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태풍의 눈
“누가 우리에게 몹몰이를 하는 중입니다. 경로를 보면 저희가 목적인 것 같고 대략 5분 정도면 도착할 것 같더군요. 주로 E급이지만, D급과 C급도 몇 정돈 섞여 있습니다.”
따라서 몰이꾼의 실력은 C급 이상으로 예상한다.
“숫자는 대략 어느 정돕니까?”
“2백에서 3백 정도로 보입니다.”
저 정도면 이 파티로 처리하기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주변 괴물을 싹 쓸어오는 수준이네요.”
“파티장님 생각이 중요하겠는데요. 그냥 피하실 겁니까?”
“충분히 상대는 가능하다고 보지만, 저 혼자 결정하기엔 상황이 간단하지만은 않군요. 의견을 모았으면 합니다.”
전투 도중 마주친 것도 아니라 대응하기엔 시간이 충분하다. 도망치려면 도망칠 수도 있고 원거리 요격도 가능한데다 싸울 태세를 정비하기에도 시간은 넉넉했다.
“혹시 누군가 쫓기는 건 아닌가요?”
“그렇다기엔 대상이 안 보입니다.”
“그런 경우는 대부분 암살자 계통이죠.”
몬스터라도 일정 거리 이상 벌리면 못 찾긴 하지만, 괴물의 감각은 인간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그 감각의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은신한 채 유도하는 거다.
보통의 몹몰이는 포위망을 갖추고 한 곳으로 웨이브 밀어내기를 하는 식이 되는데, 그래야지만 관리국에 신고가 들어가거나 했을 때 빠져나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대놓고 은신해서 끌어다 넘기거나 하는 식이면 바로 관리국에 빌런으로 낙인찍히고 헌터 인생 종 치는 거다.
그래서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직군이 저렇게 작정하고 하는 수작을 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즉, 이번 경우는 빌런이거나 관리국이 바쁜 틈을 타 어떤 길드에서 타 길드에 가기로 한 유망주를 죽인다거나 하는 게 확실하다는 뜻이다.
“그럼 빌런 아닌가요? 전 굳이 위험 감수하고 싶진 않은데···.”
이진아가 가장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럴만했다. 그녀는 E급 서포터고 이번 사냥을 공치더라도 어차피 여유 시간 동안 불러주는 파티는 많다.
“다른 분은?”
“처리. 한 표.”
“하긴, 첫날부터 쫄아서 튀면 남은 기간이 다 어그러지니까.”
강소연이 무표정하게 한 마디 내뱉자 탱커와 이민호, 그리고 나머지 딜러들도 전부 처리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짐꾼들은 당연히 피하고 싶어 보였지만, 이미 총 열 명 중에 다섯이 찬성. 대세가 결정된 셈이다.
그래도 아직 과반을 넘어간 건 아니라 나는 짐꾼 쪽을 바라봤다.
“기사분들은?”
“뭐, 여기서 우리가 다 반대해봤자, 전투조 분들 여론 보니 하는 쪽으로 갈 것 같소만.”
“그러면 저도 아무래도 상관은 없네요.”
분위기가 이리 흐르자 이진아도 말을 바꿨다. 회의한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빠르게 결론은 났고 난 그 즉시 1초도 망설이지 않고 파티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결정이 났군요. 시간 여유가 있으니 전위장님. 그리고 이우석 기사님 인솔하에 전투 진지부터 만들어주시고 원거리인 강준씨와 저는 요격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내 지시에 짐꾼들과 근력이 강한 전위조를 중심으로 즉석에서 토목공사가 시작되었다.
이게 특히 각성자 짐꾼이 일반인과 차별화되는 점이기도 했다.
일반인이 셋 있어봐야 고작 4분 동안 진지를 만든다고 해서 얼마나 만들겠는가?
하지만 하나같이 각성자로 구성된 짐꾼들은 다르다.
그들 하나하나가 보통 인간은 들고 다니기도 힘든 엄청난 물량을 담은 수레와 봇짐 등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며, 또 헌터 물류 협회의 체계적인 과정을 거쳐 한명 한명이 분대 규모의 공병이나 다름없었다.
‘전투조 각성자들도 이들과 협업하는 경험은 중요하지. 돈 좀 아끼겠다고 일반인을 짐꾼으로 쓴다는 건 그런 감각에서 뒤처지는 거다.’
대규모 게이트가 되면 고작 안에서 하루 이틀만 싸울 게 아니다.
전투조가 중간마다 돌아와 정비할 요새를 만들어야 하고 현지 조달 가능한 수원을 점검해야 하며, 고립될 때를 대비해 게이트 내의 식생 중 섭취 가능한 것을 채집, 수렵한다.
그런 모든 작업이 짐꾼의 몫이다.
‘파티를 이끄는 지휘자라면 이들이 필요한 것을 알고 또 다독일 줄도 알아야 하지. 높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이런 사소한 경험에서부터 좋은 헌터와 아닌 헌터가 차이가 나는 거야.’
이들도 엄연히 게이트 공략을 함께하는 일원으로서 단순히 짐만 나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각성자 짐꾼에게는 나름의 존칭으로 기사라는 명칭이 정착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달리는 사이에 이미 원거리 두 명 모두 괴물의 얼굴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적에게 접근한 상태였다.
“파티장님. 첫 주문은 어떤 걸로?”
나름 꽤 경력이 있는 E급 헌터답게 여유가 있으니 파티장의 지시를 묻는다.
“강준씨가 쓰실 수 있는 대지계 주문 중에 늪지대를 불러오는 게 있었죠.”
“아, 붉은 늪이요? 언제 그런 것까지 다 보셨데. 그런데 그건 범위가 그리 넓지 않아서 여기서 쓰기엔 좀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주문으로는 저들이 전부 다 빠질만한 늪지대를 만들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달려오는 걸 늦추고 이리저리 돌아오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저 속도를 좀 늦추는 게 목적입니다. 경로 주변에 군데군데 깔아서 괴물들의 돈좌나 저지를 노려보죠.”
“아하? 하긴. 제가 주문을 쏘는 것보단, 지형을 바꾸고 파티장님이 수를 줄이고 개중 강한 놈을 저격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요.”
“예. 마법사님 감각을 믿어보겠습니다.”
“맡겨주시죠.”
괴물의 구성은 아주 다양하다.
‘아귀가 주력이고 헬라가 섞였군. 사이에 낀 C급은 나이트메어와 죽각귀.’
북쪽 필드는 기본적으로 아크리치의 권역이지만, 휴전선까지 그 영역이 퍼지진 않았다.
그렇기에 그 보스가 제 종복으로 삼을만한 가치가 없는 괴물들은 대개 영역 싸움에서 밀려서 휴전선으로 밀려들곤 했다.
하늘에는 신이 난 악령 몇 마리가 눈에 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 소름 끼치는 푸른 불꽃을 뿜는 나이트메어들이 달리고 있었다.
원래 아귀는 높은 지성을 가진 상위 개체가 통제하지 않는 이상, 같은 급 괴물과는 공존할 수 없다.
그런데 몸이 폭탄인 헬라는 먹어봐야 그 살점이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폭발할 것이고 악령은 애초에 먹을 수가 없으니 아귀들이 이를 악물고 추격자를 따라 달려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붉은 뻘 늪이 이강준에 의해 적의 앞쪽에 형성되는 그 순간, 뭔가를 발견한 내가 화살을 쏴 날렸다.
“그놈입니까?”
“보셨나 보군요.”
“직접 본 건 아니고 화살 튕겨 나가는 것 보고 알았습니다.”
바로 늪 수면을 박차며 뛴 걸 보고 화살을 쐈지만, 뭔가로 막아냈는지 화살이 튕겨 나갔다. 급히 쏜 거라 제대로 된 위력을 담을 수 없던 것이 아쉽다.
놈도 화살을 맞을 뻔했으니 바로 움직임을 보이진 않을 것이다.
‘아마 거리를 벌리겠지.’
슬슬 놈이 괴물들 감각에서 벗어나면 우리를 볼 때가 됐다. 페이트로 추정되는 놈을 놓쳐 잠시 우왕좌왕하던 괴물들은 이내 우리를 발견하고 괴성을 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저희 쪽으로 옵니다.”
난 곧장 마력 화살 다섯을 시위에 걸어 하늘로 쏴 올렸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활시위를 튕겼다. 날아올랐던 화살은 떨어져 내리며 작은 폭발을 일으켰고 늪지대에 속도가 느려진 아귀와 헬라를 착실하게 줄여나갔다.
“먼저 합류하시죠.”
“예. 그럼. [보호막].”
슬슬 웅덩이가 넷쯤 남았을 때, 옆에 있던 이강준을 파티 쪽으로 돌려보냈다. 암습을 걱정하는지. 각종 보호막을 치고 이동하는 모습이다.
‘어차피 목표는 나일 테니.’
마력이 절반 정도 줄어들 때쯤, 괴물들의 웨이브가 수십미터 앞까지 도달했고 나는 슬쩍 뒤편을 바라봤다.
‘시간이 조금 필요하겠어.’
대충 진지의 형태는 갖췄지만, 준비가 덜 되었다.
나는 뒤로 도는 척하다가 괴물들 방향으로 뒷점프를 했다.
쐐-액!
그러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비도 하나가 날아든다. 돌아가려 했으면 지나쳤을 경로. 땅에 박히는 비도를 보지도 않고 바람을 가르던 경로를 향해 내 화살이 날아간다.
콰직!
묵직한 소리와 함께 이번엔 제대로 힘을 실은 화살이 상대 공격에 박살 나는 소리가 났다.
‘잘도 쳐내는군. 이걸 반응하는군, 그래. 이 정도면 그놈이 맞다. A급 잠재력의 암살자다워.’
방금은 꽤 회심의 일격이었다. 하지만 놈은 상처를 입지 않았다.
두 쪽으로 쪼개진 화살이 놈이 있었을 자리 옆에 떨어지고 암살자의 기척은 자취를 감췄다.
파티 본진 쪽에서 신호탄을 쏴 올리는 소리가 들린다. 색은 붉은색, 빌런을 뜻하는 신호다.
‘여기서 관리국 사무소까지는 가깝다. 걸릴 시간은 약 10분. 너도 시간제한이 생겼다. 어쩔 거냐?’
어느 정도 진형이 갖춰지긴 했으니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빌런이 있음을 알려서 관리국 순찰대의 지원을 받으려는 거다. 상황이 불리한 것은 나지만, 놈도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니 초조해질 것이다.
하지만 훗날 대한민국 최악의 범죄조직, 거미의 간부급이 되는 잠재력은 헛것이 아닌지 놈은 그 도발이나 다름없는 붉은 신호에도 서두르지 않았다.
유리한 상황이 아니면 시도하지 않는다는 암살자 계통 직군들의 제1원칙. 좋은 판단이다.
우리가 서로 침묵하는 그 사이, 괴물들은 내 지척까지 도달한다.
어쩔 수 없이 먼저 움직인 것은 나였다.
내가 발걸음을 떼자마자 경로를 점하며 다시 날아오는 세 자루의 비도.
하지만 나는 이번에도 스텝을 꼬았다.
한 걸음 멈춰가는 선택. 동시에 화살통에서 세 발의 화살 깃을 쥐었다.
그러자 급히 강력한 힘을 담은 네 번째 단검이 멈춰선 내 방향까지 섬광처럼 날아온다.
급히 멈춰서는 동작을 취한 내가 무조건 역동작에 걸렸을 것이라 급하게 판단한 것 같다.
‘됐다. 놈이 당황했어.’
하지만 그 첫 발걸음은 특정한 조건에서 특정한 기술을 쓰기 위한 것이었다.
내 몸 뒤쪽의 괴물 무리는 내 몸을 붙잡기 직전이다.
나는 곧장 그 자세에서 마력을 회전시키듯 돌려 다리에 밀어 넣었다.
다리로 몰려든 마력은 벼락이라도 치는 것처럼 두 발끝에서 방전한다.
바로 직전, 내 뒤에서 손을 뻗고 입을 벌려오던 아귀의 몸.
나는 몸을 뒤틀며 그게 마치 벽인 것처럼 두 걸음 걷어찼다.
그 결과, 아귀는 폭풍에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주변의 괴물들을 휘감으며 빙글빙글 돌고 멀리 처박혔다.
그리고 그게 나를 저 하늘 높이 날아오르게 하였다.
그렇게 불과 1초 남짓한 시간 만에 하늘로 날아오른 나는, 마찬가지로 강력한 기술 탓에 역동작에 걸렸을, 암살자를 향해 미리 걸어두었던 세 발의 화살을 쏴 날렸다.
캉! 콰직!
두 개의 화살이 부서지는 소리. 그러나 놈이 가진 무기는 오직 양손의 단검 두 개뿐.
세 번째 화살은 제 역할을 다 했다.
“윽!”
작은 신음성. 산기슭의 여기서 꽤 떨어진 장소에 거미가 그려진 가면을 쓴 소년 정도로 생각되는 남자 하나가 어깨에 화살이 박힌 채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화살을 뽑아낸 놈의 고개가 우리 본대 쪽으로 돌아갔다.
“칫···.”
이민호가 당장에라도 뛰어나갈 기세로 보이자 놈은 혀를 차며 나무가 우거진 산속으로 몸을 던졌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어도 한쪽 팔을 당한 상태로 동급의 전사를 평지에서 당해낼 수는 없다는 판단이었겠지.
[본대! 진지 더 보강해도 됩니다!]
그렇게 방해꾼이 사라지자마자 난 본격적으로 괴물의 드리블을 시작했다.
아직 마력은 충분하고 가능하면 깔끔하게 막는 편이 좋다.
처음엔 걱정됐는지 웅성거리던 그들은 내가 꽤 깔끔한 드리블을 해내자 안심하고 보강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드리블을 한 지 5분 정도 지나서 우리가 전투하는 도중에 관리국 직원들이 도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난 이놈들을 끌고 본대 쪽으로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