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 태풍의 눈
시스템의 직군이라는 것이 인간이 상상하는 어지간한 것은 전부 다 있었고 그중에는 페널티를 대가로 전투력을 끌어올리는 직군도 당연히 있었다.
* 원형유지(A랭크/패시브/특수)
이게 C급 잠재력 각성자 안혜성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었다.
그리고 그 특성의 설명은 이렇다.
- 해당 특성은 피격 시 반드시 발동합니다
- 피해를 받을 때 발동하며 그 상태에서 육신은 불멸하며 변형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어보면 엄청나게 좋은 특성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진짜 페널티 없는 그런 불멸의 육체라면 고작 A급이겠어.’
그런 균형을 파괴하는 말도 안 되는 특성은 존재하질 않는다.
이 원형유지라는 특수 체질 특성에는 그 효과에 걸맞은 반대급부로 강력한 제한이 있었다.
- 사용자의 마력은 피격 시 ‘진혈’로 전환되며 이 진혈은 상대를 격살함으로서 흡수할 수 있습니다.
- 진혈 전환 상태는 발동하면 30분간 피격을 받지 않을 때까지 지속합니다.
- 사용자의 마력이 0이 되거나 지속시간이 종료되기 전까지 임의로 해제할 수 없습니다.
좋게 말하면 마력 수치가 다할 때까지는 몇몇 특수 공격을 빼면 절대 안 죽는 무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한 번 피격을 당하는 순간, 마력을 전혀 쓸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된다.
그 외에도 언급만 안 됐을 뿐, 제어기란 제어기는 마력 보호막이 없어서 죄다 저항 없이 최대치로 먹히고 주문계 공격에도 취약하며, 일부 속성 공격에는 얄짤없다는 단점도 있었다.
이것저것 문제는 있지만, 그럼에도 물리적 공격에 한해선 자기 자원이 허락하는 한 절대 면역이라는 건 작은 장점이 아니었다.
다만, 앞서 말한 서포터를 가려고 할 보급관 후보자와 마찬가지로, 이런 검증되지 않은 빌드를 타야만 하는 각성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가 않다.
“이번 후보자는 뭐가 좋을 것 같으십니까?”
나는 포르세티에게 이건 관찰을 통해 알게 되었다며 그가 가진 숨겨진 특성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고 투자금 중 일부를 활용해 열어놓은 그 숨겨진 특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포르세티의 감상은 깔끔했다.
“탱커는 잘하겠네.”
“그것도 나쁘지 않은 평가입니다만, 그래선 저 원형 유지 특성을 제대로 활용할 수가 없겠죠.”
“상대 격살시 흡수 때문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포르세티의 방법도 활용성은 있었다. 탱커로 쓴다면 특급 보스의 일격이라도 한 번 만큼은 반드시 막아낼 수 있겠지.
하지만 그래선 일회용의 탱커일 뿐이다.
고작 C급이니 고위 길드에 자기 효용성을 주장하고 고용되어 보스 골치 아픈 패턴 때 그것만 막는, 평소에는 하급 던전에서 일하다 종종 불려 가서 큰 생명 수당을 받는 식이 될 것이다.
“제 빌드에서 이 남자는 버서커 직군부터 탈 겁니다.”
“버서커? 처음 듣는데?”
“특수 자원 강제, 그리고 일정 종류 자원군을 보유하는 업적을 만족하면 열리죠. 숨겨진 직군입니다.”
“아니, 여기서 히든이라고? C급한테?”
“특수자원 특성은 원래부터 숨겨진 직군을 하라고 붙은 것들이니까요.”
그 버서커 직군 고유 기술인 폭주 같은 경우는 특수 자원으로 마력이 전환 됐을 때만 쓸 수 있는 기술이다.
그리고 폭주 상태에 들어가면 마력 대신에 자원으로 본인의 특수 자원과 지구력을 쓰게 된다.
‘마력, 그러니까 MP 대신 쓸 수 있는 자원은 오직 둘. 정신력으로 올리는 ESP, 그리고 지구력 능력치로 오르는 SP. 안혜성의 능력치는 전사형 분배니 SP를 쓰는 쪽으로 가야 하고.’
그래서 버서커는 안혜성이 지구력 기반의 기술을 쓰기 위해선 반드시 거쳐서 가야 하는 직군이었다.
“다 좋은데, 넌 그걸 어떻게 아는 건데?”
몹시 날카로운 질문이지만 대답은 한마디면 된다.
“제 직업 특성입니다.”
“아니. 이거 개사기 직업 아냐? 할 말이 없네. 그런 게 다 보여?”
“대충 비슷합니다.”
포르세티의 각성자 창에서 확인한 안혜성의 잠재 능력치는 [근력=C/민첩=D/기교=E/마력=B/정신력=D/지구력=C/감각=D]라는 아주 괜찮은 전사형 분배였다.
‘기교가 좀 떨어지지만, C급의 능력치치곤 아주 황금 밸런스지.’
전사계가 가장 중요시하는 근력이 본인 등급과 같다.
그리고 그걸 증폭하고 보조할 각종 기술을 발동시킬 수 있도록 마력 수치가 또 높았다.
아마 포르세티도 이런 능력치의 밸런스를 보고서 C급이라도 장비 좀 갖춰주면 명성 좀 벌겠다 싶어서 계약했겠지. 하지만 그가 여태까지 여신에게 벌어준 명성 점수는 없다시피 했다.
‘당연히 기술 하나 못 쓰는 고기 방패를 누가 데려가겠어. 어떻게든 전위를 데려가려 들지’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포르세티도 눈살을 찌푸리더니 변명하듯 말했다.
“성좌들 사이에선 저런 건 함정이라고 불러. 꽝 뽑은 거지.”
그때와 이후에도 안혜성을 지켜보면 어떻게든 전위 구하지 못한 사냥 파티에 자기 무적 능력을 호소하면서 임시 탱커 역할이라도 하려고 한 것 같다.
하지만 각성자의 게이트 진입이라는 건 최소 한 주는 잡아야 하는 원정이다.
안혜성의 특성으로는 제대로 된 위협 수준을 차지하지 못하기에 저등급 괴물이라도 어그로를 잡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길드 게이트는 검증된 용병들만 들어갈 수 있고 저 등급의 국가 게이트는 예약이 항상 밀려있지.’
그런 귀한 기회를 이런 각성자와 함께 가고 싶은 인원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전략적으로도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파티장이라면, 화력 집중형 혹은 안전지향형 파티를 구성했을 때만 그를 데려갈 수가 있다.
그런데 애초에 안전지향형 파티는 시간 더 들여서 전위를 구하면 구했지 그 같은 각성자는 데려갈 이유가 없었다.
‘그러면 결국 필드로 밀려나는 거야.’
필드는 상대적으로 빌런도 많고 무슨 사고가 터질지 알 수가 없다. 허탕을 치는 경우도 흔하고 일전에 내가 이야기했던 사냥터 텃세도 겪어야 한다.
고질적으로 위험한 전위 직군을 안 하려고 드는 이런 세태가 아니었다면 안혜성도 파티에는 전혀 끼지도 못하는 처지였을 것이다.
‘뭐, 지금도 당일치기만 하는 필드 사냥에나 몇 번 불려 갔겠지. 아니면 보호해줘야 하는 위험이 덜하니 짐꾼으로는 괜찮아서 그쪽 방면으로 일하거나.’
문제는 안혜성의 상황이 각성자 치고 푼돈을 버는, 이런 일들로는 먹고살기가 너무 힘든 형편이라는 점에 있었다.
지금 이 남자의 빚만 7억이다. 그리고 매달 나가는 병원비만 천만 원이 넘었다.
사실 이 정도 수익을 매달 안정적으로 올리려면 최소가 C급 헌터는 되어야 한다.
‘이자는 2%. 벌써 이자만 월 200 이상을 추가로 부담해야 하지. 그것도 각성자라 국가 헌터 신용대출이 가능했던 거고 이제 가능한 대출 금액은 3억. 슬슬 쫄릴 거야.’
국가에서 제공하는 헌터 신용대출은 이자를 갚을 수 있다는 가정하에 원금 상환기한만큼은 무제한이다.
목숨 걸고 국가를 위해 일하는 이들이라는 명목하에 중하급 각성자들이 장비를 갖추고 일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복지 차원에서 제공하는 대출이다.
‘다른 한 명은 어쨌거나 이미 정상적인 서포터로 일하는 중이니까.’
내가 안혜성을 다음으로 택한 것에는 급한 처지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게 한몫을 했다.
‘각성자 사회는 한 번 빌런으로 찍히면 끝이야. 아직 부모와 동생들이 전부 다 살아있으니 버티지만, 정신력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
안혜성과 다음의 서포터까지, 이 둘은 내게 찾아온 두 번째 기회에 첫 파티원으로 점찍은 인물들이기도 했다.
포르세티에게 이번 각성자에 대한 투자 협상을 했고 내가 받은 안혜성에 대한 지분은 25%, 명성 점수는 80만을 투자하기로 했다.
“그러면 작성해 드린 자료대로 부탁을 드리죠.”
“그래. 맡겨둬!”
그리고 성좌가 개설한 방에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난 창문이 깨지고 누군가의 침입으로 엉망이 된 집안 풍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짐작 가는 것은 있다. 그 행적이 노출되긴 했지만, 빌련 놈은 기어코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예. 사무관님. 접니다. 그때 그 빌런, 잡혔나요?”
[여전히 관리국에서 추적 중인 것으로 압니다.]
“배후라도 알려졌습니까?”
[아뇨. 안타깝게도 누군가와 접선하려는 흔적은 아직 없다고 들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난 누군가 내 집을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리며 당시 그 전투에 참가했던 이들에 관한 조사를 부탁했다.
[그랬군요. 협회에 보고하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에 간단한 인사치레를 하고 통화를 끊었다.
아마도 추격당하고 있을 그놈이 한 짓은 아닐 것이다.
“상황을 보면 그 자식이 내게 직접 언급한 건 아니겠고.”
상대는 안에서 벌어진 것에 대한 영상을 받아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정보력 혹은 권력과 밀접하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심문했거나. 그렇겠지.”
서울에서 그럴 수 있을만한 조직은 많지 않다.
일전에도 언급했던 두 조직, 검은 거미와 붉은달. 이 둘뿐이다.
‘전자는 괜찮은데, 후자면 난감한데. 계획을 바꿔야겠어.’
붉은 달은 규모가 좀 작다고 하지만 세계구급 조직이다.
얽히는 순간, 지금 내 상황에서는 적극 협조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반면, 검은 거미 쪽은 아직 그 규모가 커지기 전이라 직접 방해할 수도, 누군가와 싸움을 붙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 판단을 하자면 먼저 적이 누군지부터 확인해야만 했다.
‘물론, 확인할만한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
마침 전화할만한 거리도 있었고 최서린에게 먼저 연락을 해봐야겠다.
휴대폰을 보니 여기저기 연락이 온 곳이 좀 있었고 그중에는 그녀의 연락도 있었다.
[그제는 전화 안 받더니. 아,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조금···. 서린 씨도 비슷한 것 충분히 겪었을 것 같은데요. 그때 안에서도 들으셨겠지만, 전 당장 어디 들어갈 생각은 없어서요.”
[그러네요. 그럴 생각이면 전화기 꺼놓은 것도 방법이겠네. 어쨌든 지금 저한테 계약 제의가 아주 많이 왔거든요? 그때 말했던 조언.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어딥니까? 제가 그리로 가죠.”
약속장소로 가기 전, 나는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며 지혜를 통해 파악한 것 외에도 정보를 수집했는데,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먼저, 뜨거운 감자가 되었던 유지혜는 학교 졸업 전 사전접촉은 불법이라 계약이 들어온 건 없었지만, 이번 3분기에 스카우트들의 아이돌이 되었다.
1, 2위를 제외한 십대 길드 모두에서 그녀의 잠재력과 성향 따위를 다시 측정한다며 그쪽 아카데미를 들쑤시고 다니는 모양이다.
‘지금은 원체 언더독이니 나쁜 평가가 나올 리 없겠지. 특별반 유망주들도 고꾸라뜨린다고 괜히 위험 감수하진 않을 거고.’
응원을 받으면 받았지 욕먹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급히 그녀에 대한 보고서를 다시 작성한 후, 각 길드의 인사담당관이 시선을 돌린 건 당시 브레이크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이었다.
먼저, 정영하가 가장 큰 재평가를 받았다.
본격적인 헌터 활동을 하기 전인 정영하가 업적으로 뭔가 특성을 달았을 리가 없다.
즉, 성좌가 직접 거대화를 달아줬다는 거고 그건 그의 사고뭉치 같은 행동에도 잠재력이 몹시 쓸만하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내부 웨이브 방어의 핵심이 되었던 최서린은, 역시 최고 유망주라는 소리를 들었다.
거기에 강사가 들고 갔던 헌터캠의 영상과 이후 밖에서의 활약상으로 잠재력이 어느 정도는 측정됐고 B ~ S급 잠재력이라는 요 몇 년간, 엘리트 코스를 거친 이들을 제외하면 최고 유망주 평가를 받았다.
나도 기존 등급에 +점수를 받은 모양이고 이민호는 그 한결같은 발언과 정의감에 그 자신이 원하던 관리국 쪽에서 직접적인 접촉에 들어갔다.
최서린과 약속장소는 어느 주택가의 한적한 카페였는데, 그곳에는 그녀 외에도 다른 유망주가 한 명 더 있었다.
“서로 대화를 나누거나 한 적은 없겠지만, 같은 동기고 구면이니 제가 소개할 필요는 없겠죠?”
“두 사람이 아는 사이였습니까?”
옆의 키 작은 단발 아가씨는 의자에 기대서 조용히 자기 앞의 커피를 빨아들일 뿐이다.
일전 국가급 빌런이 될 예정이라던 인물.
그리고 현재 잠재력 평가는 C ~ B지만, 훗날엔 S급에 가까운 A급 빌런으로 평가받는 서포터, 강소연이다.
“친구죠. 애가 좀 내성적이라서요.”
어쩐지 둘이 같이 빌런 그룹으로 들어갔다 했더니 인연이 깊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제게 듣고 싶으시다는 조언은?”
“우리가 같이 들어갈 수 있으면서 둘 다 최고 대우를 해줄 수 있을 곳이요. 이건 제안 온 곳들.”
“저한테 돌아오는 건 뭡니까?”
“인맥? 그쪽에게도 나쁠 것 없잖아요? 나랑 친분 과시하는 건 특권 아니에요? 여기 우리 지켜보는 인간들만 몇인데. 당신 눈썰미면 알 거잖아?”
대놓고 하는 말에 근처에서 몇몇 딴짓하던 사람들이 흠칫하는 게 느껴진다.
역시, S급은 S급이라는 건지 자신감이 넘치는 게 보통 인물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 말고도 진로에 대해서도 좀 조언을 받고 싶은데요.”
“그러실 분은 아닐 것 같은데.”
“아, 나야 당연히 정해둔 빌드가 있죠. 내가 말하는 건 당연히 소연이죠.”
“그것까지 하기엔 책임이 무겁겠네요. 그리고 방금 말씀하신 대로, 주변 상황이?”
최서린을 눈썹을 찌푸렸고 난 커피로 짧게 입술을 축이며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전 딱히 누군가와 척을 지거나 고위 길드의 전문가들에게 건방져 보이고 싶진 않거든요. 어디까지나 약속을 지키는 의미에서 당신에 한정한 조언입니다.”
“거절?”
난 최서린의 말에 선을 그었다. 당장 내가 투자할 인물들 컨설팅하는 것만 해도 바빠 죽겠는데 전혀 돈도 안 되는 인간에 쓸 시간은 없었다.
“적당히 친분을 쌓긴 했지만, 짧았던 인연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목 받는 유망주 동기들끼리 관계를 좀 더 발전시켜 보자는 거죠.”
뭔가를 깨달은 난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짐짓 여유롭게 툭 던졌다.
“이미 갈 곳은 정해져 있으신 거군요. 길드 내의 파벌을 걱정하십니까? 옆에 분을 데려가려는 것도, 절 불러낸 것도 그래서고?”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내뱉은 내 말에 최서린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