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태풍의 눈
거미놈들이 이번엔 좀 심하게 내 집을 작살 내놨다.
“거미의 경고. 이 시점에 볼 줄은 몰랐는데.”
스프레이로 칠해진 검은 거미 척살 문양.
어지간히 열 받았는지 이걸 집 안에 그려 놓고 갔다.
이러면 서둘러야겠다.
내버려두면 간부급 둘이 올 것이다.
아무리 내가 가진 특별한 기술이나 경험치, 그리고 특성과 빌드가 훌륭하다고 하지만, 현시점에서 내 종합적인 능력치는 D급이다.
경험까지 해서 좋게 쳐줘도 당장은 C등급 쯤 어딘가에 불과했다.
‘당장 보스까지 나서진 않을 거다. 자존심 약간 빼면 아무 이득이 없으니까.’
내 기억에도 그 구성원 모두를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간부진들 현상 수배는 한국에서는 워낙 유명해 얼굴과 이름 정도는 잊지 않았다.
날 노린 빌런이 거미임을 확신하자마자 이들의 현 등급부터 검색을 해봤다.
‘능력을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인명록에 등록된 프로필대로면 전원 C급 이하다. 보스가 직접 오는 것만 아니라면 셋까지는 상대할 수 있겠지.’
상대 가능하다는 건 이긴다는 뜻이 아니라 버틴다는 뜻이다.
당장 위험하진 않다고 말했지만, 벌써 2명의 습격이 가시화되고 있는 이상 가능한 한 빨리 떼어버려야 하는 것도 분명했다.
‘관리국에 과거 놈들의 아지트로 추정되는 곳을 습격하도록 흘리는 것도 방법이지만···.’
그건 마지막으로 미뤄뒀다. 거미는 여기저기 첩자도 많고 이 시점이면 관리국 내부에 뛰어난 해커도 보유하고 있다.
괜히 내가 흘렸다는 것이 새나가면 개미굴을 쑤셔놓은 꼴이 될 거다.
물론, 이놈들을 끌어낼 수는 있었다.
원 역사에서 검은 거미가 그 정체를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시점은 현 6위 길드인 태백과 9위 길드인 금화 사이의 사건에 얽히면서였다.
‘금화가 주력을 잃어 몰락하고 태백은 체면을 구기면서 관리국과 함께 이 악질 범죄집단과 지겨운 싸움을 시작했지.’
훗날 서울의 밤이라 이름 붙을 사건이다.
10년 뒤의 일이며, 태백과 금화는 각각 9, 10위로 밀린 상태. 반면, 거미는 국가급 빌런 조직으로 체급을 불린 시점이었으니 이상할 것 없는 결과다.
하지만 지금 거미는 10대 길드에 가져다 붙일 급이 아니다.
또한, 보스인 타란툴라는 내가 던지는 황금 사과를 그냥 넘기진 못할 것이다. 원래도 그 물건 때문에 조용히 거미줄만 펼치던 거대 조직의 실체가 드러났으니까.
‘알려진 가정사가 사실이라면 아무리 지금 세력이 약해도 뭐라도 시도할 거다. 거미 구성원은 아직 잠재력만 높은 어중이떠중이지만, 지금도 보스만큼은 만만한 인물이 아니지.’
그 여자가 이른 나이에 게이트 질병을 해결할 방법을 찾겠다며 길드를 나와 해외로 떠났을 때가 이미 B급이었다.
훗날 S급 판정을 받은 걸 생각하면, 지금 시점에선 못해도 A급일 것이다.
이 정보가 퍼지면 혼란은 반드시 발생한다.
엘릭서라는 물질은 그럴만한 물건이었다.
그 과정에서 거미와 10대 길드와 충돌은 필연. 사건이 터지면 나 같은 유망주에게 신경 쏟을 여력 따위는 없어진다.
‘각 길드 정보 담당 부서가 그런 시도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분명 거슬려서 직접 움직이거나 관리국을 움직이려는 놈들은 나온다.’
아니라도 상관은 없다.
‘엘릭서. 활용도를 아주 단편적으로만 이야기해도 치명적 장애로 은퇴한 특급 헌터를 현역으로 복귀시키면서, 노예계약을 맺을 수 있는 물건이지. 이미 효과는 지금 시점에도 증명된 물건이고.’
길드 순위를 요동치게 할 수도 있고 만일을 대비한 보험으로 들고 있을 수도 있다. 굳이 그게 아니어도 정부나 외국에 이권을 대가로 팔 수도 있을 것이다.
현 시점에도, 앞으로도 게이트 질병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으니 그냥 부르는 것이 가격이다.
길드 정보부 사이에선 치열한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범죄 조직이 경거망동하다간 바로 눈에 띈다.
‘그런데, 원래보다 더 정신없을 수도 있겠는데···.’
원래 일어났던 분쟁보다 사건이 커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 안정형 게이트가 지금은 길드 연맹의 공유지였나? 금화가 가지고 있었던 건 이후 분배를 받았나본데.'
수많은 큐브가 들어있는, 일명 큐브 던전의 퍼즐 중 하나가 풀리고 그 안 내용이 퍼지면서 벌어졌던 사건이다.
나도 그 풀이법은 기억하고 있었다.
원래는 금화가 퍼즐이 풀린 결과 그것이 가리키는 게이트를 특정 기간까지 태백에 인도하기로 계약에 도장까지 찍어 놓고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분쟁이 생긴다.
평시였다면 10대 길드가 가져갔을 그 엘릭서는 두 길드 사이의 분쟁으로 정신없는 틈에 순식간에 몰아친 거미의 수작에 범죄 조직의 손에 들어갔다.
‘어차피 대전쟁을 대비하는 덴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조직이다.’
어차피 지금 내 실력이나 세력으로는 못 먹을 엘릭서.
미리 사용해 차도살인지계를 쓰는 거다.
거미가 냉정하게 판단해서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땐 잠시 외국에 나갔다 오면 된다.
조금 기다리면 범죄조직들이 한동안 전부 숨죽이게 만들 사건이 터질 테니까.
그러다 보면 나에 대한 주목도 흐지부지될 것이다. 그 사이 나도 계획대로 되면 충분한 배경과 실력을 갖출 테지.
“필드 사냥은 오늘이 마지막이네요. 곧 국가 E급 게이트 배정이 나올 것 같은데, 여기 계신 분 중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남아주시기 바랍니다.”
포르세티의 방에 피난갔다 돌아왔던 그날의 분풀이를 마지막으로 거미들은 관리국을 의식하는지 그 이상을 하진 않았다.
그렇게 필드 사냥은 무난하게 흘러갔고 일정이 모두 지나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이 멤버 그대로 같이 할 수 있으면 당연히 참가해야죠.”
“민호는 관리국 면접 일정이 그쯤이고 소연 씨도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여기 전원은 어려울 것 같고 추가 인원을 모집할 생각입니다.”
“뭐, 두 분은 엄연히 여기 있을 분들은 아니었으니까요.”
난 이번 필드 사냥 동안 착실하게 파티원들의 신뢰를 얻었고 결과적으로 더는 함께할 이유가 없는 강소연과 이민호를 제외한 모두가 남았다.
그리고 그러는 사이, 이름 있는 탐사대와 연구실에는 신문지 따위로 꽁꽁 묶인 출처를 알 수 없는 소포가 배달되었다.
우리가 필드 사냥을 진행하는 동안 그들은 그 해답을 시험해본다고 큐브 던전으로 몰려갔고 그 광경은 기삿거리를 찾던 기자들에게도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랜만에 큐브 게이트의 수수께끼 하나가 풀렸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그 내용이 엘릭서가 들어있는 히든 던전의 위치를 말한다는 것이 기자들에 의해 드러났다.
하필 그 위치가 길드 연맹의 공유지에 있던 미공략 된 게이트라 헌터 사회가 떠들썩해지는 건 당연한 흐름이었다.
* * *
그리고 김유성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여파는 최서린과 강소연에게도 미쳤다.
여기저기 간을 잡던 두 여자는 각 길드가 엘릭서에 집중하다보니 갑자기 썰물처럼 빠져나간 관심에 쓴맛을 느껴야 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잘 만나고 왔어?”
“응.”
최서린은 할 일도 없겠다, 오랜 절친이 재잘거리는 요 며칠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나도 따로 알아는 봤거든? 일리는 있는 분석이네. 마침 관심이 다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니 그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시간은 있겠어.”
“그동안은 어쩔거야?”
“휘성이 조언대로 관리국하고라도 협상해볼까? 나도 이 시국에 사정사정해가면서 길드에 들어가고 싶진 않고.”
소연은 침묵했다. 최서린이 관리국에?
친구의 선택에 뭐라 할 생각이 없는 소연으로서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알아. 알아. 겁나게 안 어울리는 건.”
“···파산 각.”
“에이, 내가 그렇게 사치스럽진 않아.”
최서린의 성격상 관리국에 들어가면 위계질서를 못 지킬 것이 뻔하다. 그러다 보면 사고 치고 쫓겨날 테고 길드엔 지금 정도의 대우는 못 받겠지.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씀씀이가 크고 뭐가 됐든 1등을 해야 하는 성격이라 그 수입으로는 파산할 것이다.
소연은 이걸 알았기에 김유성이 서린을 참 잘 파악했다는 생각을 했다.
“길드. 어떨까?”
“길드를 세우자고?”
“응.”
잠시 고민하던 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한텐 안 어울려. 난 뭐든 자신감이 넘치긴 하지만, 그런 자질구레한 일 못한다는 건 알아. 너도 휘성이도 그쪽으로는 그다지 인연 없잖니.”
“그 남자. 데려오면.”
“흠, 우리 소연이가 그 싸가지를 어지간히 괜찮게 봤나 보네. 그래도 거절. 나도 걔가 능력이 있는 건 알겠는데 나랑 성격 안 맞는다는 것도 확실하게 알겠어. 첫 만남도 좀 별로였고 이것저것 재는 음험한 쪽이야. 그 인간.”
소연은 그 평가가 정확하다는 걸 인정했다. 굳이 따지자면 느낌이 그리 위험한 쪽은 아니지만, 김유성이 계산하고 재는 스타일이라는 건 확실했다.
굳이 따진다면 소연도 그런 좀 음험한 부류라고 봐야겠지. 그래서 거부감이 없는 것이다.
반면, 친구인 최서린은 그냥 목표에 직진하는 스타일이다. 타고난 강자인 그녀는 목표가 한 번 정해지면 재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소연이 말했던 내용을 종이 위에 그대로 써 놨던 최서린은 그중 하나에 주목하고 있었다.
“금성이라···. 재밌네.”
소연이에게 제안했다는 금성으로의 이적. 최서린은 이게 구미가 당겼다.
“금성?”
“생각해보면 거기 좀 서포터 길드잖아. 내가 가면 완전해지는 것 아냐?”
“그런가?”
소연이 그녀에게 맞춰갈 거라 손해를 볼 거라는 평가도 몹시 거슬렸다. 살면서 그딴 건 신경을 써본 적도 없긴 하지만, 그녀도 하나뿐인 절친을 위해선 희생할 수 있었다.
“굳이 희생이랄 것도 없지. 내가 가면 어디든 최고가 될 테니까. 좋아. 결정했어. 소연이 너, 나랑 같이 금성으로 가자. 생각해보니 그 인간,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이미 있었잖아. 역시 밥맛이네. 재수 없어.”
애초에 원했던 질문은 소연이와 함께 갈만한 가장 적합한 길드를 알려달라는 거였다.
서린은 알아서 잘 클 자신이 있었고 거기에 고등급 재능의 딜러가 별로 없다면, 쉽게 그녀가 정상을 차지하고 키우면 그만이다.
소연이의 재능이 거기서 가장 만개한다면 금성으로 가는 게 가장 옳았다.
“물론, 당장은 그놈의 엘릭서 때문에 분위기가 거지 같아서 좀 그렇고 네 말대로 할 일도 좀 찾아야겠네. 그 재수탱이. 찾아가자.”
“왜?”
“빌런 쳐죽이러. 이거 잠잠해질 때까지 영웅 놀이나 하면서 시간 때워야겠어. 휘성이도 불러. 딱이네.”
소연이 동생인 휘성에게 시킨 뒷조사로 둘은 이미 빌런 조직이 그녀의 동기, 김유성을 노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응.”
언제나처럼, 소연은 절친의 의견에 한 걸음 물러나 조용히 따라갔다.
물론, 그녀는 친구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이런 사건이 터지고 시간이 지나면 그들에 대한 관심도 사그라든다. 그러면 좋은 조건을 받기는 힘들어질 것이다.
그렇기에 이건 대중과 길드의 관심을 유지하려는 목적이다.
* * *
“···아니 또 왜?”
그리고 E급 게이트에 난데없이 오버스펙 세 사람의 파티 신청을 받은 나는 슬슬 위가 쓰린 것을 느꼈다.
아무리 미인들의 관심이라지만, 최서린하고는 절대 얽히고 싶지 않았고 강소연도 솔직히 좀 꺼림칙하다.
이번에도 파티원들의 무언의 압력에 굴복한 나는 강소연에게 연락을 했다.
“무슨 생각입니까?”
[서린. 빌런.]
“네?”
[나한테 전화 바꿔봐.]
옆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리고 전화 받는 사람이 바뀌었다.
“최서린씨?”
[너, 빌런이 집착한다며?]
“그런 건 또 어떻게 안 겁니까. 그리고 이거랑 그게 뭔 상관인지 모르겠군요.”
그리고 이후의 대화는 요컨대 동생 중 하나가 국가 자문 탐정인데, 관리국과 그의 도움을 받아서 최서린이 빌런을 잡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걸 제가 받아들여야 합니까?”
[이쪽이 난감한 상황에 빠진 동기를 돕는 거잖아? 거절할 이유가 있어?]
물론, 나쁠 건 없다.
괜히 성격 더러운 최서린이 빈정 상해서 친하다는 동생을 시켜 관리국이라는 패를 망가뜨릴까 살짝 걱정되기도 했고 굳이 어그로를 분산해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단지, 안 얽히려 했는데 무슨 인연인지 자꾸 얽히는 게 부담스러웠을 뿐이다.
“···예. 오시죠.”
속으로 저울을 재보며 이걸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들의 합류를 허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