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태풍의 눈
“지금 이 대화, 저기서 다 듣고 있을 텐데?”
“아. 딱히 엿먹이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직 어딘가 특정하지도 않았죠. 하지만···.”
“하지만?”
대답 대신에 마력으로 테이블에 글자를 그렸다.
나는 네가 어디로 가려는 건지 알고 있다.
이 시기 생 신인에게 저리 만족스러울 정도로 좋은 조건을 줄법한 10대 길드라면 단 하나밖에 없다.
- 청해 -
내가 필담으로 언급한 길드 이름은 대한민국 내 2위를 차지하고 있는 그 길드, 청해다. 정답이었는지 최서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아마도 인맥은 아니실 거고. 그중에 조건이 가장 좋았나 보군요. 그럴만하죠.”
최서린도 유망주라 고위층 인맥이 있었다면 내가 절대 모를 수가 없다.
반면, 어중간한 인맥이라면 오히려 지금 상황에서는 절대 오지 말라고 뜯어말렸을 거다.
“너, 뭔가 아는 거야?”
“여기서 이야기할만한 사항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한가지는 말할 수 있겠군요. 굳이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운 없는 인간은 바뀌어도 재수가 없다는 건지 골라도 하필이면 가장 먼저 비참하게 몰락하는 길드를 골랐다.
‘헛바람이 들어간 건가. 자신감이 과한데.’
최상위권 길드는 보유하고 있는 S급 잠재만 수십 명이다. 그런 길드들은 아무리 최서린급 유망주라고 해도 급하지 않다. 협상은 길어지는 게 정상이다.
이런 자신감을 가진 여자가 다른 거 다 제쳐 놓고 이 짧은 시간에 결정을 내린 기색이라는 건, 조건이 너무 좋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건이 지나치게 좋다는 건 당연히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물론, 그녀도 파벌을 언급했으니 어렴풋하게 인지할 근거는 있었던 것 같다.
‘아마 해당 길드의 인사담당자가 한 명만 찾아오진 않았던 거겠지.’
그럼에도 조건 보고 들어가겠다는 건 자기 능력으로 헤쳐나갈 자신이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래서 자신감이다.
‘날 회유하려는 것도 그래서고. 괜찮은 잠재력 몇을 같이 데리고 들어가서 자기가 만만치 않다는 걸 보여주려는 거지.’
다른 길드라면 계획을 변경해서 여기 두 사람과 인맥도 쌓을 겸 한동안 함께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청해는 아니다.
거기 있는 건 그저 시간 낭비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그녀가 망하는 경우는 이미 피했고 기색과 흔적을 보면 내가 없는 사이에 붉은달이 접근한 것 같지도 않다.
난 이 시대 인간들이 잘 모르는 추적용 기술을 많이 알고 있었다.
‘붉은달 놈들과 접촉했으면 흔적이 남았겠지. 애초에 이런 자잘한 사건을 일으키기보단 세계적으로 놀던 것들이니 이번 사건을 일으킨 건 거미들이로군.’
아직은 별 것 아니지만 질긴 놈들이라 당분간은 귀찮을 것 같다.
이들의 운명이 어찌 되든 당장 알 바가 아니다. 이번의 불행한 사건에서 건져내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다 했다.
‘청해가 망했다고 해도 구성원이 어긋나거나 하진 않았어. 그저 중견 길드로 몰락하고 대규모 인재 유출이 일어났을 뿐이지. 앞으로도 잘만 살아갈 여자들이고 당분간은 사는 곳이 다를 텐데, 여기 내 시간을 쏟아붓는 건 낭비다.’
지금은 오히려 내 코가 석 자였다. 안혜성과 접촉할 좋은 타이밍을 찾으려면 그를 관찰하고 인연을 이어야 하고 그건 참을성이 필요한 작업이다.
하지만 떠나려는 나를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탁 내리친 최서린이 막았다.
“잠깐.”
“뭡니까?”
“나랑 했던 약속은?”
“애초에 진지한 약속이었는지조차 의문이군요. 이런 곳을 약속 장소로 정하면서 그걸 묻는 것 자체가 생각이 없는 것 아닙니까? 난 바쁜 사람이고 그쪽 장난에 어울려줄 여유가 없습니다.”
“그 자문비. 얼마면 되는데? 1억?”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최서린이라는 여자를 조금 알 것 같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여자. 날 써먹으려거나 혹은 시험해본 건가.’
최서린을 보니 그걸 비웃음으로 받아들였는지 얼굴에 화가 좀 붙은 표정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굳이 약하게 보일 필요는 없다.
나는 그 자리를 떠나며 답했다.
“돈은 내가 충분히 벌 수 있습니다. 건승하시길.”
돈은 유용하지만, 미래 지식을 쥐고 있는 내겐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었다.
‘그러면, 우리 버서커 형님을 만나러 가보실까.’
그녀들은 모르겠지만, 난 이미 원하는 걸 얻었으니 다음 투자를 향해 달려갈 때다.
* * *
김유성이 떠나고 최서린도 강소연과 그 자리를 떴다.
“좀 재능이 있어 보여서 같이 하려고 했더니, 생각보다 건방진? 아니면 오만한? 그런 남자네.”
그들은 차를 타고 소연의 집으로 가는 중이다.
물론, 말과는 달리 서린은 그렇게까지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애초에 그녀는 성격도 쿨한 편이었고 유성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갑작스러운 만남에서 이미 그녀가 고민하던 길드의 정답을 맞힌 것이 몹시 컸다.
“그 남자. 정보력만큼은 상당한 것 같아. 소연아 듣고 있지?”
“서린. 정말 청해로 갈 거야?”
소연의 질문에 서린은 인상을 쓰면서도 쉽사리 긍정의 말을 내뱉지 못했다.
조금 전의 만남을 떠올렸다. 그 묘한 여유와 압박감까지. 기이한 남자다.
그리고 그가 묘한 비웃음을 날렸을 때도 그녀는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나한테도. 번호, 줘.”
“뭐?”
“내가 연락해서 다시 만나볼게.”
오랜 친구의 말에 서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릴 적부터 대인 기피증이 약간 있던 소연은 사람을 많이도 가렸다.
기본적으로 누군가와 약속을 거의 잡지 않는 편이었고 특히, 남자는 절대 혼자서 약속 잡아서 만나는 일이 없었다.
혹여 일로 만나더라도 그녀와 있을 때, 혹은 하나 있는 남동생과 있을 때만 만났다.
그래서 소연의 연락처에는 가족 외엔 한 명의 남자도 존재하질 않는다.
“와, 휘성이 빼고 네 폰에 처음으로 기록되는 남자 번호 아냐?”
“···이건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워낙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
“재미없네. 좀 귀여운 반응 좀 보려 했더니. 그래서, 이번엔 휘성이랑 같이?”
“아니. 그건 저쪽에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믿음이라거나 그런 측면에서.”
“사람 성격이나 기분에 민감한 너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네. 확실히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저 남자는 어떤 느낌이야?”
“모르겠어. 눈에서까지 아무것도 못 읽었어.”
“아무것도?”
최서린은 내뱉자마자 침묵했다. 여태 살아오면서 소연이 했던 인물평은 좀 이해가 안 되더라도 뒤늦게 생각해보면 정확했다.
양쪽 모친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소연은 아주 어릴 때부터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서린의 엄친딸이었다.
타고나길 무리의 여왕이었던 서린에겐 소연이 유일하게 또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의 계산적이며, 공주와 시녀 같은 지긋지긋한 관계가 아니었던 것도 있지만, 이런 특별함도 있었기에 그녀는 소연과의 관계를 아꼈다.
그 발언이라는 게 쇳덩어리라든지 썩은고기라든지 마카롱이라든가 같은 식이라 성격을 의미하는 정확한 단어로 규정되지는 않았지만, 그 감은 항상 도움이 되어왔다.
그런 소연이 파악하기 힘든 사람이다. 그렇다면 김유성은 최서린이 느꼈던 대로 최소한 비범한 부류의 사람은 맞을 것이다.
“알겠어. 네가 따로 한 번 만나봐. 나도 좀 걸리는 게 있어서 당분간은 여기저기 알아보면서 조율만 할 테니까.”
소연은 자신을 내려주고 서린이 집으로 돌아간 뒤, 한숨을 내쉬며 남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일이야, 누나.]
“휘성아. 무리가 아니면 사람 하나만 조사해 줘. 뭐하고 다니는지, 그리고 앞으로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답지 않게 요구사항이 세세하네. 신상정보가 어떻게 되는데? 자료로 보내줘.]
그녀의 동생인 강휘성은 이 대 헌터 시대에 우후죽순 생겨난 각성자 사립탐정이자, 그 유능함을 증명해온 관리국의 자문이기도 했다.
[그렇게는 필요 없을걸. 헌터 과정 동기. 이름. 김유성. ]
[···뭐야. 남자? 아! 또 서린 누님인가? 우리 누나 눈에 좀 거슬렸나 보네. 우리 누나 보는 눈은 확실히 믿을만하지. 뭐하는 놈팡이야 이거?]
“아니. 내 용건.”
그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연은 그게 동생 특유의 TMT의 시동이 걸리는 전조인 걸 깨닫고 막으려 했으나 한발 늦었다.
[와, 놀랍네. 누나가 남자 뒷조사를 다 하고? 아하! 나도 넌지시 들어본 것 같긴 해. 이번 중구 게이트 사태에 괜찮은 사람 몇 있었다지? 누나도 거기 있었다면서. 참 난리였다던데. 오오, 그러면 그 위기 사이에서 피어나는 풋풋한 감정?! 이-야, 그럼 올해 나한테도 매형이 생기는 건가! 김유성씨라 했지? 어떤 사람이야? 자상한 성격? 생긴 건 어때? 우리 조카님은 예쁘고 잘 생길만한가?]
따발총처럼 쏟아지는 말에 그녀는 중간마다 말을 끊으려 했으나 그 묘한 늘어지는 어법에 계속 타이밍을 놓쳤다.
결국, 소연은 밀려오는 짜증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러야만 했다.
하여간 그녀의 동생은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았다. 물론, 반대로 휘성은 항상 누나가 말이 없어서 자기가 말이 많아진 거라고 주장해왔다.
“쓸데없는 소리. 일이야.”
[···재미없구먼. 일이라면 이번 길드 들어가는 거? 그냥 관리국 지원하면 안 됨? 공무원 하쇼. 돈이야 내가 잘만 버는데. 관리국 가셔서 내 뒷배나 좀 봐주시지.]
“서린 옆이 편해.”
[네네. 참···. 한 쌍의 아름다운 악어와 악어새십니다. 난 이 만남 반댈세. 누나 그러다가 시집 못 가.]
“죽는다.”
연애상담이 아니라는 말에 휘성은 김이 쭉 빠진 목소리를 했지만, 소연 입장에서는 이제야 대화하기 편해졌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만나서 상담할 게 있으니까, 약속 잡기 좋은 상황이 필요해.”
[뭐, 정보 관련된 거라면 어지간한 거면 나한테 부탁하면 되는 것 아냐?]
“그것도 그러네. 보자. 정보는 그때.”
[그래. 알겠어. 이틀 정도 시간 줘. 내가 다시 연락할게.]
“응.”
소연은 화면을 터치해 통화를 종료했고 꽤 부티나는 단독주택 안으로 들어섰다.
* * *
말이 많고 적은 남매가 통화를 마치던 그 시각, 유성은 게이트 신청을 하고 필드 입장권도 산 후에 파티 모집을 하는 과정에 있었다.
당연히 가장 먼저 짐꾼을 찾는 중이었고 중계하는 에이전트와 연락 중이다.
[그 각성자 짐꾼 말고 일반인 짐꾼으로 전부 맞추시면 그 단가 맞추는 건 물론이고 좀 많이 싸게도 가능하신데?]
“죄송하지만, 헌터 물류 협회랑 척 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어서요.”
[에이, 이런 저 등급 시절이나 필드 사냥 때, 그리고 유성씨 같은 신참 시절에 잠깐 하는 건 그쪽 협회도 크게 신경 안 써요. 그리고 나중에 고위 길드 들어가면 누가 함부로 그런 걸로 트집을 잡겠어.]
“조언에는 감사드립니다.”
[음, 원칙 지키는 것도 나쁜 건 아니긴 하지. 어쨌든 이 단가로는 요청한 인원 풀을 맞추기가 쉽지 않아요. 그건 알죠?]
각성자 짐꾼들에게도 자기 처지를 대변해주는 헌터 물류 협회가 있다.
따로 국가 공인 자격증도 발급하는 데다 일반인 짐꾼하고는 가지고 움직일 수 있는 물품의 양도 기본적인 기동력도 큰 차이가 있다.
애써 지켜줄 필요도 없다. 어지간한 상황 아니면 자기들끼리 살아남는 데다 간혹 헌터 사냥에서 사고가 났을 때 임시 땜빵해서 빈자리를 메꾸기도 할 정도니까.
‘군대로 따지면 장교와 부사관들의 그 애매한 관계라고 해야 하나.’
헌터들도 친하고 기분 좋으면 잡몹들 남겨서 이들의 레벨링을 도와주거나 했다.
한마디로 사는 세계는 다르지만, 나름대로 경계를 긋고 서로 존중하는 관계다.
지금 이야기할 사항은 아니지만, 그래서 애매한 잠재에 너무 저쪽으로 가면 인맥과 인식 때문에 헌터 쪽으로 다시 돌아오기가 힘들어지기도 했다.
헌터 물류 협회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번 남부에서 발생한 S급 특대규모 게이트 같은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저 대규모 길드들도 물류 협회에 의뢰해서 게이트 초반부의 보급로를 맡기기도 하는 등, 이쪽 협회도 결코 무시할만한 이익 집단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각자 한 가지 재주 정도는 있지.’
적어도 전투의 여파 정도는 알아서 해결하고 수틀리면 헌터들이 따로 챙길 필요 없이 각자 알아서 도망갈 실력은 된다는 거다.
이쪽 협회에서도 짐꾼을 지원하는 데 있어서 들어가야 하는 게이트의 등급에 따라 엄격하게 관리를 했다.
‘그렇다고 해도 높아 봤자 D급에 간혹 C급이 있을 뿐이지만.’
B급 이상의 상위 게이트를 공략하는 길드쯤 되면 자체적 보급 담당팀이 존재하기 때문에 물류 협회를 자주 이용하진 않는다.
그쪽은 대개 신입이나 현장에서 뛰기 힘들어진 인원들이 보급팀을 맡고는 했다.
즉, 흔히 일반인들이 술안주로 씹는 짐꾼에 대한 멸시라던가 하는 건, 전부 일반인 짐꾼들과 헌터 혹은 각성자 짐꾼과의 사고와 갑질 따위의 마찰이었다.
‘애초에 그건 불법이니까. 헌터들도 각성 짐꾼들도 인식이 안 좋을 수밖에.’
정부도 바보가 아니기에 위험한 게이트나 필드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마련이다.
일반인의 게이트 진입은 엄연히 법제화되어 막혀 있었다.
헌터들이 볼 때는 외국인 불법 체류자의 노동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돈 사정 급하거나 각성하고 싶어서 그러는 건 알지만.’
게이트를 많이 드나들거나 필드에 들어가 괴물 처치하는 곳 근처에 오래 있다 보면 각성을 하는 빈도가 높다는 연구결과가 있긴 하다.
물론, 그럼에도 애초에 이런 사람을 고용하는 헌터가 잘못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정부에서 노력해도 이게 좀처럼 근절되질 않았다.
‘사람 욕심이라는 게 참.’
헌터들도 사냥 허탕치는 경우도 많고 장비 깨져서 그날 공친다거나 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그러다 보면 돈을 아껴야만 하는데 가장 먼저 눈이 돌아가는 게 인건비인 거다.
그리고 사람이 한 번 쓰기 시작하기가 힘들지 쓰고 안 걸리면 양심 버리고 계속 쓰게 된다.
게이트도 저등급 게이트면 관리국 사무관들에게 뒷돈 찔러주고 들어가는 거고 짐꾼들 측정이나 자격증 속이는 도구도 계속 발전하고 그런 걸 하나하나 그때그때 적발하는 게 쉽지도 않다.
그래서 가끔 기자들도 기사를 써서 헌터들의 비양심 때문에 일반인 짐꾼들이 게이트 들어가서 사고가 나고 죽고 하는 문제가 난다고 호소하곤 했다.
어쨌든, 짧은 상념에서 돌아온 나는 짐짓 고민했다는 듯 에이전트에게 답했다.
“뭐, 어차피 딱히 일정이 급할 건 없으니 그렇게 부탁드립니다.”
이러면 쭉정이가 좀 많이 밀려들 가능성이 높긴 한데, 그런 건 계속 컷 하면 된다.
어차피 짐꾼으로 안혜성이 지원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내 목표다.
그리고 운 좋게도 바로 다음날, 안혜성이 내 파티에 지원서를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