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태풍의 눈
“어쩌실 겁니까?”
뽑힌 직후에는 나도 감탄사를 내뱉었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저게 뽑힌 것 자체로도 가치는 있었으니 이 단차를 돌린 보람은 있다. 그저 상황을 보니 우리가 써먹긴 글러서 배가 아플 뿐이다.
그리고 포르세티도 나와 마찬가지로 기쁨이 가시자 현실이 눈에 들어온 것 같다.
“저기, 이거 방법이 없을까···.”
답 없는 걸 아는지 목소리가 기어간다. 방금 전의 추태에 그 전의 내 충고도 있었으니 할 말이 없겠지.
“적금 깨실 겁니까? 그래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저 녀석도 눈치가 있을텐데.”
“너한테 얼마 남았다고 했지?”
“700만입니다. 그걸 다 쓰자고요?”
그건 앞으로의 변수에 대응해야 하는 자금이다.
올인하면 뒤가 없어진다.
“그건 좀 그렇지?”
물론, 그럴 가치가 있는 녀석이긴 했다.
“쓰는 건 그렇다 치죠. 최고 등급에 훌륭한 분배, 거기에 재벌가 자제에 저 드러난 특성이면 투자하지 않는 게 더 웃기겠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써도 안 될 것 같은데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포르세티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린 지금 성좌의 관행을 따를만한 명성 점수조차 없다.
“시작 등급이 A입니다. 거기에 나이는 이제 고작 18세. 저거, 되겠습니까? 저라도 자기 현재 등급 추정이 A급이 나오면 최상위 신좌 말곤 생각도 없을 것 같은데요.”
S급까지 성장이 예상되는 최서린이 지금 C등급에 [email protected]를 받았다. 루카는 그런 특급 중에서도 특별한 놈이라는 거다.
저 빛에 대해 물어서 그놈의 가챠 시스템에 대한 설명도 들었다.
각성자들 사이에서는 그저 S급 이상은 다 똑같게 말하지만, 성좌 사이에선 붉은색이 뜨면 S급, 황금색이 뜨면 SR, 백색으로 빛나면 PT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 난 시스템상 최고 등급 각성자를 뽑은 거다.
“끙···.”
“그러고 보니 나오긴 나왔네요. 그놈의 지크프리트가.”
저놈은 원래부터 참격형 중거리 전사 빌드를 타는 놈이고 그것에도 최적화 된 분배니 진짜 지크프리트급이 나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겠다.
가챠는 제물을 바치면 누군가는 반드시 성공한다는 법칙은 불변인가보다.
제물이 여신 본인이었다는 게 함정이었지만.
“그래. 내가 잘못했어.”
결국, 포르세티는 내 한심함을 담은 시선에 항복했다.
어쨌든, 물주시다. 너무 갈구는 건 좋지 않다.
난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에게 조언을 건넸다.
“이거 부친께 연락을 하죠. 기왕 나온 것, 써먹어야 합니다.”
“뭐? 안돼! 절대 안 돼!”
포르세티는 결사반대했지만,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심지어 이거 여러 신들 한 바퀴 돌고 온 것도 아니고 갓 각성한 녀석인데, 넘기고 뭐라도 받아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래. 그건 맞지.”
“보유 B급에 저 녀석 임시계약까지 넘겨서 제대로 된 A급 하나와 여유 명성을 받아오는 게 최선입니다. 복잡한 협상 따위 없어도 가장 값을 제대로 쳐줄 분은 당연히 부친이시고요.”
발드르라면 지명도는 충분하다.
계약 여부까지는 확실치 않겠지만, 그것까지 우리가 감당할 이유는 없겠지.
‘뭣보다 다른 신좌, 성좌들은 스카우트 정보에 장난질을 칠 수도 있다.’
신화 속 발드르 신의 평판 상 자식에게 사기를 칠 인물은 아니니, 수작 없이 자료를 확실하게 받을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래도 아빠는 안 돼! 엄마면 모를까!”
“모친이라시면 난나 여신이신데, 인간들 사이에선 지명도가 너무 낮습니다. 우리가 이 협상을 걸면 받기야 하시겠지만, 저희가 원하는 걸 다 받아내면 모친께 손해를 강요하는 일입니다. 어차피 부친께 갈지도 모르죠.”
“차라리 엄마를 통해 들어가는 게 나아. 분명 숨겨주실 테니까. 아마 내가 협상하려 들면 으···.”
하지만 내 거듭된 설득에도 포르세티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래. 아빠라면 네 말대로 더한 것도 얹어주라고 하겠지. 하지만 대가는 집에 들어가는 거야. 협상의 여지 따윈 없을걸? 그리고 그랬다간 너랑 이렇게 방 파면서 대화하는 것조차 다 허락 받고 해야 할 텐데, 그게 괜찮겠어?”
이 부녀 관계도 언젠가는 풀긴 풀어야 할 텐데, 당장은 힘들어 보인다.
나는 여신의 완강함에 결국 차선책을 내밀었다.
“정 그러시다면 조부께 연락하시죠.”
“할아버지?”
“이 값을 제대로 받아낼 수 있을법한 분은 부친 외에는 그쪽뿐입니다.”
그리고 나는 거래에 있어서 뭘 기준으로 협상해야 하는지에 대해 몇 가지 조언을 건넸다.
포르세티는 꽤 구미가 당기는 것으로 보였다. 반면, 나는 신화에서의 오딘의 평가를 생각할 때, 이 시도가 그리 달갑지 만은 않았다.
‘거기에 오딘의 신화 내용 정도면, 이 여신의 작은 변화에도 뭔가가 있다고 의심하고 조사해 볼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로마 신화의 제우스에 비하면 오딘의 신화는 내용이 꽤 흉악하고 신화에서의 거의 모든 비중도 오딘에게 몰려있는 수준이다.
가진 수식어만 몇 개인가?
광기, 주술, 마법, 지혜, 음악, 계약, 문예, 죽음, 생명, 승리, 전쟁의 신이며, 바람의 신의 속성도 있고 신들의 왕이기도 하다.
옛 서구 신화의 대표격인 올림포스에선 열댓 명의 신이 나누어 가진 역할을 오딘 하나가 죄다 쥐고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한 신화의 주인이니 절대 만만하진 않겠지.’
이렇게 손에 패도, 정보도 없는데 만날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건 내게 한정한 이야기고 포르세티 입장에서는 최선은 아니어도 차선 정도는 됐다.
오딘이라는 신의 성향상 의심을 할 테니 큰 이득은 못 볼지도 모른다. 그래도 합리적인 수준에서는 받을 것이다.
“하긴, 오랜만에 할아버지 뵙는 것도 좋겠네.”
“그러시죠. 다만, 그 앞에서 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로선 굉장한 모험이자 도박이지만, 그걸 포르세티에게 따로 말하진 않았다. 아무리 사실만 말해도 가족에 대한 안 좋은 소리 하는 놈이 곱게 보일 리 없잖은가.
“그 정도 눈치는 나도 있어. 뭐 하고 지내는지 물어보시면 적당히 잘 둘러댈게.”
“예. 어떤 식으로든 제가 크기 전까지는 이런 관계가 새어나가지 않는 것이 좋으니까요. 그럼 그쪽 거래까지 확정하고 나서 뵙죠. 저는 다시 내려가 보겠습니다.”
대화 시간이 짧았기 때문에 내가 전송되었던 정글숲 경계에 괴물이 다시 차있거나 하진 않았다.
헌터 와치를 켜서 게이트 소개란에 정찰해서 파악한 정보를 채워 넣고 모집에 지원한 헌터들의 프로필을 살폈다.
‘이러면 전위 빼곤 다 구했나.’
전위 자리가 좀 남아서인지 서브 탱커보다 전위 자리가 더 오래 남았다.
모집 명을 ‘서드탱커1, 전위1’로 바꾸자 그 즉시 전위 지원이 둘이나 왔다.
프로필과 경력을 보고 그중 탱커 역할을 좀 더 잘할 수 있을 만한 인원을 받은 후, 전위 모집을 아예 지워버린다.
아마 들어올 수 있었던 인원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거다.
‘어차피 전방 세 자리 중 하나를 맡길 거니 굳이 면접을 볼 필요는 없겠지.’
전위장의 권한은 절대적이고 전사계열끼리도 커뮤니티가 있다.
13명 중 8명이 친분이 있고 문제가 있더라도 전위장에게 맡기면 되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잠시 비활성 했다가 다시 레인저 계통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수정해서 올리니 순식간에 수십 개의 신청이 쌓였다.
나는 개중에 정찰보다는 조금 데미지에 치중한 트리를 탔을 만한 인원을 받은 뒤, 모집 창을 아예 내려버렸다. 그리고 파티원 전원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현재 인원 12인, 공략 출발 날짜는 내일입니다. 정찰 결과 올라갔으니 따로 준비하실 것 있으면 준비하세요.]
[또, 13인이 될 수도 있으니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오기로 한 사람이 있는데, 못 오게 되면 상황 하나 봐서 전위 하나 추가 모집해볼 겁니다.]
[출발 시각까지 모집 실패하면 이 인원 그대로 갑니다. 새 인원이 들어왔으니 전위장님, 원거리 조장, 지원조장님은 새로 들어온 인원과 간단하게 연락 한 번 하신 뒤, 모여서 진지 경계 순서도 조정하시고요.]
그리고 그날 새벽, 안혜성에게 개인적으로 알려준 번호를 통해 문자가 날아왔다.
[저, 전직했습니다.]
가챠에 미쳐있던 와중에도 포르세티가 당장 해야 하는 건 잊지 않고 알려줬는지, 버서커 전직과 그에 필요한 장비를 구하는 임무 위주로 달렸나 보다.
[제 특성에 이런 방법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연히 누군가 경험해보고 알려주지 않으면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다.
그리고 성좌가 어디선가 이 정보를 얻어오기 위해 고생했을 거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고생하셨습니다. 내일 뵙죠. 자리는 후열 전위를 맡게 되실 겁니다. 갱신된 정찰 정보도 확인하시고 아침에 시간이 있으니 준비해야 할 것들 확인하시고 오세요.]
[네. 내일 뵙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파티원들이 전부 모이자 나는 안혜성을 다시 소개했다.
“안혜성씨는 듀얼로 함께하실 겁니다. 후방 전위 역할을 맡아주실 거고 지원조장님도 도와드릴 겁니다.”
“저기, 저분 저번 필드에서는 기사님 아니셨나요?”
급한 정비는 됐지만 좀 오래된 모델이고 여기저기 헤진 부분이 남아있는 장비라 믿음이 좀 안 갔는지 이진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후미 자리는 서포터를 기습에서 지키는 자리다.
자기 안전과도 직결된 위치니 걱정이 되겠지.
“능력은 충분합니다. 혜성씨도 기본적으로 E급 헌터니까요. 전위장님께서도 능력, 특성 확인하시면 무슨 뜻인지 아실 겁니다.”
안혜성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전위장의 표정이 미심쩍다는 눈치였으나, 내 말에 일단 확인해보겠다는 눈치다. 지난번 필드에서의 신뢰가 있던 덕분이다.
“가셔서 전직한 것 알려 드리고 전위장님 안심시켜 드리시면 됩니다. 베테랑이니 성좌님 도움으로 적절한 직업 얻었다고 하시면 조금 미심쩍어도 인정할 거고요. 다시 전투조 사회에 녹아드시려면, 아시죠?”
“네. 저분들이랑 관계부터 다져야겠죠.”
잠시 후, 폭주 상태를 키고 전위들과 가볍게 전투를 벌이는 모습이 보인다.
공격을 그대로 몸으로 받아내며 그대로 들이미는 공격에 전위들이 꽤 당황하는 모습이 꽤 볼만했다.
“이거, 능력이 후위 역할에는 딱 맞는데요. 조금 의심했는데 파티장님 안목은 확실하시네요.”
“그럼, 다른 조장님들께도 설명 부탁드리죠.”
“알겠습니다. 다 안심시켜 드려야죠.”
전위장의 설명에 조장들은 본 것도 있으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설명을 전해 들은 이진아도 표정이 좀 나아졌다.
“너도 저 사람이랑 같은 성좌를 모시나 보네.”
옆에 선, 최서린의 말에 난 의뭉스러운 미소만 슬쩍 지어 보이고 말았다.
“사전에 표시해둔 경로로 이동하겠습니다. 길을 개척해야 하니 기사는 전위분들과 함께 움직여주시고 정찰조가 괴물을 놓칠 수도 있고 전, 후방은 상대적으로 취약하니 전위 분들은 철저한 경계를 부탁합니다.”
[예원씨, 서쪽을 부탁합니다. 발성 신호탄이 한 번 들리면 전투준비, 두 번 울리면 전초기지로 퇴각입니다.]
나는 신호탄부터 가득 챙겨 옆의 레인저, 정예원에게 나눠주었다.
[기준은 저희 파티가 즉석에서 막을 수 있는 숫자인지, 아닌지. 저희는 C급 각성자를 메인 딜러로 뒀으니 어지간하면 두 개가 올라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바로 정찰을 나가려는데, 최서린이 옆에서 한마디 툭 던졌다.
“정규 편제를 맞추려던 게 이것 때문이었구나?”
“정글, 산지 같은 지역은 정찰조 한 명으론 커버가 어렵습니다. 시야가 크게 제한되니까요. 개척 과정에서 소음 발생을 막기 어려운 만큼, 전투는 필연이죠. 웨이브가 위험한 규모라면 동서로 나뉜 정찰조가 신호를 보내 퇴각시켜야 합니다.”
“그래. 본대 시야만 가지곤 확실히 부족하겠네.”
단순히 주변 경계를 하며 가는 것이라면 한 명도 상관없겠지만, 이런 지형에서 주변을 제어하며 가려면 최소 두 명의 정찰대원이 필요했다.
“그럼 부대장님. 파티를 잘 부탁하죠.”
쿵!
벌써 나무 넘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파티원들이 안심하고 작업할 수 있도록 발걸음을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