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태풍의 눈
본대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로 숲 안쪽에서 3시간 정도 기동한 뒤, 복귀했다.
첫 건설 지점까지의 기동 예상시간이 정확히 3시간이었고 본대가 이동하는 동안 대규모 웨이브는 없었다.
“왔냐?”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까?”
“카멜레온이 좀 성가시긴 했지.”
“건설 작업은 어디까지 진행됐습니까.”
“공터 주변 나무는 다 쓰러뜨렸고 해자 파면서 흙 퍼다 나르는 중.”
그 흙은 기지 지대를 높이는 것에 사용할 예정이다. 그 작업을 위해 짐꾼들은 수레에 실어온 짐들을 내려놓고 한창 삽질 중이다.
전투조는 공터를 넓히면서 쓰러뜨린 나무를 바리케이드 삼아 3인 1조로 경계를 서는 중이다. 본대에 남은 최서린이 깔끔하게 지시를 잘 내려서 할 일이 많지는 않았다.
“수원은?”
“지하수 없다는데?”
“곤란하네요. 1차로는 여기만 한 장소가 없는데.”
“남서쪽 하천에서 떠오거나, 있는 보급품 쓰고 다음 지점까지 돌파해야지.”
남서쪽 하천은 우리가 공략을 진행해나갈 방향이기도 했다.
하천을 만나서 쭉 따라가다 보면 폭포가 나온다.
폭포 옆으로는 절벽을 내려가는 길이 있다.
네임드가 있지 않을까 꺼림칙했던 장소다.
‘분명 조류 계통 사냥꾼들이 좋아할 만한 지형인데, 아무것도 없었단 말이지.’
물론, 이런 브레이크가 일어나는 돌발 게이트류는 경계선 밖 지형 생물의 내부 통과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사냥을 나갔다거나 한 틈에 게이트 생성이 되거나 할 수도 있다.
‘네임드 개체는 하나였으니까. 절벽길이 아니면 늪이다.’
그 절벽 길을 따라 내려가면 독충 지대와 늪지대가 펼쳐지는데, 늪지 안을 살펴볼 수 없었기 때문에 악어나 수중 네임드 존재를 배제할 수가 없었다.
“최서린씨. 본대를 맡아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내가 고개를 살짝 돌려 사람을 찾자 최서린이 손가락을 들어 망루를 가리켰다.
“반대편 정찰대원? 망루에 있을 거야. 저쪽에 짓는 중.”
난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건설 중인 목재 망루의 줄을 타고 올랐다.
전초기지 건설 시엔 망루를 가장 먼저 짓는 것이 교범이었다.
정예원은 살짝 무료한 표정으로 망루 위 공간을 원형으로 천천히 돌면서 어두운 숲과, 인위적으로 만든 공터의 경계선 사이 어둠을 주시하는 중이다.
“정예원씨. 동쪽은 어땠습니까?”
“보고할만한 건 없어요. 사전에 말씀하신 대로 거대 거미 영역이라 깊숙하게는 못 들어갔으니까.”
“분지 지역이었죠. 안쪽에는 아마 거미가 가득했을 것이고.”
“네.”
반면, 서쪽에는 박쥐들이 사는 동굴이 있고 그 앞으로는 독도마뱀이나 거대 살무사가 돌아다닌다.
“일단, 알겠습니다. 저는 지도제작부터 들어가겠습니다.”
“네. 다 하시면 와서 말씀해주세요.”
내가 상대적으로 정보를 더 많이 알기 때문에 먼저 제작에 들어갔다.
불을 피워놓은 공터 앞, 짐꾼들이 만들어둔 간이 작전 테이블 위에 넓은 캔버스를 깐 뒤, 익숙하게 기억을 더듬어 지형지도를 그려나갔다.
“오···. 오오!”
어느새 내 옆에 슬며시 다가와 서 있던 강휘성이 감탄사를 흘렸다.
“지도가 정말 정교하네요. 혹시 관련된 일 하셨습니까?”
“그냥 공부 좀 했습니다.”
정예원이 조사했을 동쪽 거미 지역도 첫날 봤던 대략적인 지형을 더듬어 그렸고 거기까지 작업을 마친 나는 서쪽 뱀들의 이동 경로나 규모 따위의 정보를 지도에 빼곡하게 표시하고 적어넣기 시작했다.
거기까지 한 뒤에, 정예원과 교대를 했다. 잠시 뒤, 자기가 조사한 내용을 적고 내게 알리기 위해 돌아온 정예원은 몹시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으···. 그 정도까지 해야 해요? 그 뭐랄까. 제가 바보가 된 기분이라서요.”
내가 파티장이다 보니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하겠고 살짝 주변 시선이 부끄러웠나 보다.
“이쪽 길로 욕심이 있으시다면 하셔야 합니다. 헌터 아카데미 현역 전문 과정에 ‘정찰과 지도’라는 과목이 있습니다. 길드의 현역 선배들에게 배우는 게 가장 좋지만, 그거라도 들어두시면 도움될 겁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거 안 해도 먹고 살만큼은 벌 수 있기도 하고···.”
무슨 말을 원하는지도, 왜 이러는지도 알지만 듣기 좋은 말을 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 말은 나중에 원망으로 돌아온다.
“정예원씨. 우리가 헌터 생활을 천년만년 할 수는 없습니다. 전위 직군 전성기는 30대 중반, 우리 물리 원거리는 40대 초반이죠. 이후부턴 수입이 감소합니다.”
망루를 내려가면서 난 그녀에게 계속 조언을 건넸다.
“지금이 20대. 앞으로도 20년간은 지금의 수입에 익숙하실 거고 그 소비 습관은 쉽게 안 바뀔 겁니다. 만년 E급 헌터라 해도 일반인과는 수익이 달라요.”
“···그렇겠네요.”
“아직 경력 초반이시니 배우시면 됩니다. 그럼, 회의 시간 동안 망루를 부탁하죠.”
정예원과 교대한 뒤, 비를 피할 수 있을 만한 간이 천막이 세워진 지휘 테이블 앞에 도착했고 곧장 헌터와치로 조장 소집 명령을 내렸다..
“지도가 꽤 정교하네.”
“이제 어디부터 공략할지 정해야 합니다.”
“대장인 넌 어디로 갔으면 좋겠는데?”
최서린의 질문에 난 주저 없이 답했다.
“이 구성이면 박쥐 동굴부터 해결했으면 합니다.”
“이유는?”
“빨리 정리하지 못해 활동 범위에 잡히면 사냥감이 됩니다. 동굴 흡혈박쥐류는 밤에만 활동하니, 낮에 뱀을 정리하고 해가 지면 모두 불을 끄고 모여 건물과 안에서 조용히 밤을 보내는 걸 생각 중입니다.”
밤에 괴물 상대하느라 잠을 못 자는 것, 이게 은근히 괴롭다.
“혹시 다른 의견이 있다면 말씀해주셔도 됩니다.”
“그런 이유라면 차라리 거미를 먼저 처리하는 건 어때?”
“판단의 근거는요?”
“거기 분지잖아. 박쥐 활동 범위에서도 아주 멀고 임시 기지 만들고 입구만 틀어막으면 요새가 되는 것 아냐?”
“그것도 생각해볼 여지가 있군요. 다른 분들은 또 의견 있으십니까?”
거미를 피해 없이 빠르게 처리할 수만 있다면 최서린의 방법도 나쁘진 않았다.
나도 파티원이 베테랑이고 빠르게 게이트를 클리어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녀의 경로를 탔을 거다.
“없으면 투표로 결정하죠.”
그리고 투표 결과는 나와 전위장, 원거리조장과 지원조장으로 갈렸다. 이러면 보급을 담당하는 보급대장이 결정권을 쥐었다.
“음, 거미를 쉽게 처리하려면 화계 주문 술사가 있어야 하는 거로 아는데.”
“거기 기사 아저씨. 결론만.”
살짝 서슬 퍼런 최서린의 눈빛에 지원조장, 이우석 기사는 꼬리를 내렸다.
“그, 거미를 잡는 쪽으로···.”
자기가 한 말이 최서린의 실력을 믿지 못한다는 말로 들릴 수 있었다는 걸 그도 말을 끌다 깨달은 것이다.
‘내가 편하게 대해서인지 파티 분위기가 좀 풀렸다. 긴장을 잡아줘야겠어.’
다만, 그 전에 일단 최서린의 권위부터 세워줘야 한다.
“부대장님 의견에 충분히 일리가 있습니다. 저는 공략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봤다면, 부대장님은 파티 피로도 조절을 최우선으로 보셨죠.”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리고 E급 화계 술사로도 돌파하는 곳을 C급 주문계 각성자를 데리고 돌파 못 하면 어디 가서 바보 소릴 들을 겁니다.”
그렇게 그녀를 살짝 띄워 준 뒤 내 생각을 내뱉는다.
“제가 걱정하는 건 거미류가 꽤 위험한 괴물이라는 걸 파티에 경고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괴물을 잡으며 호흡을 맞추고 진행할 생각이었죠.”
“너. 전부터 너무 조심스러운 것 아냐?”
“그럴지도 모르지만, 파티장으로서 파티원의 안전을 최대한 챙기고 싶은 것을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전위장님이 제 손을 들어주신 것도 그래서셨겠죠.”
전위장을 맡은 탱커, 장현우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마지막으로. 다들, 잘 나가던 AST길드가 어떻게 무너졌는지 아실 겁니다.”
분위기가 충분히 잡힌 것 같아 긴장과 경각심을 줄 만한 사례를 하나 들었다.
“동급 거미 여왕 둥지에서 전멸했지.”
“거미는 암묵적으로 등급에 플러스를 붙여주죠. 공략에 앞서 염두에 두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게이트 환경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도 괴물에게 유리한 지형이지만, 거미는 이게 더 심하다.
비행체도 아닌 주제에 애먼 허공에서 기습하질 않나, 자신에게 유리한 필드를 따로 만들어 내질 않나, 아주 귀찮다.
어쨌든, 분위기는 그럭저럭 잡혔고 우린 짐꾼들과 경계를 설 전투조 두 사람을 남겨둔 채, 거미 둥지 쪽으로 전진했다.
* * *
거미가 뿜은 독액이 날아들지만, 그녀의 얼음 장벽은 굳건하다. 얼음 장벽에서 회전하는 톱날이 튀어나와 날아가고 거미의 다리를 모조리 자르고 지나갔다.
능력에 의심을 받았다는 게 몹시 기분이 나빴기에 최서린은 전위들이 할 일이 없어서 놀 정도로 방어까지 참가하며 학살 쇼를 벌이는 중이었다.
“최서린씨. 마력조절 하시죠.”
“아직 널널하거든?”
“파티장으로선 그 널널한 상태를 유지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 치고 들어오는 말에 반박할 논리가 없었기에 서린은 한 걸음 물러났다. 여러모로 마음에는 들지 않지만, 어쨌든 이 레이드의 파티장은 김유성이었다.
‘어. 절반?’
그리고 남은 잔여 마력을 확인한 최서린은 좌측을 보는 김유성의 뒤통수를 슬쩍 바라봤다.
소름 돋을 정도로 정확하게 마력 회복속도 감소가 시작되는, 50%의 잔여 마력이다. 그는 도달하자마자 그녀의 전투를 막았다는 거다.
“분지 입구가 보이는군요. 전방 경계는 제가 맡을 테니 진입 전, 마지막으로 휴식하겠습니다.”
오는 길 주변 수십 미터를 싹 정리하면서 왔기에 위협이 있다면 전방뿐이다.
전위나 다른 직군에 맡겨도 될 텐데 파티장으로서 솔선수범하겠다는 건지, 김유성은 전방 숲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확실히 보통 인물은 아니네. 서린 누님이 대화에서 주도권 못 잡는 건 처음 아냐?”
“흥. 저 위로 가면 저 정도는 널리고 널렸을걸?”
“누님이 앞으로 살 세계에서야 그럴지도 모르겠네. 거긴 나도 안 가봤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저 사람한테는 뭔가 베테랑 같은 느낌이 나.”
서린도 부정하진 않았다. 성격 안 맞는 걸 빼면 이것저것 배울 점은 있는 인간이다. 10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표정이 잔뜩 굳어진 김유성이 본대로 다시 돌아왔다.
* * *
다들 내 얼굴을 쳐다보길래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억지 미소를 지었다.
“서린 씨는 고생하셨으니 전투가 있더라도 급한 상황 아니면 휴식 해주시고 다른 분들도 저희 메인 딜러님이 거미를 처리하는 동안 패턴은 대부분 확인하셨을 겁니다.”
“독액 뿜는 걸 잘 처리해야겠던데요.”
“기본적으로 전방 전위와 사선에 있지 않도록 주의해주셔야 합니다. 서포터진은 하늘, 후방으로 기동하는 거미가 있다면 딜러진에 전파해주시고 전위장님은 전파받는 거미 위치에 따라 진형을 잘 변경해주시기 바랍니다.”
방금 전방에 나가서 포르세티가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는데 몹시 귀찮은 걸 알았다.
‘설마 그렇게까지 해 놨는데 쫓아올 줄이야. 그쪽 조직도 아직 신생에 가까워서 그런가? 감정 조절을 못하는군.’
포르세티와 오딘과의 협상은 잘 끝났다고 한다.
A급 후보군을 받았고 내가 원하는 그 자료들에 명성 점수까지 천만이나 받아왔다고 했다.
우리 원래 목표가 500만쯤 받아보는 계획이었던 걸 생각하면 대성공이다.
‘하지만, 이건 이미 알고 있다는 경고인가?’
다만, 그 받아온 각성자 명단에 어이없는 게 있다.
그 받아온 A급 잠재력 각성자 중에 거미의 ‘페이트’가 있었다.
[성좌가 빌런도 움직입니까?]
나로서도 조금 충격적인 내용이었기에 조금 전, 포르세티와 대화를 나눴다. 이 질문에 포르세티는 내가 원하는 모든 정보를 담은 깔끔한 답을 돌려주었다.
[이유는 설명 못 해주지만, 성좌가 빌런을 일부러 키우는 경우는 없어. 그랬다간 시스템에 제재를 받아. 다만, 사는 곳이라면 협잡이라는 게 있잖아? 내 주력 계약자의 앞길을 막는 다른 성좌의 계약자가 있으면 어떨까?]
설명 못 한다는 이유는 내가 안다. 대전쟁 전, 성좌들에게 모두 발언이 불가능한 제약이 걸려있다. 뒷말은 짐작이 가는 것이 있었다.
[계약한 뒤 빌런이 되는 경우. 그걸 써먹는 거군요.]
[빙고. 그러니 빌런 잡는다고 문제가 될 거란 걱정은 안 해도 돼. 뭐, 빌런을 좋아하는 로키 아저씨나 악 성향 성좌들이라면 앙심을 품을지도 모르겠지만, 대개는 그냥 넘어가니까.]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페이트 이 자식이 날 기어코 죽이겠다며 이 게이트에 숨어들었다는 포르세티의 경고를 들은 거다.
혼자서는 실패했으니 거미의 행동 원칙대로면 숫자를 더 보내는 게 정석인데, 포르세티에게 들은 바로는 놈은 지금 혼자였다.
‘혼자 온 걸 보면 단독행동이겠지.’
거미는 지금 내가 뿌린 그 정보 때문에 엘릭서를 차지할 준비 하느라 조직 전체가 바쁘다는 뜻이다.
즉, 페이트 놈을 죽이고 내가 처리했다는 흔적만 지워내면 한동안 이 귀찮은 거미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