그 정도 눈도 없을 거란 생각은 안 들거든.”
“저게 이민호를 중요한 순간에 제거하려는 저격수라면?”
“농담이지? 저 정도 궁사 빌드에 은신 혹은 공간 이동기까지 익혀 놓고 특급 잠재력이 예상되는 관리국 신입 에이스 전위를 훗날 암살로 죽이겠다고?”
김현우는 반박할 말이 없어 머리만 긁적였다.
“앞으로 알아봐야 하는 건, 어느 세력에 속한 인물인지. 빌드를 가르친 스승 혹은 성좌는 누구인지. 그 집단은 우리에게 우호적인지. 그 정도야.”
“어쨌든 이번 일.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방심하지 마.”
“오빠는 당장 가서 빨리 결재서류나 올려. 난 이거부터 먼저 기정사실로 만들어 둘 거니까.”
영웅은 필연적으로 수세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행동은 항상 적보다 빨라야만 했다.
그게 캔디, 김설아의 영웅으로서 신조였다.
* * *
뒤늦게 따라붙은 김설아와 함께 관리국 서울 서부 지부에 도착하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오래간만입니다? 외부 헌터 지원이 온다는 게 여러분이셨습니까?”
“그러네. 너도 잘 적응하는 거 같아 보인다.”
가볍게 우리와 인사를 나눈 이민호는 고개를 돌려 상관인 김설아 쪽을 쳐다봤다.
“타격대는? 다들 어디 갔어?”
“선배님들은 전부 강서파 은신처 발견했다고 출동하셨습니다. 그런데 3팀장님. 혹시 저희 이번 임무에서 후방으로 빠집니까?”
“아니? 잘 싸우는 놈들을 후방으로 왜 빼는데?”
“어. 하지만 아무리 헌터라 해도 민간인인데, 이거···.”
이민호가 문제 되는 거 아니냐고 하려는데, 김설아는 자기가 물고 있던 사탕을 그에게 강제로 물려주곤 서랍을 열어 프린트물 몇 개를 꺼냈다.
그 광경을 본 최서린의 입에서 눈치 없는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어, 이거 뭐였더라. 간접키스 아닌가?”
“그래? 오히려 좋아.”
그걸 즉각 무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는 게, 보통 인물은 아니다.
“네? 아닙···!”
물론, 이민호는 바로 발작하려고 했다.
“신입. 죽는다.”
유쾌하게 실실 웃던 얼굴이었지만, 제 사탕이 위태로워 보이자 곧장 정색했는데 온도 차가 심하다.
그리고 살기가 꽤 농밀했고 이민호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그는 떨어지려던 거대한 사탕의 끝을 물어서 간신히 버텼다.
“잘했어. 나 당 떨어지면 무슨 짓 할지 몰라. 소문은 들었지?”
어색한 얼굴의 이민호 손에서 제 막대사탕을 되찾은 그녀는 그 사탕으로 우리를 한차례 쓱 가리키며 말했다.
“자! 이 인간들. 이 동의서부터 받아내. 바로 출동할 거야. 설득, 사인, 출동 준비까지 총 3분 준다!”
“뭐야, 이건?”
“어, 그게···. 저도 좀 읽어 봐야···.”
얼떨결에 프린트를 받아 우리에게 반사적으로 건넨 이민호가 머리를 긁적인다.
“휘성? 이거 사인해도 되는 거야?”
말을 더듬는 이민호는 전혀 믿을만해 보이지 않았기에 최서린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강휘성에게로 향했다.
캔디는 소파에 앉아 이민호가 하는 짓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전형적인 동의 각서 양식인데, 음. 관리국에서 이런 걸 받았었나? 처음 보네. 뭐, 문제 생겨도 관리국에 책임 없고 죽을 수 있다. 본인 선택이고? 그 정도라 내용은 별것 없네요.”
그러는 사이 내가 특별한 독소조항이 있는지만 빠르게 살핀 뒤, 동의서에 사인을 휘갈겨 넘겼다. 어차피 난 선택지가 없다.
내가 믿는다는 식으로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이민호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받았다.
자존심인지 최서린이 내용 읽다 말고 내가 하는 짓을 보곤 그냥 사인해서 똑같이 넘겼고 리더인 그녀가 결정하자 나머지도 자동이다.
“쯧, 우리 신입. 잘하는 짓이다. 영웅 하겠다는 녀석이 주변 지인에게도 믿음을 못 주면 쓰겠어? 거기에, 아직도 공문서 양식 종류도 다 못 외웠니? 나 때는···.”
“아니. 앞에는 제 잘못이지만, 이런 공문서 양식은 없잖습니까! 그건 다 외웠습니다!”
“내가 막 만들었으니 지금부턴 있는 거지!”
역시 미친년이다. 그리고 미친 사람과는 가능한 얽힐 일을 줄이는 게 답이다.
하지만 내가 김설아를 몹시 꺼리는 것과 달리 최서린은 시원시원한 성격의 이 히어로가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이런 걸 보면 사람 상성이라는 게 있나 보다.
“그러면 쿨한 히어로씨. 우리는 뭘 하면 되는 거야?”
“어. 거기 히어로 꿈나무들, 빌런 잡고 싶다며?”
“그렇지. 말이 통하네!”
“아니···. 난 지부에 짱박히고 싶은데요. 캔디님. 전 E급인데?”
현장에 가고 싶진 않았는지 강휘성이 소심하게 반항했다.
“알게 뭐야. 너희 동의서 썼잖아? 임시 관리국 직원 번호도 내가 다 현장직으로 발급해놨을 건데?”
“팀장님. 그거 전산에는 아직 안 올라갔는데요!”
“대충 사무직 중에 아무나 던져주면 일하는 동안에 끝나잖아! 빨리 던져주고 와!”
그 말대로 지금 우린 관리국 소속 계약 직원 취급이라 영웅에게 항명하면 즉석에서 유치장에 갇힐 수도 있다.
원칙상으론 금방 풀려나겠지만, 히어로가 트집 잡아서 꼬장 부리려고 들면 기약이 없다.
“···이거 더럽게 걸렸네.”
그녀가 바로 현장으로 데려가며 몰아붙이는 건, 내 데이터를 뽑아내기 위해서다.
쭉 침묵하던 내 입에서도 헛웃음과 함께 욕설이 튀어나왔고 그 항복 선언에 히어로는 피식 웃었다.
“자, 마침 도주 중인 놈들 보고가 들어왔어. 몇 명 놓친 모양이네. 도주하는 것도 두 팀. 마침 원거리도 둘에 관리국 타격대원도 둘. 난 이쪽 궁사랑 Z1으로 갈 테니, 신입 네가 나머지 데리고 Z7로 움직여.”
밖으로 나오자마자 약속이라도 한 듯 운전석과 조수석으로 흩어졌다.
“우리 귀염둥이. 달리는 차 위에서 전투해본 적 있어?”
운전대를 잡은 히어로의 입매가 뒤틀리고 나는 갑자기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누가 봐도 평범한 경험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잘됐네. 처음이면 꽤 재밌을 거야. 난 사정 봐주는 거 없이 밟을 거니까. 템포 잘 따라오라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이 한쪽으로 홱 쏠린다.
차량은 스키드마크를 그리며 관리국 지부를 유려하게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